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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1)문재인, 2) 피난민 아들에서 대통령까지










심상정의 약진  


정권교체 분위기가 확실해지면서 진보정당에 소신투표하는 유권자가 많았다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한편에선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선전했기 때문에 문재인 후보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재인 후보도 TV토론에서 심상정에게 비판받으면 “심 후보님만큼 급진적일 수는 없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며

심상정을 충분히 활용했다.  

2007년 대선 당시는 이명박 후보의 압승이 확실시 됐고, 사표심리가 없었지만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3%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후보가 민심에 공감하고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이념만으로 득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선거다.

 이번엔 심상정 후보의 개인기와 SNS를 중심으로 한 정의당의 효율적인 홍보 전략으로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드러낸

 측면이 크다. 




▲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지지자들. 사진=문재인 선대위 제공


▲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지지자들. 사진=문재인 선대위 제공


 


문재인의 철벽방어


문재인 후보는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지지율을 관리한 요인이 됐다.


 문재인 후보는 선거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의제를 던지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과제를 국민에게 설득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모호한 답변태도나 한발 늦은 입장 발표 등으로 ‘고구마’라는 별명을 얻으면서도 이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TV토론 과정에서 일부 예상밖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철저하게 준비된 발언을 위주로 대중과 언론을 상대했다.

 캠프나 당 관계자들의 막말, 문재인 선대위의 댓글 알바사건 등 악재가 터질 경우 곧바로 사과하거나 재빠르게 후보와 무관한 사안으로 선을 그어 지지율 관리에 성공했다.  






과제로 남은 과반 득표 실패 



문재인은 당내 경선에서부터 압도적 지지를 호소했다. 선거운동 마지막날인 8일에도 문재인은 “과반이 넘는 압도적

 정권교체로 힘차게 개혁하겠다”고 말하는 등 과반 득표를 자주 언급했다.

지난 대선 때 48%의 지지를 얻은 경험이 있고, 18대 대선에서 박근혜만큼 막강한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1700만의

촛불혁명까지 거친만큼 과반 득표를 예상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 겨울내내 1700만개의 촛불은 적폐청산, 불평등해결, 세월호 진상규명, 이재용 구속과 박근혜 탄핵 등을 요구했다. 사진=최창호 작가


겨울내내 1700만개의 촛불은 적폐청산, 불평등해결, 세월호 진상규명, 이재용 구속과 박근혜 탄핵 등을 요구했다.

사진=최창호 작가




 

하지만 문재인은 과반에 크게 못미치는 40% 수준 득표율에 그쳤다. 

 캠프에서는 현실적인 예상치로 45%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박영선 선대위원장은 JTBC 개표방송 인터뷰에서 “기대에 못 미친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45% 이상의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셨다면 그 힘으로 국가 개혁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긍정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에 못미친 만큼 더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남지역에서 홍준표 후보가 생각보다 많은 지지를 얻은 것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일각에선 문재인 후보가

촛불정국과 대선을 거치는 동안 비전과 철학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과반 득표실패의 원인이라지적하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경우 뭘 하게 될지,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설명하는 과정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부터 행정수도 이전을 통해 수도권 집중 문제와 지방분권이 왜 필요한지 등을 보여준

것처럼 문재인 후보 역시 정부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어야 했다. 이

는 소모적인 네거티브를 잠재우고 정책대결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효과도 있다.

 이런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은 선거기간에도 나왔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 역시 추상적이었다.

교수와 군인집단 등이 지지선언을 하거나 외곽조직으로 대거 캠프에 합류하며 세를 과시했지만 정작 유권자들이

알아야 할 최종공약집은 선거를 10일 앞둔 지난달 28일에서야 완성됐다. 또한 캠프에 급하게 영입된 인사들이 문제를 일으켜 사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재인 후보는 사드배치·박근혜 구속·동성애 관련 발언 등에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보수 세력의 눈치를 본다는

 비판도 받았다.

촛불혁명으로 지난 대선보다  높아진 유권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또 하나의 과제로 남게 됐다.  




피난민 아들에서 대통령까지 


중앙일보


지난 20103월 부산의 한 성당에서 문재인 당선인의 딸 다혜(34)

 결혼식 때 어머니 강한옥(90ㆍ가운데)여사와 김정숙 여사 함께 찍은

기념사진.




중앙일보


경희대 법대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문재인, 피난민 아들에서 대통령까지 


인권변호사 이어 '수석' 비서실장 거쳐 친노 큰형

10일 별도 취임식 행사 없이 2022년까지 5년 임기 시작

피난민의 아들ㆍ인권변호사ㆍ왕 수석ㆍ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ㆍ친노의 큰형,




문재인(64) 대통령 당선인 은 6ㆍ25 전쟁 중이던 지난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도에서 아버지 고 문용형씨와
어머니 강한옥(90)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경도 흥남 출신으로 전쟁 때 월남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 후 어린 문재인은 어머니의 연탄배달을 도우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1년 펴낸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중략)…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고 썼다.



문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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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중 졸업 사진(왼쪽),

경남고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부산 명문 경남고(25회)를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술ㆍ담배에 손을 댔고 싸움을 하다 정학도 당했다.
중ㆍ고교 때 별명이 ‘문제아’였다.
재수 끝에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72학번)에 들어갔다. 


#1974년 영부인 김정숙 여사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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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재학시절 MT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김정숙 여사가 문재인

당선인의 머리를 빗겨주며 웃고 있다





법대 72학번 문재인은 같은 대학 2년 후배(성악과 74학번)인 김정숙(63) 여사를 지난 1974년 대학 축제 때 파트너로
 만났다.
축제 이후 마주칠 때마다 간단히 인사만 했던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은 이듬해인 1975년 유신반대시위 현장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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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인이 대학3학년 때인지난 1974년 법대 축제에서 만난

김정숙 여사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문 당선인은 지난 2월 9일 JTBC ‘썰전’에 출연, 김정숙 여사와의 만남에 대해“비상학생총회를 열어서 시국토론
 연설을 했다.
선두에 서서 교문을 향해 나가다 가스차의 최루탄을 맞았다.
1m 코앞에서 발사를 했는데 응축된 걸 그대로 맞아 순간적으로 기절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가 김정숙 여사다.

#1975년 8월 강제징집 특전사


중앙일보


강제징집된 문재인 당선인은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당시 여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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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인의 특전사 때 모습








경희대 4학년 때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그의 전과기록에는‘특수공무집행방해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이라는 죄명에 처분일자는 1975년 6월18일로
 기록돼 있다.

대학에서도 제적당했다.
강제징집돼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에 입대했다.
1978년 2월, 31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1980년 사시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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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서 동기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복학도 취업도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 문용형씨가 돌아가신 뒤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에 몰입했다.
문 당선인은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당에서 공개한 ‘59문59답’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이라는
 질문에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잘 된 모습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듬해 1979년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시위와 공부를 병행하던 당시 문재인은 계엄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1980년 청량리경찰서에서 2차시험 합격증을 받았다.
차석으로 최종합격했다.

#1981년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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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인과 김정숙 여사의 지난 1981년 결혼식.


사법연수원 시절 7년 연애한 김정숙 여사와 1981년 결혼했다.
 7년동안 김정숙 영부인은 문 당선인의 대학ㆍ감옥ㆍ군대 생활을 함께 했다.
지난 4월3일 더불어민주당의 문 후보와의 ‘59문59답’에서 당시 문 후보는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나”는 질문에
 “아내가 먼저 했다.

친구들과 있는데 아내가 와서 갑자기 ‘재인이 너 나랑 결혼 할거야 말거야? 빨리 말해!’라고
해서 깜짝 놀라‘알았어’라고 했다”고 답했다.

#1982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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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인이 지난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설립했던

 노동법률상담소 홍보전단.‘돈이없어 애태우는 근로자 여러분을

돕고자 상담료는 받지않는다’고 적혀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시위경력으로 인해 희망했던 판사가 되지 못했다.
사법연수원 동기는 고 조영래 변호사, 박원선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관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등이다. 19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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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시절 어머니 강한옥(90)여사와 함께





이곳에서 문재인의 운명을 바꾼 변호사 노무현을 만났다.

1980년대 후반 당시 부산에선 4명의 재야 인권 변호사가 안기부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김광일ㆍ이흥록ㆍ노무현 그리고 문재인이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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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시절 부산동물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문재인 당선인 가족.

왼쪽부터 김정숙 여사, 아들 준용, 딸 다혜씨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때는 82m의 크레인 꼭대기까지 올라가 변론했다.
주변의 만류에 “거기에 노동자가 있고 나더러 도와 달라 하는데 가봐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2002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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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당선인과 노무현 전 대통령 부산 인권변호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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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노무현이 부산에서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시절 직원들과 함께 야유회 가는 모습





2002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위본부장을 맡으며 정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한 행사에서 문재인을 소개하면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했다.

#2003년 청와대 민정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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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재한 새정부 첫 청와대 수석회의가 지난 2003년

 2월 26일 오전 청와대 집현실에서 열렸다.

회의 시작 전 청와대에서 첫 밤을 보낸  노 전 대통령이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을

 비롯한 수석들과 환담하고 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는 조건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ㆍ양말만 싸 들고 상경했다.
이후 시민사회수석ㆍ비서실장을 맡았다.

#2004년 2월 민정수석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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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민정수석을 1년만에 사임하고 히말라야 트레킹

당시의 문재인 당선인






총선 출마 압력을 받자 청와대를 나왔다.
그 사이 스트레스로 치아 10개를 뽑아낼 정도로 격무에 시달린 이유도 있었지만 그해 4월 총선에 출마하라는 당시
열린우리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도 있었다.

그러다 히말라야 트레킹 중 접한 대통령 탄핵 소식에 변호인단 간사로 돌아왔다. 



#2004년 5월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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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서 지난 2004년 4월 20일 열린 노무현대통령 탄핵 4차공개변론에

 문재인 당시 변호인단 간사가 입장하고 있다.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이 2004년 3월 12일 야당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됐지만

두달만인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다




#2004년5월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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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7월 11일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어머니

강한옥씨와 함께 금강산 온정각에서 열린 제10차 이산가족 상봉단에 참석,

이모 강병옥(가운데)씨를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탄핵심판이 기각된 뒤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
2004년 7월 제10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문재인(당시 51세) 시민사회수석은 어머니 강한옥(당시 77)씨와 함께 북한에 사는 이모 강병옥(당시 55)씨를 금강산에서 만났다. 


#2005년 1월 두번째 청와대 민정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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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5년 1월 21일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문재인 신임

민정수석비서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후 악수를 하고 있다.





2005년 다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6년 6월까지 역임했다.

#2007년 3월 청와대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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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3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과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이 집무실에서

국정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2008년 2월까지 역임하며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 




#2007년 10월 2일~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문 당선인은 2007년 10월 당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이었다.

문 당선인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컸던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북핵문제로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원칙을 단호하고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대통령의뜻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공화당 부시 행정부도 결국 대북 강경일변도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로 가닥을 잡았다”고 밝혔다.



#2009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중앙일보

2009년 6월 2일 봉하마을에서 문재인 당시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현장검증을

지켜보고 있다.


송봉근 기자




중앙일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100일째인 지난 2009년 8월 30일

문재인 당시 전 청와대 비서실장등 참여정부 인사들이 경남 김해시

 봉화산 정토원 법당에서 열린 '100재'에 참석해있다.





문재인은 노무현 국장(國葬)의 상주였다. 


#2010년 8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중앙일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야권 단일후보와 지원유세에 나선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2011년 10월 18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범외식인 10만인 결의대회' 에 참석,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문 당선인은 지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 한뒤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재단 상임이사를 거쳐 2대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011년 6월15일 『문재인의 운명』 출간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문재인을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거부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문 당선인은 당시 이 책 맺음말에서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우리야말로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해방됐지만 우리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썼다.




#2011년 혁신과통합 상임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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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30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당시 혁신과 통합 문재인ㆍ이해찬

ㆍ문성근 상임대표가 서울 여의도에서 회동하고 있다.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2011년 9월 결성된 ‘혁신과 통합’을 통해

야권대통합에 참여, 민주통합당 창당에 일조했다.


#2012년 6월 17일 대선출마선언


중앙일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 2012년 6월17일 부인 김정숙씨,

아들 문준용군과 함께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대선출마을 선언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제19대 총선(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치시작이유를 밝혔다.
문 의원은 2012년 6월17일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2012년 9월16일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선출

중앙일보


2012년 당시 민주통합당의 대선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서울지역 경선이

 9월16일 경기도 고양체육관에서 열렸다.

서울지역 경선에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2012년 7월30일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예비경선을 통과, 본 경선에 진출했다.
 9월16일에는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2012년 11월 23일 야권 단일 대선후보



중앙일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ㆍ안철수 무소속 대통령후보가 2012년

11월 18일 오후 서울 정동 달개비에서 단일화 협상 재개를 논의하기 위한

양자회동을 마친 후 밝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야권의 단일화를 위한 당시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TV 토론이 2012년 11월21일 진행됐다.
이후 11월 23일 안철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후보직 사퇴를 선언, 문재인이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




#2012년12월19일 최다 득표 낙선

중앙일보



2012년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ㆍ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12월 4일 서울 여의도 MBC 스튜디오에서방송토론을 하기에 앞서 손을 잡고

 사진찍고 있다.

이날 토론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최한 18대 대선 첫 TV토론이었다.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섰지만 역대 당선자를 능가하는 득표(1469만 표ㆍ48%)를 하고도 낙선했다.
문재인은 대선에서 패배한 뒤 2013년 펴낸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이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것을 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로 선출

중앙일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2015년 2월8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뒤 손을 들어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됐다.
10개월동안의 대표 재직기간은 수월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2014년 3월새정치민주연합으로 창당, 2015년 12월 28일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했다.
 안철수 당시 전 새정치민주연합대표는 2015년 12월13일 탈당했다.

#2016년 1월 27일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퇴

중앙일보


2016년 1월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4차

중앙위원회의에서 대표직을 사퇴한 문재인 당시 전 대표(왼쪽)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이 연단에 올라 당원들에게 인사하고있다.






문재인 대표에 대한 사퇴요구가 빗발쳤다.
‘친문(친 문재인)패권주의’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시 문 대표 사퇴 이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체제로 전환했다.

#2016년 4월13일 위기론에서 대세론으로

중앙일보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2016년 4월 14일 오전 서울 홍은동

자택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화하고 있다.

전날 치러진 4.13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 제1당이 됐다.




 


당초 100석도 힘들다던 2016년 4ㆍ13 총선에서 민주당이 123석의 제1당이 되자 문 전 대표의 위기론은 대세론으로
바뀌었다.



#2017년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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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차 박근혜 대통령 탄핵찬성 집회가 열린 지난 2월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참석해있다


전국을 돌면서 한번도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석해오고 있던
지난 2월 11일 15차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해“대통령의 조속한 탄핵을 바라는 국민들의
마음이 다시 광화문에 모였다.

민심이 바로 헌법이다.
헌재는 이 민심을 잘 받들어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며 탄핵 인용을 거듭 촉구했다


#4월3일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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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후보는 지난 4월3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19대 대통령 후보자 수도권ㆍ강원ㆍ제주 선출대회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 등을 꺾고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4월 3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진행된 더불어민주당 수도권ㆍ강원ㆍ제주 순회경선결과를 앞서 진행된 호남ㆍ충청ㆍ영남과 합산한 결과 문 후보는 누적 93만6419표(득표율 57%)로 1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결선투표없이 본선직행을 확정지었다.
2위는 35만3631표(21.5%)를 얻은 안희정 후보, 3위는 34만7647표(21.2%)를 얻은 이재명 후보였다.



#4월17일~5월2일 여론조사 1등

중앙일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1일 경기도 의정부시 중앙동 젊음의

거리에서(위),7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광주송정역 앞

광장에서(가운데),투표를 하루 앞둔 8일 오후 부산광역시 서면에서 지지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오종택ㆍ박종근ㆍ송봉근 기자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된 지난 4월17일부터 여론조사결과공표 마지막날인 5월2일까지

문재인 후보는 여론조사 1등을 한번도 놓치지않았다.



#5월9일 제19대 대통령 당선


중앙일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부인 김정숙씨와 함께 9일 오전 서울

홍은초등학교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중앙일보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이 9일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더불어민주당

개표상황실에서 승리를 확신하며 손을 들어 환호하는 지자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제19대 대통령 당선됐다.
지난 4월3일 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당시
문 후보와의 ‘59문59답’에서 58번째 질문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달라지지않을 것이 있다면” 이에 문 당시 후보는
“광화문에서 국민들과 막걸리 한 잔 하고, 주말에는 아내와 같이 시장에 가서 장을 보는 소박한 삶‘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