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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Elvis Presley -Anything That's Part Of You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히트곡 동영상 

 

 

 

 

  

Elvis Presley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흔적들 뿐일텐데..





 

 

 

 

 

Anything That's Part Of You

 

 

I memorize the note you sent
Go all the places that we went

I seem to search the whole day through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I kept a ribbon from your hair
A breath of perfume lingers there

It helps to cheer me when I'm blue
Anything that's part of you

Oh, how it hurts to miss you so
When I know you don't love me.. anymore

To go on needing you
Knowing you don't need me

No reason left for me to live
What can I take, what can I give
When I'd give all of someone new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이 보낸 글들을 전부 외우고 있어요.
우리가 함께 갔던곳들을 돌아다녔지요.

온 종일찾아다닌것만 같네요.
당신과 관련된 사소한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당신의 머리 리본을 간직 하고 있어요.
아직 당신의 향수내음이 남아 있지요.

내가 우울할때면
내게 기운을 북돋아 주지요.
당신이 남겨준
사소하고 자그마한 흔적일지라도
당신이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다는것을 알았을때
당신이 그리워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을계속 원하게 되네요.

이젠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어요.
무엇을 갖고,무엇을 주어야할까요..
내가 새로운 사람에게 모든걸 준다해도
당신의 흔적들 뿐일텐데..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Elvis Presley”(1935-1977, 미국 미시시피)가 (그의 생전에) 직접 출연하였던 총 31편의 영화들 가운데 데뷔작이 바로 1956년도의 이 작품인데, 권투부에서 활약하던 멤피스의 “Humes"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불과 3년만이고, 또 그의 기념비적인 노래(첫 녹음 곡), “That's All Right, Mama"(1954년)를 녹음한지 2년만이며, “Louisiana Hayride”라는 프로그램으로 TV에 첫 출연한지(1955년3월) 1년도 않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빠른 출세에 비례하여 상업적으로도 무척이나 발 빠른 행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영화의 출연으로 그의 불타오르던 초고속 상승인기는 드디어 음반과 방송 그리고 영화계까지, 삼국을 통일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영화가 발표된 1956년 같은 해에 그의 “Heartbreak Hotel" 이 3월부터 8주 동안 연속으로 Billboard 차트의 정상에 (첫 번째로) 오름으로서 1969년 9월의 “Suspicious Minds"까지 총 18개의 차트 1위곡 행진에 서곡을 울리게 되고, 또 "Beatles"를 포함한 전 세계의 어느 가수나 그룹도 보유하고 있지 못하는 약 10억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음반판매기록을 세우는 발판을 바로 이 행운의 해, 1956년에 마련하게 된다.

 

 

 

 

 

 

 


그가 출연하였던 대부분의 영화들이 노래와 춤을 주축으로 하는 (뮤지컬 스타일의) 청춘 영화임에 반하여 이 영화계의 데뷔작은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흑백)서부 영화라는 점이 특이한데 (“Elvis”가 출연한 서부영화가 더 있긴 하지만.....) 줄거리 전개는 그가 출연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성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탄탄한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Elvis”가 맡은 막내아들 역은 엄밀히 말하자면 전체적인 줄거리의 중심인물로 보기는 힘들지만 그러나 제작당시에 붙였던 “르노 형제들“("The Reno Brothers")라는 원제목이 그의 새 음반 계약사인 “RCA Records” 의 홍보목적의 요청으로 인하여 “Love Me ender“로 졸지에 바뀐 것은 역시 영화의 포커스는 뜨는 별, “Elvis”에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때는 1865년 4월, 남북전쟁의 승전소식으로 들떠있던 북군을 습격하여 현금수송 열차에서 월급을 강탈해가는 남군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도 지난 4월26일에 있었던 (남군 장군)“존 스턴“의 항복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이 무리를 이끌던 “르노“ 형제의 맏형, “Vance Reno"(Richard Egan, 1921-1987, SF)는 나중에 종전사실을 알고 난 후, 탈취한 북군화폐를 일행들끼리 7등분하고 각자 귀향을 하게 되는데, 두 동생과 함께 고향으로 달려가는 그의 마음은 참전 전에 이미 서로 결혼을 약속하였던 연인, “Cathy"(Debra Paget, 1933, 덴버)에게 온통 향하기만 한다

 

  막내아들, “Clint"(“Elvis Presley”,1935-1977, 미시시피)와 모친이 기다리는 고향집에 드디어 도착을 한 “르노“ 삼형제. 그러나 이게 왠일인가?(위의 사진)그토록 그리워하던 “Cathy"가 동생, “Clint"의 부인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 전쟁 중에 “Vance”의 (잘못된) 전사소식을 듣고 “Clint"와 결혼을 한 “Cathy"도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고, 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그러던 어느 날 북군의 정규군이 강탈당한 군자금을 되찾으려 이들 앞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복잡해진다. 한편, 체포된 “Vance”를 걱정하는 “Cathy"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흥분하는 “Clint"는 "Vance”의 옛 전우들과 어울리면서 형제들과 반목을 하게 되고 그 와중에서 벌어진 한 총격전에서 그만 허무하게 죽고야 만다.

 

 

 

 

 

 

 


마치 서부 영화의 형태를 빌린 스릴러같이 강탈당한 군자금을 둘러싸고 이를 회수하려는 북군과의 심리전이 초반에는 상당히 긴박감을 주긴 하지만 중간 중간에 “Elvis Presley”가 (매우 현대적인 율동으로)노래를 하는 장면들을 삽입하면서 극의 정체성이 좀 모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도 이 영화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타이틀 송인 “Love Me Tender“ 야 말로 “Elvis”가 부른 수많은 발라드 곡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반주라고 해봐야 비록 통기타 한 대뿐이지만, (한국에서 한때 통기타 선풍이 대단하였을 때 그래서 더욱 더 유명한 곡이 되었지만...) 듣기에 무척 편하고 쉬운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전개와 (제목자체도 간단 명료 하지만)또 외우기가 별로 어렵지 않은 가사에 “Elvis”의 나른한듯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창법이 단숨에 이곡을 1950년대의 최고의 사랑노래(Love Song)로 만든 것이다.

 

연주를 포함해서 영화에서 세 네 번 들을 수 있는 이 곡은 대외적으로는 “Elvis”가 만든 것으로 발표 되었지만(로열티 계약상), 실제로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음악(OS)을 담당한 “Lionel ewman”(1916-1989, 뉴 헤븐) 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실제, “Vera Matson”과 둘이서만 공저) 그는 “Marilyn Monroe”(1926-1962)가 출연한 수많은 영화의 음악들로도 이미 유명하고, 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River Of No Return"(1954)역시 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무성영화시절부터 활약한 유명한 영화음악가, “Alfred Newman"(1901-1970, 뉴 헤븐)의 동생이기도 한데 유명한 팝 싱어 송라이터 “Randy Newman"(1943, LA)이 바로 그의 조카이다. 한편 “Elvis”는 이 “Love Me Tender“외에도 “We're Gonna Move”를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시간에 집에서, 그리고 경쾌한 “Poor Boy”와 “Let Me”를 마을 학교 기공식 무대에서 “Forrest Gump”에게 배운 (일명)“개다리 춤“과 함께 (서부영화 시대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춤이다.)신나게 열창을 하기도 한다.

 

그가 살아있었더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가 없는 지금, 그의 영화 데뷔작인 이 “Love Me Tender“는 무척이나 (역사적으로도) 소중한 의미를 준다. “King of Rock 'n' Roll ”, “팝의 제왕“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그의 이름 앞에 붙었던 수많은 수식어들 같이, “20세기의 최고의 가수”가 남기고 간 그 21살의 그의 앳띤 얼굴 모습과 (싱그러운)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의미로 무척 뜻이 깊다.  “Love Me Tender“는 언제 다시 들어도 새로운 감흥을 역시 오늘날도 안겨주고 있다.

 

 

 

 

 

 

 

 

 

 

20세기 들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미국 가수로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주로 "엘비스"로 알려져있다. 
엘비스의 음악은 온 누리를 선풍적 인기로 열광 식혔으며 "Rok'n Roll(로큰롤)의 제왕"
또는 "왕"으로 불리게 햇다.

엘비스는 미국 미시시피 주 투펄로에서 쌍둥이(한명은 즉시 사망)로 태어나 13살때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사를 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사운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던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의 협력에 의해 1954년부터 음악 경력을 쌓았다.


엘비스는 초기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와 베이시스트 빌 블랙과 함께 음악을 했고 
RCA 빅터로 레이블을 옮겨 커널 톰 파커가 20년동안 매니저를 했다.

 
1956년 엘비스는 RCA에서 발매한 첫 싱글 "Heartbreaek Hotel"을 발표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하며 히트를 쳤다,
엘비스는 텔레비젼 출연과 차트르 휩쓸며 인기를 얻었고 로큰롤을 새로운 인기있는
장르로 유행시켰다. 
1956년에는 "러브 미 텐더"에 출연하며 영화 데뷔도 했다.

프레슬리는 20세기 대중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다양한 목소리와 컨트리 팝 발라드 가스펠  블루스 등의 장르를 포괄하며 이례적인
상업적 성과를 거뒀다.

엘비스는 팝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솔로 가수이다.
또한 14번의 그래미 후보로 지명받았고 3번의 수상을 했으며 36살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1956년 나이 222세 영화 "러브 미 텐더" 에 데뷔하였고 1956년 징집 영장을 받고 
1958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내에 소재하는 제1기갑사단 소속 미군기지에 소총병으로
복무하였다.

그는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주 장르로 불렀으며 로큰롤, 가스펠, 록, 펑크, 발라드,
팝 등의 장르에서 모두 정상급에 올랐으며 세계에서 비틀즈와 함께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현재 약 10억장 이상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딸인 리사마리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첫 배우자였으므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장인이기도 하다.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의 나이에 약물중독과 만성변비로 사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세상을 뒤바꿔 놓는 역사를 썼다.
이전에는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으로 울리는 스탠다드 팝 음악이었으나 격렬한 리듬의
로큰롤로 선회 하여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다.

엘비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러한 청춘의 음악적 독립을 이뤘다는 공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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