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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Thin Lizzy & Gary Moore- Black Rose, Still In love With You

 

 

   
Black Rose

 

 

 

 

 

씬 리지Thin Lizzy  "  Black Rose"

 

 

 

 

Gary Moore - Still got the blues (1990년)

 

Live at the National Stadium Dublin, 1975.

  

 

Still In love With You

 

 

Think I'll fall to pieces
If I don't find somethin' else to do.
This sadness never ceases.
Woman, I'm still in love with you.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면 난 산산조각버릴 것 같아요
이 슬픔은 전혀 그치질 않는군요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

 

My head it keeps on reelin'
It's got me in a crazy spin
Ooh, darlin', darlin', darlin', darlin'
Is this the endI'm still in love with you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미치도록 괴로워요
이것이 끝이란 말인가요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

 

Some people say time has a way of healing
And it can dry all the tears from your eyes

Oh, but darlin' they don't tell you 'bout this empty feelin'
And I cannot disguise it

 

어떤 이들은 시간이 상처를 치유하고
당신 눈가의 눈물도 모두 마르게 될거라 하더군요
하지만, 이 텅 비어버린 내 마음을 당신께 말할 수 없어요
내 심정을 숨길 수가 없어요

 

After all that we've been through
I try my best, but it's no use
I will always keep on lovin' you
Is this the end
I'm still in love with you.

 

 

지금껏 헤쳐왔음에도 불구하고 난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난 당신은 계속 사랑할거예요 이것이 끝인가요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

 

Now that it's all over
Woman, there is somethin' I think you should know
And maybe baby, you might think it over
Just one more time before you go


이제 모두 끝났나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다시 생각해봐요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만

 

Call on me baby If there's anything I can do for you
Call on me baby
Help me see it through


전화해 주세요.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전화해 주세요.
내가 난관을 극복힐 수 있도록

 

I'm still in love with you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답니다.

 

 

 

 

 

 

 

약 10년간의 밴드활동과 록계에 미친 영향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씬 리지(Thin Lizzy)는 평가절하 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실력을 갖추고 뛰어난 음악을

들려주었던 그룹이다. 1969년 밴 모리슨(Van Morrison)의 밴드였던 뎀(Them)의 전 멤버

 에릭 벨(Eric Bell)은 브라이언 다우니(Brian Downey : 드럼)에게 밴드 결성을 제의한다.

 

 

 

 

그룹의 리더이면서 보컬리스트이자 베이시스트였던 필 리놋(Phil Lynott)은

스키드 로우(Skid Row) 라는 그룹에서 게리 무어(Gary Moore) 와 함께 밴드 생활을

하다가 자신만의 밴드를 결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데 그 역시 브라이언과 함께 제의를 받았다.


뎀의 전 멤버였던 에릭 릭슨(Eric Wrixon : 키보드)도 초대를 받아서 이들은 4명의

라인업으로 씬 리지를 탄생시킨다. 씬 리지라는 이름은 원래 [Dandy]라는 만화책에

 등장하는 Tin Lizzie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에릭 벨이 만화책을 보다가 이 이름을 그룹의이름으로 제안하게 되어 채택되었다.

1970년 이들은 싱글 "The Farmer"를 발매하는데

매우 실패한 작품이었고 이로 인해 에릭 릭슨은 팀을 탈퇴한다.


500장이 나온 이 최초의 판은 283장이 팔렸는데, 나머지는 수거되어
녹여져서 다른 레코드의 발매를

 위해 재활용되었다.이 앨범은 씬 리지의 팬들에게 대단히 희귀한 음반으로 값진 평가를 받고 있다.

 

 

 

B면에 수록된 "I Need You"라는 곡은 스튜디오를 빌려주는 사람이 대가로 대신

 수록하게 한 곡으로전혀 씬 리지답지 않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1971년 3인조가 된 이들은 첫 번째 full-length 앨범인 [Thin Lizzy]를 발매하며,

 1972년 [Shades of A Blue Orphanage]를 발매하였다.

 

밴드의 배경이었던 사이키델릭한 블루스를 들려주었던 이 두 앨범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72년 소속사는 아일랜드 전통의 곡을 커버한 "Whiskey in The Jar"를

멤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매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곡은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영국에서까지 커다란 히트를 기록한다.

 

 

 

1998년엔 메탈리카(Metallica) 가 이 곡을 다시 리메이크하여 역시 큰 인기를

 모았는데,덩달아서 씬 리지의 음악까지 관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72년 정도에 있었던 일인데, 딥 퍼플(Deep Purple) 의 리치 블랙모어(Ritchie Blackmore)는

 자신의 밴드에 싫증을 느끼고 필에게 밴드를 결성할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밴드의 이름까지 지어놓고 몇 곡의 레코딩까지 들어갔었지만, "Whiskey in The Jar"가

성공을 거두자 리치는 다시 자신의 밴드로 돌아가고 필 역시 씬 리지에 전념하게 된다.

 

 

 

브라이언 다우니(드럼), 브라이언 로버트슨(기타),

필 리뇻(베이스), 스콧 고햄 (기타)


훗날 Phil은 만일 그때 이 곡의 히트가 없었다면 씬 리지는 해산을 맞았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1973년 초 이들은 [Funky Junction : A Tribute to Deep Purple]이라는 앨범을 발매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들을 보면 전부 딥 퍼플의 곡은 아니다. 게다가 필의 보컬도 아닌

그는 딥 퍼플 의 보컬리스트였던 이안 길런(Ian Gillian)과 스타일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들은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른 상태였기 때문에 잠시나마 생활비를 벌고자

어느 사람의 부탁을 받고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원곡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졸작이었고

 매우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집의 의미 정도만 담고 있는 앨범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공격적인 사운드의 앨범 [Vagabonds of The Western World](1973)가 발매된 후

 에릭은 밴드를 떠난다.

 

 

 

 

 

 

이제까지 에릭의 밴드로 불려도 좋을 만 했던 씬 리지는 그가 떠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필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후임 기타리스트로는 게리 무어 가 들어오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곧 탈퇴한다.

 

얼마간의 멤버 교체를 거쳐 이들은 브라이언 로버트슨(Brian Robertson)과

스코트 고험(Scott Gorham)을 받아들여 트윈 기타 시스템을 구축한다.

 

 

 

 

Brian Robertson 브라이언 로버트슨 
1974년 [Night Life], 1975년에 [Fighting]을 발매하면서 사운드의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75년 이들은 미국 투어에 나서는데, 같이 공연했던 바크맨-터너 오버드라이브

(Bachman-Turner Overdrive)의 프로정신을 보고 자신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들과의 공연은 씬 리지가 보다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았음인지 1976년에 발매된 [Jailbreak]는 싱글 "The Boys Are Back in Town"과

함께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노동 계급에 대한 찬가였던 위의 노래는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까지 호평을 받은 이 앨범은 씬 리지의 최고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다.

같은 해 이들은 컨셉트를 지향한 앨범 [Johnny The Fox]를 발매한다.


밴드는 미국 투어를 계획하나 언제나 Bar에서 문제를 일으키곤 했던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손을 베이는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하여 임시로

다시 게리 무어 가 들어오고 1977년 이들은 퀸(Queen) 과 함께

Queen Lizzy Tour라는 이름으로 미국 공연을 한다.

 

 

 


 

공연 후반부터 구상 중이었던 앨범 [Bad Reputation]이 1977년 발매된다.

프로듀서 토니 비스콘티(Tony Visconti)와 함께 작업한 이 앨범은

 영국 차트 4위까지 오르는 호조를 보였다.

 

 

 

 

 

1978년 더블 라이브 앨범인 [Live And Dangerous]가 발매되었다.

런던과 토론토에서의 실황을 엮은 이 앨범은 이전 스튜디오 앨범과는

 

또 다른 흥분을 안겨준 앨범으로 특히 "Still in Love with You"는 씬 리지의

전 곡을 통틀어서 가장 이상적으로 녹음된 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즈음에 밴드는 약물과 알코올 문제로 위기를 맞게 되는데 특히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매우 심각하여 다른 멤버들과 자주 다퉜으며

길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결국 그는 1978년 해고되고

 그 자리는 다시 게리 무어 에 의해 채워졌다

 

 

.

 

필과 스코트, 게리와 브라이언 다우니로 재정비된 씬 리지는 1979년 [Black Rose]를 발매한다.
아일랜드 고유의 색채를 많이 드러낸 이 앨범에는 한 남자의 약물과 알코올에 대한 극복 의지를 그린

 "Got to Give It Up"이 수록되어 있다.

 

 1979년 투어에서 게리 무어는

공연에 갈 비행기를 놓쳐서 세 멤버만이 공연에 참가하였다.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해 게리 무어는 해고를 당하고,

이후 수많은 기타리스트의 교체가 뒤따르게 된다.

1980년은 이들에게 있어서 변화의 해였다.

 필은 결혼을 하게 되며 첫 번째 솔로 앨범 [Solo in Soho]를 내놓았다.

솔로 앨범이었지만 이 앨범에는 씬 리지의 멤버들이 참여하였으며 마크 노플러

(Mark Knopfler) , 휴이 루이스(Huey Lewis) 등의

거물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앨범을 더욱 빛내 주었다.

 

1981년 키보디스트 대런 와튼(Darren Wharton)을

기용하여 5인조 체제로 재정비한 이들은 앨범 [Chinatown]을 발매하였다.

 

 기타리스트 스노위 화이트(Snowy White)는

 뛰어난 기타 실력에도 불구하고 쇼맨쉽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무렵 필의 약물 의존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같은 해 이들은 [Renegade]를 발매하였다

 

 

 

 

이 앨범에는 "Renegade", "Hollywood", "No one Told Him" 등의 수작이

수록되었음에도불구하고 팬들과 평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는 실패했다.

이 앨범 발매 후의 투어에서는 필의 약물 과용으로 인한 불안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투어 후에 스노위는 팀을 떠난다. [Renegade]와 필의 솔로 앨범의 실패로 밴드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이들은 존 사이크스(John Sykes)를

영입하여 앨범 [Thunder And Lightning](1983)을 발매하였다.


정성을 들인 이 앨범과 그에 따른 투어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들은 이제 고별 공연을 열게 되는데 이 실황 앨범인 더블 라이브 앨범

 [Life](1983)는 이전까지 씬 리지를 거쳤던 전 멤버가 모두 출연하여

 "Still in Love with You"를 비롯한 예전의 곡들을 불렀다.


이후 필의 약물 남용은 더욱 심각해져 갔으며 이제는 공공연하게 드러낼 정도였다.
그의 아내는 견디다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그를 떠나게 된다. 존 사이크스 역시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 에 가입하기 위해 밴드를 떠났다.

 

 

 

고햄

 

 

 

 

Thin Lizzy

 

 

 

밴드의 핵심 인물인 필 리놋은 1949년생으로 마지막 여름의 밤을 잡고(8월 20일 생이다) 태어났다.

필 리놋의 어머니 Philomena(Phyllis) Lynott은 아이리쉬계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여식으로

 보다 더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런던으로 가서 일했는데 어느 날 매혹적인 남미계 흑인을 만나

아름다운 원 나잇스탠드를 치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만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여식이었던 그녀는비록 사랑하지 않는남자의 씨앗이지만 지우지 않고 낳는다.

만약 그분께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다면 필 리놋은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필 리놋은 이렇게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무지막지한양육비를 벌기 위하여

필립(필의 애칭)을 자신의 고향인 더블린으로 맡기고 다시 런던으로 가서 열심히일했다.

 

 이런 고로 필립은 본의 아니게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글구 자신보다

나이가 10살 정도 많은 사촌들 사이에서 바둥 거리며 그다지 밝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필립이 처음 밴드에 들어간 것은 10대 초반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동네(더블린)에서

  잘나갔다는 로칼 밴드 Black Eagles에 가입하여 노래를 부른다. 당시에 필립은 베이스를 연주하지 않고

노래만 전문적으로 불렀다고 한다.

 

블랙 이글스에는 브라이언 다우니라는 드러머가 있었는데 이 녀석은필립의 학교 친구로 이후

 리놋이 죽는 날까지 그와 찰거머리처럼 붙어 지낼 운명에 처하게 된다.

 

블랙 이글스는 그 동네에서 나름대로 잘 나갔다고 한다.

당시 필립의 보컬 실력은 지금과는 달리하이톤에 능통했고 상당히 히스테리컬 했다고 한다.

 

 필립이 18세 되던 날 그는 돌연히 블랙 이글스를해체시키고 Brendan "Brush" Shiels' 라는

자가 이끄는 Skid row라는 밴드에 들어간다.

 

(세바스찬 바하가 있던 스키드 로우와는 동명의 밴드).

밴드의 리더인 브러쉬라는 자는 필 리놋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당시 우리들은 멤버들에게 공짜로 대주는 그루피들이 필요했죠.

소위 빠순이들 말입니다. 노래를 잘하고못하고는 사실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들이 원하는 프론트맨은  잘 생긴 사람이었죠.

 

그래서 필립을 뽑은 것인데~~ 실제로 그가 들어온 후부터 그루피들이 많아졌다

1968년에 스키드 로우에는 새로운 기타리스트가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게리 무어였다.

 

게리 무어의가입은 스키드 로우의 사운드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필 리놋에겐 일종의 위기의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왜냐면 게리 무어는 기타만 잘 치는게 아니라 노래도 졸라 잘하는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 리놋은 노래 연습을 무리하게 한 듯하다.

 

단순히 얼굴만 잘 생긴 보컬이 아니라 노래도 잘 하는 보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목에서 피를 토할 듯 악을 쓴게 분명하다.

 

1969년에 스키드 로우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인디 레이블에서 첫 싱글 New Faces, Old Places를

발표하는데 이것은 명실공히 필 리놋의 첫 번째 스튜디오 음반(비닐)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싱글발매 후 필 리놋은 편도선 제거 수술을 위하여 밴드를 떠나는데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권위 있는 몇몇 평론가들에 의하여 필 리놋이 자신의 음악을 위하여 팀을 떠났다고 하며

게리 무어가 그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게리 무어와 필 리놋의 우정을

미화(??)하기 위한 소설이자 픽션, 허구이다.

필 리놋이 떠난 후에 게리 무어가 스키드 로우의 보컬을맡아 앨범을 냈는데

그 음반을 들어보면 해답이 나온다.

 

어쨌거나 스키드 로우에서 축출된필 리놋은 음악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때리고 있었는데이를 측은하게 여긴 브러쉬가 그에게 베이스를 사사해주기 시작한다.

 

브라이언은 필립의 목소리가 별루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의 노력과 열정을 가상하게 여겨

다시 가담했고 이후 Pat Quigley, Joe Staunton같은 자들을 규합하여 Orphanage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브라이언은 이 밴드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한다.

"이 밴드에서 사용했던 멜로디들은 대부분 초창기 씬 리지의 음악에 삽입되어 있답니다.

확실히 이 밴드는 씬 리지의 전신이었죠~~" 브라이언은 계속 말한다.

 

"당시 우리들은 히피사상과 마리화나,약물등에 심취되어 있었지요, 음악적으로는

전혀 개선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죠.

그래도 생각해보면 즐거웠던 시절이에요"

 

1969년말에 필 리놋과 브라이언 다우니는 에릭 벨이라는 기타리스트를 만나고

기존의 멤버들을 해고한다.

 

 사실 에릭 벨은 필 리놋에겐 별루 관심 없었고브라이언 다우니의 빼어난 드럼 실력을 보고

 씬 리지에 참여했다고 한다.

1970년초 밴드는 이름을 Thin lizzy로 개명하고 키보드주자'Eric Wrixon'를 수혈하여 본격적인 프로 밴드의

길을 걷게 된다.

 

 

 

 

 

 

 

 

 

1970년 7월 31일 씬 리지는 The Farmer라는 싱글을 공개하는데 이것은 명실공히

씬 리지 최초의 음반이었다.

 

 이 시점에서 키보드 주자 에릭이 밴드를 떠나고 3인조가 된씬 리지는 일주일에 4~5일 연주를 강행하며

 자신들을 알리는데 이 시기에 대하여 씬 리지의로드 매니저였던 Peter Eustace이라는 자가

한 마디 했는데"솔직히 씬 리지 초창기 시절을 회상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에릭 벨 밖에 없어요.

 

씬 리지는 사실 에릭의 밴드였죠~~ 솔직히 필 리놋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지미 헨드릭스,제프 벡과 비견할 만한 에릭 벨의 기타 솜씨는 정말 굉장했죠

 

 

 

 

1970년말에 씬 리지는 Decca Records와 싸인을 하고 이듬해인

1971년 4월에 데뷔 앨범 Thin lizzy를 공개한다. 이 앨범에 대하여

에릭 벨이 한 마디 했는데 중요한이야기니까 모두 귀를 쫑끗 세우고 들어보자

 

그때만 술회하려면 짜증이 절로 나네뇨,,, 'Scott English'라는 프로듀서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그 녀석은 약간 음치였죠,,, 우리들이 튜닝을 제대로 맞추지도 않았는데

녹음을 해서 여러 모로 작업을 힘들게 했어요~~ 레코딩 또한 아주 미숙했죠~~

우리들은 당시 녹음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로 지쳐 있었죠"

 

 

 

씬리지의 두 번째 앨범 "Shades of a Blue Orphanage"는 1972년 3월에 공개되고,

1972년에 인상적인 유럽 투어를 시작하는데 그들의 매니저였던 Ted Carroll이 차분하게 회상을 한다.

 

"우리들은 산기슭에서 LSD를 처먹고 축구를 하며 오후를 보내곤 했죠. 그러다가 공연때가 되면 호텔로

돌아와서 재충전을 하고,, 무대에서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대략 45살 정도 먹은여자가 광란의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요.

결국 그녀는 촛불로 자위행위를 하고 말았답니다.

 

쩝 - ㅜ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요??

우리들은 아직도 믿을 수 없어요,,,

그놈의 LSD가 당체 뭔지 초창기의 씬리지는 이토록 떠들썩한 실로 요란한 빈수레 밴드였으며 막가파식 스타일의

광적인 무대는 그들의 경력을 통틀어 이례적인 일로 구분이 된다.

 

 대부분의 락 밴드와 마찬가지로씬 리지는 값진 히트 싱글을 보유하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재정상태는 위태위태했다. 그나마모국인 아일랜드에서의 인기 덕분에 간신히 파산 위기를

 면할뿐 영국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불우했다.

 

 밴드는 돈을 벌기는 커녕 점점 적자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돈이 떨어질 만하면 고향인아일랜드로 돌아와 투어를 해서 근근히 연명하는 처지에 시달리고 있던 씬 리지,,

 

 그들은 영국 시장을공략하기 위하여 갖은 짠돌을 굴렸지만 세상 일은 그들의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1972년말에이르러 씬 리지는 슬레이드의 서포트 밴드로 기용되어 투어를 하는데

 그들의 소속 회사인 데카 레코드가묘안을 낸다.

 

그것은 투어와 동시에 싱글을 공개한 것인데 이것은 에릭 벨과 브라이언 다우니는 말할것도 없고

 밴드의 리더인 필 리놋에게 적잖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었다.

 

데카가 선택한 싱글은

필 리놋이 만든 창작곡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민요였던 "Whiskey in the Jar"였다.

물론 씬 리지가 커버한 버전은 원래의 민요와 많이 다르게 편곡된 것이긴하나 씬 리지 측으로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일임에 틀림 없다.

 

 아티스트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출신 성분의 메리트를끄집어내어 상업적으로 이용한 레코드 회사의

사업수단에 씬 리지 측은 크게 실망을 했지만아이러니하게도 이 싱글은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 그들을 가난의 늪에서구출할 수 있었다.

 

 "Whiskey in the Jar"는 아일랜드 차트 넘버 원에 무려

17주간이나 머물렀으며 영국에서도 6위에 랭크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Thin Lizzy의 3집 "Vagabonds of the Western World"가 공개된 것은 1973년 9월이었고

멤버들은 앨범의 내용물에 꽤나 흡족했다.

이하는 드러머 브라이언 다우니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했다

 

"필립의 진일보한 작곡력과 조금 더 호전적으로 변한 우리들의 연주가 좋은 앨범을 만든 것 같아요.

앨범 수록곡중 The Rocker는 그 당시 씬 리지의 모든 것을 하나로 압축하는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요."

 

 

 

 

 

1974년 1월에 Eric Bell이 밴드를 떠나고 곧바로 Gary Moore가 투입되어 아일랜드와

영국 투어에 기용되지만 그 역시 4월에 밴드를 떠나게 된다. 게리 무어의 탈퇴 사유는 거의

매일밤 계속되는 음주와 다음날 숙취의 콤보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4개월 동안 음주와 숙취가 계속됐어요~~ 더 이상 씬 리지에 있다간 죽을 것 같더라구요

결국 Thin Lizzy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구하는데 약관 17세의 Brian "Robbo" Robertson과

William Scott Gorham이 그들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씬 리지의 사운드가 정립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브라이언 로버트슨과 스캇 고햄의 트윈 리드 기타 사운드야말로 씬 리지의 사운드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말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씬 리지는 Decca와 계약이 만료되고 새로운회사인 Phonogram과 계약을 체결한다.

들의 통산 4번째 정규 앨범인 "Night Life"는 1974년 11월에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도 못하고 예술성 또한 높게 평가되지 못했지만

밴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면에서 커다란 의의를 둘 수 있겠다.

 

 

 

 

 

1975년 3월 Thin Lizzy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Bob Seger와 Bachman-Turner Overdrive의

오프닝으로 공연을 했다. 스캇 고햄의 말에 따르면 이 공연은 그들로서는 처음 서는 대형 무대에서

행해졌으며 그만큼 메인 밴드들의 매니저로부터 간섭과 위협(??)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공연시간을 철저하게 엄수하길 강요받았다고 하는데 스캇 고햄은 그들의 행위로부터

프로 정신을 새삼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영국으로 돌아온 씬 리지는 더욱 타이트한 밴드로

 

각광 받았고 동년 9월에 발매했던 통산 5집 "Fighting" 앨범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씬 리지는 12월 31일에 거행된

Great British Music Festival에 참전(??)하기도 했다.

 

 

 

 

 

씬 리지의 통산 6집 "Jailbreak"가 발매된 것은 1976년 3월이었다. 스캇 고햄의 말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이르러 브라이언 로버트슨과의 트윈 기타가 보다 명료하게 개선되었다고 한다.

 

전 앨범인 "Fighting" 에서 대충 대충 제시되었던 쌍기타의 이론들이 현실적으로 정립되었으며

그들 이전에 트윈기타 사운드를 선보였던 Wishbone ash의 양날개를 무참하게 짖이겨 놓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씬 리지의 트윈 기타 사운드는 위시 본 애쉬의 그것에 비하여 확실히 더 하드하고 공격적이다.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곡은 역시 "The Boys Are Back in Town"을 들 수 있겠다.

생전의 필 리놋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알려졌던 이 노래는 동년 4월에 싱글로도

발매되어 영국 차트 8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을뿐만 아니라

 

미국 차트에서도 20위권 안에 올랐다고 한다. 앨범 역시 처음으로

100,000장을 팔아치워 드디어 밴드의 주머니는 불룩해졌다고 한다.

 

 

 

 

 

 

전작 "Jailbreak"가 발매된지 정확히 7개월후인 1976년 10월,씬 리지는 7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Johnny the Fox"를 발매하는데이 작품은 "Jailbreak"의 이상적인 후속타로서 씬리지를 행운의 절정에

오르게하였다.

 

 앨범은 영국 차트 12위에 랭크되었고 11월과 12월에는 전미 투어가 잡혀 있었는데,

이 무렵 씬 리지는 또다시 골치아픈 해프닝으로 인하여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 해프닝이란 다름이 아니라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술집에서 싸움을 하다가 깨진

병에 손이 작살나서 기타를 연주할 수 없게 된 사건이다.

 

 손이 작살난 후 브라이언 로버트슨은의사로부터 재기 불능의 판정을 받고 공연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물론 그의 손가락은 얼마후 만화처럼 재생된다)브라이언 로버트슨의 대타로는 다시 게리 무어가 기용되어

1977년에 씬 리지는 퀸의 서포트 밴드로 미국 공연을 하게 된다.

 

 

 

 

 

 

게리무어는 투어 말미가 되자 또다시 Thin Lizzy를 떠나고 남겨진 3인은 8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Bad Reputation"을 제작하게 되는데 모든 작업은 1977년 4월과 6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이 앨범에는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밴드로 다시 돌아와 참여하긴 하나 그는 이제 멤버가 아니라 한낱 세션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본앨범의 자켓을 보면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사진이 배제된채 3인의 얼굴만 나와있다.

세션의 설움을 느껴보라

9월에 "Bad Reputation" 이 발매되고, 영국 차트 4위로 급등했다.

 

이 무렵 부터 씬 리지는 서서히 비평가들과 팬들,매스 미디어,동료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밴드로 성장했지만 호사다마랄까?? 필 리놋이 서서히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필 리놋은 1977년을 전후하여 자기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마약의 노예가 되어갔다.

 

그들의 투어 매니저 Frank Murray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 당시 우리들은 너무나도 많은 음주,담배,코카인을 비롯한 각종 마약에 찌들어 있었는데

필 리놋은 한발 더 나아가 진정제까지 복용했답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새벽 5시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진정제를 먹고 잠들면 정신을 아주 못차렸죠.

 

결국 우리들은 강제로 그를 버스에 태워 다음 도시로 가는 짓을 반복했죠.

그 결과, 그는 거의 항상 지저분한 상태였고, 호승심에 들떠있었죠"

라이브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Peter Eustace 또한 한 마디 했다.

"필 리놋은 코카인과 드럭을 비롯한 각종 마약을 찾기 전에는 공연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1978년 6월 "Live and Dangerous" 가 발매되었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스튜디오에서

가공하여 만들어진 라이브 앨범이라고 한다.

 

1978년 여름 투어는 브라이언 로버트슨이 참여한마지막 공연으로 멤버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

 

이하는 브라이언 다우니의 이야기다.

"브라이언 로버트슨은 뮤지션이라기 보다는 전사에 가까웠죠.

그는 항상 뼈가 부러져 있고,어딘가 잘려있고, 멍들어있고, 아킬레스 건이 잘려있었어요.

 

 그가 왜 그런 인생을 사는지는오직 신만이 아시겠죠?? 그와 함께 공연을 치룰 때마다 불안해했던

 우리들의 마음을 당신은절대 모르실거에요. 정말이지 그 새끼는 진짜 다루기 힘든 놈이었어요

 스캇 고햄 또한 한 마디 한다.

 

"브라이언 로버트슨은 정말 굉장한 기타리스트였어요.

저는 그와 함께 연주했을 때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필 리놋은 항상 어떤 이유를 갖다대서 그를 조롱하였고,끝내는 저까지 꼬득여서 그를 해고하도록 동의하게 했어요"

자 이제 문제의 브라이언 로버트슨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생각해도 저는 정말이지 통제불능의 완벽한 또라이 새끼였어요.

저는 항상 술에 쩔어 있었고, 졸라 위력적인 뽕을 빨고 있었죠.

 

저는 다혈질이었고, 아주 쉽게 흥분해서 사고를 쳤어요.

마치 다이나마이트가 '뻥' 하고 터지듯 말이죠.

일단 술과 마약에 취하게 되면 그때부턴 도무지 제어가 안되더라구요~~"

 

가을에 접어들어 씬 리지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기타는 필 리놋의 오랜 친구이자 씬 리지에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소방수 게리 무어가 맡았고 드럼은 과로로 지쳐 쓰러져버린

브라이언 다우니 대신 이언 길런 밴드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Mark Nauseef가 맡았다.

 

이 무렵의 이야기를 게리 무어로부터 들어보자

"밴드는 LA에서 드러머 오디션을 행했는데 꽤 괜찮은 드러머가 하나 보이더라구요.

이름이 테리 보지오라고 하더군요~~ 근데 이 녀석은 우리들이랑 핀트가 좀 안맞았어요.

 

보지오는 마약도 하지 않구, "좆,씹,개,뻑" 이런 말도 하지 않구, 한 술 더떠 투어할 때 마누라를

항상 옆에 끼고 다니길 원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다른 밴드로 가보라구 말하구

이안 길런 밴드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던 Mark Nauseef를 드러머로 기용한 것이죠"

 

 

 

 

 

 

 

투어가 마쳤을 때 게리 무어와 Nauseef는 L.A로 돌아갔고, 잔여멤버들은 런던으로 귀환하여

다음 앨범을 제작했다.

 

 필 리놋과 스캇 고햄은 환골탈태한 브라이언 다우니와 규합하여, 1979년 4월에

통산 10집 "Black Rose" 앨범을 공개했는데 이 앨범이 바로 게리 무어가 전곡에 참여했던 씬 리지의

유일한 앨범이다. 앨범에 참여한 게리 무어는 미국 공연 또한 참가하는데, 이하는 게리 무어의 이야기다.

 

"상황은 점점 안좋게만 변해갔죠. 필 리놋은 점점 이상해져갔어요.

 그는 공연 자체 보다는 공연 후의뒷풀이에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죠. 모랄까?

 그는 언제부터인가 음악을 진지하게 접근하려 하지 않고

즐기려고만 하더라구요. 나는 점점 더 그와 일하기가 힘들어지더라구요.

 

어느 누구도 그를 호텔에서끄집어낼 수가 없었어요. 때문에 항상 우리들은 공연 시간을 맞출 수 없었죠.

스캇 고햄은씬 리지를 가리켜 가장 프로답지 않은 프로밴드라고 비아냥 거리곤 했어요"

게리 무어와 필 리놋 사이의 마찰은 7월에 극도로 가열되었고, 결국 게리 무어는 투어 도중 팀을 나가 버렸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드라구요. 어느 누구도 필 리놋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정말 누군가 나를 해고시켜주길 절실히 원했어요."

게리 무어의 공백은 Midge Ure라는 기타리스트로 교체되었고,

9월 일본 공연에는 또다른 기타리스트 Dave Flett을 추가하여 아이언 메이든같은

트리플 기타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런 상태에서 Ure는 몇몇 곡에서 키보드를 연주했다고 한다

 

 

 

 

1980년 성 발렌타인 데이때, 필 리놋은 그의 14달 된 딸인 사라의 어머니인 Caroline Crowther와

결혼했다. 결혼식의 압권은 신부 아버지인 엔터네이너 Leslie Crowther의 낭독이었다.

"사위 녀석이 그러더라구요~~ 제 딸내미를 자신에게 줄 수 없냐구요

 

전 그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죠~~ 야 이놈의 새끼야, 넌 이미 내 딸을 두 번이나 임신시켰자너 - ㅜ"

레슬리의 말대로 캐롤라인은 결혼 당시 둘째 Cathleen을 임신 중이었고,

그녀는 5개월 뒤에 태어났다.

필 리놋의 결혼식에 즈음하여, 씬 리지는 그들의새로운 기타리스트의 이름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은 Terrence Charles "Snowy" White 로서Peter Green, Al Stewart, Cliff Richard,

그리고 Pink Floyd 등 다양한 뮤지션들의 세션맨으로 활동한전력이 있다.

 

또한 씬 리지는 새로운 멤버를 영입했는데, 그는 바로 키보디스트 Darren Wharton이다.

1980년 4월에는 필 리놋의 첫 번째 솔로 앨범 "Solo in Soho"가 발매되었고 5월에는 아직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신작 "Chinatown" 투어를 펼쳤다.

 

투어는 형편없이 무력했고 대부분의 비난은 스노위화이트에게 쏟아졌다.

스노위 화이트는 대단한 기타리스트였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액션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들의 통산 10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인 "Chinatown" 10월에 발매되었고

"Killer on the Loose"가 싱글로 발매되어 제법 히트를 쳤다. 1981년 Vertigo 레코드사는

"The Adventures of Thin Lizzy" 라는 제목의 컴필 앨범을 발매하여 영국에서 골드를 획득했다.

 

 

 

 

 

씬 리지의 11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Renegade"가 발매된 것은 1981년 11월이다.

"Chinatown"과 마찬가지로 "Renegade" 역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하나 처참한 상업적인

실패를 맛보았고,  평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팬들로부터도 초기작들에 비하여 많이 외면받게 되었다.

 

홀대받은 이유를 분석해보자면 씬 리지의 사운드가 너무 당시의 트랜드였던 헤비메탈과 팝뮤직을 따라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골수 팬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새로운 팬들 또한 흡수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필 리놋의 마약의존도는 점점 더 심각해져갔다.

1982년 거행된 "Renegade"는 사운드 면에서나무대장치적인 면에서나 차이나타운 시절보다 향상되었는데 

좋은 면이 생긴 반면 나쁜 면도 속출하였다.

 

이하는 당시 엔지니어 Eustace의 말이다

"우리들의 콘서트장에는 항상 경찰들이 오곤 했죠.

 

그들은 마약 거래를 하고 있는 관객들을 찾곤 했어요.

그 와중에 필 리놋은 계속 약에 쩔어있었고 우리들은 경찰 몰래 마약 거래자들로부터 약을 구해 필 리놋에게

주었지만 필 리놋이 계속해서 약을 원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 시점에서 스노위 화이트가 탈퇴하고 (필 리놋에 의한 해고이지만 그 자신도 원하고 있었던)

1973년 이후로 밴드의 매니저로 군림했던 Chris O'Donnell마저 탈퇴했다.

크리스는 밴드가 점점 악화되어가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하는 그의 말이다.

"Chinatown은 거대한 쓰레기이고, Renegade 역시 마찬가지이다. 씬 리지는

한때 유망한 밴드였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볼품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필 리놋은 두 번째 솔로 앨범 "The Philip Lynott Album"을 내놓았는데 이때가

1982년 10월이었다 . 이 작품은 나약하고 감성적인 한 바보의 흐리멍텅한 앨범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Renegade" 앨범의 참패와 더불어 필 리놋과 씬 리지 양자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신 리지는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한 장의 앨범과 하나의 투어를 기획하게 된다.

사실상 파산 직전에 처해있던 밴드는 찬밥,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의 매니저인

Chris Morrison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 시절에 신 리지에 들어가는 돈은 1년에 500,000 파운드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의 스텝들은돈 한푼 받지 못한 노예에 가까웠죠. 그들의 임금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어요.

사실 저는지금(1993년)도 신 리지의 매니저를 하고 있지만 지금은 겨우 연간 50,000파운드밖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당시 신 리지가 얼마나 무절제한 사치생활을 했는지 이제 알 수 있겠죠??"

 

 

크리스는 "Thunder and Lightning" 투어를 고별공연으로 정하고 티켓 판매를 증가시킨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들의 공식 스튜디오 음반으로는 마지막인 "Thunder and Lightning"이 공개된 것은1983년 3월이다.

기타리스트는 그 유명한 John Sykes로 대체되었다.

아마도 이 앨범은 1976년이후로 가장 좋은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차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4위에랭크되었으니까 "Black Rose" 이후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셈이다. Farewell Tour 또한대단했다.

 

 모든 티켓이 동이 날 정도였다. 앨범이 대박 터졌을 뿐만 아니라 공연까지

성황리에 끝나 신 리지는 가까스로 죽음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83년 10월 6일 공개된 실황음반으로 필 리놋 생전 최후의 씬 리지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3년 해머스미스 구장에서 펼쳐졌던 고별 콘서트를 담은 것으로 지금까지

씬 리지를 거쳐갔던 기타리스트들이 대거 출동하여 많은 화제를 빚었다.

 

 원래는 더블 앨범으로출시되었지만 국내에는 85년에 side c와 d면만을 발췌하여 축소 발매되었다.

사유는 국내소비자들의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이라는 실로 웃지 못할 이유라고 북클릿에 쓰여 있다.

 

 

 

 

씬 리지 해산후 마지막 3년 동안 필 리놋의 헤로인양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결국 필 리놋의부인은 딸 사라를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이 와중에도 필 리놋의 음악적 갈망은 간절하게이루어져서 1984년 로렌스 아처, 마크 스타인웨이와 함께

그랜드 슬램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지만이 밴드는 레코드 계약을 따내지 못하고 필 리놋의 헤로인 포스는

 절정에 달해버렸다.

 

마크 스타인웨이의말에 의하면 필 리놋은 리허설 기간 동안 2시간 내내 똑같은 프레이즈를 연주하고

그 사이에 가사를까먹었으며 거기에 대해 태클을 걸면 신경질을 내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부루털함

 노출했다고한다.

 

 1985년 들어 필 리놋은 게리 무어의 Run for cover 앨범에 참여하여 Out in the fields를

같이 만들었고 그랜드 슬램을 위해 만든 곡인 Millitary man을 이 앨범에 수록했다. 앨범은 영국

차트 5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하지만 필 리놋의 건강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1985년크리스마스 필 리놋은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고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1986년 1월 4일 안타깝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인은약물 과용에 의한 심장마비(Heart attack)라고 하는데 사실 그를

죽인것은 약이 아니라 바로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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