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클래식의 대중화 및 음반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지휘계의 황제로 군림하던 그라지만 그러한 이력이 단기간에 이루어졌던 것은 결코 아니다.
베를린 필하모니라는 최고의 악단을 이끌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일 중소도시의 오페라 극장 등지를 떠돌며 지휘하는 극히 평범한 2류 지휘자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때부터 그는 가수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상대로 지휘를 한다는 것의 어려움과 그 적응방법을 체득했던 것이다. 카라얀은 지난 1939년 독일 그라모폰과 계약을 맺은 이후, 수십여년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방대한 음반을 남겼다.
이러한 엄청난 레파토리와 레코딩 양은 지휘자 사상 최고 기록이기도 하다.
카라얀의 지휘는 무척 섬세하고 치밀하며 그 때문에 사운드의 완벽함에 많은 신경을 기울인다.
이것은 그가 공연 전문 지휘가 아닌 레코딩 전문 지휘자로서 그 진수를 보여준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지휘에는 어느 하나하나를 듣더라도 흐름이 무척 아름답고 색채적으로도 풍부한 표현력을 들려준다.
그가 지휘한 숱한 음반들 중에서도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명연 중의 명연으로 자리한다. 1951년부터 3년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처음 레코딩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필두로 1961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고 녹음한
두 번째 것, 그리고 1975년 역시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고 녹음한 것 등이 그것인데, 이들 모두 지휘자로서의 카라얀의 카리스마와 고양된 열정, 빼어난 연출력 등을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외에 브람스의 교향곡이나 베르디의 일련의
오페라 작품들 등에서도 카라얀의 역량이 잘 나타나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피아노에 소질을 보인 그는 1914년에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다가 당대의 지휘자인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권유에 따라 지휘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보다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1927년 비인 음악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2년후엔 울름 시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가 지휘자로 데뷔할 때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피델리오’였다.
그가 서서히 지휘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35년경이었다.
당사 그는 아헨 오페라 극장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7세의 일이며 독일 음악계 사상 유례가
없는 젊은 나이였다.
그리곤 29세가 되는 1937년에 비인 국립 오페라 극장을 지휘해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처음 연주한 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9년에는 독일 그라모폰과 최초로 계약을 맺고 음반 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1941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국가 지휘자 ‘슈타츠카펠마이스터’의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1946년에는 빈 악우협회(樂友協會)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취임했으며, 1950년에는 EMI가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를 목적으로 조직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카라얀은 제1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해 ‘니벨룽겐의 가락지’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등을 지휘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미 이때부터 카라얀은 독일 및 유럽을 대표하는 지휘자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1956년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종신 예술감독이 된 것만 봐도 당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예술감독 및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예술감독 등 굵직한 타이틀들을 모두 독식하다시피하며 새로운 시대를 리드할 대 지휘자의 출현을 알렸다.
1960년대 후반에는 베를린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재단’을 발족시켰고, 이듬해에는 파리 관현악단의 예술감독에 취임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1984년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한 바 있다.
카라얀은 내한공연을 한지 몇 년후인 1989년 7월 16일 잘츠부르크 부근의 아니프에서 죽었다.
당대 지휘계의 큰 별이 사라진 것이다.
20세기 음악사를 통털어 놓고 볼 때 지휘자 카라얀만큼 엄청난 화제와 각광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는 아마 지휘자라는 전문직업인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모든 것들을 쓸어안고 가버린 영원한 '황제'임에 틀림없는
지휘자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쏟아진 찬사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지휘자로는 보기 드물게 언제나 찬반양론을 일으킨는 격론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그런 것들을 자기 자신의 고집과 방식대로 소화시켜 버린 희대의 '독재자'이기도 했다.
격렬한 몸짓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격렬한 논란을 낳게 했던 지휘자, 그가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실들도 결곡 카라얀이 보기 드문 대지휘자라는 어쩔 수 없는 결론으로 끌려가게 마련이다.
생전의 그가 일으켜 놓은 엄청난 파문에 20세기 중반 이후의 음악계 모두가 출렁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사실은,
카라얀이 불세출의 대지휘자였다는 한 가지 사실로 되돌아 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음악을 하나로 집약해서 말해버리기에는 아무래도 황당한 감이 없지 않다.
비록 카라얀이 '지휘자'라는 직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지휘자인 동시에
연출자였고 행정가였으며, 사업가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탤런트적 기질을 음악 연주라는 하나의 정점으로 몰아부침으로써, 그렇지 못한 사람드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이나 따가운 질시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89년 81세의 나이로 그가 갑작스럽게 타계해 버리고 난 뒤 우리에게 남겨진 카라얀의 체취는, 역시 그는
당애에 추종을 불허한 카리스마적 지휘자였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 이외의 어떠한 이미지도 카라얀이라는 지휘자의 부수적 의미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카라얀은 그리스 이민의 후손으로 1908년 4월 5일, 모차르트를 탄생시킨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체구와 명민한 두뇌를 가졌던 카라얀은 특히 피아노에 대하여 대단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장차
피아니스트가 되어보려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받았으며,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재능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카라얀은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파아노 연주에 대단한 재능을 과시한 것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자신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만났다.
당시 잘츠부르크모차르테움 음악원의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대지휘자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
(Bernhard Paumgartner)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파움가르트너는 모차르트 음악에 일생을 바친 지휘자이며 음악학자로서, 오늘날의 모차르테움 음악원이 세계적인
명문음악학교로 성장하기 까지에는 그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컸다.
바로 그가 카라얀을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방향을 바꾸게 해준 사람이다.
바꾸면 틀림없이 대성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결국 파움가르트너의 '예감'은 적중하여 지휘의 황제 카라얀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파움가르트너의 권고를 받은 카라얀은 이로부터 비로소 자신의 진로가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자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한 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카라얀은 빈 국립 음악원으로 옮겨 여기서 체계적인 지휘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카라얀의 신화는 이렇게 헤서 제자리를 잡고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지휘수업 과정에서 많은 대지휘자들의 영향력이 컸지만, 특히 한스 크나퍼츠부슈, 클레멘스 크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프란츠 샬크 같은 정통 독일-오스트리아계 지휘자들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다.
그가 뒷날 독일음악연주의 절대적인 독보성을 쌓게 된 것도 이들로부터 맏은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지휘스타일에 있어서는 토스카니니를 흠모하여 '독일의 토스카니니' 또는 '토스카라얀'같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것은 카라얀이 지휘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난 뒤의 일이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빈 국립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배운뒤, 카라얀은 21세의 나리오 울름 시립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취입했다.
그가 이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한 최초의 작품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이 오페라가 '황제
카라얀'의 데뷔작품이 된 것이다.
이후로 카라얀은 모차르트 오페라 지휘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의 중요한 레퍼터리가 되었다.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에서 20댜 초반의 젊은 나날을 보낸 카라얀은 27세 되던 1935년 아헨 오페라극장의 음악
총 감독이라는 '큰 자리'를 얻었다.
이것은 기록적인 일로, 아직도 27새의 나이로 오페라 극장의 음악총감독이 된 예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카라얀이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나타나 빈 필하모니를 처음으로 지휘한 것은 1937년 6월 1일,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니를 최초로 지휘한 것은 그 다음 해인 1938년 거의 나이 30세 때다.
그 이후로 빈 필하모니와 베를린 필하모니는 카라얀의 음악인생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러나 1964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측과 불화를 빚어 빈의 음악 무대를 떠나 베를린 필에만 전념했다.
카라얀이 다시 빈 음악계에 복귀한 것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77년 5월이었다.
이때 카라얀은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하여 "일 트로바토레", "라보엠"등 세편의 오페라를 지휘함으로써 빈 필과의
옛 우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카라얀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1955년 4월 5일,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 종신음악감독에 취임한 일도 절대적으로 빠뜨릴 수가 없다.
그 이후 1989년 81세로 사망하기까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이름은 세계 음악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군림해 오면서
낱낱이 예거 할 수 없는 무수한 음악적 사건들을 엮어온 것이다.
카라얀처럼 레코드 녹음의 기능적인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지휘한 사람도 드물다.
그보다 한 발 앞서 활동했던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레코드 녹음의 혜택을 극대한 으로 누리다 간 지휘자라고 하지만,
CD시대와 영상시대로까지 활동영역을 확장한 카라얀에 비하면 미흡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체적으로 빈 필하모니와 카라얀은 오페라 독음을 통하여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그들은 영국 데카 레코드와의 계약하에 세계 오페라 연주사에 길이 빛나는 명반들을 제작해 왔던 것인데 그렇게 해서
카라얀의 대표적인 오페라 녹음은 거의 다 '빈 필하모니- 데카'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에는 빈 필하모니와의 콘서트 녹음도 가져 도이치 그라모폰에 그 숨결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최후의 녹음인 브루크너 교향곡 제 8번도 빈 필하모니와 함꼐 이루어졌다는 것은 새겨두어야 할 일이다.
카라얀은 1989년 7월 16일, 장츠부르크 축제 오프닝 콘서트를 불과 2주일 앞으로 남겨두고 급서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향년 81세가 적은 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휘자의 장수를 생각할 때 그에게는 아직도 더 지휘해야 할
인생의 여백이 필요했었다. 카라얀의 죽음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얀이 빈 필하모니와 함께 연주했던 무수한 기록들은 레코드로 재생되어 길이길이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지휘자 카라얀이 누리는 불멸의 예술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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