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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Pablo de Saras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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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기교·아름다운 음색·풍부한 레퍼토리 겸비

  낭만주의 시대 많은 음악가에 영감·자극 일으켜

 

  ‘비르투오소(virtuoso)’는 ‘덕이 있는’, ‘고결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17세기에 예술이나 도덕에 대해서

 특별한 지식을 갖춘 탁월한 예술가나 학자에게 붙여진 말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음악에 국한하여 표현기술이 탁월하고 예술의 기교가 뛰어난 음악가를 지칭하게 되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비르투오소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작곡이자 연주자였다.

 

 바이올린을 능수능란하게 표현해냈던 그의 능력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으며, 영국의 유명한

 음악 평론가 버나드 쇼는 사라사테를 “세상에 바이올린을 위한 음악을 쓴 작곡가는 많지만 진정한 바이올린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바이올린 작품들은 비평가의 펜을 무색하게 만든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사라사테의 화려한 기교와 낭만주의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아름다운 음색, 완성도 높은 그의 작곡실력과 독일 악파뿐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악파의 작품까지 섭렵한 그의 레퍼토리의 폭은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음악가들에게 큰 영감과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라사테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듣고 많은 작곡가들은 그를 위한 바이올린 작품을 썼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 랄로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과 <스페인 교향곡>,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과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가 사라사테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만을 위하여 쓴 작품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라사테는 당시 존재만으로도 많은 음악가들의 롤모델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레퍼토리를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사라사테는 1844년 스페인 팜플로나(Pamplona)에서 태어났다.

사라사테는 모차르트와 유년 시절이 매우 흡사하다.

음악가인 아버지를 두었으며, 어린나이부터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널리 날렸다.

 

또한 모차르트가 어릴 적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트와네트와 조우했던 것처럼 사라사테 역시 10살 때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와 조우하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사라사테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지역의 바이올린 교사에게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어 여덟 살 때 코루냐에서 처음으로 리사이틀을 개최하였다.

 

이때 한 부유한 음악 애호가의 눈에 띄어 그의 후원으로 마드리드의 저명한 바이올린 교수

 마누엘 로드리구에즈 사에즈 밑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사라사테는 마드리드에서도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열 살 때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여왕으로부터 바이올린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선물받기도 하였다.

 

  그 후 열두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다. 열일곱 살에는 작곡 콩쿠르에

 참가하여 음악원 최고의 영예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졸업 후 작곡보다는 연주로서 활동 범위를 넓혀간다.

열여섯 살이 되던 1860년, 사라사테는 파리에서 일찍이 데뷔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이듬해에는

영국 런던 무대에도 진출한다.

뿐만 아니라 유럽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남아프리카, 아시아까지 연주 여행을 다녔다.

 

  이렇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일생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08년 9월 20일,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대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