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염원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러한 인류에게 병은 두려운 존재였다. 병은 사람을 아프게 하고 늙게 하고 심하면 죽게 만든다. 그러나 병을 앓다가 치유됐을 때 사람은 어떤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고통과 두려움을 맞이하면서 숭고함을 찾고 전과 같지 않은 새로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요즘말로 하드디스크를 포맷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가벼운 감기에서부터 생과 사를 넘나드는 큰 병까지 이 같은 치유와 정화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친근한 일들이다.
건강을 회복한 뒤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5번은 이렇게 ‘다시 태어난’ 베토벤이 신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서려 있다. 교향곡과 관현악곡에서 외향적인 늠름하고 씩씩한 기상을 발휘했던 베토벤의 음악세계에서, 그 이면에 위치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촛불처럼 움직이는 내성과 마음의 정서는 현악 4중주와 바이올린, 첼로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등 실내악과 독주곡을 통해 표출됐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작품이다. 베토벤의 실내악을 들으면 평소에 굳게 잠겼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작곡가의 진심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곡은 현악 4중주 12번, 13번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갈리친 공작을 위해 작곡에 착수했다. 원래 4악장 구성을 의도했는데, 1825년 4월에 1악장과 2악장을 쓴 베토벤은 병으로 앓아누워 작곡을 일단 중단하게 됐다. 이후 완전히 회복한 후 3악장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작곡에 임하게 되었는데, 이 3악장을 쓰면서 베토벤은 악보 서두에 ‘Heiliger Dankgesang eines Genesenen an die Gottheit, in der lydischen Tonart’(건강을 회복한 자가 신에게 감사하는 신성한 노래, 리디안 선법을 따름)이라고 직접 표시했다.
이 3악장은 이름 그대로 신성하면서도 얼굴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실로 베토벤의 모든 4중주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악장이다. 예정에 없던 3악장이 만들어지면서 곡은 5악장 구성으로 완성됐는데, 3악장을 중심으로 1악장과 5악장이 대응하고 2악장과 4악장이 대응하는 아치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베토벤의 작품 설계는 훗날 벨라 버르토크에게 영향을 주었다. 1825년 11월 6일 슈판지히 4중주단의 연주로 초연됐다.
Budapest String Quartet - Beethoven, String Quartet No.15 in A minor
Josef Roisman, 1st violin
Jac Gorodetzky, 2nd violin
Boris Kroyt, viola
Mischa Schneider, cello
1952.05
추천음반
바릴리 4중주단(Westminster)은 단아하고, 빈 콘체르트하우스 4중주단(Westminster)은 웅숭깊다. 부다페스트 4중주단(Sony, 모노와 스테레오 모두)은 굵고 어두운 소리의 붓끝으로 터치한 연주다. 알반 베르크 4중주단(EMI,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녹음 모두)은 딱딱한 접근이라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오래 들으면 들을수록 발걸음이 닿는 오솔길 같다.
대체로 베토벤 중기와 후기 현악 4중주에서 추천했던 음반들은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카페 4중주단(EMI), 부슈 4중주단(EMI)등 음질 때문에 듣기 꺼려지는 선배들의 녹음들도 이 현악 4중주 15번은 감상하기가 용이하므로 이 곡부터 들어보길 권한다.
음질이 비교적 좋은 녹음 중에 몇 가지를 골라보면, 탈리히 4중주단(Calliope), 에머슨 4중주단(DG)의 연주는 이 곡의 이른바 유려한 디지털 녹음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으며, 최근의 아르테미스 4중주단(Virgin)은 강렬하고 날카로운 연주를 선보였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현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전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전 <객석> 편집장 역임.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누비길 즐겨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