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gedy
Here I lie in a lost and lonely part of town
난 잃어바린 고독한 도시의 한 모퉁이에 서 있어요
Held in time in a world of tears I slowly drown
시간에 붙들린 채 눈물의 세계로 천천히 빠져들고 있어요
Going home I just can't make it all alone
집으로 가야 해 더 이상 나혼자 해낼 수 없어요
I really should be holding you holding you
나는 정말 당신을 잡았어야, 잡았어야 했는데
Loving you, loving you
당신을 사랑했어야. 사랑했어야 했는데
Tragedy when the feeling's gone and you can't go on
비극이에요 그 감정들이 사라지고 당신이 나아갈 수 없을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to lov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Tragedy when you lose control and you get on soul
비극이에요 당신이 자제심을 잃고 또한 어떤 열정도 갖지 못할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besid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곁에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Night and day there's a burning down inside of me
밤낮으로 나의 내면에선 불타는 것이 있어요
Burning love with a yearing that won't let me be
나를 가만히 두지않는 열망으로 불타는 사랑이 있어요
Down I go and I just can't take it all alone
내려 가야해 그리고 더 이상 나혼자 해낼 수 없어요
I really should be holding you holding you
나는 정말 당신을 잡았어야, 잡았어야 했는데
Loving you, loving you
당신을 사랑했어야. 사랑했어야 했는데
Tragedy when the feeling's gone and you can't go on
비극이에요 그 감정들이 사라지고 당신이 나아갈 수 없을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to lov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Tragedy when you lose control and you get on soul
비극이에요 당신이 자제심을 잃고 또한 어떤 열정도 갖지 못할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besid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곁에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Tragedy when the feeling's gone and you can't go on
비극이에요 그 감정들이 사라지고 당신이 나아갈 수 없을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to lov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Tragedy when you lose control and you get on soul
비극이에요 당신이 자제심을 잃고 또한 어떤 열정도 갖지 못할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besid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곁에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Tragedy when the feeling's gone and you can't go on
비극이에요 그 감정들이 사라지고 당신이 나아갈 수 없을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to lov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Tragedy when you lose control and you get on soul
비극이에요 당신이 자제심을 잃고 또한 어떤 열정도 갖지 못할 때
It's tragedy when the morning crise and you don't know why
그건 비극이에요 새벽의 여신이 울고 당신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It's hard to bear with no-one beside you you're going nowhere
그건 참기 힘든 거예요 곁에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해요
1946년생인 배리 깁(Barry Gibb)과 1949년생 쌍둥이 형제인 로빈 깁(Robin Gibb), 모리스 깁(Maurice Gibb)으로 조직된 이 3인조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뒤, 1958년부터 ‘Brothers Gibb’의 머릿 글자를
따 ‘B.G.'s’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레코드를 발표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음악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던 이들은, 비틀즈(The Beatles)의
전세계적 성공에 큰 자극을 받아 1966년 영국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영국에서 매니저 로저 스틱우드(Robert Stigwood)를 만난 이 3형제는, 곧바로 그와 계약을 맺고 빈스 멜루니
(Vince Melouney), 콜린 피터슨(Colin Petersen) 등 2명의 멤버를 더 가담시켜 완전한 밴드 포맷을 짰다
1967년, 새로운 비지스가 발표한 첫 싱글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이
영국에서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하자 ‘Holiday’, ‘To Love Somebody’, ‘Massachusetts’ 등의 후속곡들이 줄줄이 히트대열에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특히 ‘Massachusetts’는 비지스 최초의 영국차트
1위곡이었다).
게다가 데뷔앨범 [The Bee Gees 1st]는 미국에서도 차트 7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며 비지스의 명성을 미국에서도
널리 떨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로도 비지스의 성공가도는 ‘World’, ‘I've Gotta Get A Message To You’ 등의 잇단 대히트로 거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9년 발표된 더블앨범 [Odessa]는 결과적으로 밴드의 균열을 야기하게 되는데, 밴드의 리더였던 배리 깁이 이 앨범을 통해 다소 실험적인 비전을 표출하자 평소부터 비지스의 음악성이 못마땅했던 빈스와 콜린이 탈퇴를
선언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전부터 솔로활동에 뜻을 두고 있던 로빈 깁마저 팀을 떠나는 상황에 처하자 비지스는 사실상 와해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남겨진 배리와 모리스는 2인조 진용으로 어찌어찌 [Cucumber Castle]이란 앨범을 발표하긴 했지만,
결국 1970년 로빈이 다시 팀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서야 비지스의 온전한 컴백이 성립될 수 있었다.
배리, 모리스, 로빈의 3인조 라인업으로 다시 돌아온 비지스는 일단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를
미국차트 넘버원에 올려놓으며화끈한 복귀 신고식을 치른 뒤, 한동안 성공적인 활동을 영위하다가
197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며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대단히 현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창 폭발 직전에 있던 디스코의 열기를 지근거리에서 체득할 수 있었고, 1975년 앨범 [Main Course]에서부터 그러한 성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앨범에서는 ‘Jive Talkin'’이 차트 정상에 오르는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물론 비지스의 야심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76년 ‘You Should Be Dancing’이란 곡을 또 한차례 넘버원에 올려놓으며디스코의 슬슬 선두주자로 부각되기
시작한 비지스는, 1977년 전세계 극장가를 석권한 대흥행작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영화음악을 맡으며 드디어 필생의 대박을 터뜨리고야 만다.
‘Stayin' Alive’, ‘How Deep Is Your Love’, ‘Night Fever’(모두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다) 등
비지스를 대표하는 대히트곡들이 이 사운드트랙을 통해 배출되었으며,배리 깁의 닭살 돋는 가성 창법이 디스코의
상징처럼 부각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사운드트랙 앨범은 그 해 그래미의 ‘Album Of The Year’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즈음 비지스는 애지중지하던 동생 앤디 깁(Andy Gibb)의 가수 데뷔를 적극 지원하였고, 앤디 역시 형들의 막강한 후광을 업고 넘버원 히트곡들을 양산해내며 세계적인 아이들 스타로 부각되었다.
한편 비지스는 1979년에도 비슷한 성향의 앨범
[Spirits Having Flown]을 발표하고, 넘버원 히트송 ‘Tragedy’를 배출해 내며 디스코 붐으로 인한 이득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이들도 다소 침체기를 맞게 되는데, 그 사이 배리 깁은 작곡가로 활동하며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를
통해 수많은 히트곡들을 빚어내는 수완을 발휘하였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밴드의 침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1988년에는 그토록 아꼈던 동생 앤디가 약물중독으로 30세의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까지 겪게 된다.
1997년에야 앨범 [Still Waters]로 플래티넘을 획득하며 왕년의 위신을 회복한 비지스는, 같은 해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는 감격을 누렸다.
2001년에도 이들은 [This Is Where I Came In]을 차트 16위에 올려놓는 저력을 과시하며21세기에도비지스의 신화가
여전할 거라 강변하였지만, 2003년 1월 21일 모리스 깁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비지스라는 이름을 지속시킬 여력이 없게 되고 말았다.
결국 비지스는 모리스 깁의 죽음과 함께 45년간에 달하는 긴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팝(Pop)' 역사를 통틀어 '비지스(The Bee Gees)' 만큼 오랫동안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며 다양한 음악성을 섭렵해온 연예인도 없을 것 입니다. 1960년대 서정적인 '팝(Pop)' 음악으로 '팬(Fan)'들을 사로잡았던 이들은, 1970년대는 '디스코' 열풍의 최전선에 서서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막대한 성공을 수확한 바 있습니다.
'맨체스터' 출신의 '깁(Gibb)'이 3형제로 구성된 이 '밴드( Band)'는 그렇게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1946년생인 '배리 깁(Barry Gibb)'과 1949년생 쌍둥이 형제인 '로빈 깁(Robin Gibb)', '모리스 깁(Maurice Gibb)' 으로 조직된 이 3인조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뒤,1958년부터 '부러더스 깁(Brothers Gibb)'의 머릿 글자를 따 'B.G.'s'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부터 레코드를 발표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음악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던 이들은, '비틀즈(Beatles)'의 아성에 큰 자극을 받아 1966년 영국으로 거점을 옮겨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게 되고, 영국에서 매니저로저 '로버트 스틱우드 (Robert Stigwood)'를 만난 이 3형제는, 곧바로 그와 계약을 맺고 '빈스 멜루니(Vince Melouney / 기타)', '콜린 피터슨(Colin Peterson / 드럼)' 등 2명의 '멤버(Member)'를 더 가담시켜 완전한 '밴드(Band)' 로 구성됐습니다.
1967년, 새로운 '비지스(Bee Gee's)'가 발표한 첫 '싱글(Siingle)' '뉴욕 미닝 디재스터(New York Mining Disaster/1941)'가 영국에서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히트(Hit)'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77년 전세계 극장가를 석권한 대흥행작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영화음악을 맡으며 드디어 필생의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스테인 어라이브(Stayin' Alive)', '하우 딥 이스 유어 러브(How Deep Is Your Love)', '나잇 피버(Night Fever)'등 '비 지스(Bee Gee's)'를 대표하는 '히트(Hit)' 곡들이 모두 '빌보드 싱글차트(Billboard single Chart)' #1위에 올랐으며, '홀리데이(Holiday)', '투 러브 섬바디(To Love Somebody)', '메사추세추(Massachusetts)' 등의 후속곡들이 줄줄이 '히트(Hit)' 대열에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데뷔 앨범(Debut album)' '더 비지스 1번(The Bee Gees 1st)'은 미국에서 '차트(Chart)' #7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며 '비지스(Bee Gees)'의 명성을 미국에서도 널리 떨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침체를 맞이 하는데 1988년에는 동생 '앤디 깁(Andy Gibb)'이 약물중독으로 30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되며~,
[이하생략]
Beegees에 대해서
추천한 사람
Gibb가의 가장 Hughie Gibb Jr.는 잉글랜드의 Mecca라는 댄스클럽에서 일하던 드럼주자였다. 그가 그의 아내가 될 Barbara를 만난 것은 Manchester의 한 댄스장에서였다. 1944년 5월 27일에 결혼한 이들은 45년에 첫딸 Leslie를 얻었고 이들 3명의 가족은 2차대전이 끝난 후 Isle of Man이라는 유흥지로 이주, 그곳 호텔에서 Hugh는 정기적으로 연주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되자 이제 Bee Gees는 자신들에게 아직 남아있는 문제 즉 성인취향의 노래를 십대들이 원하는 록으로 바꾸는 작업을 개시했다. 한가지 다행한 일은 일찍부터 나이트 클럽 등지에서 연주활동을 한 덕분에 이들 Bee Gees 형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섹시한 매력이 붙어있었다. 특히 Barry는 여자에 관한 일에서는 가히 명수였다. 15살, 16살 무렵에 이미 그는 한꺼번에 6명 이상의 여자를 만나곤 했다곤 한다. 또 다른 사람들 역시 마친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 Bee Gees를 어린 나이로 보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Wine and Woman 이후 후속 인기곡을 내 놓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싱글 I was Lover, A Leader of Men 은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다.(비록 인기를 얻진 못했지만 이곡은 Barry에게 65년, 호주 Adelaide의 라디오 방송국 5KA 가 수여하는 이해의 작곡자 상을 수상케 하였다. 그리고 65년 11월에는 이들이 호주에서 처음으로 내 놓은 LP The Bee Gees Sings and Play 14 Barry Gibb Sings 가 발매되었다). 한편 66년 3월 Bee Gees는 RCA와 EMI로부터 영화 출연교섭을 받았으나 Festival 사에서 계약을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출연하지 못했고 대신 Bee Gees는 Nat Kipnet 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Spin 레코드에 입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Bee Gees에게 구원의 사자격인 Ossie Byrne 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 Ossie 라는 인물은 자신의 정육점 뒤에 스튜디오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오시는 이 스튜디오를 Bee Gees가 얼마든지 사용하게 헤 주었다. 덕분에 이들 형제는 66년 여름 동안 그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스튜디오에 대한 제반사항들을 익혔고 또 시간만 주어진다면 자신들 역시 팀으로서 또는 각자 개인으로서 많은 곡을 써낼 수 있는 작곡가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Ossie 는 이들에게 싱글 Spicks and Specks를 프로듀서 해주었다. 하지만 막상 이 Spicks & Specks 가 이들이 그렇게도 오래 기대하던 호주에서의 성공을 가져다주기 시작할 무렵 이들 형제는 부모에게 자신들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이 호주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Spicks and Specks는 66년 9월에 발매되어 전국적으로 큰 히트를 기록했으나 이들 형제는 호주를 떠나 영국으로 가야한다는 자신들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호주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을 때 호주에서는 이들을 "이해의 그룹"으로 선정하고 Barry는 전곡의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작곡가상을 차지했다. 17살의 나이에 이제 Barry는 작곡가로써 뛰어난 경력을 기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 Hugh의 말에 의하면 '그런 감정을 경험해 보지도 않았을 17살의 소년이 그렇게 깊은 사랑의 노래를 쓴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영국으로 떠나기 전 66년말에 Barry는 Cole Joye, Ronnie Burns등 호주 가수들에게 곡을 써주어 부를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싱글 Spicks and Specks 가 챠트에서 승승장구함에 따라 Bee Gees의 호주에서의 두 번째 LP Monday's Rain이 새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의 많은 매니지먼트 회사로 보내졌는데 그중에서 비틀즈의 매니저 Brian Epstein 이 경영하는 NEMS 도 끼어있었다. 그밖에 호주를 떠나기 전, 이들 형제는 머릿기름등을 바르지 않고 머리를 기를수 있게 되었고 Barry는 드디어 시드니에서 만난 Maureen Bates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영국으로 떠나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결혼은 후에 이혼으로 끝나고 말았다. 신의 선물 Robert Stigwood와의 만남 한편 이들 형제는 많은 호주 그룹들이 영국으로 대단한 성공이라도 할 것처럼 떠났다가도 Seekers 말고는 별달리 성공을 한 일이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그 누구에게도 요란히 알리지 않은 가운데 조용하게 영국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영국으로 가는 도중 처음 정박한 Tuesday Island 에서야 호주 DJ들에게 자신들이 영국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엽서를 띄웠다. 싱글 Spicks and Specks가 Chart 1위에 올랐음을 안 것은 이들이 배에 오르고 나서였다. 이 소식은 이들 형제에게 자신들이 예전 같은 실패는 맛보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들 형제가 영국으로 떠난 것을 알게 된 호주의 지방지들은 "Bee Gees, 호주를 포기하다"라는 식의 기사를 적기도 하였다. 이들이 떠나기 전 Cole Joye는 Bee Gees에게 "너희들이야말로 해외에서 성공할 유일한 인물들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이제 Bee Gees는 수개월도 안되어 그 말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들 Gibb가가 수에즈, 카이로, 사하라 사막 등을 거쳐서 영국에 도착한 것은 67년 2월 7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영국에 도착해서 불과 며칠후 어느날 아침, 잠을 자고 있던 이들 가족에게 'Mr. Stickwood'라는(아버지 휴는 잠결에 이렇게 들었다)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자신을 Brian Epstein의 파트너인 Robert Stigwood라고 소개하고 Gibb 형제들을 만날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이렇게 해서 Bee Gees 형제들은 그의 어머니가 예전에 예언하던대로 그들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금발의 중년 신사" Robert Stigwood를 만나게 되었다. 로버트는 NEMS에서 Brian의 공동 매니저이자 지휘자였는데 실로 우연하게 NEMS 앞으로 보내진 Bee Gees의 음반과 테이프를 듣고는 그들의 Harmony와 작곡 솜씨에 믿을 수 없을만큼 놀랐다고 한다. 후에 로빈과 결혼하게 된 Molly Hullis는 당시 NEMS사의 Receptionist였는데 그녀는 이들 Bee Gees 형제가 NEMS사에 Robert를 만나러 왔을 때 이들은 당시 영국의 유행으로 보아선 아주 구식 양복에 굉장히 수줍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Robert가 Bee Gees와 계약을 맺은 것은 이날 불과 하루안에 다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로써 그는 Beatles 이래로 가장 성공한 작곡팀과 계약을 맺은 셈이었고 Bee Gees 역시 영국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 몇백 파운드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자신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줄지도 모르는 이런 계약은 꿈이 실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들 Bee Gees가 영국에 도착한 후 어디에 거쳐할 것인지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Robert가 어떻게 그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았는지는 지금까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라도 찾아낼 만한 사업수완을 가진 Robert Stigwood 임을 감안하면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우선 Bee Gees는 Aberfam 광산의 사고를 토대로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을 만들었다. 이 곡은 전형적인 Pop 취향의 ballad로 이들 Bee Gees가 Beatles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를 여실히 보여준 곡이었다. 또 이 앨범 Bee Gees 1st를 녹음함에 있어 이들 Bee Gees에게 가장 자극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현악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간 많은 Pop Group이 자신들의 사운드에 현악기를 도입했지만 이들 Bee Gees는 현악기 연주를 단지 Sound로 달콤하게 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필수 요소로 삼았다는 것이 다른 Pop의 경우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녹음에는 Bill Shepherd와 함께 그가 소개한 드럼주자 Colin Peterson등이 참가했다. 한편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 B.G.'s를 현재의 Bee Gees로 바꾸기로 한 것도 '67년도 말 이 당시였다. 처음에는 Rupert's World등의 이름이 제안되기도 했으나 원래 출발이 B.G.'s였던 만큼 Brothers Gibb을 상징하는 Bee Gees로 이름을 늘려 쓰기로 결정이 되었다. 첫 앨범 Bee Gees 1st의 녹음에는 3주간이 걸렸다. 이 앨범에는 당시 Beatles가 내 놓은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그 중 한 예로 이 앨범에서 Bee Gees는 Beatles가 그 앨범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Melotron Sound를 사용하기도 했다. 67년 4월, Robert는 이 새로운 Beatles의 도착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일편으로 첫 싱글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에는 이들이 Beatles의 후계자임을 알리는 선전문구가 덧붙여졌다. 하지만 앨범 녹음후 Fats Domino와 가진 첫 영국 순회공연은 이들의 이름이 아직은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별로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아직 Bee Gees의 곡들을 사람들이 모른다는 점을 감안해 공연 레파토리는 대게 남들의 노래로 꾸며졌던만큼 그런 결과는 당연했다. 공연장 조건도 좋질 못했다. 그중 어떤 곳은 탈의실에 물이 질퍽질퍽하게 찬 곳도 있었다. 게다가 이들 Bee Gees는 기타리스트까지 대동한 밴드로서의 연주는 처음인 셈이었던 것이다. 또 순회공연중 Bee Gees가 Saville 극장에서 Fats Domino와 함께 가졌던 순회공연은 그야말로 실패였다. 그도 그럴것이 평소 과격한 연주로 Rock계에 이름을 떨치던 Fats의 공연을 보러 온 팬들이 이들 Bee Gees의 취향을 마음에 들어했을 리가 만무했다. 덕분에 이 공연중 Robin은 객석에서 던지는 계란세례를 받기도 했다. Robin은 이에 대해 "그마나 우리가 Rock and Roll을 연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칼이 날아왔을지도 몰랐다"고 한다. 67년 4월 14일에는 영국에서 만든 첫 음반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 I Can't see nobody 가 발매되었다. Barry의 말에 의하면 당시는 Beatles와 비교하거나 아니면 Beatles를 때려 눕힐 것이라는 선전문구를 내놓지 않고서는 어떤 그룹이건 음반을 팔 수 없었던 때였다고 한다. 덕분에 이들 Bee Gees에게 붙여진 광고문 역시 "Beatles 이래 가장 뛰어난 탤런트들"이었다. 또 로버트는 미국에 있어선 아예 사람들이 이들을 Beatles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방편을 썼다. 즉 그는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이 담긴 음반에 그들 그룹의 이름을 쓰지 않은 채로 미국 DJ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 DJ들은 수주일간 그것이 그냥 B로 시작되는 어느 영국 그룹이라고 생각하고 그 노래를 틀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를 Beatles의 노래로 안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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