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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40년 전 ‘5·18광주민주화운동’, 그 열흘간의 기억들


사진은 80년 당시 헬기 타고 전남도청 찾은 5·18 군 지휘부(사진 위에서부터)와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끌고 가는 공수부대, 전남도청을 장악한 5·18 계엄군.



호남취재본부 정성환·배윤영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40년 전 ‘5·18광주민주화운동’, 그 열흘간의 기억들






    시대의 어둠을 밝힌 불혹의 5·18광주민주화운동
    국민저항권 정당성·무장투쟁 합법성 첫 공인
    “시대를 넘어 대동세상의 일상민주주의로 나가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한국 민주주의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을 밝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5.18민주화운동이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항쟁 기간 중 22~26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래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남겨둔 마침표’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 한때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묘지가 국립5·18묘지로 승격돼 그 명예를 회복했다.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분수령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돼 민주주의 쟁취와 인권회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올해로 불혹(不惑)을 맞았지만 진실 규명은 아직 미완이다. 5·18은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역사적 의미를 세우고 신군부 처벌로 사법 판단을 얻었으나 진상규명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40년 동안 밝혀지지 않은 발포명령자를 찾아내고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왜 군인들이 총을 쏴야만 했는지 경위를 밝혀내야 한다.

    사망사건, 집단학살, 행방불명자, 여성성폭력사건, 군 조직의 역사 왜곡과 조작 등 해결되지 못한 진실들을 규명해 내야 한다.
    또 5·18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도 과제다.

    시사저널은 온전한 진실 규명과 그날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차원에서 5·18기념재단의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5·18의 전초인 서울역 회군

    5·18민주화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일이 아니다.
    그 시대적 전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민주화 투쟁의 의미를 알 수가 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해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했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그해 5월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월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에서도 전개됐다.
    5월14일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Covert Action>에 실리기도 했다.


     평화봉사단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돌린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 당시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5.18 직후 미국의 잡지

     실리기도 했다.






    남대 정문 앞에서 촉발된 5·18


    5월18일 계엄군은 전남대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했으며, 이에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금남로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겼다.







    1980년 5월21일, 계엄군에게 희생되거나 다친 환자들을 실어나르는 시민군 차량이
    전남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날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저녁에는 계엄군이 철수한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계엄군 증파·민주화운동 본격화


    5월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 공수부대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고, 오후 3시쯤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해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이에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 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오후 4시30분께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11공수여단 소속 차 아무개 대위가
     시위대를 향해 쏜 M16 소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9세)씨도 19일에 사망했다.
    김씨는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된 최초의 사망자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를 방화했고,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저녁이 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10시 20분 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했으며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시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오후 9시50분경 광주 MBC건물에 불이 났다. 밤 11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이날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계엄군 집단발포→시민군의 등장→계엄군 철수


    5월21일 오전 0시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오전 2시18분, 이윽고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시외전화가 두절됐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됐다.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벽 4시 30분 광주 KBS건물이 불길에 휩싸였고, 오전 10시19분 광주세무서건물이 전소됐다.
    이어 11시10분 대형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했으며, 12시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시민들이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진출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발포가 시작됐다.

    오후 3시48분 공수부대원들이 도청 주변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수많은 시민들이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들도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됐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결국, 오후 5시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다.



    고립된 시민공동체의 ‘
    항쟁 나흘째인 5월22일 9시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용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는 가운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했다.

     이런 가운데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해 7개 항의 수습안을 전달했으며 서울서 대학생 500여 명이 광주에 도착해 환영식이 거행됐다.
     오후 3시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가 개최됐다.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인 곳이라 전했다.

    이날 밤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는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했다.
    하지만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철수한 시기의 광주는 치안부재상태가 아닌 진정한 ‘자치공동체’로 단 한건의 강도나
    절도도 발생하지 않았다.


    5월23일 오전 10시 경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열었고, 학생수습위가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하고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를 게시했다.
     오후 1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해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24일 오후 1시20분경 공수부대원들이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했으며, 오전 8시경,
    남구 송암동에서는 퇴각하던 공수부대와 전교사 사이에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해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이때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첫 실탄 발포자로 지목된 공수부대 차 아무개 대위가 사망했다.

    5월26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계엄군이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는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항쟁 당시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항쟁기간 전남도청 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제4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했다.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21일부터 26일까지의 일주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됐다.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됐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됐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없이 나눴고, 많은 광주시민들은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기념 연극 공연 <나는 광주에 없었다>의 한 장면.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기념 연극 공연

     <나는 광주에 없었다>의 한 장면.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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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그래픽 | 성덕환 기자 thekhan@kyunghyang.com



    그래픽 | 성덕환 기자 thekhan@kyunghyang.com





    광주의 5월, 그날을 걷다



    걸어서 돌아보는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29곳





    “화순 사시던 아버지가 새벽에 집을 나서 산으로 걸어오다가 계엄군을 만나 다시 시골로 되돌아가셨어요.”

    광주광역시 동구 의재로 홍림교 사거리의 ‘배고픈다리’(사적 13호)에서 동구 소태동 175번지 ‘주남마을 인근 시민

    학살지’(사적 14호)로 갈 때였다.


    택시기사 김모씨가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전화도 없을 때였죠.


    광주에서 데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를 말리러 오셨어요.

    그때 주남마을에서 미니버스에 탄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잘 기억해요.”


    그해 5월23일 11공수여단 62대대 5중대가 시민군 본부에 등록된 미니버스를 사격했다.

    버스에 탑승한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계엄군은 총격에 살아남은 남성 2명을 사살한 뒤 주남마을 뒷산 헬기장 부근에 암매장했다.


     2명 중 1명은 학생이었다. 공수부대 장교가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는 기록(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 남아 있다.

     계엄군은 다음날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을 사격했다.

     그중 방광범이 사망했다.






    5·18기념공원 내 ‘5·18 현황 조각’ 작품 중 하나로 항거정신을 표현했다.



    5·18기념공원 내 ‘5·18 현황 조각’ 작품 중 하나로 항거정신을 표현했다.



    지난 8일 오전 전남대병원에서 조선대로 가려고 탄 택시에서 김씨를 만났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더 많이 아는 이들, 지금도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면서 이름과 나이를 알리는 걸 꺼렸다.

    전남대(사적 1호)에서 조선대(사적 12호)까지, 주남마을에서 505보안부대(사적 26호)까지 동행했다.


    주남마을에서 다시 택시에 올랐을 때 김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조선대 부근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며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시내에서 데모를 하다 계엄군과 맞닥뜨렸다.

     “워메 군인들이 막 쫓아오는데….


     우리가 빠르죠.

    그쪽은 군장하고 우리는 맨몸이니까. (어느 집) 마루 밑 구석으로 숨었어요.


    곤봉으로 (마루 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요.

    (곤봉 끝이) 내 몸에 닿았는데…. 붙잡혔으면 나도 죽었을 거예요.

    ” 생사의 갈림길로 기억했다.


    계엄군의 만행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때려부려.

    사람 골이 터져버린다니까.


     독헌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눈이 빠지고 하는데….” 김씨는 총탄에 맞아 머리 한쪽이 흔적도 없이 날아간 시신을 본 기억을 꺼내다 말을 멈췄다.






    <b>17 상무대 옛터(재현지 5·18자유공원)</b> 상무대 영창과 법정은 5·18자유공원에 재현됐다. 계엄군은 저항하던 시민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고문 등 온갖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둘렀다.



    17 상무대 옛터(재현지 5·18자유공원) 상무대 영창과 법정은 5·18자유공원에 재현됐다.

    계엄군은 저항하던 시민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고문 등 온갖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둘렀다.



    신군부 만행 재현한 자유공원
    법정·영창 복원…자료도 전시


    광주의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는 29곳이다.

    사적지는 ‘오월인권길’ ‘오월민중길’의 핵심 코스다.

    이 길의 핵심 열쇳말은 죽음과 희생이다.


    신군부 세력의 능동적인 학살이자 죽임이었다.

    이들의 야만과 만행을 재현한 곳이 5·18자유공원이다.


     광주 시민들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군사재판을 받던 곳이다.

    법정과 영창이 복원·재현됐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있던 헌병대 본부 사무실에서는 5·18 당시 사진과 영상 자료가 전시된다.

    7일 광주에 도착했을 때 이곳부터 찾아 헌병대 본부 사무실로 들어갔다.


    “5·18 최초 희생자는 청각장애로 말을 하지 못하던 김경철(24세)이다.

     구두를 닦거나 신발을 만들어서 팔던 그는 평소처럼 일감을 찾아 시내 중심가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난 3~4명의 공수부대원에게 진압봉으로 머리를 얻어맞고전신을 구타당해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간 김경철은 다시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19일 새벽 3시에 사망판정을 받았다.

    ” 이 공간에는 진압봉으로 구타당해 죽고, 대검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기록이 가득했다.

    계엄군의 폭력을 밀랍인형으로도 재현했다.

    5·18자유관에서 5·18기념문화관으로 이동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상설 전시 빼고는 모두 중단됐다.

    두 곳은 ‘오월길 지도’와 ‘오월 그날의 현장’ 같은 지도와 책자를 무료로 배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www.518archives.go.kr)과 오월길(518road.518.org) 홈페이지에서 지도와 책자를 내려받을 수 있다. 광주의 여러 전시공간은 40주년을 맞아 11·12일 다시 문을 열었다.


    광주의 여러 기념관, 전시공간은 시민의 기억, 추모, 극복의 과정을 담았다.

     이들 공간에서 먼저 자료와 전시물을 읽고 본 뒤 답사에 나서면 사적 의미를 더 되새길 수 있다.









    <b>27 들불야학 옛터</b> 들불야학의 강학(교사)과 학강(학생)은 ‘항쟁파’로 끝까지 싸웠다. 야학 옆 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발간했다.



    27 들불야학 옛터 들불야학의 강학(교사)과 학강(학생)은 ‘항쟁파’로 끝까지 싸웠다.

    야학 옆 시민아파트에서 ‘투사회보’를 발간했다.


    조직적 항쟁한 ‘들불야학’ 터
    입구 벽체만 남긴 채 모두 철거
    녹두서점 등도 표지석만 남아


    5·18기념공원을 둘러본 뒤 답사에 나섰다.

     첫 목적지는 서구 죽봉대로의 들불야학 옛터(사적 27호)다.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윤상원 등은 가장 적극적으로, 조직적으로 항쟁에 나섰다.


    이들은 5·18 때 ‘들불야학팀’으로 불렸다.

    이들은 5월19일자 호소문에 “우리가 살길은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전두환 일파의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 없이 쳐부수는 길”이라고 썼다.


     이들에겐 정의가 처참히 무너진 곳에서 싸우는 일 말곤 없는 듯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은 광주YWCA에서 계엄군의 진압에 항거하다 사망했다.


    들불야학 터는 2004년 노후화로 ‘대건안드레아 교육관’ 입구 벽체만 남기고 철거됐다.

    이곳 일대는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을 두고 주민들 간 다툼이 벌어졌다.

    재개발되면 성당도 위치를 옮긴다.


    성당 관계자는 “들불야학 입구 벽체와 시민아파트 한 동은 보존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왜곡과 거짓 보도로 시민들의 분노의 대상이 된 광주MBC(사적 7호), 들불야학팀이 투사회보 등을 제작한 항쟁 거점 중 하나인 광주YWCA(사적 6호), 실상을 광주 안팎에 알린 구심인 녹두서점(사적 8호), 폭력과 고문을 자행한 상무대

    (사적 17호) 등은 ‘옛터’로만 남았다.


    ‘오월 그날의 현장’ 등을 읽으며 이 옛터를 들여다봤다.







    <b>11 구 광주적십자 병원</b> 연대는 병원에서 빛을 발했다. 적십자병원에서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라 헐릴지도 모른다.


    11 구 광주적십자 병원 연대는 병원에서 빛을 발했다. 적십자병원에서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라 헐릴지도 모른다.



    매각 진행 중인 적십자병원엔
    ‘사적지로 보존하라’ 현수막

    항쟁 초반 계엄군 총칼에 희생된 이들이 실려간 ‘구 광주적십자병원’(사적 11호)도 사라질지 모른다.

    8일 택시기사 김씨와 들른 병원은 폐쇄됐다. 민간 매각이 진행 중이다.

    병원 1층 창가로 ‘5·18 사적지로 보존하라’ ‘시민의 품으로’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지난 4월 이곳에서 “광주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곳”이라며 매각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첫 사망자 김경철이 이곳으로 실려왔다.

    5월 광주의 핵심 키워드엔 ‘공동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시민들은 부상자들을 간호했고, 의사·간호사의 먹거리를 챙겼다.

     시신 처리도 도왔다. 줄을 서가며 헌혈했다.

    구 광주적십자병원에도 헌혈 행렬이 이어졌다.

     계엄군이 자주 드나들던 곳인데도 개의치 않고 병원을 찾았다.


    광주기독병원(사적 10호)에도 많은 부상자들이 이송됐다.

    이곳에서도 시민들이 의료진, 부상자와 함께했다.

    많은 시민이 헌혈에 동참했다. 춘태여고 3학년 박금희도 그중 한 명이다.

    헌혈을 하고 귀가하다 총탄에 맞아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졌다.







    <b>5 전남도청</b> ‘항쟁파’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지키다 사망한 전남도청의 민주광장에선 전두환의 모습을 풍자한 ‘518개 국제 표정전’이 전시 중이다.



    5 전남도청 ‘항쟁파’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지키다 사망한 전남도청의 민주광장에선

     전두환의 모습을 풍자한 ‘518개 국제 표정전’이 전시 중이다.



    국가 폭력과 재난, 그 죽음의 현장을 둘러보는 ‘다크 투어리즘’이 광주에 꼭 들어맞는 개념은 아니다.

    헌혈과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연대와 공동체 정신, 죽음을 불사한 항쟁, 계엄군에  승리의 기억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사적지가 밀집된 옛 전남도청 일대는 죽임과 죽음뿐만 아니라 연대, 항쟁, 승리의 기억과 흔적이 이어지는 곳이다.

    옛 전남도청(사적 5호)과 금남로 일대는 ‘5월 광주’와 등식이 성립하는 공간이다.


    전남도청 분수대 옆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모형이 들어섰다.

     5월2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세운 모형이다.

    1980년 부처님오신날은 5월21일이었다.

    이날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공수부대가 사격을 시작했다.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엔 자비 같은 부처의 가르침은 찾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도청 광장(5·18민주화광장)과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오후 도청 광장에서 시민대회를 열었다.

    23일 집회엔 시민 5만명이 도청 앞에 결집했다.

     ‘항쟁파’들은 27일 오후 5시10분 계엄군 특공대에 진압되기 전까지 도청을 사수했다.

    도청 사망자는 160명에서 4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옛 전남도청엔 지금도 연대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5월 3단체는 옛 도청 회의실 건물 옆에 ‘힘내라 대구경북 코로나19 우리 함께 이겨냅시다’라고 적은 현수막을 걸어뒀다.

    5·18구묘지(사적 24호)는 망월동 묘지라고 불렸다.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란 뜻의 망월동(望月洞)은 그 이름과 달리 학살, 비극, 원한을 뜻했다.


     지금은 1980년 이후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안장된 이 묘지에서 한국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민족민주열사 묘역 부근엔 ‘특별하지 않은 사람 고 박종태 동지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열사정신 계승하여 비정규직 철폐하자!’라고 쓴 ‘전국학교 비정규직노조 광주지부’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화물연대 대의원이었던 박종태는 2009년 ‘대한통운은 노조 탄압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운명했다.

    묘역 옆 <택시 운전사>의 실존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묘엔 누군가 올려둔 소주 한 병이 보였다.








    <b>1 전남대 정문</b> 5월18일 계엄군의 위협과 협박에도 200여명이 모였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22일 교정에서 매장된 시신들이 발견됐다.



    1 전남대 정문 5월18일 계엄군의 위협과 협박에도 200여명이 모였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22일 교정에서 매장된 시신들이 발견됐다.




    <b>28 전일빌딩</b> ‘전일빌딩245’로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1층 아카이브엔 5·18 당시 빌딩과 헬기 사격 총탄 자국이 난 기둥들을 재현했다.



    28 전일빌딩 ‘전일빌딩245’로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1층 아카이브엔 5·18 당시 빌딩과

    헬기 사격 총탄 자국이 난 기둥들을 재현했다.




    여전한 연대의 장소 전남도청
    전일빌딩, 아카이브로 재탄생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 사적지의 표지석이나 기념관의 전시물, 조형물들이 광주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할 순 없어 보였다.


    7일 오후 5·18구묘지에서 광주교도소(사적 22호)를 거쳐 전남대 정문(사적 1호)으로 가는 택시의 라디오에선 극우 성향 유튜버들이 전날 5·18기념재단 앞에서 5·18 유공자에 가짜가 섞여 있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려다 시민들과 충돌

    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당시를 촬영한 영상에서 5월 단체 회원 한 명이 “우리는 40년 전 총칼에 가족을 잃었어. 5·18 심장에서 이런 건 안 돼. 제발 가”라고 외쳤다.

     몇몇 극우단체들은 16·17일 금남로 집회를 신고했다.

    7~8일 광주에서 만난 시민들은 친절했다.


    기자 신분을 밝히고 5·18 40주년 의미를 물어볼 때면 대부분 답변을 피했다.

     7일 밤 ‘전일빌딩 245’에서 직원 한 명을 만났다.

    그는 이 의문에 짧게 답했다.


    “(광주 시민들이) 할 말은 많지만 속에 있는 말을 다 하진 않죠.” 40주년을 묻는 질문엔 “죄 지은 걸 참회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전두환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2017년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계엄군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신부, 1937~2016)에겐 “가면 쓴 사탄”이라고 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전일빌딩은 아카이브와 시민 문화공간으로 다시 문을 연다.

    1층 아카이브 공간엔 총탄을 맞은 건물 기둥도 재현해 놓았다.

    5·18자유공원 직원 이미애씨도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어떤 목적으로 집단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두환 측은) 헬기도 안 띄웠다고 한다.

    역사는 진실을 기록해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40년이 지나도, 수많은 물적 증거와 증언이 넘쳐도 광주에는 여전히 ‘진실’ 문제가 고통스럽게 들러붙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특별전 타이틀은 ‘5·18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라’이다.



    ■고려 석탑, 양림 펭귄마을…몰랐던 매력

    5·18 사적지만 가보기엔 아까운 광주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고려 초 추정)은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에 건립됐다.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고려 초 추정)은 광주공원이 들어선 성거산에 건립됐다.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편성지였던 광주공원(사적 20호)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성됐다.

    원래는 광주신사였다.

    사적을 알리는 표지석 옆 계단 한 칸엔 ‘일제 식민통치 잔재인 광주신사 계단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광주공원은 성거산에 자리 잡았다. 이곳 역사는 더 거슬러올라간다.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문화재가 광주공원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타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광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5·18이나 비엔날레, 예향이나 음식 같은 단어들이다.


     자연과 삶터, 유적은 덜 알려졌다.

    예를 들어 무등산은 국립공원이다.

    2013년 3월4일 한국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오월 사적지 답사 때 인상적인 건 공원들이다.

    광주공원은 수목이 울창했다. 5·18기념공원은 보길도 부용동 세연지 같은 남도 전통의 정자나 연못을 재현했다.

    양림동 사직공원엔 전망타워가 놓여 광주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광주공원과 사직공원은 걸어서 20~30분 거리다.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엔 근대 건축물과 전통 가옥이 한데 어우러져 들어섰다.

    양림동은 광주에서 처음 서양 문명을 받아들인 곳이다.









    양림동 명소 중 하나인 ‘펭귄마을’. 주민들이 빈집에 사랑방을 만들고, 전시공간을 꾸몄다.



    양림동 명소 중 하나인 ‘펭귄마을’. 주민들이 빈집에 사랑방을 만들고, 전시공간을 꾸몄다.



    오래된 장소에 매력을 느낀다면, 5·18 최초 발포지(사적 21호)인 광주고 부근 계림동 헌책방 거리도 가볼 만하다.

    광주4·19혁명 발상지로 꼽히는 광주고 정문 옆으론 오래된 헌책방들이 늘어섰다.

     고즈넉한 커피가게는 헌책방 사이에서 커피향을 은근히 내는 듯했다.


    교육 도시의 진면목을 이 공간에서 느꼈다.

    이 시대 ‘학교 옆 서점’은 낯설면서 반가운 풍경이었다.


    광주MBC 옛터 건너편 전남 여중·고 자리엔 ‘광주학생독립운동발상지’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1929년 당시 광주여고보(전남여고 전신) 학생들이 독서회 같은 활동을 통해 시위와 백지동맹 등에 적극 참여했다고

    적혀있다.


    ‘무등경기장 정문’(사적 18호)은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의 집결지였다.

     지금은 당시 경기장 정문 등 일부 시설만 보존됐다.

     경기장 건너편 소공원 사적비 자리엔 택시들이 대기했다.


    기사들은 5·18 때도, 지금도 대기 장소라고 했다.

    이 소공원 화단엔 기아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호랑이들이 야구하는 조형물이 들어섰다.


    7일 오후 무등경기장 자리에 들어선 광주·KIA챔피언스 필드에서 진짜 선수들이 연습했다.

     키움과 ‘무관중’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야외석 뒤 철제 울타리 바깥에서 사진·영상으로만 보던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해 5월 광주... 나는 고1 소녀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부통치 결사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시민들. 전남대학교

    버스도 보인다. 1980.5.24


    ⓒ 연합뉴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사망한 시민의 시신을 끌고 가고 있다. 1980.5.28



    ⓒ 연합뉴스






     글을 입력하고 있는 필자


    ⓒ 이준호


    ▲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희생된 10대 36명의 얼굴.


    그래픽 이다현 기자 okong@seoul.co.kr

                       





    그날, 이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소년·소녀가 숨졌다.
    다 자라지 못한 그 작은 몸엔 수없이 많은 총알과 대검이 관통했고 주검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삼촌 가게에 일하러 가던 19세 소년 노동자는 대검에 찔렸고, 공부하다 귀가하던 고2 남학생은 매복한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아픈 사람 살리겠다고 헌혈에 나선 17세 여고생은 총에 맞았고, 11살짜리 소년은 묘지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사망했다.

    서울신문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희생된 10대 청소년들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검찰의 검시조서와 사망진단서를 확인했고, 국군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관련 사망자 명단’과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 결과’를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해 확인했다.

    구술 기록을 확인하면서, 연락이 닿는 유족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떤 죽음이 억울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특히 그랬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눈시울은 그렇게 40년간 마를 날이 없었다.

    5·18 광주민주항쟁(5월 17~27일) 당시 사망한 165명 중 10대 청소년은 36명(21.8%)이다.
    평균 나이는 16.7세로 정규교육을 거쳤다면 중학교 3학년이었을 나이다.
    남자가 30명이었고 여자가 6명이었다.

     검시조서에 기재된 직업을 보면 고등학생이 13명으로 가장 많았다.
     학업 대신 돈을 벌던 소년 노동자는 10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고 중학생 6명, 학교 밖 청소년(무직) 5명, 재수생 1명,
    초등학생 1명이었다.

    사망 원인은 총상이 32명(88.9%)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검시조서를 보면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총기인 M16에 의해 사망한 이들은 21명이었다.
    시민군이 경찰의 무기고를 탈취해 사용한 카빈총으로 사망한 이도 6명이었다.
     이 기록만 보면 시민군 간 오인 사격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사망자 검시기록조차 조작·왜곡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군의 학살 책임을 덜고자 카빈총에 의한 사망을 의도적으로 늘렸다는 의혹을 받는다.
     실제로 5공화국 인사들은 카빈총 희생자가 전체 사망자 165명 중 28~88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광주민주항쟁은 군인의 양민학살보단 시민군의 오인사격이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북한군이 개입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아울러 총에 맞아 사망했지만, 죽음의 원인을 바꿔 분류하기도 했다.

    김경환(19·점원)군은 자상 3곳, 총상 등이 발견됐지만, 검찰 보고서에는 ‘자상으로 분류할 것’이라 적혀 있었고, 보안
    사 검시참여보고에도 총상은 빠져 있었고 최종적으로 ‘타박상으로 인한 사망’으로 분류됐다.
    검찰의 검시기록이 조작되는 삼엄한 시대였다.
     한편 10대 사망자 중 차량 추락사가 3명이고 두들겨 맞아 사망한 이는 1명이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아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희생자의 묘비를 찾은 유족이 마스크를 벗은 채 쪼그려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아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희생자의

     묘비를 찾은 유족이 마스크를 벗은 채 쪼그려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한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커지자 전두환
    신군부는 이를 저지하고자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인 18일 계엄군은 전남대를 봉쇄했다. 군과 학생 간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가 격해지자 군인은 학생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학생들은 광주시내 중심가인 금남로로 이동했고, 계엄군은 쫓아와 진압작전을 펼쳤다.
     19일 전두환 신군부는 11여단을 광주에 증파했다.

     광주시민은 분노했다.
     대학생부터 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광주시민들은 침묵하지 않고 돌을 들었다.
    이날 오후 4시 30분 광주 동구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에 다니는 김영찬군이 계엄군이 쏜 총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광주시내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진 20일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다.
    금남로에서 택시 2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이던 날이다.
    10대 사망자도 2명이 나왔는데, 동신중 3학년 박기현(당시 14)군과 상점에서 일하던 김경환(19)군이 군인의 무자비한 폭행에 숨을 거뒀다.

    특히 이날은 박군이 수학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부산에 누나의 산후 수발을 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심심해진 박군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박군은 책을 사와야 한다며 아버지의 만류에도 자전거를 끌고 나섰고, 그 이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계엄군이 박군을 낚아채고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이틀 뒤 박군은 전남대병원에서 숨진 채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21일 오후 1시 최소 10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전남도청 내 스피커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끝나기 무섭게 공수부대의 사격이 시작됐다.
    10분여간 지속한 사격에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10대라고 총탄이 피해가진 않았다.

    이날목숨을 잃은 10대 청소년은 총 13명에 이른다. 부처님오신날이었던 그날 김완봉(14·무등중3)군도 금남로에 있었다. 김군의 어머니인 송영도씨는 아들과 함께 절에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는 청년들에게 빵을 먹이자는 주변의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송씨는 그 길로 집에서 10만원을 들고 와 빵과 우유, 담배, 계란 등을 슈퍼에서 사 모아 도청 시위대에 건네줬다.
    그러는 사이 집에 있던 아들이 금남로로 나왔던 것이다.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 등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 송씨는 결국 적십자병원 시체실에서 아들을 찾았다.

    전날 아침에 아들이 입었던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전교 13등을 했다며 학교에서 배지를 받아온 착한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은 뒷목 쪽에 총을 맞아 사망한 상태였다.       

    무장한 시민군의 저항에 따라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22일 이후에도 10대 사망자는 계속 나왔다.
     이날 6명이 사망했고, 23일 4명, 24일 3명, 25일 2명,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이 있었

    던 27일에는 5명이 숨졌다.
    계엄군의 잔혹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23일 사망한 손옥례(19·무직)양은 전남 화순으로 시신 담을 관을 구하러 가는 버스에서 매복한 군인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다.
     당시 손양은 머리와 가슴 등 M16 총탄 7발을 맞았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계엄군은 손양의 가슴부위를 대검으로 찔렀다.
     그렇게 손양의 주검은 2번 죽었다.
     같은 버스를 탄 것으로 추정되는 황호걸(19·방송통신고3)군도 복부를 비롯해 9곳의 총상을 입었다.

    절단된 10대의 시신도 있다.
    시위대 차량에 탑승해 총을 들고 군인을 추격하다가 24일 사망한 김부열(17·조대부중3)군은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시신 발견 당시 심한 부패로 사인 및 상해 수단을 규명하기 어려웠지만, 목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가슴과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간 상태여서 유족은 사타구니 옆 점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김군의 시신은 광주 동구 지원동 뒷산에서 발견됐다.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서울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가운뎃줄 오른쪽 다섯째가 최예섭 준장. 맨 아랫줄 왼쪽 다섯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한겨레> 자료사진



    가운뎃줄 오른쪽 다섯째가 최예섭 준장. 맨 아랫줄 왼쪽 다섯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 최측근 5·18 작전 개입' 문건 나왔다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 1980년 5월 메모
    전남도청 무기회수 작전 등 상세히 적혀
    최 실장 주민증 3장 위조해 도청 작전 활용



    5·18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최측근 최예섭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이 광주에서 각종 작전기획에 직접 개입했을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이 나왔다.

    보안사령부가 전남도청 안 폭약 뇌관을 제거하는 ‘막후작전’을 위해 주민등록증 위조까지 의뢰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폭약 뇌관 제거가 실제로 이뤄졌고 이는 마지막 광주 진입작전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신군부의 진압 과정을 규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자료다.

    17일 <한겨레>가 입수한 김기석(1931~2010)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이 쓴 ‘수습대책위 위원 접촉

    사항’이라고 적힌 메모지에 1980년 5월24일 회의 참석자로 ‘GEN, choi(ASC)’라고 적은 내용이 담겨 있다.


     ASC는 육군보안사령부를, GEN은 장군(General)을 의미한다. 영문 choi는 최예섭(1929~2019) 보안사 기획조정실장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김기석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이 쓴 ‘수습대책위 위원 접촉사항’이라고 적힌 메모.


    김기석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이 쓴 ‘수습대책위 위원 접촉사항’이라고 적힌 메모.      



        

    1980년 5·18 때 광주에 온 보안사 장군은 최예섭 기획조정실장(준장)뿐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12 및 5·18 검찰 수사(1995년) 때 “5월19일 최 기획실장이 ‘광주의 보고가 잘 안되니 직접 내려가 파악해 보고하겠다’며 자원했다”고 진술했다.


    최 기획실장은 505보안대 분실과 전투교육사령부 사무실 등 2곳을 ‘보안사령부 광주분실’로 사용했다.

     최 기획실장은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최경조 보안사 대령(광주전남합동수사본부장)과 함께 5·18의 ‘작전지침’을

     세우는 3인방의 수장 격이었다.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의 메모는 당시 보안사가 시민군의 거점인 전남도청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막후공작’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5월24일치 메모엔 ‘17~20시 무기관리학생 A, B, C, D와 접촉’이라고 적혀 있어 몇명 대학생들한테서 정보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5


    월24일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다가 무장 시민군들에게 무기 반납을 종용하며 상무충정작전(진압작전)을 짜고 있던 시점이다.

    계엄군이 광주 진압 작전을 세우던 5월25일 메모엔 오전 10시 ‘A학생으로부터 작전 완료. 뇌관은 별도 마대에 넣어 분리 저장’이라는 보고 내용도 적혀 있다.


    실제 당시 도청 지하 군 무기고에 시민군이 보관해둔 폭약 뇌관 2288개와 수류탄 신관 279발, 최루탄 170발,

    다이너마이트 2100개의 뇌관들은 누군가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무기 회수에 반대했던 ‘강경파’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뇌관이 제거된 직후인 5월25일, 전두환 신군부는 진압작전 개시 시점을 ‘5월27일 0시1분 이후’로 결정했다. 공작

    성공 후 마지막 진압작전을 벌였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1980년 5·18 진압작전 이후 전남도청 앞 정호용 특전사령관. 5·18기록관 제공



    1980년 5·18 진압작전 이후 전남도청 앞 정호용 특전사령관. 5·18기록관 제공       


       

    이 메모와 관련해 최 기획실장이 진압작전을 앞두고 전남도청에 누군가를 잠입시키려고 했다는 서의남 광주 505보안대 중령의 진술도 이 같은 정황을 뒷받침한다.

    서 중령은 1995년 검찰 조사에서 “최예섭 대령(준장을 오해한 것으로 보임)이 도청에 위장침투하려고 한다고 해

    위장 주민등록증 3개를 만들어줬다”고 진술했다.


    서 중령은 “당시 도청에 총기류와 폭약 등이 많이 있어 위험하니 총기의 공이 등을 제거하기 위해 도청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았다.


    5·18 연구자인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최예섭 기획실장 등 서울에서 내려온 보안사령부 사람들이 큰 틀의 방향을 설정하고 사실상 진압작전 등을 뒤에서 기획했다.

    김기석 부사령관의 메모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 기획실장 등 보안사 3인방을 통해 5·18을 사실상 컨트롤했다는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건”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공수부대 계엄군이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시민군

     진압 작전을 마치고 도청 앞에 집결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

    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경향신문] 1994년 11월28일 점심 무렵 서울 여의도 한정식집 ‘녹원’. 현역과 예비역 고위 군인 8명이 모였다.

    현역 장군 2명과 대령 2명, 예비역 장군 3명과 중령 1명 이었다.

    모임 주최자는 정호용 당시 민주자유당 의원이었다.

    정 의원은 5·18민주화운동 때 공수부대를 지휘한 특전사령관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5·18 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여단장과 대대장들이다.

    이들은 2시간여 동안 점심을 함께 했는데 외부인의 접근을 일체 통제했다고 한다.

    이 자리는 5·18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앞두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1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옛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예(비역)대장 정호용, 5·18당시 특전부대장 초청 오찬’ 문건 내용이다. 문건에는 “고소·고발된 (5·18 당시)특전사 대대장 9명 중 3명(예비역 소장 1명·예비역 준장 1명·예비역 대령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참석했다”면서 “오찬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동정을 파악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문건이 시사하는 점은 두 가지다.

    5·18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승승장구해 대부분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15년 전 사령관의 요청에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일 정도로 ‘결속력’이 여전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검찰 수사에 대비해 모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5·18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대응책을 숙의했다.

    ■‘성공한 쿠데타’서 5·18특별법 제정…기소는 5명뿐

    5·18에 대한 검찰수사는 1994년 5월13일 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322명이 전두환씨 등을 내란죄와 내란목적 살인죄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씨를 포함해 5·18당시광주에 투입된 대대장급 이상 계엄군 지휘관 35명이 고발 대상이었다. 검찰은 이 고발장을 바탕으로 5·18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검찰은 같은해 7월18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해 큰 논란을 불렀다.

    국민 반발이 거세게 일자 김영삼 정부는 그해 12월21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재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다음해인 1996년 1월23일 12·12와 5·18내란 사건 핵심 관련자 16명을 기소했다. 5·18학살과 관련해 고발된

    35명 중 기소된 사람은 전두환·노태우·이희성·정호용·최세창·박준병 등 5명에 불과했다. 30명은 기소되지 않았다.

    5·18 때 20사단 사단장이던 박준병은 주요 인사들 중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실형이 선고된 전두환(무기징역)·노태우(징역 17년)·정호용(징역 7년)·최세창(징역 5년) 등도 1997년 12월22일 모두

     사면복권 돼 석방됐다. 이들은 구속기간도 2년여에 불과했다.

    당시 고발된 계엄군 지휘관들은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처벌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상당수 5·18지휘관들은 군내 요직에 있었다.

    기무사는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군 내부가 동요하자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당시 군에있던 5·18지휘관들의

    동정과 발언 등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문건으로 남겼다

    5·18 당시 20사단 대대장으로 투입됐다 1994년 국방부 동원국장이었던 유효일 소장에 대한 기무사 문건에는 “지휘계통의 지시에 의거 출동한 대대장 등을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군인이란 지휘계통의 상급자 말 한마디에

    진로를 결정해야 하며 명령에 대핸 절대 복종은 군의 생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기소되지 않았고 처벌을 받지도 않았으며 2004년 국방부 차관이 됐다.

    기무사는 소준열 5·18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동정을 파악해 “5·18과 관련해 본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책임질 것은 확실히 지겠지만 오직 충성일념으로 군복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잘못은 없었다는 것인 본인의 신념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5·18당시 7공수 33대대장 이었던 권승만 준장의 문건에는 “정부 조치에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어 몇몇 사람들과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나온다.


     3공수 11대대장 이었던 임수원 준장은 “정부에서는 명령권자만 처벌한다고 했지만 사견으로는 대대장급 이상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명령을 직접 수행했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 된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적혀있다.

    기무사 문건에는 당시 합참의장 이었던 김동진 대장(20사단 61연대장)이 임 준장에게 “5·18당시 역사자료와 전투상보 등 관련 자료를 보고해 달라”고 지시를 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육군 정훈참모부장 이었던 정영진 소장(20사단 61연대 대대장)은 “시위군중과 큰 출동이 없었음에도 지금 와서 무조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군 지휘·명령체계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다분하다”면서 “책임자 처벌시 당시 수뇌부에 한정해야만 군의 동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무사는 파악했다.

    이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한 군 검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기무사가 작성한 1995년 2월3일자 ‘군 검찰부 5·18관계 조사 진행 동정’에는 군 검찰의 조사 축소 사항이 기록돼 있다.


    문건에는 “군 검찰부는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한 12개 대대 중대장 14명에 대한 조사를 끝으로 사실상 참고인 조사를

    모두 종료했다”고 밝히면서 “최초 참고인 56명을 조사할 예정이었으나 군 사기 저하 등을 우려해 대대 당 1∼2명만

    조사했다”고 돼 있다.

    ■처절받지 않은 계엄군 지휘관…진상 규명 외면

    이렇게 면죄부를 받은 계엄군 지휘관들은 현재도 5·18을 부정하며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있다.

    최근 광주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두환씨의 사죄명예훼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계엄군들은 한결같이 ‘헬기사격’을 부정하고 있다.


    1995년 검찰 5·18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최환 변호사는 “전씨 휘하에 있었던 계엄군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5·18을 부정하는)전씨의 뜻과 행동에 따라 그들도 이런 태도를 계속 견지할 것이다”면서 “정치권이 사면 복권을

    너무 서둘렀다”고 말했다.

    처벌받지 않은 계엄군 지휘관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있다.

     국립묘지 안장대상은 무공훈장 수훈자나 장성급 장교,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계엄군 지휘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전현충원에는 현재 진종채(2군사령관)·소준열·박준병·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등 5·18에 관여한 지휘관들이 장군 묘역에 안장돼 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이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다면 5·18진상규명은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계엄군 지휘관들은 이제라도 진상규명에 협조하고 국민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서 “전씨처럼 끝끝내 버틴다면 단호한 처벌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조사를 개시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특별법에 따라 조사 결과 범죄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검찰에 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진상규명 과정에서 가해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적극 협조할 경우 처벌하지 않고, 특별사면과 복권도 건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0년 동안 진실을 외면한 5·18계엄군에게 주어진 마지막 참회의 기회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전두환·노태우 전직대통령 동상 철거만이 능사인가






    충북도 청남대 동상 철거 결정에 존치해야..
    잘못된 역사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야


    [동양일보 엄재천 기자]충북도가 청남대 안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동상을 철거하기로 한 것과 관련,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후대에게 물려 줘 산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며 철거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충북도는 지난 14일 이시종 지사 주재로 열린 도내 시민단체 관계자 회의에서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방침을 정했다. 철거시기에 대해서는 너무 조급하게 하지 말고 도민들의 의견수렴을 거쳐 향후 청남대 운영방향 개선방안 등을 마련해 추진하기로 했다.

    앞서 '충북5.18민중항쟁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 13일 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 휴양지에 군사 반란자의 동상과 길을 두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와 대통령길 폐지를 촉구했다.

    그러면서 5.18 40주년을 맞는 18일 이전에 동상을 철거해 달라는 입장을 전했다.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청주시 문의면)에는 10명의 전직 대통령 동상과 유품, 사진, 역사 기록화 등이 전시돼 있다.

    이 동상들은 충북도가 2013년부터 2년여에 걸쳐 개당 2억원씩 20억원을 들여 제작했다.

    이중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상도 포함돼 있다.

    각각 2.5m 높이의 동상은 두 사람 이름을 붙인 산책로 '전두환 대통령길'(1.5㎞)과 '노태우 대통령길'(2㎞) 입구에

     세워져 있다.

    충북도가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 철거 근거로 삼은 것은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전직 대통령은 경호 및 경비를 제외한 다른 예우를 받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이들은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죄로 전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 동상 철거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 사이에선 굳이 철거까지 해야 하냐는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계 인사는 “잘못된 것도 역사”라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과오를 명확하게 기록해

    자손들에게 알리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것도 역사다. 그냥 기록을 없애고 지운다면 후세들은 그들의 과오를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며 “그들 동상에 그들의 죄를 낱낱이 기록해 산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주 우암산 삼일공원에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동상중 정춘수 동상 철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시민은 "친일 행각을 벌였다고 정춘수 동상을 철거했더니 지금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친일 행적의 배신자가 있다는 산교육의 기회를 잃었지 않았느냐"며 "정춘수 동상 철거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할 바에야 차라리 청남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 전 대통령이 청남대를 만들어 자주 이용했으니 그런 역사적 과오가 있는 대통령이 조성한 대통령 별장이라면 폐지

    하는 게 정답이라는 것이다.

    청남대를 즐겨찾는다는 한 시민은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전직 대통령 동상 철거는 성급한 결정인 것 같다"며

     "진영논리에 치우펴 무조건 없애기 보다는 후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해 알리는 게 더 중요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남쪽의 청와대'라는 뜻의 청남대는 제5공화국 시절인 1983년 건설됐다.

    이후 역대 대통령의 여름 휴가 장소로 이용되다가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일반에 개방돼 관리권이 충북도로 넘어왔다.




    엄재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