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배우로서의 오들 헵번 】: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의 본 이름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Audrey Kathleen Ruston)'인데~ 예명으로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영국의 영화배우. 전성기 때 당대 최고의 미녀였으며 연기력도 뛰어났다.
또한 노년기에 아름다운 선행을 펼쳐 더욱 더 유명해진다.
당시 주로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에 호리호리하고 지적이며 고전적인 미인으로 등장하여 당대 최고의 미인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현재까지도 영원한 미의 상징으로 불리우고 있다.
세기의 미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정도로 그녀의 사진이 21세기의 휴대폰
광고에 쓰였을 정도 20세기 최고의 미녀라 불리지만 본인은 외모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털어놓기를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이 각졌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고…'라고 했다고..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벨기에 태생이며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남작 부인(Baroness Ella van Heemstra)' 사이에서 태어나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를
옮겨가며 지냈다.
아버지는 오드리를 낳은 후 가정을 버리고 방랑,헵번이 영화배우로 성공한 이후에 잠깐 다시 만난게 전부라고 한다.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냈고, 그때 살던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으로 악명 높은 아른헴이었다.
실제 자원하여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 전투에 휘말린 적도 있다고... 당시의 처참한 경험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 만큼은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할리우드판〔전쟁과 평화〕에 출연하긴 하지만 전투 장면에서는 출연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당시 16세의 간호사였던 헵번이 치료한 어느 영국군 부상병과 20여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부상병은 007 시리즈 감독 '테렌스 영(Terence Young)'. 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고 전쟁 중에 갖은 고생을 다하며 영양 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종전 후 영국에 돌아왔을 무렵 전쟁 난민 지원 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어릴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 키가 너무 커져(170cm) 포기했다고 한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Audition)'을 거친 후 발탁되어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더불어 첫 할리우드 주연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 여우상까지 받을 정도로 연기력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이때 원래 '프랑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이 '캐리 그랜트(Cary Grant)'와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였으나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에게 '프로젝트(Project)'가 넘어갔고, '조지 스티븐스(George Stevens)'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가 감독하게 된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Gene Simmons)'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할 수 밖에 없었다.
하룻밤에 찍는다는 설정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 나온 아이디어,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은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 사에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예상대로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은 오스카 주연 여우상을 수상했고,[이하생략]
【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 】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연인이 있었으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유명해지면서 스케쥴이 바빠지자 헤어진다. 이후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페러(Mel Ferrer)'와
사귀게 되는데 '멜 페러(Mel Ferrer)'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성질도 더러웠지만
'헵번(Hepburn)'을 구워 삶았다.
결국 '멜 페러(Mel Ferrer)'는 세 번째 부인을 버리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과 네 번째 결혼을 하는데 , 이 결혼은 아무리 봐도 '헵번(Hepburn)'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유명한 여배우가 한물간 이혼남 배우랑 결혼하는 셈이었으니...
'헵번(Hepburn)'은 아이를 좋아하여 많이 가지려고 했는데 첫 번째 임신 때 사고로 유산한 후 이후, 잦은 유산을 했고, 아들 하나로 끝났다.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멜 페러(Mel Ferrer)'의 바람기 때문에 결국 '헵번(Hepburn)'은 아들 하나를 낳고
이혼하였다.
이후로 '헵번(Hepburn)'은 '멜 페러(Mel Ferrer)'를 피했으며,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 페러(Mel Ferrer)'는 장수하다가 2009년
90살로 사망, 두 번째 결혼은 이탈리아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
하는데, 재혼 시 나이가 40세였는데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후로도 임신에 노력했으나 결국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했다.
남자 복은 지질이도 없는지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도 바람둥이였고, 참고 살다가 결혼 후 13년만에 이혼한다.
그래도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와는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이후 사망 시까지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Robert Wilder)'와 동거했으나 결혼을 하진 않았고 아이는 없었다. (동거 시작했을 때 나이가 50대였으니...).
【 유니세프(unicef)' 대사로서의 오드리 헵번 】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unicef)' 대사로서 인권 운동과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가하고 제3 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 않게 유명하고 또한 아름다웠다.
특히 1992년 암 투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를 방문하여 봉사 활동을 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런 모습을 보인 분이라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의 아버지가 나치 동조자였다고 까는 소수의 사람들은 십자 포화를 TOT로 맞게 된다. 흡연으로 인한 결장암으로
사망.《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보여준 긴 담배 파이프가 유명하며 아직까지도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파이프라고 하면 통한다,
【 유엔 아동 기금(國際聯合兒童基金,)United Nations International Children's
Emergency Fund) 】
【 TOT(Time on Target / 동시탄착사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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