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80년 당시 헬기 타고 전남도청 찾은 5·18 군 지휘부(사진 위에서부터)와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끌고 가는 공수부대, 전남도청을 장악한 5·18 계엄군.
호남취재본부 정성환·배윤영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40년 전 ‘5·18광주민주화운동’, 그 열흘간의 기억들
국민저항권 정당성·무장투쟁 합법성 첫 공인
“시대를 넘어 대동세상의 일상민주주의로 나가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 한때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올해로 불혹(不惑)을 맞았지만 진실 규명은 아직 미완이다. 5·18은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역사적 의미를 세우고 신군부 처벌로 사법 판단을 얻었으나 진상규명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일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당시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전남대 정문 앞에서 촉발된 5·18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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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증파·민주화운동 본격화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9세)씨도 19일에 사망했다.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군 집단발포→시민군의 등장→계엄군 철수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발포가 시작됐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들도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고립된 시민공동체의 ‘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5월26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21일부터 26일까지의 일주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됐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기념 연극 공연
<나는 광주에 없었다>의 한 장면.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항쟁 마지막 날인 5월27일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5·18기념공원 내 ‘5·18 현황 조각’ 작품 중 하나로 항거정신을 표현했다.
사태에서 혁명으로, 폭도에서 유공자로
5·18은 당시에는 독재 정권에 의해 ‘폭동, 난동, 소요, 사태’ 등으로 불릴 것을 강요받다가 80년 이후 계속적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이제는 ‘민주화 운동’이나 ‘민중 항쟁’ 등으로 불리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5·18’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었다.
“화순 사시던 아버지가 새벽에 집을 나서 산으로 걸어오다가 계엄군을 만나 다시 시골로 되돌아가셨어요.”
광주광역시 동구 의재로 홍림교 사거리의 ‘배고픈다리’(사적 13호)에서 동구 소태동 175번지 ‘주남마을 인근 시민
학살지’(사적 14호)로 갈 때였다.
택시기사 김모씨가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전화도 없을 때였죠.
광주에서 데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말리러 오셨어요.
그때 주남마을에서 미니버스에 탄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잘 기억해요.”
그해 5월23일 11공수여단 62대대 5중대가 시민군 본부에 등록된 미니버스를 사격했다.
버스에 탑승한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계엄군은 총격에 살아남은 남성 2명을 사살한 뒤 주남마을 뒷산 헬기장 부근에 암매장했다.
2명 중 1명은 학생이었다. 공수부대 장교가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는 기록(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 남아 있다.
계엄군은 다음날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을 사격했다.
그중 방광범이 사망했다.

5·18기념공원 내 ‘5·18 현황 조각’ 작품 중 하나로 항거정신을 표현했다.
지난 8일 오전 전남대병원에서 조선대로 가려고 탄 택시에서 김씨를 만났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더 많이 아는 이들, 지금도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면서 이름과 나이를 알리는 걸 꺼렸다.
전남대(사적 1호)에서 조선대(사적 12호)까지, 주남마을에서 505보안부대(사적 26호)까지 동행했다.
주남마을에서 다시 택시에 올랐을 때 김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조선대 부근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시내에서 데모를 하다 계엄군과 맞닥뜨렸다.
“워메 군인들이 막 쫓아오는데….
우리가 빠르죠.
그쪽은 군장하고 우리는 맨몸이니까. (어느 집) 마루 밑 구석으로 숨었어요.
곤봉으로 (마루 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요.
(곤봉 끝이) 내 몸에 닿았는데…. 붙잡혔으면 나도 죽었을 거예요.
” 생사의 갈림길로 기억했다.
계엄군의 만행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때려부려.
사람 골이 터져버린다니까.
독헌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눈이 빠지고 하는데….” 김씨는 총탄에 맞아 머리 한쪽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시신을 본 기억을 꺼내다 말을 멈췄다.

17 상무대 옛터(재현지 5·18자유공원) 상무대 영창과 법정은 5·18자유공원에 재현됐다.
계엄군은 저항하던 시민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고문 등 온갖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둘렀다.
신군부 만행 재현한 자유공원
법정·영창 복원…자료도 전시
광주의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는 29곳이다.
사적지는 ‘오월인권길’ ‘오월민중길’의 핵심 코스다.
이 길의 핵심 열쇳말은 죽음과 희생이다.
신군부 세력의 능동적인 학살이자 죽임이었다.
이들의 야만과 만행을 재현한 곳이 5·18자유공원이다.
광주 시민들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군사재판을 받던 곳이다.
법정과 영창이 복원·재현됐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있던 헌병대 본부 사무실에서는 5·18 당시 사진과 영상 자료가 전시된다.
7일 광주에 도착했을 때 이곳부터 찾아 헌병대 본부 사무실로 들어갔다.
“5·18 최초 희생자는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던 김경철(24세)이다.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서 팔던 그는 평소처럼 일감을 찾아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에게 진압봉으로 머리를 얻어맞고전신을 구타당해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간 김경철은 다시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19일 새벽 3시에 사망판정을 받았다.
” 이 공간에는 진압봉으로 구타당해 죽고, 대검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기록이 가득했다.
계엄군의 폭력을 밀랍인형으로도 재현했다.
5·18자유관에서 5·18기념문화관으로 이동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상설 전시 빼고는 모두 중단됐다.
두 곳은 ‘오월길 지도’와 ‘오월 그날의 현장’ 같은 지도와 책자를 무료로 배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www.518archives.go.kr)과 오월길(518road.518.org) 홈페이지에서 지도와 책자를 내려받을 수 있다. 광주의 여러 전시공간은 40주년을 맞아 11·12일 다시 문을 열었다.
광주의 여러 기념관, 전시공간은 시민의 기억, 추모, 극복의 과정을 담았다.
이들 공간에서 먼저 자료와 전시물을 읽고 본 뒤 답사에 나서면 사적 의미를 더 되새길 수 있다.

27 들불야학 옛터 들불야학의 강학(교사)과 학강(학생)은 ‘항쟁파’로 끝까지 싸웠다.
야학 옆 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발간했다.
조직적 항쟁한 ‘들불야학’ 터
입구 벽체만 남긴 채 모두 철거
녹두서점 등도 표지석만 남아
5·18기념공원을 둘러본 뒤 답사에 나섰다.
첫 목적지는 서구 죽봉대로의 들불야학 옛터(사적 27호)다.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윤상원 등은 가장 적극적으로, 조직적으로 항쟁에 나섰다.
이들은 5·18 때 ‘들불야학팀’으로 불렸다.
이들은 5월19일자 호소문에 “우리가 살길은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전두환 일파의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 없이 쳐부수는 길”이라고 썼다.
이들에겐 정의가 처참히 무너진 곳에서 싸우는 일 말곤 없는 듯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은 광주YWCA에서 계엄군의 진압에 항거하다 사망했다.
들불야학 터는 2004년 노후화로 ‘대건안드레아 교육관’ 입구 벽체만 남기고 철거됐다.
이곳 일대는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을 두고 주민들 간 다툼이 벌어졌다.
재개발되면 성당도 위치를 옮긴다.
성당 관계자는 “들불야학 입구 벽체와 시민아파트 한 동은 보존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왜곡과 거짓 보도로 시민들의 분노의 대상이 된 광주MBC(사적 7호), 들불야학팀이 투사회보 등을 제작한 항쟁 거점 중 하나인 광주YWCA(사적 6호), 실상을 광주 안팎에 알린 구심인 녹두서점(사적 8호), 폭력과 고문을 자행한 상무대
(사적 17호) 등은 ‘옛터’로만 남았다.
‘오월 그날의 현장’ 등을 읽으며 이 옛터를 들여다봤다.

11 구 광주적십자 병원 연대는 병원에서 빛을 발했다. 적십자병원에서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라 헐릴지도 모른다.
매각 진행 중인 적십자병원엔
‘사적지로 보존하라’ 현수막
항쟁 초반 계엄군 총칼에 희생된 이들이 실려간 ‘구 광주적십자병원’(사적 11호)도 사라질지 모른다.
8일 택시기사 김씨와 들른 병원은 폐쇄됐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다.
병원 1층 창가로 ‘5·18 사적지로 보존하라’ ‘시민의 품으로’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지난 4월 이곳에서 “광주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곳”이라며 매각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첫 사망자 김경철이 이곳으로 실려왔다.
5월 광주의 핵심 키워드엔 ‘공동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시민들은 부상자들을 간호했고, 의사·간호사의 먹거리를 챙겼다.
시신 처리도 도왔다. 줄을 서가며 헌혈했다.
구 광주적십자병원에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계엄군이 자주 드나들던 곳인데도 개의치 않고 병원을 찾았다.
광주기독병원(사적 10호)에도 많은 부상자들이 이송됐다.
이곳에서도 시민들이 의료진, 부상자와 함께했다.
많은 시민이 헌혈에 동참했다. 춘태여고 3학년 박금희도 그중 한 명이다.
헌혈을 하고 귀가하다 총탄에 맞아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졌다.

5 전남도청 ‘항쟁파’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지키다 사망한 전남도청의 민주광장에선
전두환의 모습을 풍자한 ‘518개 국제 표정전’이 전시 중이다.
국가 폭력과 재난, 그 죽음의 현장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이 광주에 꼭 들어맞는 개념은 아니다.
헌혈과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연대와 공동체 정신, 죽음을 불사한 항쟁, 계엄군에 승리의 기억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사적지가 밀집된 옛 전남도청 일대는 죽임과 죽음뿐만 아니라 연대, 항쟁, 승리의 기억과 흔적이 이어지는 곳이다.
옛 전남도청(사적 5호)과 금남로 일대는 ‘5월 광주’와 등식이 성립하는 공간이다.
전남도청 분수대 옆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모형이 들어섰다.
5월2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세운 모형이다.
1980년 부처님오신날은 5월21일이었다.
이날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공수부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엔 자비 같은 부처의 가르침은 찾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도청 광장(5·18민주화광장)과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오후 도청 광장에서 시민대회를 열었다.
23일 집회엔 시민 5만명이 도청 앞에 결집했다.
‘항쟁파’들은 27일 오후 5시10분 계엄군 특공대에 진압되기 전까지 도청을 사수했다.
도청 사망자는 160명에서 4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옛 전남도청엔 지금도 연대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5월 3단체는 옛 도청 회의실 건물 옆에 ‘힘내라 대구경북 코로나19 우리 함께 이겨냅시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걸어뒀다.
5·18구묘지(사적 24호)는 망월동 묘지라고 불렸다.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란 뜻의 망월동(望月洞)은 그 이름과 달리 학살, 비극, 원한을 뜻했다.
지금은 1980년 이후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안장된 이 묘지에서 한국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민족민주열사 묘역 부근엔 ‘특별하지 않은 사람 고 박종태 동지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열사정신 계승하여 비정규직 철폐하자!’라고 쓴 ‘전국학교 비정규직노조 광주지부’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화물연대 대의원이었던 박종태는 2009년 ‘대한통운은 노조 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운명했다.
묘역 옆 <택시 운전사>의 실존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묘엔 누군가 올려둔 소주 한 병이 보였다.

1 전남대 정문 5월18일 계엄군의 위협과 협박에도 200여명이 모였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22일 교정에서 매장된 시신들이 발견됐다.

28 전일빌딩 ‘전일빌딩245’로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1층 아카이브엔 5·18 당시 빌딩과
헬기 사격 총탄 자국이 난 기둥들을 재현했다.
여전한 연대의 장소 전남도청
전일빌딩, 아카이브로 재탄생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 사적지의 표지석이나 기념관의 전시물, 조형물들이 광주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할 순 없어 보였다.
7일 오후 5·18구묘지에서 광주교도소(사적 22호)를 거쳐 전남대 정문(사적 1호)으로 가는 택시의 라디오에선 극우 성향 유튜버들이 전날 5·18기념재단 앞에서 5·18 유공자에 가짜가 섞여 있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려다 시민들과 충돌
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당시를 촬영한 영상에서 5월 단체 회원 한 명이 “우리는 40년 전 총칼에 가족을 잃었어. 5·18 심장에서 이런 건 안 돼. 제발 가”라고 외쳤다.
몇몇 극우단체들은 16·17일 금남로 집회를 신고했다.
7~8일 광주에서 만난 시민들은 친절했다.
기자 신분을 밝히고 5·18 40주년 의미를 물어볼 때면 대부분 답변을 피했다.
7일 밤 ‘전일빌딩 245’에서 직원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이 의문에 짧게 답했다.
“(광주 시민들이) 할 말은 많지만 속에 있는 말을 다 하진 않죠.” 40주년을 묻는 질문엔 “죄 지은 걸 참회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전두환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2017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계엄군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신부, 1937~2016)에겐 “가면 쓴 사탄”이라고 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전일빌딩은 아카이브와 시민 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연다.
1층 아카이브 공간엔 총탄을 맞은 건물 기둥도 재현해 놓았다.
5·18자유공원 직원 이미애씨도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어떤 목적으로 집단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두환 측은) 헬기도 안 띄웠다고 한다.
역사는 진실을 기록해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40년이 지나도, 수많은 물적 증거와 증언이 넘쳐도 광주에는 여전히 ‘진실’ 문제가 고통스럽게 들러붙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특별전 타이틀은 ‘5·18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라’이다.
■고려 석탑, 양림 펭귄마을…몰랐던 매력
5·18 사적지만 가보기엔 아까운 광주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고려 초 추정)은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에 건립됐다.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편성지였던 광주공원(사적 20호)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성됐다.
원래는 광주신사였다.
사적을 알리는 표지석 옆 계단 한 칸엔 ‘일제 식민통치 잔재인 광주신사 계단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광주공원은 성거산에 자리 잡았다. 이곳 역사는 더 거슬러올라간다.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문화재가 광주공원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타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광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5·18이나 비엔날레, 예향이나 음식 같은 단어들이다.
자연과 삶터, 유적은 덜 알려졌다.
예를 들어 무등산은 국립공원이다.
2013년 3월4일 한국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오월 사적지 답사 때 인상적인 건 공원들이다.
광주공원은 수목이 울창했다. 5·18기념공원은 보길도 부용동 세연지 같은 남도 전통의 정자나 연못을 재현했다.
양림동 사직공원엔 전망타워가 놓여 광주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광주공원과 사직공원은 걸어서 20~30분 거리다.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엔 근대 건축물과 전통 가옥이 한데 어우러져 들어섰다.
양림동은 광주에서 처음 서양 문명을 받아들인 곳이다.

양림동 명소 중 하나인 ‘펭귄마을’. 주민들이 빈집에 사랑방을 만들고, 전시공간을 꾸몄다.
오래된 장소에 매력을 느낀다면, 5·18 최초 발포지(사적 21호)인 광주고 부근 계림동 헌책방 거리도 가볼 만하다.
광주4·19혁명 발상지로 꼽히는 광주고 정문 옆으론 오래된 헌책방들이 늘어섰다.
고즈넉한 커피가게는 헌책방 사이에서 커피향을 은근히 내는 듯했다.
교육 도시의 진면목을 이 공간에서 느꼈다.
이 시대 ‘학교 옆 서점’은 낯설면서 반가운 풍경이었다.
광주MBC 옛터 건너편 전남 여중·고 자리엔 ‘광주학생독립운동발상지’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1929년 당시 광주여고보(전남여고 전신) 학생들이 독서회 같은 활동을 통해 시위와 백지동맹 등에 적극 참여했다고
적혀있다.
‘무등경기장 정문’(사적 18호)은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의 집결지였다.
지금은 당시 경기장 정문 등 일부 시설만 보존됐다.
경기장 건너편 소공원 사적비 자리엔 택시들이 대기했다.
기사들은 5·18 때도, 지금도 대기 장소라고 했다.
이 소공원 화단엔 기아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호랑이들이 야구하는 조형물이 들어섰다.
7일 오후 무등경기장 자리에 들어선 광주·KIA챔피언스 필드에서 진짜 선수들이 연습했다.
키움과 ‘무관중’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야외석 뒤 철제 울타리 바깥에서 사진·영상으로만 보던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
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그해 5월 광주... 나는 고1 소녀였다
[루게릭병 환자가 눈으로 쓴 에세이] 5.18에서 코로나19까지
1980년 5월 나는 16살로 광양에서 광주로 유학 온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국민학교에 7살에 입학했다).
일 년 선배 언니와 자취를 했는데 학교가 조선대학교 바로 옆에 있었기에 날마다 대학생의 시위 소리가 들렸다.
시위가 내게는 공부를 방해하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주초마다 실시하는 주요 과목 시험과 버거운 과제 탓에 두 달이 되도록 집에도 못 간 채 처음 보는 중간고사 준비에
열중했다. 중간고사를 이틀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 오셔서 눈물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취생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시며 살아서 만나자고 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와 교복을 입은 채로 선배 언니가 오기를 기다리며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언니와 함께 고속버스터미널 행 버스를 기다렸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향하며 겁이 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론 '설마 내 나라 군인이 교복 입은 여고생을 해치겠어?'
하는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은 집에 가라 하셨지만 버스가 오지 않았다
그날 밤 그 집에 세 살던 사람들과 집주인 가족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앉아 각자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를 했다.
도무지 믿기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공수부대가 시위 진압에 투입되어 시위 학생들과 행인에게 총을 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죽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려 겨울 담요로 방문을 가린 채 며칠을 보냈다.
얼마 안 지나 계엄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간고사 후에 집에 가려고 미뤄둔 탓에 쌀과 돈이 바닥이 났다.
집주인 댁에서 빌릴 수도 있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몹시 꺼리는 언니 탓에 우리가 살던 지산동에서 제법 먼
거리인 방림동 언니의 외삼촌댁까지 걸어서 쌀과 돈을 얻으러 갔다.
가는 길에 창문을 열고 몽둥이를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탄 버스가 보였다.
가게들은 군데군데 문을 열었지만 시내버스가 안 다녀서 그런지 침묵의 도시 같았다.
▲ 진압군에 희생당한 시민들.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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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전남대병원으로 들어가기에 호기심에 우리도 쌀자루를 든 채 따라 들어갔다.
병원 뒤뜰에는 그늘이 있었고 거기엔 총을 맞아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이 한 줄로 눕혀져 있었다.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고 가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주검도 있었다.
머리, 가슴, 등에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 시신이 건물 끝에서 끝까지 빼곡했다.
우리는 너무 큰 충격에 할 말을 잃고 병원 밖으로 나와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 날 이후
전남대병원 근처엔 조선대병원이 있었고 거기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무섭고 싫었지만 가보겠다는 언니 손에 이끌려 어쩔 수없이 조선대병원으로 갔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참혹했다. 그늘마다 시신이 누워 있고 역겨운 냄새까지 났다.
믿기지 않는 처참한 현실에 두려움보다는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야 했나?
그것도 내나라 군인에 의해 이토록 처참하게 목숨을 잃어야 하나' 하는 의문과 함께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고
울분이 솟구쳤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와 나는 헌혈을 하기로 하고 전남대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언니는 시위대가 탄 버스를 보고 먼저 버스에 올랐다.
나는 겁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버스에 따라 올랐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20대로 보였다.
그 중 몇 명은 교련복 상의를 입고 총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버스 바깥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부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시민들. 전남대학교
버스도 보인다. 1980.5.2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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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로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돌고 돌아 3시간 동안 시위대가 탄 버스를 타고 광주 외곽까지 갔다.
광주 외곽은 보지는 못했지만 군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가는 길에 시민들이 나와 주먹밥을 전해 주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기도 했다.
차를 탄 내내 겁이 났다.
우리는 시내에서 내려 달라고 강하게 요구해 어딘지도 모른 채 내려서 길을 물어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늦은 아침 식사 후에 출발했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오후 3시쯤이었다.
헌혈을 하려고 많은 사람이 긴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막상 헌혈을 하려고 학생증을 내미니 나는 아직 어리다며 그냥 가라 하고 언니는 몸무게가 너무 적다고 거절
당했다.
언니는 괜찮다며 제발 헌혈하게 해달라 울면서 졸랐지만 우리는 거부 당해 돌아와야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날마다 도청 앞에 나갔다.
그 당시 내 일기에 '나는 오늘도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도청 앞에 나갔다'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본 것 같다. 빈틈이라곤 찾을 수 없을 만큼 모여 있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핸드마이크 소리를 귀 기울이며 들었다.
그들은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리고 있었다. 외신 기자로 보이는 사람과 인터뷰하는 모습도 보였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광주는 민주화의 열기와 분노로 뜨거웠지만 치안은 신기할 정도로 안전했다. 가게도 문을 열었고 혼연일체가 된 주민들은 서로 도왔다.
경찰이 제 기능을 못하는데도 오히려 더 안전했다.
신기한 생각이 들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도청 앞 상무대엔 계엄군의 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관이 놓였다.
언니와 나는 관 위에 태극기를 덮어 주고 싶어 광주 시내의 체육사마다 찾아다녔다.
체육사를 찾아 종일 다녔지만 힘들지 않았다.
체육사 사장님들은 우리를 칭찬하시며 아낌없이 태극기를 내어 주셨다.
구해 간 태극기를 관 위에 덮었다.
총소리만 들릴 뿐
그러던 중 26~27일 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다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헬기에선 '폭도들은 자수하라. 시민들은 밖에 나오지 말라'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도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집주인 아저씨를 졸라 집 뒤에 있는 조선대 뒷산에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총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전이 벌어진 듯하였다.
총소리만 들릴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숨도 쉬지 않는 듯 적막했기에 총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 5.18민주화운동당시 희생된 시민들. 1980.5.25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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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산에서 내려왔다. 집은 조선대 뒷산과 바로 연결돼 있었지만 그때 상황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겁쟁이인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저녁엔 며칠 전 지역 일간지에 실린 시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청춘의 도시여"를 다시 읽었다.
시가 너무도 가슴에 와닿아 제법 긴 서사시를 일기장에 정성껏 옮겨 적었다.
(그 당시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그 일기장을 대학 1학년 때 총학생회 부회장이던 동아리 선배에게 보여 주었다.
내 일기는 서울 동부지역 여러 대학의 대자보에 붙었었다.
일기장의 행방을 물으니 선배는 그걸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님께 드렸다고 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사망한 시민의 시신을 끌고 가고 있다. 1980.5.28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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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나던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통행 제한도 풀렸다.
난 광양으로 내려갔다.
광주를 벗어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이 들판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가족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했다.
얼마간의 휴교령이 풀리고 돌아간 학교는 무척 오랜만인 듯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불과 얼마 전 겪은 일에 관해서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끔 국어 시간에만 선생님의 분노에 찬 말씀이 있을 뿐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처참한 상처를 감춘 채 바쁜 일상
으로 돌아갔다.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
재수를 해서 1984년 대학에 입학했다.
멋진 캠퍼스에서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꿈꾸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동아리 소개 책자를 받아들고 살피던 중 "뜨거운 가슴, 냉철한 이성" '백단학회' 라는 글귀가
가슴을 뛰게 했다.
과 선배에게 물으니 거기 가입하면 제대로 졸업하기 힘든 곳이라 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내 가슴을 뛰게 한 그 글귀에 끌려 혼자 학생회관 5층의 백단학회 문을 두드렸다.
거기는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사회 구조적 모순과 군부 독재 타도에 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곳이었다.
봄부터 캠퍼스는 '5.18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과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우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나는 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서울 사람들이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광주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학우들이 마치 나의 억울함을 편들어 주는 듯 고마웠다.
나는 그렇게 소위 말하는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공부는 아예 뒷전이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백단학회와 함께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선배들이 좋았고, 아는 게 많아 후배들을 지도하는 선배들이 존경스러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는 거듭 되었다.
나는 교내시위뿐 아니라 기습적인 가두시위와 몇 개 대학이 함께하는 연합시위 등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서울 사람들은 그날을 거의 몰랐고, 나는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살다보면 엊그제 일도 기억이 안 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 일도 있다.
내게 5.18 광주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5.18 광주는 내 가슴과 머리에 각인되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그 시절 운동권이었던 대부분의 학우들은 학교 다니는 이유가 학과 공부가 아니라 학생 운동을 하기 위해서 였다.
일주일이면 두세 번의 시위가 있었다.
나는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싸우지 않는 학우들은 비겁하다 생각했고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종종 들려오는 학우들의 분신 소식은 참으로 가슴 아팠다.
우리는 순수했고 뜨거웠고 다소 급진적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박종철이고 이한열이었다.
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한장. 한 청년이 태극기 앞으로 손을 들고 뛰쳐
나가고 있다
ⓒ 6월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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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에 싸워 승리한 6월 항쟁은 양김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반쪽짜리 승리로 끝났지만 그때 시청과 명동에서
싸우던 청년 학생들이 쉰을 넘겨 이제 청년이 된 자녀들과 함께 2017년 촛불혁명으로 이한열을, 박종철을 부활시켰고 5.18광주를 완성시켰다. 잘못된 국가권력에 굴하지 않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드디어 승리로 이끌었다.
나는 촛불혁명엔 전혀 참여하질 못했다. 2012년 봄부터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왼팔부터 힘이 빠지더니 불과 몇 달 만에 걷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처음엔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검사 결과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2012년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서울대병원에서 MND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게 무슨 병인지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루게릭병이라 했다.
치료법도 원인도 모르는 이 참담한 병이 내게 오고 말았다.
아마 이유도 모른 채 사형 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 내 인생 마지막 투표라는 생각으로
시청과 명동에서 싸우던 청년 학생들이 쉰을 넘겨 이제 청년이 된 자녀들과 함께 2017년 촛불혁명으로 이한열을, 박종철을 부활시켰고 5.18광주를 완성시켰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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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은 내 모든 것들을 삼켜버린 블랙홀이 되어 버렸지만 일주일 후의 대통령 선거만은 예외였다.
그 당시 남편이 원주로 발령을 받아 집 주소지가 남편이 근무하는 원주로 되어 있었다. 나는 투표 전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성남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내 인생 마지막 투표가 될 거란 생각을 하며 원주로 향했다.
너무도 간절했던 민주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좌절되던 날 나는 너무도 힘들었다.
나는 박근혜정부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독신으로 살며 자신은 대한민국과 결혼했다 하니 비록 왜곡된 방법일지라도 그녀 나름의 방법으로 사심
없이 일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역사는 발전하는 거라는 내 믿음은 너무도 쉽게 허물어졌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실망감, 좌절감, 분노는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실타래가 풀리던 날 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비가 오면, 눈이 오면, 날씨가 추우면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마침내 촛불혁명이 승리하던 날 너무도 기뻤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살고 있는 보람을 느꼈다.
역사는 이렇게 결국엔 발전하는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얼마 전 전두환씨가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법정에 섰다.
그의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그에게 역사와 국민 앞에 참회하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되지 않았고 일부 세력이 계속 왜곡하고 폄훼하는 상황에서 5.18은 40주년을 맞이했다.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지만 5.18 광주는 현대사의 민주주의의 아프지만 빛나는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올해, 다시 투표를 했다
▲ 글을 입력하고 있는 필자
ⓒ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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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인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코로나가 무서운 기세로 확산할 때만 해도 전세계로부터 따갑게 외면받던 우리가 지금은 모범적으로
코로나19에 대처한 국가가 됐다.
투명한 공개와 철저한 관리, 선진 의료체계 등은 우리 국민의 높은 시민 의식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치러진 총선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시는 투표하지 못할줄 알았던 나도 이번 총선에 남편의 도움을 받아 참정권 행사를 했다.
우리의 코로나19 극복과정은 우리보다 세계 언론이 먼저 주목하고 놀라워했다.
코로나로 경제는 더욱 어렵고 일부 업종은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 어렵지만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우리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거라 확신한다.
올봄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롭고 힘들었지만 TV로 코로나19 극복과정을 지켜보며 자긍심으로 가슴 벅찬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높은 자긍심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재난기본소득을 나눠준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기부로 작은 힘을 보태기로 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국난을 힘 모아 극복해 왔다. 위
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코로나 이후에 우리의 도약이 기대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기념식 예행연습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의자 간격이 띄어져 있다.
뉴스1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서 소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아픈 역사 되풀이 말아야”…5·18 40주년 추모제 열려
옛 전남도청서 사상 첫 기념식
17일 광주 민주묘지서 추모제
유족 등 200여명 참석 ‘넋’ 위로
5·18 때 경찰 21명 부당 징계 취소
시민단체, 전두환 집 앞 차량시위
5·18 전날 매년 열리던 전야제는 올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취소됐다.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은 18일 정부기념일(1997년)로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당시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에서 열린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는 오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유족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제에는 상복을 차려입은 유족과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영훈 유족회장은 “40년이 지난 오월이지만 그날의 고통과 슬픔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며 “다시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추모식에선 추모 시를 배경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시극 공연이 펼쳐졌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유가족들은 떠나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닦아냈다.
이날 추모제는 코로나19 여파로 참석자들의 의자를 상당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다.
광주 임동주교좌성당에서는 김희중 대주교 집전으로 기념 미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 등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국가보훈처는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제40주년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에서 개최한다고 이날 밝혔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기념식에는 국가 주요인사, 5·18민주유공자 및 유족 등 400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기념공연에서는 작곡가 정재일과 영화감독 장민승이 제작한 ‘내 정은 청산이오’가 최초로 공개된다. 참석자 모두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면서 기념식은 마무리된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모이자 연희동으로! 전두환은
사죄하라!' 5·18 드라이브스루'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차량을 타고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경찰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부당하게 징계를 받은 경찰관들에 징계처분을 취소하며 명예회복 작업에 나선다. 경찰청에 따르면 양성우 전 전라남도경찰국(현 전남지방경찰청) 경무과장, 안수택 전 전남도경 작전과장 등 21명에 대한 징계처분이 지난 15일자로 직권 취소됐다.
경찰은 이번에 명예가 회복된 생존자 5명 본인과 사망자 16명의 유족에게 징계로 줄어들었던 이들의 급여를 소급
정산해 이른 시일 내에 지급할 방침이다.
‘5·18광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 등은 16일 서울 여의도에서 출발해 전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향하는 차량 행진 및 ‘드라이브 스루’ 집회를 진행했다.
차량 행진에는 무릎을 꿇은 전 전 대통령 모습의 조형물을 실은 트럭을 필두로 ‘오월정신 계승, 촛불혁명 완수’ 등 문구가 적힌 선전물과 태극기가 달린 70여대(주최 측 추산)의 차량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전 전 대통령 자택 인근에 도착한 뒤 경적을 울리며 항의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광주=한현묵 기자, 박현준·이강진 기자 ji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희생된 10대 36명의 얼굴.
그래픽 이다현 기자 okong@seoul.co.kr
서울신문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희생된 10대 청소년들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5·18 광주민주항쟁(5월 17~27일) 당시 사망한 165명 중 10대 청소년은 36명(21.8%)이다.
사망 원인은 총상이 32명(88.9%)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아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희생자의
묘비를 찾은 유족이 마스크를 벗은 채 쪼그려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광주시내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진 20일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다.
21일 오후 1시 최소 10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전남도청 내 스피커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던 27일에는 5명이 숨졌다.
절단된 10대의 시신도 있다.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서울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출처: 서울신문
가운뎃줄 오른쪽 다섯째가 최예섭 준장. 맨 아랫줄 왼쪽 다섯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 최측근 5·18 작전 개입' 문건 나왔다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 1980년 5월 메모
전남도청 무기회수 작전 등 상세히 적혀
최 실장 주민증 3장 위조해 도청 작전 활용
5·18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최측근 최예섭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이 광주에서 각종 작전기획에 직접 개입했을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이 나왔다.
보안사령부가 전남도청 안 폭약 뇌관을 제거하는 ‘막후작전’을 위해 주민등록증 위조까지 의뢰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폭약 뇌관 제거가 실제로 이뤄졌고 이는 마지막 광주 진입작전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신군부의 진압 과정을 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자료다.
17일 <한겨레>가 입수한 김기석(1931~2010)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이 쓴 ‘수습대책위 위원 접촉
사항’이라고 적힌 메모지에 1980년 5월24일 회의 참석자로 ‘GEN, choi(ASC)’라고 적은 내용이 담겨 있다.
ASC는 육군보안사령부를, GEN은 장군(General)을 의미한다. 영문 choi는 최예섭(1929~2019) 보안사 기획조정실장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김기석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이 쓴 ‘수습대책위 위원 접촉사항’이라고 적힌 메모.
1980년 5·18 때 광주에 온 보안사 장군은 최예섭 기획조정실장(준장)뿐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12 및 5·18 검찰 수사(1995년) 때 “5월19일 최 기획실장이 ‘광주의 보고가 잘 안되니 직접 내려가 파악해 보고하겠다’며 자원했다”고 진술했다.
최 기획실장은 505보안대 분실과 전투교육사령부 사무실 등 2곳을 ‘보안사령부 광주분실’로 사용했다.
최 기획실장은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최경조 보안사 대령(광주전남합동수사본부장)과 함께 5·18의 ‘작전지침’을
세우는 3인방의 수장 격이었다.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의 메모는 당시 보안사가 시민군의 거점인 전남도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막후공작’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5월24일치 메모엔 ‘17~20시 무기관리학생 A, B, C, D와 접촉’이라고 적혀 있어 몇명 대학생들한테서 정보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5
월24일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가 무장 시민군들에게 무기 반납을 종용하며 상무충정작전(진압작전)을 짜고 있던 시점이다.
계엄군이 광주 진압 작전을 세우던 5월25일 메모엔 오전 10시 ‘A학생으로부터 작전 완료. 뇌관은 별도 마대에 넣어 분리 저장’이라는 보고 내용도 적혀 있다.
실제 당시 도청 지하 군 무기고에 시민군이 보관해둔 폭약 뇌관 2288개와 수류탄 신관 279발, 최루탄 170발,
다이너마이트 2100개의 뇌관들은 누군가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무기 회수에 반대했던 ‘강경파’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뇌관이 제거된 직후인 5월25일, 전두환 신군부는 진압작전 개시 시점을 ‘5월27일 0시1분 이후’로 결정했다. 공작
성공 후 마지막 진압작전을 벌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1980년 5·18 진압작전 이후 전남도청 앞 정호용 특전사령관. 5·18기록관 제공
이 메모와 관련해 최 기획실장이 진압작전을 앞두고 전남도청에 누군가를 잠입시키려고 했다는 서의남 광주 505보안대 중령의 진술도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서 중령은 1995년 검찰 조사에서 “최예섭 대령(준장을 오해한 것으로 보임)이 도청에 위장침투하려고 한다고 해
위장 주민등록증 3개를 만들어줬다”고 진술했다.
서 중령은 “당시 도청에 총기류와 폭약 등이 많이 있어 위험하니 총기의 공이 등을 제거하기 위해 도청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았다.
5·18 연구자인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최예섭 기획실장 등 서울에서 내려온 보안사령부 사람들이 큰 틀의 방향을 설정하고 사실상 진압작전 등을 뒤에서 기획했다.
김기석 부사령관의 메모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 기획실장 등 보안사 3인방을 통해 5·18을 사실상 컨트롤했다는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건”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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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공수부대 계엄군이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시민군
진압 작전을 마치고 도청 앞에 집결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
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5·18 기획-"명령에 복종했을 뿐"..'충성'으로 뭉쳐 처벌 대비한 계엄군
[경향신문] 1994년 11월28일 점심 무렵 서울 여의도 한정식집 ‘녹원’. 현역과 예비역 고위 군인 8명이 모였다.
현역 장군 2명과 대령 2명, 예비역 장군 3명과 중령 1명 이었다.
모임 주최자는 정호용 당시 민주자유당 의원이었다.
정 의원은 5·18민주화운동 때 공수부대를 지휘한 특전사령관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5·18 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여단장과 대대장들이다.
이들은 2시간여 동안 점심을 함께 했는데 외부인의 접근을 일체 통제했다고 한다.
이 자리는 5·18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앞두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1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옛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예(비역)대장 정호용, 5·18당시 특전부대장 초청 오찬’ 문건 내용이다. 문건에는 “고소·고발된 (5·18 당시)특전사 대대장 9명 중 3명(예비역 소장 1명·예비역 준장 1명·예비역 대령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참석했다”면서 “오찬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동정을 파악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문건이 시사하는 점은 두 가지다.
5·18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승승장구해 대부분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15년 전 사령관의 요청에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일 정도로 ‘결속력’이 여전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검찰 수사에 대비해 모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5·18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대응책을 숙의했다.
■‘성공한 쿠데타’서 5·18특별법 제정…기소는 5명뿐
5·18에 대한 검찰수사는 1994년 5월13일 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322명이 전두환씨 등을 내란죄와 내란목적 살인죄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씨를 포함해 5·18당시광주에 투입된 대대장급 이상 계엄군 지휘관 35명이 고발 대상이었다. 검찰은 이 고발장을 바탕으로 5·18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검찰은 같은해 7월18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해 큰 논란을 불렀다.
국민 반발이 거세게 일자 김영삼 정부는 그해 12월21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재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다음해인 1996년 1월23일 12·12와 5·18내란 사건 핵심 관련자 16명을 기소했다. 5·18학살과 관련해 고발된
35명 중 기소된 사람은 전두환·노태우·이희성·정호용·최세창·박준병 등 5명에 불과했다. 30명은 기소되지 않았다.
5·18 때 20사단 사단장이던 박준병은 주요 인사들 중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실형이 선고된 전두환(무기징역)·노태우(징역 17년)·정호용(징역 7년)·최세창(징역 5년) 등도 1997년 12월22일 모두
사면복권 돼 석방됐다. 이들은 구속기간도 2년여에 불과했다.
당시 고발된 계엄군 지휘관들은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처벌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상당수 5·18지휘관들은 군내 요직에 있었다.
기무사는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군 내부가 동요하자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당시 군에있던 5·18지휘관들의
동정과 발언 등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문건으로 남겼다
5·18 당시 20사단 대대장으로 투입됐다 1994년 국방부 동원국장이었던 유효일 소장에 대한 기무사 문건에는 “지휘계통의 지시에 의거 출동한 대대장 등을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군인이란 지휘계통의 상급자 말 한마디에
진로를 결정해야 하며 명령에 대핸 절대 복종은 군의 생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기소되지 않았고 처벌을 받지도 않았으며 2004년 국방부 차관이 됐다.
기무사는 소준열 5·18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동정을 파악해 “5·18과 관련해 본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책임질 것은 확실히 지겠지만 오직 충성일념으로 군복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잘못은 없었다는 것인 본인의 신념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5·18당시 7공수 33대대장 이었던 권승만 준장의 문건에는 “정부 조치에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어 몇몇 사람들과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나온다.
3공수 11대대장 이었던 임수원 준장은 “정부에서는 명령권자만 처벌한다고 했지만 사견으로는 대대장급 이상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명령을 직접 수행했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 된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적혀있다.
기무사 문건에는 당시 합참의장 이었던 김동진 대장(20사단 61연대장)이 임 준장에게 “5·18당시 역사자료와 전투상보 등 관련 자료를 보고해 달라”고 지시를 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육군 정훈참모부장 이었던 정영진 소장(20사단 61연대 대대장)은 “시위군중과 큰 출동이 없었음에도 지금 와서 무조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군 지휘·명령체계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다분하다”면서 “책임자 처벌시 당시 수뇌부에 한정해야만 군의 동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무사는 파악했다.
이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한 군 검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기무사가 작성한 1995년 2월3일자 ‘군 검찰부 5·18관계 조사 진행 동정’에는 군 검찰의 조사 축소 사항이 기록돼 있다.
문건에는 “군 검찰부는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한 12개 대대 중대장 14명에 대한 조사를 끝으로 사실상 참고인 조사를
모두 종료했다”고 밝히면서 “최초 참고인 56명을 조사할 예정이었으나 군 사기 저하 등을 우려해 대대 당 1∼2명만
조사했다”고 돼 있다.
■처절받지 않은 계엄군 지휘관…진상 규명 외면
이렇게 면죄부를 받은 계엄군 지휘관들은 현재도 5·18을 부정하며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있다.
최근 광주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두환씨의 사죄명예훼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계엄군들은 한결같이 ‘헬기사격’을 부정하고 있다.
1995년 검찰 5·18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최환 변호사는 “전씨 휘하에 있었던 계엄군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5·18을 부정하는)전씨의 뜻과 행동에 따라 그들도 이런 태도를 계속 견지할 것이다”면서 “정치권이 사면 복권을
너무 서둘렀다”고 말했다.
처벌받지 않은 계엄군 지휘관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있다.
국립묘지 안장대상은 무공훈장 수훈자나 장성급 장교,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계엄군 지휘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전현충원에는 현재 진종채(2군사령관)·소준열·박준병·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등 5·18에 관여한 지휘관들이 장군 묘역에 안장돼 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이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다면 5·18진상규명은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계엄군 지휘관들은 이제라도 진상규명에 협조하고 국민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서 “전씨처럼 끝끝내 버틴다면 단호한 처벌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조사를 개시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특별법에 따라 조사 결과 범죄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검찰에 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진상규명 과정에서 가해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적극 협조할 경우 처벌하지 않고, 특별사면과 복권도 건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0년 동안 진실을 외면한 5·18계엄군에게 주어진 마지막 참회의 기회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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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광주 MBC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문 대통령은 ‘5·18 하면 가장 생각나는 사람’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꼽았다.
연합뉴스
5·18 하면 제일 생각나” 11주기 앞두고 盧 추모
노무현 변호사, 광주를 확장한 분으로 기억”
오는 23일 11주기 추도식 열려…
코로나19로 간소한 진행
문재인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40주기를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생각난다”고 말해 눈길을 끈다.
노 전 대통령의 11주기 기일이 1주일도 채 안 남은 점을 감안해 ‘정치적 동지’인 노 전 대통령을 향한 애틋한 추모의 정을 드러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임기 만료(2022년 5월10일)까지는 전 대통령 기일에 맞춘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바 있다.
17일 문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기를 하루 앞두고 광주MBC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 ‘5·18 하면 생각나는 인물’로 노 전 대통령을 꼽았다.
문 대통령은 “80년대 이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다”며 “87년에는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 5·18 광주 비디오 관람회를 가졌다”고 회상했다.
1980년대 문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나란히 부산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문 대통령은 “그런 것(광주 비디오 관람회 개최)이 부산지역 6월 항쟁의 큰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일을 함께했던 노무현 변호사를 광주를 확장한 분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당시 5공 전두환정부의 언론 탄압과 정보 통제로 5·18의 진상이 호남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 특히 영남권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노 전 대통령의 끈질긴 활동 덕분에 부산시민들도 5·18에 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점이 1987년 부산지역에서 6월 항쟁이 활활 타오르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의 언급은 노 전 대통령의 11주기 기일(5월23일)이 6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뒤로는 봉하마을에 가지 않고 있다.
당시 그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임기 후
추도식을 찾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으로 5년 임기가 종료하는 2022년 5월10일까지노 전 대통령 기일에 맞춘 추도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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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추도식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 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실제로 지난해는 노 전 대통령의 10주기 기일로 남다른 의미가 있었고 미국에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까지 몸소 참석했음에도 문 대통령은 영부인 김정숙 여사를 대신 보냈을 뿐 본인은 약속대로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올해 노 전 대통령의 11주기 추도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 적은 인원만 참여한 가운데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노무현재단은 “11주기 추도식은 권양숙 여사 등 유가족과 재단 임원 등 100여명의 최소 인원만 참석한다”며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참배객들을 위해 행사는 재단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할 것”이라고 밝혔다.
추도식 사회는 박혜진 아나운서가 맡고,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추도사를 낭독할 예정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전두환·노태우 전직대통령 동상 철거만이 능사인가
[동양일보 엄재천 기자]충북도가 청남대 안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 것과 관련,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후대에게 물려 줘 산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며 철거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충북도는 지난 14일 이시종 지사 주재로 열린 도내 시민단체 관계자 회의에서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방침을 정했다. 철거시기에 대해서는 너무 조급하게 하지 말고 도민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향후 청남대 운영방향 개선방안 등을 마련해 추진하기로 했다.
앞서 '충북5.18민중항쟁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 13일 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 휴양지에 군사 반란자의 동상과 길을 두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와 대통령길 폐지를 촉구했다.
그러면서 5.18 40주년을 맞는 18일 이전에 동상을 철거해 달라는 입장을 전했다.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청주시 문의면)에는 10명의 전직 대통령 동상과 유품, 사진, 역사 기록화 등이 전시돼 있다.
이 동상들은 충북도가 2013년부터 2년여에 걸쳐 개당 2억원씩 20억원을 들여 제작했다.
이중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상도 포함돼 있다.
각각 2.5m 높이의 동상은 두 사람 이름을 붙인 산책로 '전두환 대통령길'(1.5㎞)과 '노태우 대통령길'(2㎞) 입구에
세워져 있다.
충북도가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 근거로 삼은 것은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전직 대통령은 경호 및 경비를 제외한 다른 예우를 받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이들은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죄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 동상 철거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 사이에선 굳이 철거까지 해야 하냐는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계 인사는 “잘못된 것도 역사”라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과오를 명확하게 기록해
자손들에게 알리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것도 역사다. 그냥 기록을 없애고 지운다면 후세들은 그들의 과오를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며 “그들 동상에 그들의 죄를 낱낱이 기록해 산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주 우암산 삼일공원에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동상중 정춘수 동상 철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시민은 "친일 행각을 벌였다고 정춘수 동상을 철거했더니 지금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친일 행적의 배신자가 있다는 산교육의 기회를 잃었지 않았느냐"며 "정춘수 동상 철거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할 바에야 차라리 청남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 전 대통령이 청남대를 만들어 자주 이용했으니 그런 역사적 과오가 있는 대통령이 조성한 대통령 별장이라면 폐지
하는 게 정답이라는 것이다.
청남대를 즐겨찾는다는 한 시민은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전직 대통령 동상 철거는 성급한 결정인 것 같다"며
"진영논리에 치우펴 무조건 없애기 보다는 후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해 알리는 게 더 중요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남쪽의 청와대'라는 뜻의 청남대는 제5공화국 시절인 1983년 건설됐다.
이후 역대 대통령의 여름 휴가 장소로 이용되다가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일반에 개방돼 관리권이 충북도로 넘어왔다.
엄재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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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군부의 계엄사령부는 1980년 5월 31일 ‘광주폭동사태’로 규정 ‘무장폭도에 의한 살상파괴 방화 약탈과…’
1980 년 5월 당시 본보기자(황종건, 김녕만)들이 기록한 광주 모습을 통해 그때의 실상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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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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