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SBS나이트라인 캡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 (서울=연합뉴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3월 22일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기념영상을 시청하는
김 전 회장 모습.
2019.12.10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
대우그룹 재계 2위로 키운 세계경영 신화..41조원 분식회계로 몰락
베트남서 사업가교육 중 건강악화로 작년 귀국..아주대병원서 말년
"청년들의 해외진출 돕는 GYBM 교육사업 발전적 계승" 유지로 남겨
(서울·하노이=연합뉴스) 김준억 기자 민영규 특파원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나빠져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했으며 평소 뜻에 따라 연명치료는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 이후 주로 베트남에서 지내던 김 전 회장은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귀국했으며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 전 회장은 자신이 사재를 출연해 세운 아주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입원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졌다.
1936년 대구 출생인 김 전 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추앙받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덕한 경영인으로 내몰리기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부친이 납북된 이후 서울로 올라와 당시 명문 학교인 경기중과 경기고를 나왔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 만 30세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폴란드에서 세계경영 설명하는 김우중 전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996년 3월 13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DAEWOO-FSO자동차 공장 회의실에서
자동차 출입기자들을 만나 대우의 세계경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확장해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로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1990년대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천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하기도 했다.
고인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지만,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해체됐다.
아울러 김 전 회장은 21조원대 분식회계와 9조9천800억원대 사기대출 사건으로 2006년 1심에서 징역 10년, 추징금
21조4천484억원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8년6월,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으로 감형됐으며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한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고인은 지난해 8월 말 베트남 하노이 소재 GYBM 양성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한 이후 건강이 안 좋아져 통원 치료를 하는 등 대외활동을 자제해오다 12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해 장기 입원에 들어갔다고 대우 관계자는 밝혔다.
김 전 회장이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행사가 마지막이다.
대우그룹 임직원들은 1999년 그룹 해체 이후에도 매년 창업기념일에 기념행사를 진행해왔으며 김 전 회장을 포함해
300여명이 참석해 왔다.
대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BM 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줄 것"을 유지로 남겼다고 밝혔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고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
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예정됐으며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이다.
justdust@yna.co.kr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 (사진=연합뉴스) |
대우 해체는 정책 잘못 탓...역사가 평가해주길" 故김우중·대우맨 '통한의 눈물' "'방만경영에 쓰러졌다' 알려진 대우그룹 해체는 사실과 다르다" 항변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36년 대구 출생으로,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만 30세인 1967년 창립 이후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의 기업을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대우그룹은 1967년 대우실업에서 출발해 30여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에 자산총액이 76조원에
대우그룹은 외환위기와 함께 유동성 위기를 맞은 후 1999년 8월 채권단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에 들어간 뒤 해체됐다. 이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서 분식회계 혐의를 받아 해외도피 생활을 하고
이와 관련 김 회장과 대우맨들은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 "대우의 잘못보다는 당시 정책에 실패한 정부의 잘못이
김 회장은 지난 2014년 전직 대우그룹 임직원들 500여명이 참석한 '대우특별포럼'에서 "방만한 경영을 하고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쓰러진 것으로 알려진 대우그룹 해체가 사실과 달리 알려져 있다"며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고 역사가 자신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길 바란다"고 주장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해체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영실패’가 아니라 김대중 정권에 의해 의도된 해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평생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다.
(서울=연합뉴스) 1992년 1월 26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귀국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공항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방북성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19.12.10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외환관리를 잘못한 정부당국자들과 OECD 가입조건 맞추기에 매달린 국정책임자,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말만 쫓아 국익을 무시했던 DJ 정부 당국자들에게 책임이 있었고, 그들의 모든 잘못을 김우중 회장이나 대우그룹에게 전가했다는 주장이다.
또 대우는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고용과 가동률을 극대화하고 수출을 통해 부족한 외화를 벌어들이자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를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몇십억 달러의 무역흑자라고 예측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우는 1998년 한해 홀로 14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계속 세계 경영을 추진하며 전 세계에 걸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이한구 전 대우경제연구소 사장 또한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출간한 회고록 '대우는 왜?'를 통해 "대우그룹 해체의 책임은 실패한 정책을 입안한 사람이나 그런 잘못된 정책을 집행한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환관리를 잘못한 정부당국자들과 OECD 가입조건 맞추기에 매달린 국정책임자,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화의 주역이었지만 압축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2/10/a7a4ecb2-ef2f-4c50-99c9-a729e428c7e3.jpg)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국 산업화의 주역이었지만 압축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중앙포토]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였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고인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도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매진했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것을 계기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고인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1998년 3월 1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및 고문단 간친회에
참석한 당시 김우중 전경련 회장 모습.
[연합뉴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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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급격한



김우중 전 회장은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그룹을 창업한 뒤 재계 순위 2위 기업으로 성
장시켰다. 사진은 지난 2017년 대우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 당시 김 전 회장의 모습.
/더팩트 DB
[사진출처 = 매경DB]
재계 2위·세계경영서 역대 최대부도` 파란만장 인생 김우중은 누구?
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생을 보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 명예회장, 정주영 왕회장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된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고,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탄생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거침없이 달려온 대우그룹은 창업 15년만에 자산규모 국내 네번째인 재벌로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1980∼90년대에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강조한 대로 `세계경영`에 나섰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하지만 그에게 최대 위기가 왔다.
특히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 갈등은 여전했고 오히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여기에 설상가상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고인은 17조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과 세금을 내지 못하고 1년여 투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디지털뉴스국 이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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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전 회장이 '골프 예찬론자'로 탈바꿈한 곳은 바로 베트남이다. 수도 하노이 관문인 노이바이 국제공항 부근인 번찌
(Van Tri) 골프장이 본격적으로 개장한 2007년부터 이곳이 그의 숙소나 마찬가지였다.
이 골프장은 차남인 선용씨 소유다.
부지런함을 타고난 그는 어김없이 새벽 5시면 기상해 골퍼로서 골프장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직접 살폈다.
흥미로운 것은 18홀 전체가 아니라 절반씩 나누어 살폈다.
매번 시정할 것이 발견됐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캐디 부분이었다.
기본적인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김 전 회장은 캐디들을 한국에 단기연수를 보냈다.
한국 골프장에서 베트남 캐디들은 혹독한 대(對)고객 서비스 교육을 받았다.
한국서 연수를 받고 돌아온 번찌 골프장 캐디들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고객들의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번찌 골프장이 베트남 내 최고의 명문 골프장으로 자리매김한 알려지지 않은 비결 중의 하나가 캐디 경쟁력이다.
김 전 회장은 일 년에 200일가량은 하노이에서 거주했다. 정기 건강검진차 귀국 등으로 귀국하지 않으면 거의 이곳에서 기거했다. 그는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나눴다.
김 전 회장의 또 다른 특징은 지독한 독서가였다. 그는 거의 매일 단행권을 한권씩 읽었다. 취향도 다양했다.
퀴퀴한 중국 무협지에서부터 경영 실패 사례를 다룬 최신 서적까지 다양하게 섭렵했다.
그냥 건성으로 읽는 게 아니라 거의 통독할 정도였다.
번찌 골프장 내 클럽 하우스는 또 전용 강의실로도 사용됐다.
이곳에서 김 전 회장은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부류의 전문가들을 한 달에 한 번씩 초청해 질의응답식 세미나를 가졌다. 금융, 유통, 농산물 등 온갖 부류의 전문가들이 초빙돼 짧게는 2시간, 길게는 4시간가량 의견을 나눴다.
이 초청 세미나에 초빙된 강사 중에는 고상구 K&K글로벌트레이딩 회장, 조원대 농촌진흥청 산하 KOPIA센터장 등
베트남에서 탁월한 능력을 입증한 전문가들이 포함됐다.
김 전 회장은 맹자 '진심편'(盡心編)을 자주 인용하곤 했다. "得天下英材而敎育之三樂也."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교육자의 기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그는 2010년부터 번찌 골프장에서 '인생 2모작'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취업대란에 시달리는 한국 청년들에 대한 구제책의 하나였다 '김우중 키즈'로 불리는 청년 양성가 계획(GYBM)이었다.
좁디좁은 한국 땅을 벗어나 광대하고 여전히 개척할 곳이 많은 세계를 누비며 미래 한국을 견인할 자산은 도전정신이 투철한 청년들밖에 없다는 경험칙에서 나온 구상이었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GYBM 프로그램은 해외청년취업·창업 분야에서 사실상 선구자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선진 한국 물려주고 싶었는데…" 故 김우중 회장이 남긴 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밤 11시50분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게 됐다. 김 전 회장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다. 해당 명언은 2015년 기업가 정신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기업인 어록 설문조사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989년에동명의 에세이집이 발간돼 6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키도 했다. 그 밖에도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불굴의 의지를 강조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회사 설립 10년 만인 1977년 동아방송 신년대담에 출연했을 땐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가'가 되기보단 '성취형 전문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4년 10월2일 연세대에서 열린 '연세대 상경대학 창립 100주년 기념 초청 특강'에서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마지막 세대가 돼 '선진 한국'을 물려주고 싶었다"며 "우리는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어록을 묶은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2017년 그룹 출범 50주년을 맞아 펴낸 '김우중 어록: 나의 시대, 나의 삶, 나의 생각'에는 "한평생 가식 없이 살았다는 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며 "내가 한 말들을 그렇게 이해해 준다면 얼룩진 과거사로 인한 마음속 부담을 조 금이나마 떨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있기도 하다. 김 전 회장은 1937년 대구 출생으로 1967년 대우를 세운 뒤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 규모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의 기업을 일군 1세대 기업인으로 꼽힌다. 1990년대에는 '세계경영'을 가치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 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키는 등 불굴의 의지를 가진 경영인으로 평가받아왔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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