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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Emerson, Lake & Palmer - Trilogy, Lucky Man,,C'est la vie

 

 

 

ELP 앨범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앨범은 3부작 이란 Trilogy 이다.

1집 앨범도 좋아 하지만 이 앨범이 가장 좋은 이유는 바로  타이틀곡인

 3부작에 있다.처음듣는 분들은 한번 감상해 보시길....

 

 

 

 

 

 

 

 

 

 

 

 

 

Lucky Man

 

 

 

 

He had white horses
And ladies by the score
All dressed in satin
And waiting by the door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White lace and feathers
They made up his bed
A gold covered mattress
On which he was laid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He went to fight wars
For his country and his king
Of his honor and his glory
The people would sing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A bullet had found him
His blood ran as he cried
No money could save him
So he laid down and he died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Ooooh, what a lucky man he was

 

 

 

 

 

 

 


 

 

 

C'est la vie

 

 

 

C'est la vie

Have your leaves all turned to brown

Will you scatter them around you

C'est la vie


Do you love

And then how am I to know

If you don't let your love show for me

C'est la vie


Oh, oh, c'est la vie

Oh,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In the night

Do you light a lover's fire

Do the ashes of desire for you remain


Like the sea

There's a love too deep to show

Took a storm before my love flowed for you

C'est la vie


Oh, oh, c'est la vie

Oh,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Like a song

Out of tune and out of time

All I needed was a rhyme for you

C'est la vie


Do you give

Do you live from day to day

Is there no song I can play for you

C'est la vie

 

Oh, oh, c'est la vie

Oh,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프로그레시브록의 수퍼밴드를 꼽을 때 꼭 빠지지 않는 밴드가 ELP이다.

아니 굳이 프로그레시브록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ELP는 수퍼밴드 축에 든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많은 걸작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라디오 방송에선 이들의 노래중에 C'est la vie나

 Take a pebble정도만이 소개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마치 이들의 대표작인 양 말이다.

ELP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런지 웹에는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가 있다.

다음 글과 그림은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를 근간으로 작성한 것이다.



ELP의 시초는 Nice와 킹크림즌의 69년 합동 공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Nice에는 키스 에머슨이 키보드를 맡고 있었고, 킹 크림즌에는 그렉 레이크가 보컬과 베이스를 맡고 있었다.

 

당시 두 밴드는 영국 록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상황이었다.

 나이스는 히트곡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하몬드 오르간을 쓰는 지미 헨드릭스"라는 별명을 가진 에머슨의 키보드 쇼로 더 유명한 상황이었고 미국에서도 큰 호응을 얻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킹크림즌은 69년 벼락같이 터져나온 밴드였다.

 

클럽을 전전하던 밴드가 데뷔 앨범을 내자마자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고, 영국뿐 아니라 유럽, 미국에까지 빅히트를

 기록했다.

이들은 두 번 같이 공연 했는데, 69년 8월 10일 Plumton에서 열린 제9회 Jazz and Blues Pop Festival과

 10월 17일의 Fairfield Hall공연 에서였다.

 

에머슨과의 만남에 대해 그렉 레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Filmore West에서도 같이 공연을 했습니다.

 

사운드 체크를 하다가 에머슨을 만났어요. 당시 킹크림즌은 분열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죠. 이언과 마이크는 투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밴드는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당시 에머슨의 밴드는 계속 잘 될 것 같이 보였죠.

 

그런데, 사운드 체크를 하는 도중에 그가 재즈 스타일의 짧은 곡을 연주했어요. 뭔지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저도 당시 그에 따라 연주를 하게 되었죠."

(키스 에머슨은 이 72년의 잼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베이스라인을 따라 움직였고 나는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아주 훌륭했어요."

 사운드체크 이후 서로의 느낌을알 수 있었죠.) 얼마후 그의 매니저가 내게 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좀 하고싶다고

 이야기 했을 때 저도 당장 그러자고 얘기했어요.

 

 킹크림즌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거든요.

당시 우린 거의 끝장난 상황이었고, 난 음악을 계속 하고 싶었는데 거기에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은 키스가 있었고

나도 클래식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그는 건반주자, 나는 싱어... 서로가 필요한 상황이었죠.

제3의 인물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느꼈고 칼 팔머를 영입했죠."

초기 라인업으로 구성된 킹 크림즌은 11월 16일 미국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왔고, 레코드사와의

계약 때문에 프립은 킹 크림즌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썼다.

 

프립은 그렉이 밴드에 더 남아있으면서 나머지 멤버들을 교체하여 밴드를 유지하자고 설득하려 했지만 그렉은 이미

 키스 에머슨과의 일하기로 결심을 굳힌 상황이었지만 그를 돕기위해 2집의 녹음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2월로 예정되었던 공연은 맥도날드와 가일스의 탈퇴로 무산되었다.

프립과 레이크는 스튜디오로 돌아와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겨우 2집의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녹음된 작품이 In the Wake of Poseidon이다.

4월 초, 영국의 New Musical Express의 헤드라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키스 에머슨관 그렉 레이크, 새로운 밴드 조직에 합의!"

드러머 물색에 나선 이들은 처음엔 지미 헨드릭스의 익스피어리언스 밴드에 있던 밋치 밋첼을 마음에 두렀다고 한다. "예, 그랬어요. 어느 정도는. 밋첼은 우리의 제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했죠.

 

 하지만 그는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고 칼 팔머와 일하기로 정해진 후까지도 이에 대해 지미 헨드릭스와 얘기하고

있었어요."

대신 이 두밴드는 70년 8월이나 9월에 조인트 콘서트를 가지는 정도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전에 지미 헨드릭스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드러머 물색에 곤란을 느낀 레이크와 에머슨이 미국에서 드러머를 구해볼까 할 때 쯤 되서 나타난 칼 팔머는 크림의

매니저였던 로버트 스틱우드가 제안한 인물이었다. 당시 스무살. 아토믹 루스터와 Crazy World of Arthur Brown에서 활동한 실력파였다.

"처음 오디션에서 그들과 같이 연주했을 때 호흡이 아주 잘 맞긴 했지만 바로 밴드에 가입하진 않았어요.

며칠 뒤 다시 와서 연주해 봐서 그때에도 호흡이 잘 맞는지 한번 보자고 그랬죠.

 정말 두 번째에도 잘 맞더군요.

그래서 그날로 바로 가입했죠." 칼 팔머의 말이다.

녹음은 70년 7월에 시작되었고 레이크가 프로듀스를 담당했다.

 레이크는 79년 밴드의 해산때까지 계속 프로듀스에 참여했는데, 그는 이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밴드의 멤버 전원이 제작에 참여하던 킹크림즌 시절의 경험 덕이기도 했고, 자신들의 곡을 좀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Knife's Edge가 밴드 멤버들과 Robert Fraser에 의해 쓰여졌고, 나머지 곡들은 당시 컨템퍼러리 록과 클래식, 미국의 재즈를 약간 섞은 스타일의 연주곡으로 채워 졌다. 앨범의 타이틀은 Emerson Lake and Palmer로 붙여졌고 이후

록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의 하나로 꼽히게 된다. 그렉 레이크를 팝음악의 최고의 보컬로 만들어주었고, 밴드의 최고 "히트"곡으로 기록되는 어쿠스틱 발라드 Lucky Man은 레이크혼자서 만든 작품이다.

녹음이 끝나고 애럼이 발표되기도 전에 이들은 무대에 데뷔를 하게 되는데, 일반적인 공연이 아닌 팝 페스테벌에서였다. 3일간 지속된 Isle od Wight Pop Music Festival이 바로 그것이다. 키스 에머슨은 하몬드 오르간, 피아노, 그리고

주문 제작된 무그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면서 웅장한 사운드를 연출해 내었고, 앨범이 발표되기 전이라 낯선 곡임에도

불구하고 관둥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Nice 시절의 Rondo, America등이 연주되었고, 전람회의 그림들도 연주되었다. "우리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과 강렬한 록큰롤을 융합한 곡을 만들기로 했었죠." 에머슨의 말이다.

이 페스티벌에는 지미 헨드릭스, 더 후, Free, Sly & the Familys Stone같은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출연한 영국판

 우드스탁이었으며 이러한 무대에서의 공연은 당시 앨범도 발매되기 전이었던 젊은이들에겐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칼 팔머는 "우리가 폭풍같은 연주를 마쳤을 때 관중들은 거의 미친 것 같았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의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무대 양쪽 끝에 설치되어 있던 대포 발사였다고 한다!

데뷔 전부터 유명 밴드의 멤버들로부터 구성괴었다는 것 때문에 영국의 크로스비 내쉬 앤 영이라고 불릴 적도로 관심의 대상이었던 이들은 데뷔 무대에서의 성공적인 공연과 앨범의 대히트로 방송에도 출연하고 영화도 찍게 된다.

 (Pictures at an Exhibition)

71년 초,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에 모였다.

유럽 투어중에 키스가 개발한 테마인 타르쿠스를 사용하기로했다.

 

(타르쿠스의 테마는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Ginaster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에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에머슨은 후에 브레인 샐러드 서저리의 토카타에도 이를 원용하였다. 앨범은 2월에 발표되었다.

레이크는 New Musical Expres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병사와 전쟁을 다룬 텍스트죠.

 

충돌과 대립이 난무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가사는 혁명에 관한 것이죠. 지나 버린 혁명, 이미 일어난 혁명. 혁명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왔나요? "

77년 Contemporary Keyboard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키스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전 칼과 그렉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Tarkus의 경우에는, 칼이 박자의 변화 때문에 무척 충격을 받았어요.

 칼은 전에 5/4박자로 연주를 해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는 그 기억을 살려 Tarkus에서 그런 곡을 썼던 겁니다.

 

 그렉은 애초에는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았어요.

이상하다고 했었죠. 하지만 시도는 해보기로 했었고, 이후엔 그도 무척 좋아하게 되었죠." ELP는 Tarkus를 녹음하는데 6일 걸렸다.

71년 4월과 5월에 첫 미국 순회공연을 가진다. 때 맞춰 라디오를 통해 집중 방송된 Lucky Man덕분에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Tarkus는 7월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 발매되었다. 영국에선 앨범 판매순위 1위에 올랐고, 미국에선 9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하였다.

다음 앨범이 발매되기 전 밴드는 Pictures at an Exhibition의 공연앨범을 발매하기를 원했으나 밴드의 미국 레코드사인 애틀랜틱사가 이를 반대하였다.

 

레코드사는 공연 실황이 쓰레기같은 작품이라며 밴드의 경력에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ELP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3월경 뉴캐슬 시청에서 행했던 공연의 실황을 담은 해적판이 나돌고 있었고,명백한 저작권 침해 상황이었다.

 

결국 11월에 앨범이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유럽에서만 50만장이 팔려 나가는 성공을 거두자 애틀랜틱사는 미국에서도 앨범을 발매하자고 제안해왔고 밴드는

이를 거절한다.

 

레코드사 사장이 미국에서 런던으로 직접 와서 간청을 하였고, 결국 이 앨범은 미국에서도 발매되어 멀티-플래티넘 히트를 기록한다.

 원곡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이들만의 독특한 구성으로 록과 클래식을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밴드의 이미지에도 한층 도움이 되었다.

영국에서 행해진 12월의 공연에서 이들은 Aaron Corpland의 Rodeo를 편곡한 Hoedown을 연주한다.

이때터 키스 에머슨은 두 대의 하몬드 오르간, 모듈라 무그, 그랜드 피아노, 클라비넷을 동시에 무대에 올려놓고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72년 7월에 발표된 3집 Trilogy는 원래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담은 커버가 구상되었으나 달리가 수십만달러의 로얄티를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대신 멤버들의 초상화를 담은 다소 담백한(?) 커버로 발매 되었다. 이전의 어느

앨범보다도 더 많은 시간 (=돈?)과 노력이 투입되었고, 앨범은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5위에 오르는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특히 싱글 커트된 From the Beginning도 차트 순위 39위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하였고 Hoedown 역시 방송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유럽,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공연이 열렸으며, 일본에서까지 공연이 행해졌다.

오사까에서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관중들의 호응이 있었으나 며칠 뒤 있을 예정이던 도꾜에서의 공연은 태풍으로 취소되었다.

이해에 이들은 약 180일을 공연으로 보냈고 엘로디 메이커지에서는 영국 및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그해 최고의 밴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72년 말에는 킹크림즌에 있던 피트 신필드가 영입되어 그렉과 가스를 공동작업하기로 하였고, 자신들 소유의 음반사인 만티코어 레코드사를 설립하였다. 이태리의 수퍼 밴드인 PFM, Banco등이 이 레이블을 통해 세계 진출을 하게 된다.

73년 봄에는 칼 팔머가 Guildhall School of Music에서 클래식 팀파니를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Brain Salad Surgery는 73년 11월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발매되었다. 더많은 시간과 더많은 돈, 노력이 쏟아

 부어졌고, Jerusalem, Karn Evil 9, Still You Turn Me on 그리고 강렬한 멜로디라인을 자랑하는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가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영국에선 방송 금지곡으로 선정되었다.

이곡은영국의 전통 음악을 편곡한 것인데, BBC가 이들의 곡이 거룩한 분위기의 원곡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Alberto Ginestera의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을 편곡한 Toccata에 가장 많은 애착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에머슨이 가장 종경하는 클래식 작곡가인데다가, 그의 곡을 BSS에 싣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에머슨이

직접 작곡가가 있던 제네바로 날아가 에머슨의 편곡을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Alberto Ginestera는 이들의 곡을 듣고는 무적 감명 받았으며 "이 곡은 원래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로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퍼 밴드가 된 ELP의 BSS 투어는 어마어마한 규모가 되었다. 25명의 투어보조요원이 동행했고, 공연장비는 35톤이나 되었다.

드럼 키트는 무대에서 회전하도록 고안되었으며 피아노는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뒤집어지는 쇼를 특수 라이팅 속에서

 연출하였다. 공연은 미국에서 12월에 시작되어 74년 2월까지 계속되었고, 3,4월에는 영국에서도 투어가 이어졌다.

4월 6일 캘리포니아에서 가진 공연은 이들이 그대까지 행한 공연 중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이었다.

딮 퍼플과 함께 공연의 메인 퍼포머였으며, 블랙 사바스, 이글스, 어쓰 윈드엔 파이어등이 함께하였다.

공연은 온타리오 자동차 경주장에서 열렸는데 35만의 관중수를 기록했다.

 

이 공연은 TV로도 미국에서(ABC) 방영되었다. 이 공연의 비디오는 후에 콜렉터즈 아이템이 되었다.

에버슨은 이 공연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40피트 공중에서 연주하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4월말 완전 매진을 기록한 웸블리 구장에서의 공연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 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연주

 여행을 하였다.

미국에서의 이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햇고, 이를 틈타 ELP는 세장짜리 앨범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Ladies and Gentlemen,

 Emerson, Lake & Palmer라는 긴 제목의 편집 앨범이 발매하였고 미국 앨범 차트 4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운다.

(세장짜리 앨범이 미국에서 차트 10위권에 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후 밴드는 3년간의 긴 휴식에 들어간다.

이 기간동안 각자 솔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에머슨은 피아노 콘체르토를 썼고, 레이크는 피트 신필드와 함께

 C'est la Vie를 발표하였다.

에머슨은 피아노 콘체르토를 다 쓰고 난후 런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녹음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웃기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뒤쪽에 앉아 있는 브라스 단원들은 포르노 잡지를 꺼내 들었고, 지휘자도 코웃음을 쳤죠.

 

 그들은 나의 작품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거죠. 나는 강하게 밀어 부쳤어요.

 나는 여섯 번의 녹음 세션을 예약해 두었고 당신들이 그안에 제대로 녹음하지 못한다면 잘 할 때까지 세션을 약하겠다고 말했죠."

76년 말, 에머슨은 Norman Jewison의 영화 "The Dogs of War"의 사운드 트랙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영화는 81년에야 발표되고, 사운드 트랙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렉 레이크와 피터 신필드가

가사를 쓴 Priates가 만들어졌다.

 

 그렉과 신필드는 이 곡의 가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고 이것이 더블 앨범Works 1,2의 토대가 되었다.

Works 1의 한 면은 각 멤버들의 솔로 곡들로 채워진 돋특한 구성이 되었다.

팀으로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솔로 활동을 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이 앨범에 큰 노력을 쏟아부은 만큼, 후속 공연도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다.

75명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대동하였고 이 뮤지션들을 고르기 위해 전세계 6개 대도시에서 1500명에 이르는

연주자들을 오디션하였다..

77년,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는 130여명의 인원을 동원한 공연을 하였다.

 하루에 인건비만 해도 2만불이 지출되었고, 노조 규정에 따라 하루에 250마일 이상 이동할 수 없고, 일주일에 나흘 이상의 공연을 할 수 없게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투어 경로를 계획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진행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공연이 매진을 기록하지 않는 한 적자를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자를 면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투어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사정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2주만에 밴드는 3백만불의 적자를 보았다.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오케스트라를 포기해야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이후부터의 공연은 트리오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6주동안 이들이 벌어들인 돈과 오테스트라와 함께한 앨범과 트리오 공연의 실황 녹음 앨범의 판매 수익으로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연주여행의 실황은 공연이 끝날 때쯤 모든 작업을 마치고 Works vol 2로 발매되었다.

공연이 끝난 78년, 밴드는 다시 몇 년간의 휴지기를 갖고 싶어했다. 솔로 활동들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틀랜틱 레코드사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고 새로운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할 것을 요구하였다.

 

ELP는 바하마의 Compass point 스튜디오로 향했고 여기서 만들어진 앨범이 Love Beach였다.

 멤버들은 예전만큼 서로 다투질 않았다.

 서로에게 싫증이 나 있었다. 그만 두고들 싶어했지만 그만둘 수가 없는 상황 때문에 작업을 계속할 뿐이었다.

 당연히, 앨범은 서로 연관 없는, 평범한 노래들의 모음이 되어 버렸고, ELP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79년 12월, ELP는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12년의 활동을 통해 3천만장의 앨범을 판매하면서, 프로그레시브 록을 만들고, 기르고 퍼뜨린 수퍼밴드의 종말이었다.

에머슨은 로마에서 Inferno의 사운드트랙을 녹음을 벌써 시작하고 있었고, 그렉은 솔로 앨범을 내기 위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칼은 새로운 밴드 PM을 결성하였다. 그렉 레이크는 Thin Lizzy의 주역이었던 게리 무어와 록큰롤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고, 두장의 솔로 앨범도 발표하였다.

 

 (Greg Lake: 1981, Manoevres:1983) 칼 팔머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진 않았으나 예스의 스테브 하우, 킹 크림즌의 존 웨튼, 버글즈의 지오프 다운즈가 참여한 80년대의 수퍼그룹 아시아에서 드러머로 82년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6년간 아시아에서 활동하면서 In the heat of the moment, Sole survivor, only time will tell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였으며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 여행을 하였다.

85년 여름, 당시 폴리도르 부사장이었던 Jim Lewis와 키스 에머슨과의 통화로부터 ELP의 재결합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렉 레이크는 재결합에 별 이의 없이 동의하였으나 칼 팔머가 문제였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재결합을 하고 싶었으나

 아시아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아 에머슨, 레이크와 같이 작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후 결국은 코지 파웰이 대신 스틱을 잡았고 이들은 한동안 에머슨 레이크 앤 파웰로 활동한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웰은 앨범도 발표하였으며 공연도 성공적이었고, 프로그레시브록 팬들의 호응도 많이 얻었지만

에머슨은 칼 팔머를 잊을 수가 없었다.

 

87년 그는 다시 칼 팔머에게 연락을 하였고, 마침 칼 팔머도 아시아를 떠난 상황이었다. 밴드는 다시 재결합 하였고

 앨범을 발표했으나 (To the power of 3)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밴드는 다시 해산되고 각자의 솔로 활동에 들어간다.

그렇게 80년대가 지나가고 진정한 재결합의 기회는 91년에 찾아오게 된다. 영화 사운드 트랙을 셋이서 같이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멤버들은 작업에 착수하였고, 헐리우드 영화 음악의 히트메이커 Mark Mancina가 맡는다.

 

(Mancina는 ELP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라이온킹, 트위스터, 콘에어등의 영화음악을 제작하였다.)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ELP의 앨범은 제작이 완료되었고, 햇볕을 보게된다.

 

앨범 타이틀은 BLACK MOON. (dark side of the moon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92년 ELP는 다시 무대에 선다.

다음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로스 엔젤레스로 이주하였을 때 키스 에머슨의 오른팔에 이상이 왔다. 오랜기간에 걸친

 격렬한 건반 연주로 신경이 상해 있었고 수술을 해야 했다.

 

 94년 발매된 In the Hot Seat앨범의 연주는 한번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러번에 걸쳐 부분 부분 녹음한 후 스튜디오

 작업으로 곡을 꿰어 맞춰야 했다.

완성도나 통일성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공연 여행도 할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밴드는 다시 2년간의 휴식에 들어가야 했다. 96년, 이들은 제쓰로 툴과의 합동공연으로 화려하게 컴백한다

 

 

 

 

 

 

 

 

70년대 그룹 예스(Yes)나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와 견줄만한 또 하나의 수퍼그룹인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Emerson, Lake & Palmer, 이하 ELP)는 클래식과 록음악을 접목시켜 수천만 명의 팝 팬들을 록음악 마니아로

 전향시키는데 공헌한 프로그레시브 록 드이다.

 

당대 최고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었던 나이스와 킹 크림슨(King Crimson에서 각각 활동했던 케이스 에머슨

(Keith Emerson, 키보드)과 그레그 레이크(Greg Lake, 보컬·베이스)는 오디션을 통해 아토믹 루스터

(Atomic Rooster)에서 활동했던 칼 파머(Carl Palmer)를 영입해 70년 그룹 ELP를 결성한다.

 

플리마우스(Plymouth)에서 열린 쇼를 데뷔 무대로 갖고 곧이어 발표한 셀프 타이틀의 첫 앨범으로 UK 차트 5위,

 

 US 차트 20위를 기록하며 록계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이들은 마이너 발라드 곡 'Lucky Man'의 히트에 힘입어 순회공연을 펼치면서 광기 어린 스테이지 연기로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얻게 된다. 또한 이들은 71년 케이스 에머슨의 무그 신디사이저(Moog synthesizer) 구사와 칼 파머의 독특한 드럼 패턴으로 폭발적인 사운드가 돋보인 [Tarkus], 뉴캐슬에서의 실황 공연을 담은 ELP의 첫 라이브 앨범이자 무소르그스키(Mussorgsky)의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을 록음악으로 편곡한 [Pictures at an Exhibition](71)을 발표하면서 클래식 록의 선봉자로서 입지를 굳힌다.

72년 [Trilogy]를 발표,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의 곡이었던 'Hoedown'을 히트시킨 ELP는 알베르토 지나스테라(Alberto Ginastera)의 피아노 협주곡 1번(Piano Concerto No.1)을 록음악에 융합시켜 'Tocatta'를 만들었고 이 곡이 수록된 [Brain Salad Surgery](73)라는 앨범을 자신들의 레이블인 맨티코어(Manticore)에서 발매했다. 74년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라는 트리플 라이브 앨범을 선보인 ELP는 한동안 각자 솔로 앨범 작업을 하고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을 프로듀스 하는 등 휴식기를 가진 뒤 77년 [Works]라는 더블 앨범을 발표했다. 멤버들 각자가 한 면씩 솔로로 취입하고 나머지 한 면만 공동작업을 한 이 앨범은 프로그레시브 록 마니아들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그레그 레이크의 명곡인 'C'est La Vie'로 다수의 팝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70년대 후반 팝 음악계가 펑크 록과 디스코, 뉴웨이브 그룹에 의해 점유되면서 이들이 추구하는 지적인 록음악에 대한 팬들의 관심도 엷어졌다. 결국 78년 혹평을 받은 [Love Beach]를 끝으로 ELP는 79년 공식적인 해체를 선언한다. 이후 영화음악을 작곡하면서 간간이 솔로 프로젝트 앨범을 녹음하던 케이스 에머슨과 역시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영위하던 그레그 레이크는 85년 앨범 작업을 위해 다시 모였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팝 수퍼 그룹 아시아(Asia)의 멤버로 활동하던 칼 파머를 끌어들이는데는 실패했다. 대신 코지 파웰(Cozy Powell)을 영입하여 에머슨, 레이크 앤 파웰이라는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91년 칼 파머가 합류하여 다시 ELP라는 이름으로 [Black Moon](92)을 발표하며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마친 이들은 93년 [Live At Royal Albert Hall]이라는 또 하나의 라이브 실황앨범을 발매한다. 이후 [In the Hot Seat](94)를 발표했으나 이전의 화려했던 음악 스타일에 비해 많이 퇴색된 앨범으로 팬들의 시큰둥한 반응 속에 사실상 ELP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한때 헤비메틀 밴드의 역작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것에 비해 현재는 이들에게서 거창한 수작이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정열적인 라이브 무대로 그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이들은 클래식 록음악의 대중성을 입증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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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naver.com/jangnams7080/150023783994

 

 

 

 

 

 



 

 

 

'세라비(C'est La Vie)'는 1969년 '나이스(Nice)'의 '멤버(Member)', '키스 에머슨(Keith Emerson)'과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Bassist and Vocalist)' 였던 '그렉 레이크(Greg Lake)'가 '샌 프란시스코(San Fransico)'에서 만나 '드러머(Drummer)', ' 칼 파머(Carl Palmer)'를 가입시켜 만든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가 '데뷔(Debut)' 처음부터 뛰어난 연주 솜씨와 볼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무대 매너로써 인기를 독차지하며 황금의 '록 트리오(Rock Trio)'로 일컬어졌습니다.

1977년 발표한 '웍스 볼륨(Works Volume 1)'에 수록된 곡으로 미국 '싱글 차트(Single Chart)' #91위에 올랐습니다. 서정적인 '멜로디(Melody)' 덕분에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오랫동안 누렸지요.

'팀(Team)'에서 '베이스(Bass)'를 맡고 있는 '그렉 레이크(Greg Lake)'와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인 더 코트 오프 크림슨 킹(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작업을 같이 했던 작사가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가 만들었습니다.

이 곡에 대해 '그렉 레이크(Greg Lake)'는 다음과 같이 말을했습니다.

『 '파리(Paris)'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데, '파리(Paris)'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예요. 가끔 거릴 거닐면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르간(Organ)' 소리 같은 것이 들려요. '라스베가스(Las Vegas)'에서 들을 수 있는 '배럴 오르간(Barrel Organ)' 같은 소리요. 난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내가 사는 아파트로 걸어오곤 했어요.

어느 날 카페를 지나는데 '에디뜨 피아프(Edith Piaf)'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아파트로 돌아와선 생각했죠. '프랑스(France)' 느낌의 '프랑스(France)' 노래를 만들어야 겠다고요.

난 '프랑스(France)' 말은 못하지만 '세 라 비(c'est la vie)'만은 알았죠. 노래를 만들기에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이 곡을 '프랑스(France)' 가수 '자니 홀리데이(Johnny Hallyday)'가 '리메이크(Remake)' 해서 '프랑스(France)'에서 #1위를 차지했어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

'세 라 비(C'est La Vie)'란 말은 영어권에서도 잘 알려져 있어서인지 이 제목으로 동명이곡이 상당히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1984년 '최혜영'이 '그것은 인생이란'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음악 '스타일(Style)'의 한계성이 드러나 각자 '솔로(Solo)' 활동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 곡은 77년에 발표된 것으로서, 국내 가수들에 의해서도 많이 불리워진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