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 앞자락을 스쳐지나간 바람 때문이었을까.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에서 나는 문득 ,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이내 그것은 내가 가을을 감지하는 오랜 습성이며 가을이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할 상실감임을 알아차린다.
날아가버린 풍선을 쫓는 아이처럼 고개를 젖혀든다.
잎을 떨구고 선 미루나무 빈가지가 회색 하늘을 세세히 빗금질 하고 있다.
시작이 없는 끝과 끝이 없는 시작이 있을 건가.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끝을 마련하는 양보와 아름다움이 잔잔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이때쯤 .. 북녘을 날으는 기러기처럼 더 없이 수척해져서 가벼워지고 싶은 욕심,
이 가난한 욕심으로 해서 풍요로울 수 있는 사람도 이 계절엔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아직은 열기를 품고 있는 서늘한 바람이 완고히 예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러는 잊어버리고 때로는 아무 일 없다며 묻어두었던 사람과 사랑의 일을 들추어서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암시는 아닐까.
패독산 열탕으로 치유할 수 없는 오한과 신열에 몸을 떨며 철저히 혼자서 치러야 하는
오랜 지병, 이름도 없는 이 해묵은 병은 가을을 건너가기 위한 지독한 아픔이고 슬픔일런지 모른다.
어느날 , "쾌유"라고 등을 두드리며 가을이 가는 나루터에 섰을 때 ,
자책과 회오(悔悟)로 닦여진 거울 앞에 서서 한결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된다.
이 엄중한 가을의 묵시(默示) 앞에서 가을은 조용히 그 모두에게 용서를 빌라고 다그친다.
용서를 빌고 용서받으며 .. 깊은 자성(自省)의 계단을 내려갈수록 고독은 더욱 깊어진다.
끝내 , 정직해질 수밖에 없는 명징성(明澄性)으로 가을은 4月보다 잔인하다. 거리가 붐비고 있다.
지표(地表)의 끝으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난민처럼 도심으로 돌라온 것이다.
여름밤의 화려한 꿈들을 뜨겁게 노래하던 사람들의 모습에서 탈진의 피로가 보인다.
화려한 축제의 끝이 그러하듯이 여름은 광란의 얼룩으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가을은 두 손을 낮게 내밀며 기쁨과 노여움 , 사랑과 미움 , 행복과 불행 ,
만남과 이별 , 희망과 절망 , 믿음과 배신 , 그리움과 망각 , 때로는 발을 적시며
회한(悔恨)하고 건너 뛰면서 환호하기도 했던 일상의 징검다리를 다시 놓아 다독거려 준다.
뉘우침이 있어 기도에 들게 하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주저 없이 참회(懺悔)의 서문을 써야 할 시간이다.
탈색되지 않는 주서(朱書)로 오로지 진실만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자문하여 보자.
어떤 누구의 서명이라도 받아낼 수 있는 자신이 섰는가.
교활했던 눈빛과 이즈러진 웃음부터 지워야 할 것이다.
과장된 억양과 분장을 지우고 박수 갈채가 끝난 객석으로 내려서는 주인공이 되어 겸허하고
허허로운 가슴을 열어 보일 일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잃는다고 생각하는가.
둘러봐도 무채색의 도심에 가을은 명도(明度) 높은 채색을 짙게 내리고 있다.
따뜻한 체온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약속처럼 또 가을은 오고 용서 빌게 하고 용서받고 싶은
간절함으로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있다.
잘못이 있어 다행으로 여겨지는 것 또한 가을이 지닌 영원한 귀향성(歸鄕性)이다.
영문 모르고 돌아선 사람의 기별을 기다리며 오늘도 굴원(屈原)의 시를 읊조릴
이유가 있어 이 가을도 나는 행복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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