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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Mercedes Sosa-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드립니다)

 

         

 

 



 

 Mercedes Sosa-Gracias a la Vida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드립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alto cielo su fondo estellado
y en las multitudes al hombre que yo amo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하늘의 많은 별,
그리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또렷하게 구별 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cielo que en todo su ancho
graba noche y dia grillos y canarios
martillos, turbinas, ladridos, chubascos
y la voz tan tierne de mi bien amado

 

 

귀뚜라미와 까나리오 소리,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소나기 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이런 소리들을 밤낮으로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귀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cedario
con 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vi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춰주는 빛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는 단어의 소리와 문자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s cansados
con ellos auduve ciudades y charcos,
playa y desertos, montanas y llanos
y la casatuya, tu calle y tu patio

 

도시와 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평원
그리고 너의 집과 너의 길, 너의 정원을 걸었던
그 피곤한 나의 다리로 행진을 하게 한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 el corazon que agita su mano
q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umano
quando miro el bueno tan lejos del malo
quando miro el fondo de tus ojos claros

 

인간의 지식에서 나온 열매를 볼 때
惡에서 아주 멀리있는 善을 볼 때
너의 맑은 두 눈의 깊이를 볼 때
그것을 알고 떨리는 심장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i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rio c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행운과 불행을 구별할 수 있게 한
웃음과 눈물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드립니다.
웃음과 눈물로 나의 노래는 만들어졌고
모든 이들의 노래는 모두 같은 노래이고
모든 이들의 노래는 바로 나의 노래입니다.

 

 

 

 

 

 

 

 

 

 

 

Mercedes Sosa (메르세데스 소사)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는 특유의 굵고 온화한 목소리로

누에바 깐시온을 상징하는 대가수이다. 물론, 그녀는 빼어난 노래 실력과

 여타의 가수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자세'를 가진 여걸이지만, 그녀가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로까지 칭송되는 것은 그녀의 음악 인생이

 모국인 아르헨티나와 남미의 질곡 많은 현대사와 괘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새로운 노래)은 본래 1950~196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급속한 유입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숭고한 음악적 자산과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음악 운동이었다.

 

 그 바탕에는 아르헨티나의 아따우알빠 유빵끼(Athaualpa Yupanqui),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를 필두로 한 전시대의 뮤지션들이 닦아놓은 '남미의 뿌리 찾기'의 전통이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화려한 치장을 제거한 어쿠스틱 기타 위주의 단촐한 악기 편성이 주를 이루었으며, 가사에는 민중과 함께 하며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메세지를 담았다.

 

남미에 군부독재가 몰아친 1960년대~1970년대 초중반, 이들의 노래의 메시지는 더욱 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저돌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에 대해 군부는 금지곡 세례와 활동 제한, 강제 투옥과 출국 등의 초강수로 대응했다. 혼탁한 시대에 맞서 노래하는

 사람의 책임을 다한 대가로 수많은 스타들이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으며, 칠레의 빅토르 하라(Victor Jara)는

목숨까지 바쳤다.

 

이런 당시 남미의 정치적 상황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에,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그 사상이 여타의 남미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지는 것을 미국은 가만히 지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남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각 국의 보수 세력과 군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하여,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그들의 손 안에 묶어둘 수 있었다.

 

그토록 폭압적인 지배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종의 '목적음악'처럼 변질된 기분이 없지

않지만, 사실 누에바 깐시온은 어디까지 노래와 시의 만남을 추구하고 그 서정성과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남미의

음악 '혁명'이었다.

그들은 주옥같은 가사와 노래을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켜내려 했으며, 노래의 본질을 끝까지고수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의 뚜꾸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노래 인생의 시작은 열다섯 살에 방송국의 아마추어 가요제에서 우승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프로뮤지션의 길을 걷지 않고 전통춤 강사로 살아갔지만, 1962년에 열린 가수와 시인들의 모임을 통해 누에바

깐시온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1965년에 코치킨 포크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며, 이것이 필립스사와의 첫 번째 음반 계약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녀는 작곡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곡보다 소사가 부른 노래가 더욱 유명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Gracias a la vida

(생애 감사하며)'는 비올레따 빠라의 곡이고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는 유빵끼의 곡이지만,

오히려 소사의 목소리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토록, 그녀는 다른 이의 말과 음악을 완벽하게 자신의 말과 음악으로 변용하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누에바 깐시온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의 명성을 쌓아간다.

1975년의 쿠데타로 아르헨티나?군부가 집권하면서, 그녀 역시 극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1979년, 그녀는 자신의 콘서트 장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이 날 공연을 본 청중들과

 밴드 멤버들까지 모두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갖은 위협에 시달리고 험난한 인생길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남편마저 죽으면서, 더 이상의 음악 활동이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군사정권에 의해 영구 추방되어 끝 모를 유럽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한없는 절망으로 시작된 망명 생활이었지만, 그것은 존 바에즈(Joan Baez), 밥 딜런(Bob Dylan), 해리 밸라폰테

(Harry Belafonte)등과 교류하고 공연을 벌임으로서, 그녀의 음악 지평을 넓히는 동시에 유럽 전역으로 그녀의 명성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아르헨티나에서 살면서 헌신해온 그녀에게, 타향살이는 정신적 스트레스 뿐 아니라 목소리가 닫히는

위기까지 가져왔다.

 

결국 그녀는 1982년, 많은 위험과 위협을 무릅쓰고 아르헨티나로 귀국을 감행한다. 그리고 얼마 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잉글랜드에게 패배했고, 군부가 몰락하면서 너무나 허탈하게 민주화를 맞이란다.

곧이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많은 이들에게 기념비적인 공연으로 남아있다.

 

 특히 'Gracias a la vida'의 마지막 1분을 장식하는 관객들의 기립박수로부터는, 단순히 귀국한 대가수에 대한

감사와 축하, 민주화에 대한 경탄을 넘어서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이름이 아르헨티나 인들에게 주는 위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소사의 레퍼토리들이 보다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 부터이다. 아르헨티나를 넘어서,스팅(Sting),

밀뜬 나시멘뚜(Milton Nascimento) 를 비롯한 타국의 슈퍼스타들에게 초대받아 기꺼이 공동 작업에 임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다양한 베스트 앨범과 모음집이 출시되어 그녀의 음악을 접하기는 더욱 수월해졌다.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1997년, 그녀는 한 번 더 쓰러진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르헨티나의 평화와 환희, 그리고 노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몸에, 예순을 넘어 반응이 찾아온 것이다.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사이에

 탈수현상으로 30kg이 빠지면서, 죽음의 문턱을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걸 이겨내고, 1998년 < Al Despertar >로 재기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만약 메르세데스 소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듣고 바로 '아, 좋구나' 느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그녀의 두터운 흉성과 특별히 오버하지 않는 무난한보컬 스타일은 자칫 무미건조하게 들릴수도 있다.

또한 노래에서 뿜어 나오는 육중한 무게감과 지나칠 정도의 차분함으로 인해 절대 쉽게 가슴을 파고들지 않을 것이며,

 특히나 요즘의 감성과는 절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미쳐 걸러지지 않은 잔해 같은 앙금들이 은연중에 베어 나온다.

그녀의 음악이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에 의한 압박감 탓이 클 것이다.

직선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소위 '한방에 보내는 음악'에 익숙하고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지나칠만치 관조적이며 사색적인 소사의 노래는 그리 매력 있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소사의 노래는 가슴속 분노와 격정을 있는 그대로의 이상으로 분출하는 절창도 아니며, 기교와 기술이 넘쳐흐르는

솜씨 좋은 가수의 요령과 센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엔 그런 연출된 감정이나 훈련된 기술 따위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담담한 고백과 진실성이

 들어있다.

 

이제 그녀의 나이도 일흔을 넘겼다. 아르헨티나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민중의 곁에서 몸소 함께 하며, 진실한 영혼이 담긴 노래로 국민들의 분노와 슬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그녀의 목소리는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해와 성찰을 품고 있다.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해석자'라는 영광스런 호칭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그녀가 과대평가 받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릇된 집권 세력에 적극적으로 저항을 표한 가수도 아니었으며, 민중을 위해 노래한 가수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같은 호칭은 과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소사 자신도 인정했다..

그녀는 절대 사회참여적인 노래를 한적이 없다고, 처음부터 그녀의 관심은 그녀주위의 삶과 현실, 그리고 인간의

문제였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견지하지는 않았을망정, 경제난과 군부정치에 이중으로 시달리던

아르헨티나 평민들의 괴로운 삶에,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한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런 그녀의 위상은 아무리 높게 평가되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전 시대 아르헨티나인들이 추앙한 인물이 '국모' 에비타였다면,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던 공통 분모는 메르세데스 소사였다.

 

'Gracias a la vida'.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많은 사람들, 기쁘고 슬픈 일들, 소중한 사랑들,자신이 겪고 만났던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고, 산다는 것 자체로 기껍고 행복하다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그녀는담담하게 노래한다.

비올레타 빠라의 원곡을 넘어서는건 물론이거니와,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노래로 자신있게 추천하는 곡이다.

 

요즘 가수들에 질렸다고 말하며, 진정한 가수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첫 손가락으로 꼽고 싶은 가수이다. 본질적으로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사실 그녀의 별 것 없어 보이는 매끄러운 인토네이션과 비브라토, 바이브레이션과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음정의 구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어느 정도의 연륜과 감상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모국 아르헨티나와 함께 했고, 그 고통에 아파하고 환희의 순간을 함께 했으며, 치욕으로 얼룩진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마지막 빛 같은 존재였던, 영원한 아르헨티나 민중의 어머니 메르세데스 소사.

설령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삶에 무한한 영광이 함께 하리라. 라틴 아메리카는

영원히 그녀를 추앙할 것이며, 전 세계인이 그녀의 노래에 담긴 치유와 회복, 기쁨과 사랑의 힘을 축복할 것이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시대에 벌어진 '더러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실종자를 낳은

암울한 아르헨티나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물론,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는 방송될 수 없었다.

 

소사는 비밀경찰이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대중 앞에서 노래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매 순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사는 'Todo Cambia.'에서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고통당하는 민중들과의 굳은 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2009년 10월 4일 오전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가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사는 지난 9월 18일부터 숙환인 신장과 폐 질환으로 집중 치료를 받아왔으나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소사를 사랑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국회로 옮겨진 그녀의 시신에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시내 샤카리타 묘지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Elisabeth Fernandez)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됐다. 

 

짙은 검은색 머리 때문에 '라 네그라(La Negra, 검은 여인)'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던 소사는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음악에서 대중음악(fork music) 음악의 원류를 찾는 운동인 동시에 민중음악을 통한 사회변혁운동인 '누에바 칸시온

(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을 이끈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 편에서 그들을 옹호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래를 무기로 삼아 악명 높은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투쿠만(Tucumán) 주 산미구엘(San Miguel)에서 프랑스인과 케추아족 인디언

(Quechua Amerindian) 사이의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로 태어났다. 

소사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기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현실문제에 눈을 떴다. 그녀는 15세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1959년 그녀는 첫남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Mauel Oscar Matus)의 도움으로 앨범 'La Voz de la Zafra'을

발표했다. 

5년 뒤인 1965년에는 코르도바(Córdoba) 시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진보주의적 가수이자 민중운동 활동가이기도 했던 소사와 그녀의 남편은 본격적으로

누에바 칸시온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녀는 1960~1970년대 아르헨티나 누에바 칸시온의 선두주자로 활동했다. 

 

소사는 평생 남미의 전통음악을 추구했던 아르헨티나의 가수이자 작곡가 아따우알바 유빤끼(Atahualpa Yupanqui,

1908~1992)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남미의 구전음악과 종교음악에 바탕을 둔 노래들을 통해서 그녀는 고통받고 상처받은 민중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소사는 언제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대변하였기에 그녀의 노래는 정치색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사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로 불렸다.  

 

칠레 민속음악의 선구자 비올레타 파라(Violetta Parra, 1917~1966)가 작사, 작곡한 '생에 감사해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를)'는 소사가 불러서 더욱 유명해진 노래다. 

멕시코 출신의 미국 반전가수 조안 바에즈(Joan Baez, 1941~)가 부른 뒤에 이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독재정치와 인종차별에 맞서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여성 민권운동가들이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어버렸지만, 1970~1980년대 전세계 양심적 지식인과 진보적

 좌파들의 송가로 불리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체포와 투옥 끝에 국외로 추방당한 그녀는 1976~1982년까지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국의 민중들도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에 이어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죽음을 무릅쓰고 1982년 귀국한 소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갖고 그녀의

 목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르헨티나 민중들에게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 '알폰시나

이 엘 마르(Alfonsina y el Mar)', '솔로 레 피도 아 디오스(Solo le pido a dios)' 등 남미 포크 음악의 걸작들을

들려주었다.

 

 심금을 울리는 소상의 노래는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의 공연 실황 앨범 '엔 아르젠티나

(En Argentina)'는 14년이나 뒤늦은 2006년에서야 국내에서 발매되었다. 

 

소사는 생전에 40여장에 이르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2007), 영국 가수 스팅(Godon Matthew Sumner, 1951~)과 공연을 가진 바 있다.

 

또, 조안 바에즈 외에 브라질 출신의 까에따누 벨로주(Caetano Emanuel Viana Teles Veloso, 1942~), 스페인

 출신의 후안 마누엘 세라(Joan Manuel Serrat, 1943~), 콜롬비아 출신의 샤키라(Shakira Isabel Mebarak

Ripoll, 1977~) 등과도 공연했다.

 

 소사는 1994년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공연했다. 2002년에는 뉴욕 카네기홀, 2004년에는 로마 콜로세움에서도 성황리에 공연을 가졌다. 

 

2008년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Andrew Soderbergh, 1963~) 감독의 영화 '체(Che)'에는 소사가 부른

 '발데라마(Balderrama)'가 사운드트랙으로 쓰이기도 했다. 2009년 6월 국내에서 발매된 앨범 '칸토라

(Cantora)'는 그녀의 마지막 유작으로 남게 됐다

 

생전에 평소 '나는 좌파다.'라고 당당히 밝히곤 했던 소사는 라틴아메리카의 포크음악 나아가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남미의 뮤지션들 뿐만 아니라 영미권 뮤지션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위대한

음악인으로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도 메르세데스 소사나 조안 바에즈 같은 위대한 민중가수들이 나오기를...... 

 

 

 

 

 

 

 



Hasta Siempre, Mercedes Sosa!
"메르세데스 소사여, 영원하라!"
뚜꾸만의 딸


혹독한 군부통치와 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을 상징했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출생했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이 콜롬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꼭 2주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소사가 출생한 '뚜꾸만'(Tucuman)은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포한 곳이기도 했다.

뚜꾸만은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전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의 본산으로 음유시인

'아따우알빠 유팡키'(Athaualpa Yupanqui)가 소년시절을 보내며 인디오 전통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확인하고 정신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곳이다.

소사가 출생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소사가 평생을 걸쳐서 걸어가게 될 '자유를 향한 여정'을 예감하게 된다.

소사의 조부는 께추아족 인디오였으며, 조모는 프랑스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누이 '코차'가 푸른 눈을 가진 반면, 소사는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 그대로다. 전통 춤을 가르치는 강사로

 생활하던 소사는 1965년 코치킨 포크 페스티발에서 안데스의 전통의상을 입고 안데스의 전통북인 '봄보'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페스티발에서 그녀를 눈여겨본 필립스사는 그녀와 첫 음반 계약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전설은 시작된다.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뮤지션들이 대부분 싱어송라이터였던 것과 달리 소사는 작곡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사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누에바 깐시온의 최고의 해석자로서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와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의 아리엘 라미레즈와 레온 히에코,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파블로 밀라네스 그리고 브라질의 밀톤 나시멘뚜와 쉬쿠 부아르키 등 소사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들의 노래는 마치

소사 자신의 말과 음악인 것처럼 완벽하게 해석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타 파라의 'Gracias a la vida', 아따우알빠 유팡키의 'Guitara di melo tu'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빅토르 에레디아의 'Razon de vivir'(살아가는 이유) 등 누에바 깐시온의 스탠더드가 되는

노래들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군부독재시대에 벌어진 '더러운 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실종자를 낳은 암울했던

 아르헨티나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물론,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는

방송될 수 없었다.

 

소사는 비밀경찰이 따라붙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대중 앞에서 노래하기 위해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매순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소사는 'Todo Cambia'(모든 것은 변한다)에서 "모든 것은 변합니다 /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

생각하는 것도 /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고통 당하는 민중들과의 굳은 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번역을 필요치 않는 노래

노랫말의 의미가 중요한 누에바 깐시온 가수인 소사에게 '언어의 문제'는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소사의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목소리에 있다. 소사의 목소리는 그녀가 펼쳐온 음악의 정수였다.

 

소사의 목소리는 노랫말이 담고 있는 정서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소사의 목소리에 신들리듯 빨려들어 여느 음악 공연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소사의 목소리는 놀랍게 변화한다.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들려주기도 하며, 때로는

신념에 찬 우렁찬 외침을 거침없이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웃음을 담기도 하며,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이웃들의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소사의 천부적인 목소리는 그녀의 전인격과 일치되는 것이기도 했기에 소사의 노래는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노래로 전 세계인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곧 목소리이며 이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의 전인격뿐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을 한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인 판초를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삶과 음악을 일치시킨 위대한 가수에게 바치는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었다.


'희망'을 노래하기 위한 끝없는 여정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1979년 1월, 군사정권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남편과의 사별 직후에 당한 일이었기에 그녀에게 아르헨티나를

 떠난다는 것은 뿌리로부터 찢겨져 나가는 처절한 아픔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음 둘 곳 없는 쓰린 망명 생활 속에서 소사의 아티스트적 면모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시기에 소사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음악들을 실험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데스의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포크로리카'(Folklorica) 가수라는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 록과 재즈의 요소까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음악적 뿌리는 잊지 않았다.

드디어, 소사는 1982년 망명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다행스럽게도 소사가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몰락을 맞이했다. 귀국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음악 생활의 초반과 이후에 중요한 도움을 주었던 아리엘 라미레스와 아르헨티나의 밥 딜런이란 별명을 가진

록 가수 레온 히에코, 찰리 가르시아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극장을 가득 메운 아르헨티나

국민들과 더불어 소사의 귀국과 아르헨티나의 민주회복을 축하하는 감동과 환희의 축제가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의 민주회복과 더불어 소사의 레퍼토리는 사회적, 지역적인 것에서 범 아메리카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스팅, 닐다 헤르난데스, 프란시스 카브렐, 밀톤 나시멘뚜 등 세계적인 대중음악 스타들과의 공연과 앨범

작업도 이루어졌다.

 

 또한 음악 생활 내내, 자국의 작곡자들과 아티스트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소사의 노력도 이보다 한층 활발해져

아르헨티나의 작곡자들의 작품을 노래한 앨범 [Vengo a ofrecer mi corazon(내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을

발표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97년까지 활발한 앨범 활동과 공연활동을 펼치던 소사는 오랜 동안 감춰져 있던 정신적 상처로 인해 쓰러지고 만다. 망명 기간부터 쌓여왔던 불안과 고통이 소사의 육신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무려 5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극심한 탈수현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오간 끝에 소사는 가까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체중이 무려 30Kg이나 줄었지만, 반년동안의 고통 끝에 1998년 기념비적인 앨범 [Al Despertar(잠에서 깨어나)]를 발표하여 평론가들과 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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