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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파스칼에 대하여

 

 

 

파스칼에 대하여

 

 

파스칼(1623∼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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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체는 비록 딱딱하고 무미건조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인간과 인간사에 대해 매우 예리한 회의를 담고 있었다.

 자신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는 일이란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나, ‘아무리 보기 흉한 짐승이나 시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정교하게 묘사한 그림을 바라보며 모종의 쾌감을 갖는 것은 인간 공통의 본성’이라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대로,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파스칼의 참신한 묘사 또한 그러한 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아렌트(H. Arendt)가 근대의 주된 분위기를 ‘회의’라고 규정했듯이, 파스칼의 목소리에도 그러한 회의적 리듬이 음울하게 풍겨 나온다.

 

 그러나 그의 회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아니다. 데카르트는 보편적 회의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는 제일원리를 도출하지만, 파스칼의 회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회의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신뢰했던 이성적 추론은 불분명한 것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무한히 거대한 우주와 무한히 미소한 입자들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어정쩡하게 부유하다가

  무한한 시간의 일직선상의 일점만을 살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우주의 쓰레기’, ‘한 개의 갈대’에 불과하다.

 

이렇듯 인간은 너무도 비참하기 때문에, 단 한 순간이라도 어떤 소일거리들에 빠져 있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이다.

 그러나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성을 놓치지 않는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한 존재이지만, 그는 ‘생각하는 갈대’인 것이다.

 그는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가 그를 짓눌러버릴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더 한층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들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정신은 그들에게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다시 말하면 비참함을 자각하는 인간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20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아는 지’를 주장했던 것과 비교할 때, 파스칼은 ‘비참함을 아는 지’를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사상들 가운데 특히 피론주의(Pyrrhonism 절대회의설)의 신봉자이다.

그의 위대함은 삶의 지독한 비참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사상은 회의주의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옹호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진정으로 알 수 없고, 어떤 정의도 행할 수 없다. ‘피레네 산맥 이편과

저 편’의 정의가 상이할 만큼, 인간에게 있어 보편적인 정의란 불가능하다.

 

오로지 신의 은총을 통해 그는 신의 신비를 알 수 있고, 비로소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은총은 성서 이론에 대한 앎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감(직관)에 의해 비로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로 하여금 신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는 그 시대 여느 철학자들과 달리 이성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감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하고, 그러한 영혼에게 내세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그러한 영혼과 내세에 대해 자신의

온 생을 바쳐서라도 열망하고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나에게 비싸지 않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 밖의 진리와 행복을 찾아 헤맨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파스칼의 경멸은 가히 지나치다 할 정도이다. 



 
그의 변신론은 전혀 철학적이지 않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부터 파스칼이 살던 당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신의 속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추론의 형식을 사용해왔다.

신의 ‘존재론적 증명’이니, ‘우주론적 증명’이니 하는 것들이 바로 이성을 사용하여 신을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들이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러한 것들을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의 언사는 어떤 종교 철학자들보다 종교적이고,

성서에 입각해있다.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다. 신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신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기독교적 신앙이어야 하는가. 왜 다른 종교는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는가.

먼저 진정한 종교는 유일신을 주장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둘 이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진정한 종교는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모두 설명하고 있어야 하며, 인간의 영혼에게 영속한 행복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를테면 메시아사상―이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충족시키는 종교는 파스칼이 보기에는 기독교뿐이었던 모양이다

 인간의 존재를 휘감아 돌고 있는 불확실성의 공기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한 쾨쾨한 냄새의 공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들을 주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신앙으로의 회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젠가 다시 신을 붙잡게 될 것인가.’ 하지만 신앙으로 회귀한 나 자신에 대한 상상 또한 그리 즐거운 것은 아니다.

세속적 정욕에 물든 것일까? 아직도 무언가를 더 탐구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나의 학적 탐구는 어느 순간엔가 슬슬 지겨워질 것 같다.

 

그 때가 되면 진정 신의 옷자락 끝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열망이 솟아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 전에 내 목숨이 신의 손에 거둬진다면….

 

이러한 비참한 심정을 떨쳐내고자 나는 그토록 무언가에 흠뻑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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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무리  슬픔에  가득  차 있어도  어떤  심심풀이에  정신이  끌리면  그  동안만은  행복하다

 

또  인간은   아무리  행복하다  할지라도  권태가  마음속에서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정념이나  오락으로

 

  심심풀이를  하거나 다른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 얼마  가지  않아  우울해지거나  불행해질  것이다.  

 

심심풀이가 없으면  즐거움이 없고  ,심심풀이가  있으면  슬픔이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기에게  심심풀이를  제공애 주는  많은  사람을  가지고, 

 

그러한  상태, 자기  자신을  놓아 둘 수 있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심심풀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어떤일에도 열심일 수가  없다.

 

 어던  사건이  일어나든가.,  또는   일어날  것으로  예상 되든가. 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든가 ----

 

어쨌든  슬퍼할  일이  없어진다면,  깊은  권태가  마음속에  일으키는  독소로  변하고   그로  인해  정신이 

 

꽉  차게  되것이다.

 

  여기에  그  위대한  영혼을  사로 잡고  그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제거하기에  충분한  하나의  배려가  있다.

 

그는  우줄ㄹ  알기  위해, 만물을  판단하기  위해,  한 나라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  이세상에  때어났지만,

 

이제는  한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에만  정신이  팔려 잇다.   그리고  만일  그가  거기가지   자신을  비하시키지  않고 언제나  건강한 

 

 상태로  잇으려고생각한다면  더  한층  어리석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성을  초월하기를  원할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  즉  그는   작은일과  큰일 ,  모든일을  할수  잇지만, 

 

또  아무  일을  할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천사도  아니고  야수도  아니며, 다만   한  인간 일뿐이다.

 

 

 

인간은   분명히   생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존엄성의  전부이며,  또  가치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의  의무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데있다.    사고의  순서는   우선  자기  자신으로  부터  시작하고, 

 

 다음에  자신의  창조주와  자신의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자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영위하는  생활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관념  속에서 

 

 가공적인  생활을  영위하려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서  남의  시선을  끌려고  애쓰고  잇다. 

 

 우리는  끊임없이   가공적인  자신의  존재를  수식하고,   도  그것을  지니고 잇고자  애스며  참돤  존재를  등한시  한다.   

 

 만일   우리에게  평정이나  관용이나,  혹은   충실등이  있으면  그런  덕성을  우리의  가공적인  존재에  결부시키기  위해 

 

그것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  덕성을  다른  존재에  결부시키려고  그것을  우리에게서  떼어버린  다음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용감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스스로  나아가  비겁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참된  자아에  만족하지  않고  때로 그것을  공허한  자아와  바꾸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허무하다는 

 

명?한  증거가  아니겟는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도  무릅써야만  비로소  명예스러운  사람이   될테니깐  말이다.

 

 우리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기  때ㅔ문에  자신이  세께에  알려지고ㅡ,  자기가  죽고  난후  이세상에  태어날 사람에게 

 

까지  자기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자신이  너무  공허 하기  때문에 

 

우리  주의에  있는  불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유쾌해지고   만족을  느낀다..

 

사람은  그가  지나가는   도시에서의  평판에는  별로  상관하지 않지만,  잠시  거기에  체류할  경우엔  그것에  상관한다.  

 

거기에는  얼마만큼의  시일이  필요한가?   우리의  공허하고  빈약한  인생의  한때.

 

 

허영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므로   군인도,  심부름군도  요리사도,  인부도  제각기 

 

그  나름대로  자만하고  저마다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을  갖기를  바란다.  철학자마저도  그것을  바란다. 

 

영예를  부정하는  논자도  훌흉하게  논했다는   찬사를  받고  싶어한다.  도  독자는  그것을  읽엇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글을  쓰는  나도  아마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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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호기심은  단지  허영에 불과하다 .  대부분 인간은  화제에  오리리기   위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

 

람들은  항해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그가  좀  것을  혼자  즐길뿐, 

 

 남에게  알리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존경 받고  싶은  욕망에   관하여.

 

오만은  비참하고,  오류를   저지를는  중에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를  사로 잡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화제에  오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생병가지도  버린다.

 

허영, 유희.  사냥  . 방문  연극. 명성의  거짓된 영속

 

당신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친구가  나에게는 없다. 

 

 

 

 

 

 

모순

 

 우리  존재에  대한  멸시  . 허무한  것에  대한  목숨의 투기.  우리의  존재에  대한  혐오.

 

 

숨은  미행은  가장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잇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이따금   역사나  전기에서  보년  나는  커다란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알려진  것을  보면  결코 완전히  감추어져  있엇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행위들을  감추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하더라도 , 조금이라도  누설 되엇다는  것은  결국  모든것을  드러내고 

 

만  셈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것들을  감추려던  생각이었기  때문디다.

 

 

재채기는   영혼의  전기능을  중단시킨다는  점 에서  생식작용과  매우  흡사하다. 

 

재채기는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디다.    인간이  고통을  견디지  못함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쾌락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고통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쾌락은   우리 자신이  요구  하는  것이므로  ...

 

이  세상의  공허함을  모르는  사람은  실로  그  사람  스스로가  공허한  것이다.     그들에게서  심심풀이를  제거해보라.  

 

그들은  권태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허무를  은연중에  느낄것이다.

 

  외냐하면  인간은  자신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심심풀이가  전혀  없는  상태에   놓이자  마자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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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

 

만일  인간이  행복하다면,  성자나  신과  마찬가지로  심심풀이를  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심심풀이로  유쾌해 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까.  아니다.  심심풀이는  다른  데서,  즉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종속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피하기  힘든  고뇌를  일으키는  무수한  사건에  의해서 

 

 혼동되기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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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

 

심심풀이는  비참한  우리를  위로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심풀이는  우리의  비참  중에 

 

가장  비참  한것이다.. 

 

 왜냐하면   심심풀이는   우리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심심풀이가  없으면  우리는  권태로워질  것이고,  이  권태는  우리에게  거기서  빠져  나갈  더욱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내  줄  것이다. 

 

그러나  심심풀이는  우리를  즐겁게  해주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

 

 

인간은  사욕에 빠졌을때 마저도 위대하여  사욕헤서  하나의  훌륭한  기준을  세울줄  알았고,  그  속에서 

 

 어떤  사랑의  일면을   마니들어  냇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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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오만은  모든  비참을  상쇄함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한다.  혹은  인간의  비참함을  감추거나  그것을  드러낼  경우에 

 

그것을  알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오만은  모든  비참을  상쇄하여  이를  제거해  버린다.  이것으  실로  이상한  괴물로서,  매우  명백한  망상이다. 

 

인간은  자기의  지위에서 떨어져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그  지위를  찾아 헤메고 잇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참  모습이다.  

 

 누가  그  지위를  찬을는지 지켜보자.

 

 

사악은  자기 편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되면  그  이치를   온갖  광채로써  장식하려고  한다. 

 

도한    사악은,  고행이나  엄격한  선택이  참된  선을  이루지  못하고  반드시 자연에  복종해야만   할  겨이우에 ,

 

  그  자연으로  다시  돌아옴을  자랑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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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성과 비참성.

 

비참함은  위대함으로부터, 또  위대함은  비참함으로부터    .. 

 

인간이 빛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더  잘  발견할 수  잉ㅅ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잇다. 

 그러므로  이낙ㄴ은  비참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간은  비참하기  때문이다. 

 이낙ㄴ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지극히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의 비천함을  전혀 보여 주지  않고  구의  뒤대성만을  너무  많이  보여 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도한  그  두 가지  측면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양쪽을  보여 주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천사와 같다고  자만심을  가져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양족을  모두  알고  있어야만  하낟.

 

그가  잘났다고  우쭐거리면  나는  그를  낮아지게  해주고,  그가  겸손하면  나는  글ㄹ  높여  줄 것디다. 

그래서  그가,  자기는  불가해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가지  그에게  반대  할 것이다. 

  나는  인간에게  찬사만을  보내는  사람이나.  인간을  비난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나,  인생을  향락하려고만  하는

  사람을  모두  비난한다. 

그리하여  나는  괴로움을  극복하면서  진리를 탐구 하려는  사람만을  인정할  것이다.

 

참된선을  추구하다가  괴오움에  지쳐  버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결국에는  구세주에게  구원을  바라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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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인간의  비열함과  위대함을  나타낸  다음에. 

 

비로소  인간은  자기의  가치를  알기를  원한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게  되엇다  왜냐하면   그의  내부에는  선을  행할수  잇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내부에  있는  비열성  까지   사랑해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을  경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을  행할 수  잇는  능력은  몹시  공허한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  타고난 능력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기도  해야  하그는  자기 내부에  있는  진리를  알 수 있고, 

 또 행복해 질수도 잇는  능력을  가지고  잇다. 

 

그러나  그가  안저ㅗㅇ되고  만족할  만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진리를  찾겠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또  나는  그의 인식이  그의  정욕에  의해  얼마나  흐려져  있는가를  알고  있으므로 

그가  진리를  찾을  수 잇는  곳에서  진리를  찾도록  그  모든  준비를  갖추게  하여 , 그가  자신의  정욕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고  싶다.    

 

  

나로  하여금  종교를 알지  못하게  한 것처럼  보이던  이  모든  모순은  참된  것으로  빨리  나를  인도해  주었다.

 

 

 파스칼( 1623-1662 )은 불란서의 명예로운천재 수학자/ 물리학자/ 신학자 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초조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가 인도한 수녀 여동생을 만나보고서 1854년11월 23일 밤 10시30분-0시30분 사이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온몸으로 체험한후이렇게 고백하였다. 

      

       **학자의 신이 아니요,수학자의 신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삭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하느님 이셨도다.

               이 확신, 이 감격, 이 기쁨 그리고 이 평화 ****

 

    이 발견은 파스칼이 빈약하게 생각해왔던 여동생 수녀를 만나 모든것을 버린 동생의

    온몸과 정신에서 평화를 발견하고 그 감격을 양가죽에 적어놓았던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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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위대한 인간도 비천한 인간도 같은 사고, 같은 불만,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은 차 바퀴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데 대해 비천한 사람은 중심에 있으므로 같은 회전에도 비천한 사람은 조금밖에

움직이지 않는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쇠사슬에 얽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있어,

그중 몇 사람씩 매일 남의 눈앞에서 학살됩니다.

 

남은 자는 그 자신의 운명이 친구들의 운명과

같으리라고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희망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기 차례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하세요.

 

이것이 바로 인간 상태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신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영혼이 육체와 같이 있다는 것도, 영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세계가 창조된 것인지,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것인지도 불가해하다.

원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가해하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첫째는 신을 찾아내고 이에 봉사하고 있는 이들. 둘째는 신을 구하려고 애쓰면서 발견하지 못한 이들.

 

 셋째는 신을 구하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않고 살고 있는 이들. 첫째 종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적합하여

 행복스럽고, 셋째 종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어긋나 불행하며,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부합한다.

 

 신을 직감하는 것은 심정이고 이성은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고 심정에 직감되는 신.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머리가 발보다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사고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런 것은 돌이 아니면 짐승일 것이다.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분쇄하는 데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분쇄한다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잘 사고하도록 애써 보자. 도덕의 근본은 바로 여기 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금수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은 천사의 흉내를 내려는 자가 금수의 흉내를 내곤 하는

데서 비롯한다.

 

 너무나 자유스럽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모든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에 의하여 성립되고, 온갖 도덕은 사욕과 은총에 의하여 성립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래와 같은 교훈을 주었을 뿐이다.

 즉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노예이고, 장님이고,

 병자이고 불행한자이고, 죄인이다.

 

나는 그들을 방해하고 빛을 던져주고 축복하고 구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증오함으로써, 또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를 따라오는 데서 완성된다.

 

 인간이란 분명히 생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존엄성의 전부이며, 또 가치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의 의무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데 있다.

 

 사고의 순서는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다음에 자신의

창조주와 자신의 목적으로 향해야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결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댄스를 하거나,

현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유희 등을 생각하고, 또 전쟁을 하거나 왕이 되는 일 등만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왕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비참.

 

 심심풀이는 비참한 우리를 위로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심풀이는 우리의 비참중에 가장 비참한 것이다. 왜냐하면 심심풀이는 우리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심심풀이가 없으면 우리는 권태로워질 것이고, 이 권태는 우리에게

거기서 빠져나갈 더욱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 내줄 것이다.

그러나 심심풀이는 우리를 즐겁게 해주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

 

 신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이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에 직감되는 신, 이것이 곧 신앙이다.

신앙은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추리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는 신앙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종교는 신앙을 가지는 데만 추리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추리는 결코 거기까지 인도해 주지는 못한다.

 

 신을 아는 것과 신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가로놓여있는 것일까?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구하려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내 사고의 규제에서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영토를 소유하더라도

그 이상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주는 공간으로써 나를 포용하고, 하나의 점인 양 나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로써 우주를 포용할수 있다.

 

 사고.

 

 인간은 사고로 인해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고는 그 본성으로 보아 매우 훌륭하며,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결함이 없는 한 사고는 결코 경멸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고는 그 보다도 더 우스운 것은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결함을 또한 가지고 있다.

본성만으로 사고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

그 결함만으로 평가하면 사고는 또한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인간의 위대성.

 

 인간의 의대성은 인간의 비참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자연스러운 것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비참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오늘날 인간의 본성이 동물의 그것과 별차이가 없다고

해도, 인간이 옛날에는 인간 특유의뛰어난 본성으로부터

타락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폐위된 왕이 아니라면, 누가 왕이라는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사람들은 파울루스 에밀리우스가 집정관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집정관이 된 것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지위가 영구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페르세우스가 왕위에서 쫓겨난 것에 대하여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지위는 영속적인 것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남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입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눈이 세 개가 아닌 것을 결코 불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다.

 

 이러한 이성과 정욕의 내면적 투쟁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두 파로 갈라놓았다, 한편은 정욕을 버리고 신이 되기를 원하고, 또 다른 편은

 이성을 버리고 짐승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느 편도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성은 여전히

정욕이 비천하고 부정한 것이라 하여 정욕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정욕은 그것을 버리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목적에 의한 것으로, 이 경우 그는 대단히 위대하다.

다른 하나는 다수성으로서 판단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말이나 개의 성질을, 그 달리는 것이나 도망치려는 본능으로써 판단하려는 경우와 같다.

 

 이 두 갈래의 길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각도로 판단하게 하고, 그 때문에 철학자들은 심한 논쟁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양편이 서로 상대편의 역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한편은 말한다.

 

 "인간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이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은 말한다.

"인간이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한다면 그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A.P.R.위대성과 비참성.

 

 비참함은 위대함으로부터, 또 위대함은 비참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어떤 비참함의 근거를 위대함에 두었기 때문에 더욱 적절히

 비참함을 결론짓고, 다른 사람은 비참함 자체에서 위대함을

 결론지었기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위대함을 결론지었다.

 

한편이 위대함을 나타내려는 모든 말은, 다른 한편이 비참함을

 결론지으려는 논의에 도움을 줄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비참하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끝없는 원을 그리며 서로가 서로를 뒤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빛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참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간은 비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지극히 위대한

 것이다.

 

 철학자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외부로 향하려는 마음에 충만해 있다.

우리의 본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복을 자기의 외부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정념은 그 대상이 나타나 자극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눈을

 밖으로 향하게 한다.

외부의 대상은 스스로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호소하게 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이 "너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너희는 그곳에서 너 자신의 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을 믿는 자는 가장 허망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을 알 수 있다. 이 매개자가 없으면 신과의 교제는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신을 알 수 있고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헛된 증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예언이 있다.

 

그것은 분명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이루어졌고 그것이 진실임이 실제로 증명되었으므로, 이 진리의 정확성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있어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우리는 신을 안다.

그를 떠나서는 성서도 없고 원죄도 없으며, 약속대로 강림하신 필요한

 매개자 없이는 인간이 신을 완전하게 증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도덕과 교리를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신을 증명하고 도덕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의 참된 신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동시에 우리의 비참한 상태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신은 바로 우리의 비참을 구원해 줄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죄악을 분명히 알게 됨으로써만 신을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알게 된 사람들은,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숭배한 데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해와 감상]

 

 '팡세'는 완성된 책이 아니다. 파스칼이 '기독교 변증론'을 쓰기 위한

재료로 기록한 924편의 단장들을 그가 죽은 뒤에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병고와 금욕의 4년 동안에 수시로 씌어진 정신의 산물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천재가 무조건 성서의 기적을 믿고 오직 '기적만이 종교의 기초다'라고 단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무한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알 수가 없다.

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신의 본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내기를 걸라.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하는가?

그대가 만일 존재한다는 편에 걸어 그대가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진다 하여도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은 존재하다는 편에 내기를 걸라"고

 파스칼은 권고하고 있다.

 '팡세'는 단장(斷章)임에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의 존재에 대해서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팡세'를 '미완성의 성전' 이라 하는 까닭도 여기 있으리라.

 

 파스칼이 '팡세'에서 의도한 바는 기독교야말로 확실성과 명증(明證)을 지니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나 신성(神性)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나 이단자 및 비신앙자들을 논박하는 데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논증하는가? '팡세' 첫 머리에 나타나 있는 대로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한 정신' - 이 두 가지의 종합적 방법에 의해서였다.

 

 '기하학적 정신'은 논리로써 증명하고 결론을 지으며, '섬세한 정신'은 직관적으로써 원리와 질서를 찾아내어 사람들을 설득한다.

 

 파스칼은 지식과 현세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병고를 지닌 채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서른 다섯 살 때였다. 그때부터 4년, 39세로 죽을 때까지

 여기 저기 쓴 것이 이 프랑스 정신의 최고봉 '미완성의 성전'이라 불리는 '팡세' - '기독교 변증론'이다.

 

 이 책의 테마는 단장 60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제1부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 제2부 :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인간의 행복, 또는, 제 1부 : 인간의 본성이 타락되어 있다는 것 -

(본성 그 자체에 의하여), 제2부 : 구속자가 존재한다는 것(성서에 의해서)"이 그것이다

 

 

 

 

포르루아얄 시절

 

아버지 에티엔 파스칼은 클레르몽페랑에 있는 세무 법원 판사였다.

1626년 어머니가 죽고 1631년 파스칼의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다. 존경받는 수학자였던 에티엔은 파리로 옮겨온 뒤에는 자식 교육에만 전념했다.

 

2세 아래인 누이 자클린이 문단에서 신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 파스칼은 수학분야에서 그에 못지않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1640년 그는 종합 사영(射影) 기하학에 관한 지라르 데자르그의 저서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원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을 썼다.

 

이 책은 수학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합리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 같은 사람조차도 시샘할 정도였다.

1642~44년 파스칼은 아버지(1639년에 루앙 시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음)의 세금 계산을 도우려고 계산기를 착안하여

발명했다.

 

파스칼의 동시대인들은 이 기계만으로도 파스칼이 명성을 누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기계는 최초의 디지털 계산기였기 때문이다.

 

1646년까지만 해도 파스칼 일가는 겸손을 신앙으로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가톨릭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으로 파스칼은 보다 심오한 종교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아플 때 두 사도를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포르루아얄 수도원 원장이었던 생시랑 신부의 수도원 생활과 사상에 얀센이 창시한 얀센주의의 엄격한 도덕과 신앙을

도입했다.

 

 얀센주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7세기 형태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주의였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신의 예정설을 채택했으며, 구원의 열쇠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얀센주의 종파의 본산이 되었다.

 

속세에서 신에게로 완전히 전향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첫번째 사람은 파스칼 자신이었으며, 그는 1646년 가족들까지

 설득하여 얀센주의적 신앙생활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오랫동안 가족의 정신적 조언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세계와 금욕 생활 사이에서 겪는 내적 갈등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금 과학적 흥미에 빠져든 파스칼은 갈릴레오와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기압계 원리를 발견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의 이론을 검증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 파리와 클레르몽페랑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서 기압을 측정하여 대기압에

 관한 실험을 검증하고 확대시켰다.

 

 이 실험결과는 유체동역학과 유체정역학에서 좀더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지는 데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실험 과정에서 파스칼은 주사기를 발명했으며, 파스칼의 원리(밀폐된 유체에 주어진 압력은 그 압력이 주어진

범위에 관계없이 모든 방향에 같게 전달됨)를 바탕으로 유압 프레스를 고안해냈다.

 

 1647~48년 진공문제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더욱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과로로 병이 났고, 의사들은 더 이상 연구에 몰두하지 말고 기분을 전환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파스칼은 여전히 과학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기간(1651~54)에 그는 액체평형에 관해서, 공기의 무게와 밀도에 관해서 또 산술 3각형에 관해서 논문을 썼다.

특히 산술 3각형에서는 확률 계산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1653년말에 종교적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파스칼은 1654년 11월 23일 밤에 '은총의 불'을 경험하고,

이것이야말로 새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의 계시라고 믿었다.

 

이듬해 1월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비록 은둔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고, 저서를 발표할 때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가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와 〈명상록 Pensees〉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두 저서를

 집필한 것은 그가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입문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

파스칼이 신부들의 도덕과 정책에 대해 쓴 〈루이 드 몽탈트가 시골의 한 친구와 예수회 신부님들에게 보낸 편지

 Lettres ecrites par Louis de Montalte a un provincial〉(18통, 이 저서는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는 앙투안 아르노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앙투안 아르노는 교리논쟁에 불을 붙인 저서를 발표함으로써 신학 교수단의 심판을 받은 얀센주의의 옹호자이자

예수회 교단의 적이었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 실린 편지에서 파스칼은 예수회의 해이해진 도덕률을 비난했는데, 도덕률의 해이는

예수회가 포르루아얄과 벌인 논쟁 과정에서 드러난 약점이었다.

파스칼은 예수회 수사들의 대화와 저서를 자유자재로인용하여, 때로는 비웃고 때로는 분개하면서 그들을 깎아내리고 있다.

 

은총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2통의 편지에서파스칼은 중재자의 지위를 제안했는데,

이 덕분에 포르루아얄은 1668년 '교회의 평화'에 서명함으로써

얀센주의자들이 시달림을 받아온 종교적 갈등에 잠정적인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인기는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 그 비결은 우선 그 형식 덕분이다.

과장되고 장황한 수사학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다양하고 간결하고 꼼꼼하고 명확한 문체로 바뀌었다.

프랑스 문학 비평의 창시자인 니콜라 부알로가 인정했듯이 이 작품은 프랑스 근대 산문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이 상류사회와 개신교도 및 회의주의자들한테까지도 인기를 얻은 것은 예수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그들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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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영국 국교를 위협할 때마다 이 책을 더욱 폭넓게 읽히게 했다.

하지만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가톨릭 교회에 도움을 준 측면도 있다.

 

가톨릭은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자체의 약점을 없앴기 때문이다.

그리고 167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가 직접 나서서 교리 논쟁 과정에 제기된 명제의 절반을 폐기했는데,

이때 폐기된 명제들은 파스칼이 비난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매년 종교의 회복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앙투안 아르노의

 논문 〈영성체를 자주 행하는 문제에 대하여 De la Frequente communion〉(1643)에 제시된 사상이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 이바지했다.

 

아르노는 이 논문에서 방탕한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짓더라도 잦은 영적 교감으로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항의했다.

그후 이 생각은 프랑스 교회가 1685년 낭트 칙령(프랑스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칙령)을 폐지한 데 대한

반발을 느낄 때까지 아무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명제로 남아 있었다.

 

예수회 교단이 주로 교회 당국에 대한 복종과 정통성에 관심이 있는 반종교개혁을 표방하는 반면,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는 기독교적 사랑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의 결합을 강조하는 정신적인 접근방식을

옹호했다.

 

파스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상에 따라 불공평하게 적용되는 도덕률의 이중 기준을 거부하고, 강제성이 없는 권고와

강제성을 가진 훈계의 구별을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삶과 밀착되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복음주의자의 이상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했다.

 

이런 의견은 결코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파스칼은 모든 이기심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신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완전무결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에 대한 갈망을 떠나서는 어떤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의 열렬한 확신을 부여했다.

 

 파스칼이 생각하기에 도덕성과 영성(靈性)은 결코 떨어질 수 없었다.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서는 파스칼 자신의

정신적 발달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처음 몇 통의 편지에서는 조롱하는 말투가 자비롭다기보다는 건방지고 신랄하지만, 그후부터 그의 종교의식은 갈수록 점점 더 세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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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파스칼은 마침내 기적을 비롯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증거에 대한 명상 결과인 〈그리스도교 변명

 Apologie de la religion chretienne〉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 저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1657년 여름부터 1658년 여름까지 그는 대부분의 기록과 단편을 모았는데, 나중에 편집자들은 이것을

〈명상록〉이라는 부적절한 제목으로 출판했다.

 

 〈명상록〉에서 파스칼은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인간을 위대함과 비천함이 뒤섞인 이해할 수 없는 혼합물, 본질적으로 진리와 최고선을 갈망하면서도 진실할 수 없고 최고선에 도달할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철학이나 세속주의가 설명하지못하는 이런 모순을 설명하는 종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회의론자의 무관심은 '내기'를 통하여 극복되어야 한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즉,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회의론자가

신을 믿는다 해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회의론자는 신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도달해야 한다고 파스칼은 주장했다.

예수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알리러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색인 : 회의주의, 파스칼의 내기). 이 저서의 제2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우화적 해석론을 성서의 상징에 적용시키고

있다.

즉 율법학자가 쓴 구절을 재검토하고, 진정한 종교의 지속성과 모세의 과업,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역할에 관한

 증거를 개관한 다음, 마지막으로 원시 교회와 예언의 성취를 묘사하고 있다.

 〈명상록〉은 영성에 관한 논문이다. 파스칼은 성인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개종시키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파스칼의 〈명상록〉은 시대의 시련을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주로 자신이 아는 몇몇 개인들을 상대로

쓴 것이다. 그는 방탕한 친구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저자들(미셸 드 몽테뉴, 회의론자인 피에르 샤롱,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인 피에르 가생디, 영국의 정치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한테서 설득력 있는 논거를 찾았다.

 

파스칼에게 회의론은 하나의 단계에 불과했다.

특히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비참함은 오로지 타락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있으며 인간이 타락의 결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는 파스칼의 주장과는 별도로, '인간은 무한히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파스칼의 또다른 주장을 활용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명상록〉의 제1부를 위해 제2부를 희생했고,

철학을 지키기 위해 성서 해설을 놓쳤다.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파스칼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제2의 아담이었다.

 

끝으로 파스칼은 자신의 심리적 분석이 그 자체만으로는 '부조리의 철학'을 배제하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부조리의 철학'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계시에 관한 '일련의 사실'로 이런 분석들이 수렴하는 것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수렴은 너무 놀라운 것이어서, '괴로워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qui cherche en gemissant)에게는

 신의 섭리로 보일 정도다.

 

 

 

 

 

 

파스칼은 다시 과학 탐구에 몰두했다.

 

그 계기는 '포르루아얄의 신사'들이 〈기하학원론 Elements de geogmetrie〉을 쓰는 데 그의 도움을 요청했고,

둘째, 당시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던 문제인 사이클로이드 곡선(한 원이 미끄러지지 않고 일직선 위를

 굴러갈 때, 그 원둘레 위의 한 점이 그리는 곡선의 궤적)에 대해 그가 발견한 것을 발표하라는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금 명성을 얻은 그는 자부심을 느꼈지만, 병에 걸리자 이전의 마음가짐을 되찾았고,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성직자 찰스와 존 웨슬리 형제가 나중에 그토록 높이 평가하게 된 〈개종을 위한 기도 Prayer for conversion〉를 썼다.

 

 병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그는 그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 금욕적이고 헌신적인 생활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제문집'(교회 당국의 요구에 따라 누구나 성사[聖事]를 받기 전에 반드시 서명해야 하는 얀센주의의 5가지 명제를 비난한 서류)이 불러일으킨 논쟁에 참여했다.

포르루아얄의 신학자들과 의견 차이가 심해지자 그들과 관계를 끊지는 않았지만 그는 결국 이 논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파스칼은 1662년 8월 19일 끔찍한 고통을 겪은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 고통은 아마 위궤양이 악화되어

암세포가 뇌척수막까지 전이한 데 따른 뇌척수막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죽을 때 얀센주의자가 아닌 교구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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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파스칼은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서는 유창한 시사 평론가의 면모를 보였고, 〈명상록〉과 개인 기록에서는 영감을 받은 예술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풍부한 재능 때문에 혼란된 삶을 살았다. 그가 미분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의 지나치게 경직된 정신적 기질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의 일부는 인간과 신의 신비로운 관계를 마치

 기하학 문제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가 재능의 다양성에서 얻은 이익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종교적 저술이 그토록 엄밀한 것은 과학적인 훈련 덕분이다. 구체적 개념에 대한 그의 애착은 〈명상록〉에서

 그토록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맹렬한 공격 방법을 거부하겠다는 그의 결심에는 물론, 〈시골친구에게 쓴 편지〉에

가득 차 있는 일련의 인용문에도 드러나 있다.

 

 Macropaedia(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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