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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1828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슈베르트(Schubert, Franz) 사망  

슈베르트 [Schubert, Franz (Peter), 1797.1.31~1828.11.19] 

 

 

 

 

 

 

 

오스트리아 대표적인 작곡가 슈베르트가 1828년 11월 19일 사망했다.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도 불리운 그의 음악적 천분은 일찍부터 두드러져 8세때 교회에서 가창, 바이올린, 피아노, 오르간 등의 기초적인 지도를 받고 11세때 아름다운 소년 소프라노 음성을 인정받아 빈 궁정예배당의 합창아동으로 채용되어 국립 기숙신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궁정악장 A.살리에르에게 작곡법을 배워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다. 1828년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면서도 오토 에리히 도이츠의 연대순으로 정리된 작품번호에 따르면 작품수는 998개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약 633곡의 가곡이다.
생전의 고전파시대에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가곡이라는 예술부문이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선율과 색채 넘치는 화성에 힘입어 비로소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취급됐다. 대표곡으로 '실을 잣는 그레트헨'(1814), '들장미'(1815),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1923), '겨울나그네'(1827)등이 있으며 유해는 유언에 따라 전년에 작고한 벨링크묘지에 있는 베토벤 무덤 가까이에 묻혔다. /조선

 

 

 

 

 

 

 


1805 -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의 외교관 레셉스(Lesseps, Ferdinand de) 출생

레셉스 [Lesseps, Ferdinand(-Marie) de, 1805.11.19~1894.12.7]

[오늘<1268>(11월19일)] 레셉스
1805년 11월19일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가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1894년 졸(卒). 레셉스의 아버지는 이집트에서 외교관으로 오래 일한 레셉스 백작 마티외 막시밀리앵 프로스페르였다. 레셉스도 아버지처럼 이집트에서 본격적인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833년부터 다섯 해 동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근무했는데, 이 시절 교분을 쌓은 왕세자 사이드 파샤는 1854년 즉위하자마자 레셉스에게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운하 개발권을 주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커다란 역사(役事)에 착수했다.


당시 이집트에서 프랑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은 수에즈운하 개발권이 프랑스인에게 돌아간 것을 불편하게 여겼고, 수에즈운하회사의 사이드 파샤 주식을 사들여 회사를 프랑스인 주주들과 공동소유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는 레셉스의 총감독 아래 공사를 진척시켜 1869년 운하를 개통했다.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쌓은 명성 덕분에 레셉스는 1873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884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레셉스의 만년은 순탄치 않았다.

 

그 빌미는 레셉스가 수에즈운하 건설 못지않은 대공사가 될 파나마운하 건설에 나선 데서 주어졌다.

1879년 파나마운하 개발계획이 파리 지리학회에서 입안된 뒤 레셉스는 파나마운하회사 사장에 취임해 공사를 지휘

했으나, 당초 예상보다 공사비가 크게 늘어난 데다 경영부실도 겹쳐 회사는 1889년 파산하고 말았다.


도산하기 직전 이 회사가 유대인 금융자본가를 통해 일부 의원들을 매수해 복권부사채(福券付社債)의 입법화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나 레셉스와 그의 아들은 법정에 서야 했고, 1심에서 두 사람 다 징역 5년, 벌금 3,000프랑의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최고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레셉스는 회사 파산 이후의 삶을 정신착란 상태로 살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1/18 15:01

 

 

 

 

 

 

 


1722 - 오스트리아의 의사 아우엔브루거 폰 아우엔브루크(Auenbrugger von Auenbrugg, Leopold) 출생

아우엔브루거 폰 아우엔브루크 [Auenbrugger von Auenbrugg, Leopold, 1722.11.19~1809.5.17]

오스트리아의 의사.

 

그라츠 출생. 1752년 빈 의학교를 졸업하고 빈의 에스파냐 병원 내과의()로서 1762년까지 근무하였다.

그 후에는 개업의로서 환자의 진료를 담당하였으며, 1761년에는 7년간의 임상경험에 바탕을 둔 《신발견()

 Inventum Novum》이라는 제목으로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이학적() 진단법의 한 새로운 방법인 타진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방법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버지가 통 속에 포도주의 양을 검사하기 위하여 통의 한쪽을 두들기는 데서 착안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진단법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하였고, 18세기 말 프랑스의 명의 J.N.코르비자르 데 마레에 의하여 그 진가를 인정받으면서부터 알려졌다.
 /naver 

 

 

 

 

 

 

 

 

 

 

 


1711 - 러시아의 시인, 과학자, 언어학자 로모노소프(Lomonosov, Mikhail) 출생

로모노소프 [Lomonosov, Mikhail Vasilyevich, 1711.11.19~1765.4.15]

러시아의 시인, 과학자, 언어학자.

 

 

백해() 연안 아르항겔스크주()의 한촌()에서 농어민의 아들로 출생. 북국의 냉엄한 자연환경과 유년시절의 가난한 생활은 후에 그를 위대하게 만든 여러 가지 특성, 즉 치밀한 관찰력 ·용감성, 불굴의 인내력 등을 가지게 하였다.

모스크바의 슬라브 ·그리스 ·라틴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여 5년간을 가난과 싸우며 고학()하였으며, 1736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에 진학하고, 이어 독일에 유학, 철학 ·물리학 ·화학을 수학하였다.
귀국 후에는 1745년부터 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아의 교수로서 러시아문화의 향상에 노력을 다하였다.또한 교육 분야에도 열정을 쏟아, 당시 러시아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외국인 학자들의 횡포에 대항하면서 러시아 학자들의 진출을 도왔고, 1755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대학인 모스크바대학을 창립하였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연구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특히 라부아지에보다 14년이나 일찍 질량 불변의 법칙을 확립한 것, 열역학의 발견이 이루어지기 80년이나 앞서서 이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주장한 점, 또 뉴턴의 망원경을 개량하여 금성()의 대기()를 발견한 것 등은 과학자로서의 그의 뛰어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학상의 중요한 공적으로는 문어()의 개혁과 작시법()이다. 《러시아어 문전()》(1755)을 저술하여 러시아어 문법의 체계를 확립하였고, 《수사학()》(1748) 및 《러시아어에 관한 교회용어의 효용에 대하여》(1757)에서는 종래의 문어로서의 교회 슬라브어와 구어()의 사용 법칙을 확립하여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도록 양자()를 통합 ·조정시켜서 새로운 문학용어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 문어는 풍부해졌으며 점차로 교회 슬라브어로부터 해방되었다.작시법에 대한 업적은 종래의 음절시()를 배격하고 러시아어에 맞는 음절억양시()로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는 다수의 뛰어난 자작의 시로써 이의 우위를 입증시켰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러시아의 고전주의()를 확립하고 이를 서정시에 적용하여 독특한 송시()를 썼다. 《저녁의 명상》(1743) 《엘리자베타 여제() 즉위의 날에》(1747) 《아침의 명상》(1751) 등은 유명하다. V.G.벨린스키는 그를 일컬어 ‘러시아 문학의 표트르 대제’라고 하였다.

 /naver 

 

 

 

 

- 'Self Portrait'                   - 'Adoration of the Shephe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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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es and the Daughters of Jethro'

 

 

 

- 'Tancred and Arminia' - 'Landscape with Polyphenus'

 

 

- 'The Triumph of Neptune and Amphitrite'           - 'The Deposition'

 

 

 

1665 - 프랑스의 화가 푸생(Poussin, Nicolas) 사망

푸생 [Poussin, Nicolas, 1594.6.15~1665.11.19]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

 

 

1594년 노르망디의 레장드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 고향에서 Q.바랭에게 배우다가 1612년 파리로 나가 F.엘 및 G.랄르망에게 사사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까지의 일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621년 뤽상부르궁()의 장식에 필립 드 샹파뉴와 함께 고용되었다.
이 때 왕궁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원래 이탈리아 고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더욱 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1624년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도메니키노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그가 지니는 명쾌단정()한 구도와 약간 차가운 듯한 색조는 이 시기의 수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라파엘로 등 고대에 심취하였고, 로마와 상상적인 고대풍경() 속에서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하였다.
1628년 성베드로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명성이 높아져, 1639년 마침내 고국 프랑스의 루이 13세로부터 수석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화가들과 잘 맞지 않아, 1642년 다시 로마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신화()와 고대사(), 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그것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독특한 이상적인 풍경 속에 그렸는데, 그 장대하고 세련되고 정연한 화면구성과 화면의 정취는 그 후 프랑스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작품으로 《예루살렘의 파괴》(빈미술사미술관) 《아폴론과 다프네》(뮌헨미술관) 《바커스제()》 《플로라의 승리》 《아르카디아의 목자()》(이상 루브르미술관) 《양치기들의 경배》 《계단 위의 성가족》 등이 있다.

 /naver 

 

 

 

 

- 'Melpomene Erato & Polymania'

1616 - 프랑스의 화가 르 쉬외르(Le Sueur, Eustache) 출생

르 쉬외르 [Le Sueur, Eustache, 1617.11.19~1655.4.30]

Lesuer라고도 씀. 종교적인 작품을 그린 프랑스의 화가.

 

 

프랑스 고전주의적 바로크풍으로 회화·조각 왕립 아카데미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곳의 교수가 되었다. 화가 시몽 부에로부터 배웠고 어린 나이에 화가 길드에 들어갔다. 몇 개의 그림을 태피스트리로 다시 만들어 주목을 끌었고, 미완성으로 남은 랑베르 저택의 장식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교회와 수도원에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에페소스에서 설교하는 성 바울로 St. Paul Preaching at Ephesus〉(루브르 박물관 소장)와 샤르트뢰 수도원에 그린 22개의 유명한 연작 〈성 브루노의 생애 Life of St. Bruno〉(루브르 박물관 소장)가 있다. 푸생, 라파엘로, 부에 등의 화풍의 영향으로 우아한 드로잉과 섬세한 구도가 두드러진다.

 /브리태니커

 

 

 

 

 

 

 

 

1600 - 영국 왕 찰스1세(Charles I) 출생

찰스1세 [Charles I, 1600.11.19~1649.1.30] 

[오늘속으로<650>(11월19일)] 찰스 1세

 

 

1600년 11월19일, 뒷날 청교도 혁명의 와중에 ‘인민의 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제 신민들에게 목이 잘리게 될 영국 왕 찰스1세가 태어났다.
그가 짧은 공화정 시대의 문을 영국인들에게 열어보이며 죽은 것은 1649년 1월30일이었다.
총신(寵臣) 버킹엄 공작의 실정이 국민의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찰스1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전쟁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를 강요하다가 반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의 크고 작은 전쟁들에까지
 미주알고주알 간여하며 국고를탕진했다.
탕진한 국고를 메우느라 찰스1세는 많은 세금을 걷지 않을 수 없었고, 의회는 이를 비판하며 권리 청원(1628)을 통해서 의회의 동의 없이는 과세할수 없다는 원칙을 확인했다.
다급한 왕은 권리 청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듬해 의회를 해산해 국민대표들의 입을 막았다. 장로파가 다수인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지만않았더라도 찰스1세는 그럭저럭 고종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회 동의 없이 스코틀랜드와 전쟁에 들어간 그는 결국 군비가 모자라 강화할 수밖에 없었고, 복수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날 ‘단기의회’라고 불리게 될 이 의회는 국왕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다. 찰
스1세는 그 꼴이 보기 싫어 3주만에 의회를 해산했지만, 그 직후 스코틀랜드와 또 전쟁이 터지자 다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1세가 죽은 뒤에도 4년간 더 존속할 이 의회가 이른바 ‘장기의회’다. 찰스1세는 이 의회에서 자신의 반대파들을
 솎아내고 싶었다.
그는 어리석게도 1642년 1월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하원으로 가 반대파지도자들을 체포하려다 실패했고, 이 사건은
청교도혁명이라고 불리게 될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2-11-18 16:4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4&oid=038&aid=0000160726

 

 

 

 

- Landing of Columbus on Puerto Rico

1492 - 콜럼버스, 푸에르토 리코 발견(1차 항해) 

콜롬버스(Columbus, Christopher, 1451~1506)

 

 

1492년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은 유명하다. 콜롬버스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출생, 14세부터 배를 타기

시작, 고향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일찍이 포르투갈에 건너가 결혼을 하고, 선원생활을 하던 중 1484 년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에 갈 수 있다는 계획을 포르투갈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이에 에스파니아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1492 년 이사베라 여왕의 후원을 얻어 1492 ~1504 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대서양을 왕래하였다.

 

콜롬버스는 산타마리아호, 니나호, 핀타호등 세 척과 78 명의 선원을 거느리고 1492 년 8 월 파로스항을 떠나 1 차 항해에 나서 2 개월여의 항해 끝에 10월12일 육지를 발견하고 상륙한 곳이, 지금의 바하마에 있는 산살바도르(San Salvador) 였다.그는 쿠바와 아이티에도 갔는데 그곳에서 산타마리아호는 좌초되어 버렸다.
11월 19일 푸에르토리코에 상륙, 그는 그가 발견한 고장을 끝내 인도 땅 인줄로 알고 "서인도"라 하며 원주민을 인도사람, 즉, "인디안"(Indian) 이라 명명했다.  


콜롬버스의 2 차 항해는 그의 flagship(기함) Mariagalante호와 16 척의 배와 선원, 군인, 이주민, 사무원, 법원판사등 1,200 명을 대동하고 식민을 목적으로 1493 년 9 월 25일 Cadiz항을 출발, 11월 3일 새로 도미니카, 자마이카, 과테말라
를 발견하고는 이곳이 일본의 부근에 있는 섬으로 착각. Hispaniola에 남겨둔 그의 선원들이 인디안에 의해 살해된 것을 11월 27일 발견. Santo  Domingo를 최초의 식민지로 삼고 총독이 됨.1496년 7월 31일 스페인 Cadiz항에 귀국. 1498 년 5월 30일 6척의 배와 함께 중국을 찾기위해 남쪽으로 3 차 항해하였으나, 비로소 아메리카 대륙 본토에 상륙, 그곳은 남미 북단 트리니다드, 토바코, 그라나다, 마가리타 등 이였다.  
그후1502년 5월 9일 4척의 배와 선원 150명을 데리고 Cadiz항을 4 차 항해 출발, 1503년 1월 6일 오늘날 중앙아메리카 파나마를 발견 함. 그 후 귀족들과의 불화로 큰 뜻을 펴지 못한 채 실의 속에 그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으며 1505 년 세상을 떠났다.

 

http://k.daum.net/qna/view.html?qid=3PZ
hc

 

 

Yanni(야니) - 05- Tribute(트리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