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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OST

영화 그녀는 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걸까?

 

 

"Le Monde" (르 몽드)가 극찬한 '문학의 천재' 카레르가 펼치는              

경쾌하고도 공포스런 삶의 이야기                                                   

 

 

life in mono                                                                                                                    


[눈속임의 전문가이며 능수능란한 “가정법”을 구사하여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이성이 상상 앞에서 흔들리고,

부조리 앞에서 논리가 굴복하며 익살이 비극에 잠식당하는 정확한 시점,

 

그 민감한 경계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좌표가 분명치 않다.] 

--- "Le Monde"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삶을 꾸려갈까? 지금의 나의 상황과

 존재의 당위성을, 세상이 무너져도 확실하다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언젠가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로 <델리카트슨 사람들>에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한 중년부인이 등장하는데,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던 상상의 목소리가 실은 그녀를 가로채려는 이웃집 남자의 의도적인 장난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미치광이로 몰아갔던 타인에 의해 자신에 대한 가치 판단기준을 상실해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 내지는 모험(?)은 호접지몽을

꿈꾸었던 옛 성인에게서조차 찾을 수 있으니 인류에게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암묵적

약속 같은 것인가.

 

 

 

 

 

 

 

콧수염의 “그”는 어느날, 10년 동안 길러왔던 부숭부숭한 콧수염을 장난 삼아

 잘라보기로 한다.

10년 동안이나 기른 콧수염을 자르는게 별로 내키진 않지만, 아내를 놀라게 해주겠다는

 재미로 사각사각 콧수염을 밀고 아내를 기다리면서 ‘아내가 뭐라고 할까?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그러고 보니 좀 어색하기도 한데…’ 라며 초조해한다.

 

 

 

 

 

아내 뿐만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 자주 지나치던 사람들조차도 그에겐 콧수염이 없었다면서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는 것이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서 “그”가 콧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이

없어지고, 그의 부모님, 과거의 추억들마저도 진위여부가 부정되면서 급기야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마저 느끼게 된다.

소설 마지막에 충격적 결말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엽기적이긴 하지만, 진리에 대한

확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에의 회의와 부정은 이 소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전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가정법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는 독자들에게 “당신은 무엇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씨익 웃으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정말로 그러한지 얼마나 확신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작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믿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지, 또한 진리라는 것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꼬집어내고 있다.

 

『콧수염』은 일상의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 정체성을 찾으려한다.

다소 시작부터 경쾌한 젊은 부부의 일상 보여주며 콧수염하나로 긴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내심 들었지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집요한 작가의 추궁과

의심 속으로 빨려들지 않을 수 없다.

 

한번 물면 놓지 않은 끈질기고 난폭한 투견처럼 작가는 내면의 심층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초반의 경쾌한 출발로 시작하여 중반의 광기의 서스펜스에 빠져들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이 이야기는, 잔혹하고도 예리하게 마음 한구석을 난도질당한 쓸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책속의 구절

 

그녀는 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걸까?

그가 자신을 놀래 주니까 다른 비장의 무기로 대응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바로 그게 놀라 웠다.

그녀는 전혀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는 그녀가 당황한 모습을 단 1분 1초도 보지 못했다.

 

그는 판을 다시 재킷에 넣으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마치 그런 장면을 여유 만만하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썹한번 찡긋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이라도 표시가 난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 p.19

 

 

 

"아네스가 전화를 해서 혹시 너한테 이런 얘기를……."
그는 망설였다.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다고?"
"어, 너한테……."

그는 눈 딱 감고 말했다.
"너한테 내가 한번도 콧수염을 길러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려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제롬이 입을 뗐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 한번 분명히 짚어 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콧수염을 깎은 걸 너도 분명히 봤을 것 아니야."

이상하게도, 그가 방금 전에 콧수염을 복수로 쓴 것 때문에 제롬이 놀란 모양이었다.

 제롬은 꿈속에서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pp.113~114

 

 

“10분 전에, 점심 먹으러 못 간다고 당신이 우리 부모님한테 분명히 전화했지?”

그는 그녀의 망설임을 감지했다.
“어머님한테. 응”
“다른 일요일처럼 이번에도 우리 부모님 댁에 점심 먹으러 가기로 돼 있었지. 맞아?”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작년에”
그녀가 말했다.


그는 황망해서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게 놀라웠다.

이번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은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었다.

이번에는, 기억 상실 다시 한번 확인 - 물론 이것도 잔인한 일이긴 하지만 -

 

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실제로는 1년 전부터

 아버지를 뵌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에 훨씬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는 지난 일요일에 했던 점심 식사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날 응답기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말이다.

 자신이 지워 버린 그 목소리 말이었다.

 

“어떡해.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

아네스가 그의 어깨 위에 머뭇머뭇 손을 얹으며 웅얼웅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차마 삭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그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p.127-128

 

 

하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정말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는 살아 계시고, 친구들도 존재하고, 그는 콧수염을 깎은 것이다.

이걸 인정하면 다른 두 번째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아네스가 미쳤다는 가정이었다.---

 p.150

 

 

그가 두 사람의 공통된 기억.

 어떤 사람 혹은 물건에 대해 아무 뜻 없이 언급할 때

아네스가 창백해지면서 입술을 깨물고 한참 말이 없는 것만 봐도 <또 시작이구나> 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다시 와해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지뢰밭 위에서의 생활, 언제 다시 우르르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채 더듬더듬 앞으로

 나가는 생활, 이런 생활을 어느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p.168-167

 

 

 

그는 박혀 있던 면도날을 뽑았다.

기운이 빠져서 면도칼을 목에 갖다 댈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성공했다.

 

비록 행동에 힘이 달리고 온몸에 일던 강직성 경련이 팔을 빠져 나가긴 했지만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느낌조차 없는 상태에서 칼을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로

움직이며 턱 아래를 잘랐다.---

 p.220

 

 

 

 

 

작가 Emmanuel Carrere 에 대해

 

1986년 프랑스에서 처음 발표되자마자 몽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특이한 작가로 일약 주목을 받으며 예상치 못한 대중적 호응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둔 『콧수염』은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라는 아주 재미있어 보이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현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무관심,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광기의 측면을 극도의 서스펜스와 절묘하게 조화시킨 이 작품은, 많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작가

카레르를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의 삶을 악몽으로 새로이 묘사하고 정의하는 헨리 제임스에 비견하게 만든 수작으로 꼽힌다.

 

현재 프랑스에서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엠마뉘엘 카레르는 195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6년 소설 『콧수염』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겨울 아이』로 1995년 프랑스의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 상을 받으면서 전세계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르 몽드'지가 말한대로, 눈속임의 전문가이며 괴기담의 대가이자 '가정법'

 소설가인 그는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이성이 상상 앞에서 흔들리고, 부조리 앞에서

 논리가 굴복하며 익살이 비극에 잠식당하는 정확한 시점, 그 민감한 경계 지점을 날카롭게 보여 주려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또한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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