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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Musical

Richard Strauss All Souls' Day

 

 


 

 

 


Allerseelen - Jessye Norman

 

 

 

 

Richard  Strauss
Gedichte aus Letzte Blatter, Op. 10, TrV 141
No. 8. Allerseelen (All Souls' Day) 위령의 날 

 

 

Hermann von Gilm zu Rosenegg(1812-1864) TEXT 
 

 

 
Stell auf den Tisch die duftenden Reseden,
탁자위에 향긋한 레세다를 갖다놓고,
Die letzten roten Astern trag herbei
최근에 핀 붉은 과꽃을 여기에 갖다놓고,
Und lass uns wieder von der Liebe reden,
그리고 우리 다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
Wie einst im Mai.
마치 예전의 오월처럼.

Gib mir die Hand, dass ich sie heimlich drücke,
내게 손을 달라, 내가 그것을 은밀히 잡을 수 있도록,
Und wenn mans sieht, mir ist es einerlei:
그리고 사람들이 보아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Gib mir nur einen deiner süssen Blicke,
나에게 단지 너의 달콤한 눈길을 달라,
Wie einst im Mai.
마치 예전의 오월처럼.
 


Es blüht und funkelt heut auf jedem Grabe,
모든 무덤에 오늘은 꽃이 피고 향기롭다,
Ein Tag im Jahr ist ja den Toten frei;
일년중 하루는 죽은 사람도 자유롭다;

 

Komm an mein Herz, dass ich dich wieder habe,
나의 가슴으로 오라 내가 너를 다시 안을 수 있도록,
Wie einst im Mai.
마치 예전의 오월처럼.

 
Edith Wiens, sop  
Rudolf Jansen, piano

 

 

 

 

 

 

 

 
 

      

 

 

 

 

 

 

 

 

 

 

 

후기 낭만파 음악의 거장인 그는 근대 독일을 대표하는 최대의 작곡가이며 표제음악과 교향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아버지는 뮌휀 궁정 가극장에서 호른을 부는 단원이었는데,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에게서 최초의 음악 교육을 받았다. 4세 때부터 재능을 보인 그는 6세에 피아노곡과 가곡을 작곡하였다. 16세 때 교향곡 d단조 등 작곡에 진전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 음악을 숙독시켰는데,  점차 19세기 말의 낭만파 작품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882년 그는 뭔휀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 미학, 문화사 등을 공부하였다.
1883년 그는 베를린에서 그 당시 미술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5년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에게 인정을 받아 마이닝겐에서 뷜로의 보조 지휘자 겸 합창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브람스,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 등의 새로운 음악을 알게 되었으며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1886년 뮌헨 가극장의 제3악장이 되었고, 1889년 바이마르 궁정 지휘자가 되었으며, 1894년에는 다시금 뮌휀,
1898년에는 베를린, 1919년부터 5년동안은 빈 국립 가극장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에 남 아메리카로 가서 재차 미국을 방문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1932년 나치스 정책은 유대인을
 배척하였으며 음악가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그는 처음에 나치스 정권에 협조하여 정부가 설치한 음악국의 총재로 있었는데, 얼마 후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말살하고 대신 새 제목으로 작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를 거부하고 유대인 츠바이크의 대본에 희극 [침물의 여자]를 작곡하였다. 그로 인해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사서 1935년에 총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1945년에 독일이 패망하자 그는 나치스 협력자의 혐의로 비난을 받아 작품은 악계에서 매장되어 곤란한 때도 있었다.
 그는 생활을 위해 80여세에 런던, 빈 등지에서 지휘봉을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84세의 탄생일을 맞이하는 해에 그는 나치스 숙청 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시금 햇빛을 보게 되어 85세 생일 때는 그를 축하하는 음악회가 각지에서 개최되었고 작품도 연주되어 절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신경질이 있는 반면 완고한 사람이며 정력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어느 파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환영되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는 형식에 중점을 둔 고전주의적인  작곡가였고 젊었을 때는 주로 교향곡과 실내악을 작곡하였다.

다시금 그는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의 표제음악의 영향으로 음악을 형식적인 구성에서 해방하고 음을 수단으로 시와 극과 이야기 등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표현력은 대단한데, 라이트 모티브(Leitmotiv)의 기법과 변주법에 의한 기량은 놀랄 만하며 관현악법의 능숙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고전에 대한 애착심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소편성에 의한 기악곡은 주목할 만하다. 가곡 분야에도 200곡 이상이나 되는데, 독일의 예술 가곡 작곡자로서의 비중은 대단하다.

그의 작품은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에서], 교향시로 [돈 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돈키호테][영웅의 생애] 등이 있고 [알프스 교향곡]과 모음곡으로 [서민 귀족], 악극으로 [군트람][불의 결핍][살로메][일렉트라][장미의
기사][그림자 없는 여인][간주곡][이집트의 헬레나][아라벨라][침묵의 여자]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교향시,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이 있다.

그는 리스트의 뒤를 이어 교향시에 표제적인 내용과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근대적인 작곡 수법을 가미한 작곡가이다.
 따라서 [살로메][엘렉트라][장미의 기사] 등으로 바그너가 개척한 악극에 새로운 발전을 보여 주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본질적인 기질은 극장과 오케스트라로부터 기인한 대담한 음색 표현과 연극적인 제스처를 이끌어

내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차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신동 출신인 그는 여섯 살 무렵부터 이후 78년 동안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 의거한 리트를

200여 곡이나 작곡했다.

그러나 예술가곡 장르에 헌신했던 그의 진정한 위대한 업적은 베를리오즈, 말러의 경우처럼 오케스트라를 수반한 성악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 반주의 가곡을 15개밖에 작곡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두는 피아노 반주 리트와 마찬가지로 풍부하고 복합적이며 오페라적인 성격을 똑같이 머금고 있다.

아이헨도르프와 헤세의 시에 감명 받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슈트라우스는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모든 재산은 빼앗겼고 명예는 더렵혀졌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은 잿더미가 되었고 사랑하는 조국은 커다란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84세의 슈트라우스는 지금까지 승리에 넘친 삶을 걸어왔지만, 이제는 회생할 수 있는 희망은 고사하고 질병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오페라 <카프리치오>에서는 언어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패러독스한 결말을 내렸고 <메타모르포젠>에서는 감성과

 이성의 무기력함에 대한 우울한 결말을 내렸다.

더 이상 그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듯이 보였다.

당시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슈트라우스는 영국에서 지휘자 토머스 비첨이 선의를 갖고 다방면으로 구원 활동을

펼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과거를 곱씹으며 현재만을 향유할 수 있었다.

1946년 슈트라우스는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시인 아이헨도르프가 쓴 시 ‘저녁놀에’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슈만과 볼프가 즐겨 차용했던 아이헨도르프의 시로부터 그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마지막 의미 있는 작품을 작곡하도록 아들 프란츠 슈트라우스에게 설득 당한 작곡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를 위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는 1946년부터 조금씩 스케치를 해나가기 시작했고, 여기에 그가 젊은 날에 작곡했던 교향시 <죽음과 변용>이라는

제목을 악보 옆에 메모해두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여성 목소리를 위한 이 ‘저녁놀에’는 1948년 5월 6일 완성되었다.

 

그 다음으로 슈트라우스는 20세기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의 세 개의 시에 곡을 붙이고자 했다. 이들 작품 또한

아름다운 목소리와 오케스트라의 풍부한 음향을 위한 리트로서, 작곡가는 ‘저녁놀에’처럼 고요한 마음의 평정과

 부드러움, 과거에 대한 회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죽음을 향한 묵묵한 준비를 혼합해 놓은 분위기를 의도했다.

 ‘저녁놀에’를 완성한 뒤 몇 주 뒤 슈트라우스는 밝은 수채화와 같은 ‘봄’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 해 7월 18일 완성했다.

탄력을 받은 슈트라우스는 8월 4일에는 ‘잠들기 전에’를 완성했고 곧이어 9월 20일에는 ‘9월’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이 네 개의 오케스트라-리트가 연주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소프라노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이 작품의 초연을 1950년 5월 22일 런던 앨버트 홀에서

가졌는데, 이미 8개월 전 85세의 슈트라우스는 가르미슈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 파울리네가 타계한 지 9일 뒤에 이루어진 초연이었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라는 제목은 슈트라우스의 출판업자가 작곡가 사후 붙인 이름이다.

제목에 의해 일종의 형식적 순환과 내용적 연관을 갖는 연가곡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언제 어떻게 자신의 연극에

막을 내려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을 통해 부유한 삶과 사랑했던 아내에 대한 헌신,

 영광스러운 명예, 더 나아가 휴고 볼프와 말러, 피츠너로 이어졌던 위대한 독일 낭만주의 리트 전통에 마지막 고별인사를

던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