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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Musical

Rossini,의 생애 <세빌랴의 이발사 서곡> 외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파리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소문난 작곡가의 곡이라서 그런지 연주회장은 대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제일 앞줄 가운데 두 자리가 비어 있어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귀한 손님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나 하고

호기심에 부풀어 그 자리를 주시하였다.

 

 

  막이 막 오르려는 찰라 양복을 빼입은 두 젊은 청년이 떠들면서 들어와 앉았다.

 이들의 이야기하는 소리가 좌우는 물론 2층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 모든 사람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막이 오르고 전주곡이 끝나자 이번에는 사람들의 귀에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청년이 ‘흐윽’ 하면 옆 사람이 ‘푸ㅡ’ 하는 식으로 장단을 맞춰 코를 고는 것이었다.

 

 

  이 두 괴한(?)의 등장은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리 공연 내내 사람들의 눈총과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표는 항상 최고 자리의 것을 구입해 그런 식으로 깽판을 치는 것이었다.

 

 

  뒤늦게 이 두 젊은이는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에르베르(1791〜1864)에게 매수된 자들임이 밝혀졌다. 마이에르베르의 로시니에 대한 질투심이 그런 일을 획책케 한 것이다.

이 일을 알게 된 로시니는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두 장의 초대권을 보냈다.

 

 

  “귀하가 계획하신 대로 안 되고 매번 만원 사례가 이어지고 있으니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보내드린 두 장의 음악회 초대권을 받아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두 자리는 연주회장의 어디서나 잘 보이는 자리로 몹시 편하게 되어 있어 주무시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주회가 끝나기 전에 제가 손수 깨워드리지요.”

 

 

  로시니의 재치 있는 편지에 마이에르베르는 찾아와서 사과를 했고, 두 사람은 친해졌다.

 

  어느 날 로시니는 마이에르베르의 초청을 받아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마이에르베르의

「악마 로베르」를 관람하였다.

 

로시니는 그 중에서도 ‘En vain j'espere un sort prospere’(나는 헛되게 행운을 희망했도다)라는

테너 아리아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로시니는 마이에르베르에게 “당신이 앞으로 이 곡보다 더 훌륭한 아리아를 작곡한다면 나는 물구나무를 서서

춤을 추겠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마이에르베르는 “그래요? 그럼 어서 춤출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위그노」의

제4막이 곧 완성되니까요”라고 말했다.

 

 

 

 

 

  로시니는 “아니, 「위그노」의 제4막이요? 친구여, 감히 물어보노니 「위그노」의 제4막이 어떤 점이 특별한지

말해주겠습니까?”고 되물어 보았다.

 

 사실 마이에르베르는 「위그노」의 제4막을 아직 작곡할 생각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제4막을 곧 완성하겠다고 말했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랴. 마이에르베르는 먼산을 바라보다가

 “하여튼 기다려 보시오”고 말을 돌렸다.

 

 이런 이유로 「위그노」는 제5막으로 완성되었지만 제4막에는 뚜렷한 아리아가 없었다. 두 사람의 경쟁심리가

서로를 키워주었던 셈이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 : 낭만파 가극의 큰 깃발을 재빨리 이탈리아에서

 내건 로시니는, 밝고 기지에 찬 음악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오늘날에도 크나큰 감흥을 남기고 있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 이탈리아의 피사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도시 도살장의 감독관이자 또 지방극장의 트럼펫 주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0세 때 양친을 도와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프리넷티에게 하프시코드를, 안젤로 테세이에게 창법과 화성을 배웠다.

15세 때는 볼냐로에 있는 리세오 음악원의 마티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 별도로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조그만 가극이지만 「데메트리오」라는 곡을 작곡했으며, 그리고 이듬해에는 칸타타로 상패를 받았다.

 

 

  18세 때의 작품인 1막의 희가극 「라캄비알레 디 마트리모니오(약혼 어음)」는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어

로시니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어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상연됨에 따라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지고, 그 가극은 대단한 속도로 보급되어 갔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 20일에 로마에서 상연, 같은 해의 12월 4일에는

「오텔로」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었는데, 이들 가극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서 마침내는 빈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베토벤은 46세로, 제9교향곡 작곡에 착수하려 하던 시대로서, 그 명성은 빈은 물론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빈 사람들이 열광하는 로시니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토벤의 연주회가 로시니의 가극에 압도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으니, 얼마나 로시니의 음악이 당시의 빈 사교계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1823년 로시니는 파리를 거쳐서 런던에 갔으며, 이듬해까지 영국에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갔는데,

 런던에서는 17만 5천 프랑의 큰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극장 총지배인으로 취임했다

.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에서 상연했으며, 왕궁과 시민이 통틀어 열광했던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빈에서의 성공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슬픔의 성모(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에 완성, 이듬해 1월 7일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로시니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1855년 파리로 옮기고부터는 차츰 나빠지더니 1868년 11월 13일

파리에서 타계했다.

 

 가극 38개, 칸타타 15개 등 성악곡이 대부분이고, 기악곡은 적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윌리엄 텔 서곡」은 교향곡으로서도 훌륭하다.

 

 

  ㅡ『클래식명곡 해설』, 삼호뮤직 편집부 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