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 '음악의 헌정'
Musikalisches Opfer Bwv.1079
Performer: Jordi Saval,l Le Concert Des Nations
Komponist: Johann Sebastian Bach
Bach The Musical Offering (Musikalisches Opfer)
for keyboard and chamber instruments, BWV 1079
바흐 - '음악의 헌정' Musical Offerings
Jordi Savall/Le Concert des Nations - Bach,
Das Musikalisches Opfer, BWV 1079
Pierre Hantai(harpsichord), Marc Hantai(transverse flute),
Manfredo Kraemer(violin), Riccardo Minasi(violin), Xavier Puertas(viola),
B?lazs M?t?(cello), Jordi Savall(viola da gamba)
01 Thema Regium (Iraverso Solo)
02 Ricerear A 3 (Clavecin)
03 Canon Perpetuns Super Thema Regium (7)
04 Canon 1 A 2 (Cancrizans) (Clavecia)
05 Canon 2 A 2 Violini In Unisono
06 Canon 3 A 2 Per Motum Contratium
07 Canon 4 (A) Per Augmentationem Contratrio Motu
08 Ricercar A 6 (Clavecin) Sonata Sopr`Ii Soggetto Real
09 Sonata soprIl Soggetto I. Largo
10 II. Allegro
11 III. Andante
12 IV. Allegro
13 Canon A 2 Quaerendo Invenietis (9a) (Clavecin)
- `Ascendenteque Modulatione Ascendat Gloria Regis`
바흐 - '음악의 헌정' Musikalisches Opfer (Musical Offering)
1747년에 J.S. 바흐가 작곡한 9곡으로 된 대위법적 변주곡(BWV 1079). 바흐가 포츠담궁전을 방문하였을 때
프리드리히대왕이 내린 주제를 바탕으로 작곡하고 헌사를 붙여 대왕에게 헌정하였다.
전통적 대위법을 충분히 구사한 음악으로 시대의 흐름에 등을 돌린 말년의 바흐의 대표작이며 특히 6(六聲)의
리체르카레>는 대위법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에 의해 바하는 궁정에 초대되어 대왕이 자랑하는 최신식 질버만의 클라비어의 몇 개를
시험 연주하고 대왕 자신이 준 주제에 의하여 리체르카레를 즉흥적으로 작곡 연주해서 왕을 놀라게하였다.
왕이 그에게 주었던 주제를 3성의 리체르카레(즉흥 연주를 기보한 것)와 같은 주제에 의한 카논5곡, 카논 풍푸가
1곡을 인쇄하여 헌사와 함께 대왕께 바쳤다.
음악의 헌정 Musikalisches Opfer
트리오 소나타 1곡과 2곡의 푸가(리체르카레), 10곡의 카논을 포함하고 있는 이 난해한 음악의 헌정은푸가의기법과
더불어 바흐의 최 말년에 작곡된 곡으로 이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자 서양 음악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걸작이다.
이 곡이 작곡된 일화는 다음과 같다. 1747년 그의 차남 칼필립 엠마뉴엘이 오르가니스트로 봉직 하고 있던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대왕의 간청으로 포츠담 방문 했을 때. 자신이 훌륭한 플루트 주자 이기도 했던 대왕이 내린 주제를 갖고
즉석에서 3성 푸가를 연주해 갈채를 받은 사건으로 비롯된다.
푸가의 기법에서도 연주 악기가 지정 되지않아 여러 종류의 악기에 의한 음반이 나와 있지만 이 음악의 헌정도 악기의
지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곡의 배열 순서도 확정되어 있지않다.
따라서 지금 까지 다양한 악기에 연주에 의한 또 다양한 배열의 연주가 나와 있어 듣는 우리들에게 큰 부담과 당혹감을
주고 있음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들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과 즐거움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악곡의
배열순서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마는 구조적 형식미를 지극히 중시하는 바흐 음악에 있어 이런 문제는 결코
무시될 수는 없다.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배열이 제시되고 있지만 1970년대 이후로는 후스만의 원전연구에 의한 배열쪽으로
굳어지고있다.
즉 처음에 3성푸가로 시작하여 대왕의 주제에 의한 무한 카논 후 5개의카논,카논풍의 푸가, 그 다음 6성푸가, 2성 및
4성카논 후 트리오 소나타, 마지막에 무한 카논의 순서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리오 소나타를 중간에 두고 처음과 마지막에 3성과 6성의푸가를 두고3 성푸가 - 트리오소나타- 6성푸가
사이사이에 각각 5개의 카논을 두는 건축학적 구조배열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바흐음악의 귀재 칼 리히터는 대왕의 주제를 쳄발로로 시작하는가 하면 칼 뮌힝거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고있다.
글 : 한국바흐협회 양현호
리체르카레(ricercare)
16, 17세기의 여러 가지 형태의 기악곡 명칭으로 이탈리아어(語) ‘탐구한다’는뜻의 동사 ricercare가 어원으로, 이 말은 의미가 다양하여 일률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우나,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푸가의 전 단계를 이루는 모방적 기악곡이다.
모방적 리체르카레는 르네상스시대의 성악 모테트양식을 기악에 적용한 것으로부터 시작, 모테트와 같이 여러 가지 주제의 모방적 처리를 중요한 특징으로 하였다. 여기에는 기피襤翎諛?오르간용이 있는데,
전자는 가사가 없는 모테트 라고도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며, 후자는 16세기 중엽부터 성악 모테트양식
에서 탈피, 독자적인 기악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에는 다주제(多主題) 리체르카레가 지배적이었으나, 17세기에는 단일주제로 바뀌는 경향을 보여 변주(變奏)
리체르카레 형식이 프레스코발디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 후 단일주제의 유기적 전개와 명확한 형식구조가 발달, 푸가로 이행 18세기에도 리체르카레라는 명칭이
쓰이나 ‘고식(古式)푸가’의 의미밖에 없다.
16세기에 전술한 유형과는 달리 연습곡 또는 자유스러운 양식에 의한 즉흥적 성격의 곡에도 리체르카레라는 명칭이
쓰인 경우가 있다.
리체르카레의 전성기는 16, 17세기였으나 20세기가 되자 신고전주의적 풍조 (新古典主義的風潮) 가운데
부활되어 말리피에로, 카젤라, 마르티누,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바흐(J.S. Bach, 1685-1750)
바로크의 태양이 지고 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 깊숙이 스며들며, 세상 아름다움과 몇 해 전부터 인연을 끊은 늙은 바흐를 비추고 있었다.
영주들도 항복할 만큼 기세등등하고 완고했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위대한 칸토르,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파란만장한 명성을 누렸던 별이 까무러지고 있었다.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대음악가계의 후손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집안은 유전학상으로도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1685년 아이제나하에서 출생한 그도 거리의 악사, 작곡가, 칸토르 등 다양한 음악직업을 가진 선조들로부터 그는 아낌없는 재능을 물려받았다.
당시의 모든 변변찮은 음악가들의 형편이 그렇듯이 그의 집 안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틈틈이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영특한 바흐는 언제나 학급에서 일등이었다. 1694년 잇달아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바흐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를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사했다.
형은 바로크 시대의 대작곡가 요한 파헬벨의 제자였으므로 바흐도 그 영향을 단단히 받았다.
그의 형은 프로베르거, 케를, 북스테후데 뵘 등의 작품사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바흐를 무시하여 잘 보여주지
않았으나 집념이 강한 바흐는 그 많은 악보를 남몰래 필사하여 누구보다도 뛰어난 독보력으로 공부했다.
1700년 봄 형의 가족이 늘어나 더 이상 군식구로 붙어 있기가 불편했던 바흐는 북독일 뤼네부르크에서 급비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바흐가 18세 되던 해, 아른시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취임해 그의 실력을 인정받아 이례적인 높은 급료를 받았다.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만 아니라 성가대 연습도 맡았는데 그의 완고한 성격과 젊은 대원들의 혈기 왕성한 성격은 거리에서 난투극을 벌일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다가 아른시타트 성직회의와 결정적으로 충돌한 것이 1705년 10월 휴가 후의 일이었다. 무엇이나 새것을 좋아하고 훌륭한 것에 깊은 감동을 받을 줄 아는 바흐는 1705년 10월에 한 달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를 방문해 북스테후데의
명연주를 들었다.
그의 장려한 오르간곡과 칸타타에 흠뻑 빠져든 바흐는 무려 4개월을 아무 소식도 없이 뤼베크에 머물렀다.
가뜩이나 젊은 성가대원들과의 불목과 괴상한 연주법에 머리를 흔들던 시의회원들은 더 이상 그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 시대는 바흐가 오르간 연주와 작곡의 기초를 굳혀가며 자기 양식을 만들고 있던 때로서, 시의회원들이 "괴상망측한
음악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라고 부르던 곡들이 태동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전주곡과 푸가, 혹은 토카타와 푸가에는 북스테후데의 매혹적인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고, 유명한 D단조의 토카타와 푸가(BWV 565)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707년 6월 아른시타트 성직회의와 충돌한 후 그는 뮐하우젠에서 새 직장을 구하고 육촌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이 고장에서 1708년 2월에 작곡한 "하느님은 나의 왕이시로다"(제 71번)는 북독일 악파의 양식에 의한 장려한
작품으로서 바흐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교회 칸타타였다. 바흐는 1708년 7월 바이마르에 새 직장을 얻어 오르간곡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고장에서 교회의 오르간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개조했으며 그 많은 바흐의 오르간곡이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바흐는 지극히 독일적이면서도 결코 독일의 울타리에만 갇혀 있지 않고 여러 국민의 양식을 융합시키는 위대한
도예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의 신선한 매력에 끌려 그가 작곡한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여 전혀 새로운
느낌을 맛보게 했다.
바이마르 시대 후기의 오르간곡은 라틴적인 명쾌함이 물씬 풍기는 것도 바로 그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713년 헨델을 존경했던 바흐는 그의 탄생지인 할례에서 직장을 구하려 했다.
할례의 의원들은 바흐의 오르간 연주와 칸타타의 작곡에 감탄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기꺼이 맞 아들이려 했으나 급료문제로 의견을 일치할 수가 없었다.
바흐는 스스로의 능력에 적합한 보수를 바라며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기에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흐가 다른 직장을 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이마르 영주는 그를 놓치고 싶지않아 그의 봉급을 증액시키고
1714년 3월 궁정악단의 지휘자로 임명하며 대신 매달 교회 칸타타 한 곡씩을 작곡하도록 정했다.
이로써 바흐는 칸타타 시대에 돌입하여 제 61번 "자, 오라 이방인의 구세주여!"(Nun komm, der Heiden Heiland),
제 31번 "하늘은 웃고 땅은 환호하도다!"(Der Himmel lacht die Erde jubiliret), 제 61번 "오라, 그대 달콤한 죽음이여!"(komm, du, Stlsse Todesstunde) 등의 명작이 태어났다.
바이마르에서 바흐는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정과 경제가 모두 안정되었고 교우관계도 비교적 원만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는 이때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C장조(BWV 564)를 작곡했다. 이 곡은 특이한 형식과 화려한 연주 효과를 갖는
오르간 칸타타로서 그가 매료되었던 비발디와 북스테후데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태리 협주곡의
3악장 형식을 사용한 화려한 페달 솔로에는 복스테후데의 모습을, 푸가에는 쿠우나우 풍의 유머가 넘실거리고 있다.
이렇듯 활동적이고 안정된 기반에 어둔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716년 영주와 그 조카 사이에 일어났던 권력 다툼
때문이었다.
그 둘 모두와 친분을 맺었던 바흐로서는 처신하기가 매우 난처했으며 더우기 궁정악장이 죽자 그 후임으로 내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어긋난 것은 바흐가 바이마르를 떠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바흐의 재능을 아끼던 영주는 간청과 협박으로 그를 묶어두려 했으나 고집불통이고 완고한 바흐를 꺾는 데는 실패했다.
바흐는 쾨텐 궁정악장으로 취임하여 1723년까지 지냈다.
1720년 쾨텐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바흐는 바르바라의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져 또다시 방황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723년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칸토르 자리가 공석이 되어 바흐는 세번째 인물로 선택되었다.
"최고가 거절했으니 중간 정도의 인물이라도" 선정하겠다는 라이프치히 시참사원들의 거만한 태도는 몇 년 동안 바흐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시 참사회, 성직자회의, 대학 당국 등 세 부류의 상사가 바흐 활동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그들 사이의 반목은 바흐의 깊은 괴로움이었다.
게다가 라이프치히의 합창단의 질은 낮았고 규율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봉급도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 교회 음악에 대한 그의 열의는 급속도로 식어갔다. 바흐의 태만에 분노한 시 참사회가 감봉처분을 결정하자 바흐는 드레스덴에 있는 ’작센 선거후(選擧候)의 궁정작곡가’라는 칭호를 얻어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작센후는 1736년 11월에 기꺼이 그 작호를 내렸고, 바흐의 예측대로 이 명예는 효과가 있어 그 이후 바흐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바흐 생애의 마지막 화폭은 포츠담 방문이다. 계몽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를 방문한 바흐는 왕이 제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를 해 왕을 감격시켰다. 이때 연주된 곡이 바로 "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BWV 1079)이다.
그리고 그 해 6월 이론가 미슬러(Lorenz chistoph Mizler)가 창립한 음악가 협회에 가입하여 "높은 하늘에서
(Vom Himmel hoch)"(BWV 769)를 작곡 출판했다.
그리고 1748년부터 1749년에 걸쳐 마지막 대작 "푸가의 기법(Die kunt der Fuge)"(BWV 1080)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악화된 그의 건강은 미완성 곡을 남기고 말았다.
1749년 5월 시력이 급속히 감퇴하여 50년 두 번에 걸친 수술을 받고 더 악화되어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위대한
음악의 도예가 바흐는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 커튼을 내리며 별빛 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고전파의
탄생이 장엄한 서곡을 펼쳤다.
그의 진가는 세기가 흐를수록 더욱 드러나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위대한 명성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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