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P SONG & ROCK

Janis Joplin-Move Over

 

 

                                                                                                                                                            

Janis Joplin-Move Over

 

 

 

 

 

 

 

 

Move Over

 

You say that it’s over baby, lord,
You say that it’s over now,
But still you hang around me, come on,
Won’t you move over.



You know that I need a man, honey lord,
You know that I need a man,
But when I ask you to you just tell me
That maybe you can.



Please dontcha do it to me babe, no!
Please dontcha do it to me baby,
Either take this love I offer
Or honey let me be.



I ain’t quite a ready for walking, no no no no,
I ain’t quite a ready for walking,
And whatcha gonna do with your life,
Life all just dangling ?



Cd ck 30322 r. 01 10 1984
Oh yeah, make up your mind, honey,
You’re playing with me, hey hey hey,
Make up your mind, darling,


You’re playing with me, come on now!
Now either be my loving man,
I said-a let me honey, let me be, yeah!

You say that it’s over, baby, no,


You say that it’s over now,
But still you hang around me, come on
Won’t you move over.

You know that I need a man, honey, I told you so.

 

You know that I need a man,
But when I ask you to you just tell me
That maybe you can.

Hey! please dontcha do it to me, babe, no!


Please dontcha do it to me baby,
Either take this love I offer,
Honey let me be.

I said won’t you, won’t you let me be ?


Honey, you’re teasing me.
Yeah, you’re playing with my heart, dear,
I believe you’re toying with my affections, honey.

I can’t take it no more baby,


And furthermore, I don’t intend to.
I’m just tired of hanging from the end of a string, honey,
You expect me to fight like a goddamned mule.
Wah, wah, wah, wah, honey...

 

 

 

 


Janis Joplin

 

남성이 지배하는 락계에서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둔 최초의 여성 락커 재니스 조플린.

 "Blues Mama"라는 별명처럼 어려서부터 Billie Holiday나 Bessie Smith등의 블루스 음악을 즐겨 들었고

시와 그림공부를 하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서 심장을 파고드는 슈퍼 허스키 금속성 음색,

폭발적인 성량으로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온 몸을 흔들며 노래 부르는 광기어린 모습은

흡사 신명난 굿을 벌이는 무당을 연상케 한다.

외모 콤플렉스와 상처로 굴절된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한 그녀는

꿈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히피의 본거지 샌프란시스코로 떠날 수 있었던 열정과

자신의 음악을 통해 고통받는 주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던 따뜻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약과 섹스의 노예가 됐다.

음악가로서는 성공의 길에 들어섰지만 우울했던 어린시절의 고통에 휩쓸리면서

결국 Kozmic Blues Band를 결성하고 2년 후 1970년 생을 마감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27살의 나이에 함께 세상을 등진 Jimmy Hendrix, Jim Morison과 함께 3J라 부르며

그녀의 목소리를 애도했다고 한다.

 

재니스 조플린이 짧으나마 가수로 활동한 생애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은

오늘날 락커들이 보여주는 잘 갈고 닦인 계산된 모습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고,

예쁘고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목소리가 아닌 여성의 자아표현을 위한 목소리를 들려준 최초의 여성 락커였다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한 주류로 자리잡은 시기는 불과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록 음악의 역사는 위대한

 저항과 승리의 시간이자 동시에 패배와 굴종의 시간이기도 했다.

많은 음악평론가들이(특히 국내에서는 '강헌' 같은 음악평론가에 의해) 록(rock)이 마치 민중가요이자 저항가인 양 높이

추켜세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록 음악이 반항적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전성기는 사실상

60년대로 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후 니르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 같은 인물은 일종의 오파츠(Out Of Place ARTifactS)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상업적이고 체제 내 반항적인 구두선(口頭禪)에 멈춰 있었다.

 

 그 대단했던 록의 황금기를 빛낸 록커들 중에서도 사람들은 압축해서 '3J' 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3J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앞서 이미 다룬 바 있는 The 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 지미 헨드릭스

(Jimi Hendrix), 그리고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다.

 

텍사스에서 가장 못생긴 계집애에서 발퀴레로

 

  제니스 조플린은 생전에 그녀 특유의 개방적 성격 탓에 성장기에 그곳의 완고한 분위기 로 인해 많은 갈등과 불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플린은 어려서부터 별난 아이로 취급받기 일쑤였고,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텍사스는 남성중심의 사회(가부장적)였다.
그림 그리기와 시를 좋아했으며 오데타와 레드벨리 같은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

 

자신의 말대로 "주말이면 남자애들과 어울려 영화 보러가고 콜라나 좋아하는 텍사스 여자 아이들"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녀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늘 따돌림을 당했고, 거기에는 못생긴 그녀의 외모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럴수록 점점 더 자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플린은 이때부터 이 세상에 기댈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제니스 조플린은 18세 되던 61년 고향 텍사스를 떠나

휴스턴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5년간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노래하는 고된 시절을 경험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세상살이의 힘겨움과 더러움을 절감했고 세상이 점차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아예 저버리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믿음마저 없는 사람들은 체념하고 현실순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가 바라고 또한 적극 퍼뜨리는 인간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보의 이상은 어둡다.) 희망을 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러운 세상을 저주하거나 술과 약물에 젖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당시 록음악계 역시 남성중심의 세계였던 탓도 역시 크게 작용한다.

그녀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행동은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오직 노래만이 그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불타오르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여장부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성 록 아티스트였다.

 스물일곱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간 예술가이자 반역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등장 이후 록음악을 하겠다는 모든 여성은 그녀를 뛰어넘고자 하는 이나 그녀를 무시하고자 하는 이나 상관없이

모두 제니스 조플린이란 거대한 그림자와 비교되거나 싸워야만 했다.

 

조플린은 68년 타임지와 같은 인터뷰에서 "나는 노래할 땐 마치 아주 강한 약을 먹은 듯한 기분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이 말은 그가 이미 강한 약의 느낌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에게 노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또한 자유기고가 필립 제이콥스는 그녀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고통스런 외침은 단지 노래부르기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귀신쫓기 의식이었다."

 

  제니스 조플린은 1966년 블루스 밴드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에 가입하고 활동 무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때부터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록계의 스타였다.

당시 그녀는 겨우 23세였지만 고향인 텍사스로부터 든든한 블루스 음악의 토대를 지니고 왔다.

그리고 이듬해 몬터레이 페스티벌을 통해 조플린 신화의 막을 올렸다.


 그녀의 등장은 이제까지 소파에 누워 듣던 음악인 백인 여가수의 노래가 아닌 광란의 이미지였다.

이제까지의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 같이 맑고 고운 소프라노 음색이 여가수의 전부인 줄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조플린의 목소리는 충격 그 자체였던 거이다.

 

갈라진 벽 너머로 쏟아지는 얻어맞으며 절규하는 여자의 갈라진 목소리 같은, 노래라기 보다는 절규나 비명에 가까우며

 몸 속의 고성능 화약을 폭발시키는 듯한 엄청난 에너지는 도무지 여자 가수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몸 안의 모든 힘을 일시에 쏟아져 내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헝클어진 긴 금발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무대 위의

모습 역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 요새는 남자 가수들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헤드 뱅잉에 열심이긴 하다.

 

그러나 헤드 뱅잉만 한다고 록은 아니다.)
아주 가끔 느린 블루스를 부를 때 보이는 육감적인 목소리와 몸놀림에서만 그가 여자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껍데기를 벗고 느껴보라" 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껍데기란 위선과 가식 뿐 아니라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덕 관념이나 상식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다. 누구도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베시 스미스의 음악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으며 별 어려움 없이 베시의 스타일을 모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우상과 자신의 미래가 비슷하게 될 것이란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가 섹스를 언급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노골적인 섹스 얘기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여자가 말한다는 것 자체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녀는 공공연히 무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폭음과 환락을 마구 즐겼다.

 

폭음과 환락이 그녀의 인생을 망칠 것이라는 충고에도 그녀는 "술에 취하는 것이야말로 못난 내게 가장 잘 맞는 행위"라고 응수하곤 했다고 한다.) 조플린은 이내 자유와 금지되지 않은 것, 거침없음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블루스를 통해 열정과 절망, 저항을 한꺼번에 표현했고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과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쾌락에 대한 갈망을 노골적으로 담아냈다.

 

샌프란시스코의 필모어 극장이나 애벌런 볼룸 같은 곳에서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실제 생활은

 고독했다. 약물중개상은 그녀의 돈을 갈취해갔고, 친구들은 그녀를 속였다.

 그녀의 삶은 블루스 그 자체였다.

 

  이제 펄(제니스 조플린의 애칭)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가수였다.

 그러나 조플린은 대중 속에서 더욱 진한 고독을 느꼈다. 그녀는 "나는 무대에서 2만5천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땐 늘 혼자다"라는 말로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곤 했다.


조플린은 자신이 거대한 남성 사회에 갇힌 불쌍한 괴물임을 알지 못했다.

조플린은 68년 빅 브라더를 탈퇴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실 조플린은 다른 밴드의 여성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그 중요도에 걸맞는 위치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남성 위주의 록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록 가수들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인 문제였다.
그녀는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 조직한 Kozmic Blues Band를 자신의 백밴드로 한정했다.

그러나 빅브라더의 탈퇴는그녀에게 더한 고통을 주었을 뿐이었다.

빅브라더는 제니스 조플린을 제니스 조플린답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을 들으면 프로가수라기 보다는 어딘가 설익은 아마추어의 느낌이 난다.

빅 브라더&홀딩 컴퍼니는그 생생함과 함께 그녀의 극단적인 감성의 표출을 일정 부분 자제하게 해주고 악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뤄 보컬을 뒷받침해 주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제 그녀는 혼자서 현실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70년대 이후 활동한 모든 여성 로커들은 제니스

 조플린을 모델로 삼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마저 불행했던 여인

 

   그녀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극단을 달렸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었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도 잠시사귀었다.

 

제니스 조플린은 마치 자신이 관계를 갖은 남자들을 정복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지만 대개의 남자들은 자신이 너무나

 술과 마약에 너무 취한 탓인지 다음날 아침엔 그녀와의 관계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곤 했다.

 

조플린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투덜댄 적이 있다.

 "기차에는 165명이 타는데, 나는 65명하고밖에 잠을 못잤어!" 라고 말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변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세스 모건이란 뉴욕 출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버클리 대학생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가정을 갖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어서 이제까지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했다.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평온한 가정을 일굴 수 있다는 소망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몸을 혹사하던 블루스록, 사이키델릭 록의 열창일변도에서 벗어나 소울 발라드를 시도하려 했고 그 음반이

현재까지도 불후의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는 "진주(Pearl)"이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의 이런 시도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해 흡족해 했다.

그러나 제니스 조플린은 지미 핸드릭스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 후인 70년 10월 4일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

급하게 결혼식을 서두르고 있던 중에 생긴 일이었다. 그녀의 사인은 헤로인 과용이었지만 실제 그녀의 죽음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제니스 조플린 자신은 행복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거나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 재학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캠퍼스의 가장 못생긴 남자"로 뽑혔던 못생긴 백인 계집애.
제니스 조플린! 그녀는 불안하고 즉흥적이며 이기적인 동시에 자기파괴적이었던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제니스 조플린,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이제까지의 노래부르기 역사는 사기였음이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녀가 록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크다.

 

  제니스 조플린은 그 음악과 인물이 같은 비중으로 중시되는 몇 안되는 록 스타이자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 속의 빈곤을

보았고, 자유의 여신으로 대변되는 미국 주류사회의 폭력성을 이론이 아닌 감성으로 깨우쳤으며 갖은 반항과 대담한 실험을 통해 개인적인 자유와 문화 혁명을 꿈꾸었다.

그녀는 플라워 무브먼트의 역사와 신화였으며 남성 중심의 사회와 록 음악계 속에서 성 해방까지 포괄하는 여성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소통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제한된 틀 안에서나마 기성 사회의 성을 맹공한 페미니스트였으나 무엇보다도그녀, 제니스 조플린은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기존의 남성과는 별도의 여성 록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냈고 이후 모든 여성 록 가수들은 크든 작든

 조플린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