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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ngwie Malmsteen-Child In Time
There was a time, I used to look into my father's eyes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곤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
In a happy home, I was a king I had a golden throne
행복한 집에서, 난 황금 왕관을 가진 왕이었어
Those days are gone, now the memories are on the wall
이제 그 시절은 가고, 모든 추억은 벽에 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
I hear the songs from the places where I was born
노랫소리가 들려, 내가 태어난 바로 그 곳에서 나는
Up on the hill across the blue lake,
파란 호수 건너편 언덕 위
That's where I had my first heartbreak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날
I still remember how it all changed
아직도 기억해, 그 후로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게 됬는 지
My father said,
아버지는 말씀하셨어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child
"얘야, 걱정하지 마
See heaven's got a plan for you,
자, 하늘은 널 위해 그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now"
그러니 이제 걱정안해도 돼"
Yeah!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child
"얘야, 걱정하지 마
See heaven's got a plan for you,
자, 하늘은 널 위해 그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now"
그러니 이제 걱정안해도 돼"
Yeah!
There was a time, I met a girl of a different kind
조금 색다른 여자를 만났던, 그런 시절이 있었어
We ruled the world,
우린 온 세상을 가진 듯 했고,
I thought I'll never lose her out of sight
평생 그녀를 내 곁에서 잃지 않을거라 생각했지
We were so young,
하지만 우리는 너무 어렸지
I think of her now and then
때때로 그녀가 생각나곤해
I still hear the songs reminding me of a friend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랫소리가 아직도 들려와
Up on the hill across the blue lake,
파란 호수 건너편 언덕 위,
That's where I had my first heartbreak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날
I still remember how it all changed
아직도 기억해, 그 후로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게 됬는 지
My father said,
아버지는 말씀하셨어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child
"얘야, 걱정하지 마
See heaven's got a plan for you,
자, 하늘은 널 위해 그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now"
그러니 이제 걱정안해도 돼"
Yeah!
See heaven's got a plan for you
자, 하늘은 널 위해 그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child
그러니 이제 걱정안해도 돼
See heaven's got a plan for you
자, 하늘은 널 위해 그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단다,
Don't you worry, don't you worry now
그러니 이제 걱정안해도 돼
Yeah!
Oh, oh, oh, oh!
잉위 맘스틴은 뛰어난 실력을 갖춘 기타리스트 입니다. 그는 그 음악성과 기타리스트로서의 일거수 일투족을
리치 블랙모어와 비교해서 이야기되는 수가 많은데 그만큼 리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잉위 맘스틴은 좋은 가정환경에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1963년 6월 30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의 친정집은 놀랍게도 수백년이나 이어지고
있다는 오페라의 명가라고 합니다.
스웨덴도 독일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래전부터 클래식이 사랑받고 있는데, 에드워드 반 헤일런과 에이드리안
반덴버그를 낳은 네덜란드에서는 클래식의 뮤지션이 국가 공무원으로 대접받고 있다고 합니다.
잉위의 어머니인 리그모어는 잉위가 세 살이 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게하는 동시에 트럼펫도 사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섯살이 되던 생일에는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로 사 주었는데, 그 때는 잉위가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아 2년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잉위와 기타와의 진정한 첫 만남은 일곱살 때 텔레비젼에서 본 지미 핸드릭스(1945~70)의 라이브쇼였다고 합니다.
그 tv프로그램에서는 핸드릭스 뒤에 리치 블랙모어의 딥 퍼플(1기나 2기 때로 리치는 아직 스트라토를 쓰지 않고 깁슨
ES-335TD를 메인으로 하고 있었을 때임)이 출현했는데, 그 리치의 정평있는 화려한 액션은 핸드릭스의 흉내로밖에
비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리치로부터 그 후 강하게 영향을 받은 잉위 였지만, 우선은 핸드릭스가 그 당시 잉위 소년의 히어로였던 것입니다.
핸드릭스라는 마음의 히어로를 얻은 잉위는 기타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빨리 솔로를 쳐보고 싶은 마음에
마구 쳐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1년쯤은 튜닝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기타를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터져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마구 쳐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형이 튜닝하는 법과 코드를 잉위에게 가르쳐 주었고, 얼마 후 잉위는 어쿠스틱 기타에
어테치먼트 타입의 픽업을 붙이고 라디오에 연결해서 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잉위의 히어로는 지미 핸드릭스 였지만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리치 블랙모어로 옮겨갔고, 그렇게
리치광으로 연습에 연습을 계속 하던 그는 1975년 마침내 그가 원하던 팬더 스트라토 캐스터를 입수하였으며,
클래식 기타에도 도전하여 약 1년간의 레슨도 받았다고 합니다.
우선 독보와 스케일 등의 음악 이론은 오케스트라의 멤버가 된 누나로부터 배웠으며, 독보력과 테크닉은 이전부터
잘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어떤 클래식 넘버도 자기가 느끼고 있는대로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었습니다.
클래식 중 그가 심취해서 듣는 것은 바하를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시대의 것으로 "My God"이라 할만큼 바하를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바하라고 하면 오래 전부터 리치가 맨 먼저 나선 셈이라 리치가 좋아하니까 잉위도 좋아하는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째튼 잉위는 의상이나 액션, 기타 사운드 뿐만 아니라 기타 주법면에서도 적지않
게 리치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78년 의무교육을 마친 잉위는 자기의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4트랙의 MTR을 구입하고 데모테입의 제작에도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됩니다.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라는 이름은 그 당시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음악 관계자에게 보내는 데모 테입에도, 또 스테이지에 설 때의 세션 밴드명으로도 라이징 포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합니다.
이로서 잉위와 라이징 포스의 소문은 스웨덴 국내에 퍼지고 스웨덴의 CBS 레코드로부터 계약협상도 거론되었는데,
레코드 회사측이 스웨덴 국내에 히트시킬 목적으로 잉위는 어디까지나 세계, 즉 미국의 록 뮤직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80년 경에는 영국에 단기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상당한 수의 데모 테입을 여로 곳에 계속 보냈고, 82년
여름에는 마참내 본격적인 기회가 찾아옵니다.
당시 "슈라프넬" 레코드를 경영하고 있었던 마이크 버니가 관심을 갖고, 자기가 주관하는 있는 기타 플레이어지의
칼럼에 잉위를 소개했던 것입니다.
마이크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조건으로 잉위에게 미국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할 것을 권하였고, 잉위는 83년
초에 로스 앤젤레스로 갈것을 결심합니다.
유감스럽게 솔로 앨범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마이크는 슈라프렐에서 데뷔시키려 하고 있었던 "스틸러"에 잉위를
참가시켜 밴드를 강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잉위 참가 이전은 리더 론 킬이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잉위는 기타 쪽이 더 뛰어났음은 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잉위로서는 조금도 참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우선 혼자서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것보다는 라이브의 기회가 많은데다가
스틸러에 참가하지 않으면 돈도 사는 곳도 곤란을 받시 때문에 레코드에 참가키로 했습니다. '스틸러'는 잉위의
기타만을 듣는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레코드로 잉위는 자기가 작곡에 참가한 제작하려는 의도임을 알고 이를
거부하고 맙니다.
'애브덕션'과 '노 웨이 아웃'은 좋아하는 작품으로 들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레인보우, M.S.G등을 거친 잘 알려진 그래엄 보네트의 메니저로부터 새 밴드 결성의 일원으로
참가해달라는 권유가 들어왔는데, 그래엄은 잉위가 추구하는 음악과 공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새 밴드를 선택하게
됩니다.
새 밴드는 아직 악곡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라 잉위는 그래엄과 함께 악곡을 만들어 냈고, 83년 말 '알카트러즈'를
발표, 아직 밴드 컬러는 결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래엄의 보컬과 잉위의 기타가 갖추어지면서 그리 어렵지 않게 훌륭한 조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레인보우 시대에 이미 높은 인기를 얻었던 그래엄과 기타 영웅 잉위와의 결합은 팬들을 자극하여 데뷔하자 갑자기
주목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84년 1월에는 최초의 동양 공연도 행하였는데 공연마다 모두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공연이 끝난 후 잉위와 그레엄 사이에 음악적 언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세대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잉위는 84년 봄에 알카트러즈를 탈퇴하여 84년 6월에 폴리돌에서 취입한 'Live Sentence'가 그의 알카트러즈에서의
마지막 플레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잉위는 미국에 머물러 솔로 앨범 제작에 돌입하여 84년 11월 'Yngwie Malmsteen's Rising Force'라는 이름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습니다.
그 후 잉위는 앨범 라이징 포스의 제작 멤버를 재편성하여 그룹 라이징 포스를 결성하는데, 데뷔 앨범 'Marching Out'은 영국, 미국 등 각국에서 좋은 판매고를 기록, 탑 밴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85년은 과히 라이징 포스에게는 도약의 해였는데 미국의 기타 전문지 기타 플레이어에서 록 기타리스트 부문에 잉위가, 록 앨범 부문에 솔로 앨범 'Yngwie Malmsteen's Risinf Force'가 선출되었습니다.
86년에 접어들어 "기타 영웅"의좌를 획득한 잉위는 같은 해 봄부터 LA에서 신작 레코딩에 들어갔습니다.
포로듀스는잉위 자신이 담당한 이 작품은 'Trilogy'라고 타이틀 되어 미국에서는 9월 하순에 발매되었습니다.
앨범 발표 후 잉위는 투어 멤버로 또다시 제프 스코트 소트를 맞이하여 11월의 동양 공연을 시발로 월드 투어를 개최하게 는데, 그 사이'You Don't Remember'가 전미에서 히트를 기록하여 그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만 갔습니다.
월드 투어는 이듬해인 87년 봄까지 계속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잉위는 막 복귀한 제프를 다시 해고하고
레인보우에 몸담았던 조린 터너를 맞이하여 본격적인 밴드체제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88년 봄 잉위는 조를 맞이하여첫번째 앨범인 'Odyssey'를 발표하고 동시에 싱글'Heaven Tonight'도 발매했으며,
'애브덕션'과 '노 웨이 아웃'은 7월부터 미국을 비롯 월드 투어를 시작, 영국, 유럽을 돌아 소련에서도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앨범 판매 때문에 폴리돌 레코드와 대립되고 밴드 내부의 음악성의 차이가 원인이 되어 투어 종료 후에 조가
탈퇴하였으며, 키보드의 앤스도 그 뒤를 이어 탈퇴하자, 라이징 포스는 사실상 붕괴를 맞이하였습니다.
따라서 잉위는 앞으로의 활동에 잠시 휴식기간을 갖기 위해 89년 겨울의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수록한 라이브 앨범
'Trial By Fire~Live In Leningrad'와 라이브 비디오 'Live In Leningrad'를 동시에 발표했는데, 이 기간 잉위는
뉴욕을 떠나 마이애미에 이주를 했습니다.
LA에서 뉴욕으로 이주했을 때처럼 기분전환을 하여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한 것입니다. 뉴 프로젝트는 당시
연륜 있는 멤버를 모은 수퍼 그룹이 될 상황이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실현되지 않자, 잉위는 전원이 스웨덴 사람으로 구성된 벡밴드를 구성하여 90년 4월 'Eclipse'를 발표합니다.
지미 헨드릭스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타리스트로 추앙받으며 1980년대 초반의 헤비메탈 씬을 사실상 평정했던
에드워드 반 헤일런 앞에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잉베이 말름스틴, 이른바 바로크 메탈의 전성기를 열어젖히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꽃처럼 펼쳐졌던
기타계의 속주경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어느 날 리치 블랙모어가 우연히 그의 음반을 듣고는 누군가 레코드를 고속으로 돌리고 있는 줄 착각했으나 그것이
실제 연주 속도임을 알고 이제 자신의 시대는 갔다며 탄식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연주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레코드를 고속으로 돌리고 있는 줄 착각했다
196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잉베이 말름스틴은 일곱 살이던 1970년, TV에서 지미 헨드릭스 추모 특집
프로그램을 보다가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홉 살 생일 때 딥 퍼플의 앨범 「Fireball」을 선물 받으며 자연스럽게 지미 헨드릭스와 리치 블랙모어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배가 되었다.
열두 살 때 자신의 필생의 명기가 될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처음 만난 그는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하루 여덟 시간이 넘는 맹연습을 통해 실력을 연마했다.
몇몇 로컬 밴드를 거쳐 1978년 라이징 포스(Rising Force)를 결성한 그는 기타 전문잡지 「기타 플레이어」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는데, 그것을 들은 저명한 칼럼니스트 마이크 바니(Mike Varney)가 「기타 플레이어」의
'스포트라이트' 칼럼에 그를 소개함으로써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마이크 바니의 주선으로 그룹 스틸러(Steeler)에 가담해 미국 록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는 1983년 그래험
보냇과 함께 알카트라즈(Alcatrazz)를 결성했다.
잉베이 말름스틴은 알카트라즈 시절 데뷔 앨범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과 일본 공연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Sentence」 단 두 장의 앨범에 참여했다.
「No Parole from Rock 'n' Roll」에서는 수록곡 〈Island in The Sun〉 〈Jet to Jet〉
〈Hiroshima Mon Amor〉 등에서 탁월한 기타 솔로를 들려주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Live Sentence」
실황에서는 바흐의 유명한 클래식 명곡인 〈부레〉를 일렉트릭 기타로 편곡해 연주한 〈Coming Bach〉의 연주 장면이 향후 그가 걸어갈 길을 예시한 명장면으로 꼽힌다.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이미 기타의 신성으로 떠오른 잉베이 말름스틴은 그러나 열 살에서 스무 살에 이르는 다른
멤버들과의 현격한 나이차와 음악적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알카트라즈를 떠나 자신의 밴드인 라이징 포스를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Rising Force」는 1984년에 나왔는데, 이 앨범은 헤비메탈 기타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적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Black Star〉 〈Evil Eye〉 〈Far Beyond The Sun〉 등 그의 대표곡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는데, 바로크
메탈의 전성기는 명백히 이 앨범과 함께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Rising Force」는 「기타 플레이어」에 의해 그 해 베스트 록 앨범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래미 어워즈의 베스트 록 연주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Rising Force」가 잉베이 말름스틴의 기타 플레이를 전면에 내세웠던 반면, 이어진 앨범들인 「Marching Out」
(1985)과 「Trilogy」(1986)에서는 대중성을 고려해서 보컬의 비중을 높이게 되는데, 이러한 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1987년 잉베이 말름스틴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업친데덥친 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상실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아픔을 이기고 돌아와 컴백작인 「Odyssey」를 발표했다. 수록곡 가운데 〈Heaven Tonight〉이 크게 히트했으며 앨범도 최대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잉베이 말름스틴은 재기에 성공했다.
1980년대 테크닉 지상주의 시대를 열다
바로크 메탈의 제왕이라는 별명은 잉베이 말름스틴에게 붙여진 가장 적절한 칭호이며 그의 기타와 음악을 가장 잘
정의하는 수식어이다.
그가 기타 연주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헤비메탈 기타 연주에 클래시컬한 요소들을 적극 도입했다는 점인데,
그것은 아마도 클래식에 정통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클래식 기타를 배웠던 가정 환경과
클래식적 요소가 강했던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발디, 바흐 등 바로크 시대 음악가들의 대위법 선율을 록 기타 연주에 응용했고 파가니니의 초절기교의 바이올린 테크닉 또한 기타 연주를 위해 옮겨 왔다.
한 개의 줄 위에서 7~8잇단음 이상이 이어지는 긴 프레이즈를 빠르게 연주하는 스타일이 대표적으로 바이올린
주법을 활용한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탁월함은 역시 눈부신 속주에 있다.
속주를 위해 고안했다는 스윕 피킹 주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운데 하나인데, 왼손가락의 현란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스윕 피킹은 업다운 크로스 피킹 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해 있던 속도 경쟁에 새로운 신기원을 열었다.
솔로 애드립에서 보여주는 유연한 스케일의 연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강점이다. 그는 내추럴 마이너, 하모닉
마이너, 디미니쉬 스케일 등 다양한 스케일을 적극 활용해 독창적인 연주를 펼침으로써 펜타토닉 스케일에 갇혀있던
기존의 연주 패턴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잉베이 말름스틴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와 마샬 앰프라는 고전적 조합을 즐겨 사용했다. 알카트라즈 시절 이후 그는
평생을 초지일관 이 조합을 고집했는데 그래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의 마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타의 역사에서 1980년대는 테크닉 지상주의 시대였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불꽃 튀는 경쟁을 펼치며 연주 기술의 진보와 확장을 이루어냈다.
그 시작은 아마도 에드워드 반 헤일런이었을 것이며,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에 기름을 쏟아 부은 이는 잉베이
말름스틴이었을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의 연주력, 특히 속도는 후배 기타리스트들이 반드시 도전하고 넘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뛰어넘지 못해 좌절하고 실패한 이의 숫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잉베이 말름스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거리가 있다.
그는 연주력과는 별개로 불 같은 성격과 쉽게 자만심을 드러내는성품 탓에 많은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바로크 메탈의
시대가 빠르게 저물어간 이후에도 고집스럽게 노선을 견지했던탓에 말년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연주자라는 혹평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잉베이 말름스틴이 1980년대의 중심에서 테크닉과 속주 경쟁을 주도했던 스웨덴이 낳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이며 바로크 메탈의 제왕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후 눈부신 속주를 주무기로 등장한 수많은 기타리스트들, 대표적으로 토니 메칼파인, 조슈아 페러히어
(Joshua Perahia), 크리스 임펠리테리, 폴 길버트 등은 명백히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이들이다.
어려서 클래식 수업을 받고 바이올린등을 연습한 잉위는 지미 헨드릭스의 미친기타에 넔을 잃고 이후 리치 블랙모어와
울리 로스의 클래시컬한 어프로치에 반하고 결국 스윕 아르페지오를 들여와 세상에 그의 기타세계를 알립니다.
그의 재능은 당시 천재 프로듀서 마이크 바니에의해 미국에 알려집니다.
그리곤 [Steeler]의 저 앨범에 잠깐 몸 담았다가 83년 당대 최고의 보컬로 이름을 날리던 그래험 보넷과
[Alcatrazz]를 만들어 활동을 합니다.
그것도 잠시 자신만의 밴드 [Yngwie Malmsteen Rising Force]를 조직해 본격적인 세계정복에 나섭니다.
또한 첫 앨범부터 그의 든든한 메이트이자 20세기형 키보디스트 옌스 요한슨과 함께 초절정 솔로 배틀을 선보입니다.
1집 수록곡 [Black Star], [Far Beyond The Sun]으로 전 세계의 모든 기타리스트들을 긴장시키기에 이릅니다.
한창 기타를 연습하던 크리스 임펠리테리는 잉위의 등장에 엄청난 충격을 먹게되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기위해
부던히 노력을 합니다.
임펠리테리는 결국 극한의 스피드로까지 기타연주를 몰아붙이며 전 세계 속주 전쟁에 선봉에 섭니다.
EP를 발매하고 88년 그래험 보넷과 함께 1집 [Stand In Line]을 발표합니다.
특히나 [Over The Rainbow]의 연주로 단번에 기타영웅으로 등극합니다. 둘의 두번째 공통분모 그래험 보넷이
있었군요.
다작을 하는 잉위는 창작의욕을 불태우며 그의 명반들을 쏟아냅니다.
[Odyssey]에서 정점을 찍은 잉위는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라이브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후 퇴색되어가는 기타속주 테크닉 전쟁과 함께 메틀이 서서히 사그라 듭니다.
잉위가 제왕으로 군림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임펠리테리는 2집이 나올무렵 큰 방황을 하게 됩니다.
절친이자 동반자 롭 락이 돌아와 함께한 [Grin And Bear It]은 파워풀한 곡들로 구성은 되어있지만 임펠리테리의
특징을 살리지 못한체 외면을 당합니다.
이후 다시 돌아온 밴드는 미니앨범 [Victim Of The System]을 발매합니다. 예전 임펠리테리의 모습을 다시금
보여준 준비작이죠.
EP나 미니 싱글이 안팔리는 한국에는 저 미니 앨범과 2집을 섞어서 발매합니다.
90년대 미국에서 바로크 메틀은 뭐 그냥 사장됩니다.
하지만 유럽과 특히 일본에서는 지속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왕의대접을 받습니다.
[The Seventh Sign]에서는 라우드니스에서 활약한 유일한 서양보컬 마이크 베세라를 맞이해 일본 오리콘 1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저 앨범이 나오기 전 잉위의 처가가 약혼을 반대하면서 경찰에 체포를 의뢰해 밤중에 잡혀갑니다. [I Don't Know]란 곡에서 뭔일인지 자신도 모르겠다면서 심경을 토로하죠.
90년대가 끝나갈 무렵 발표한 [Facing The Animal]에서는 전설의 드러머 코지 파웰이 함께 했는데 앨범을 발표하고
얼마 안가 코지는 차 사고로 사망하고 저 앨범이 유작이 된 잉위에게는 특별한 앨범입니다.
.
잉위는 명성만큼이나 멋진 보컬들과 함께 했죠.
잘 안알려진 보컬들은 그들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었고 훌륭한 보컬들이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임펠리테리와 다른 점은 보컬교체에 있네요.
대부분을 자신의 동반자 롭 락과 한 그와 달리 잉위는 자신의 음악을 다른 색들로 칠하고 싶어했던 욕심쟁이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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