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pin (1810 - 1849)
Piano Concerto No.2 in F minor, Op. 21
쇼팽 -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 Op.21
Lang Lang, Piano
Wiener Philharmoniker, orch.
Zubin Mehta, cond.
폴란드 '쇼팽의 집' 정원에 있는 쇼팽 조각상
쇼팽은 평생 동안 거의 피아노곡만 작곡했고 음악사를 통틀어 피아노란 악기를 얘기할 때 쇼팽과 견줄만한 작곡가는 찾아 보기 어렵다.
쇼팽은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는데 두 곡 모두 청년기에 작곡했다.
그래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관혁악부의 상대적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청년기 쇼팽의 예민한 감수성이 배어있어 더없이 애틋하고 아름답다.
쇼팽은 1829년 19세에 피아노 f단조 협주곡을 작곡했으나 유럽 여행 중 이 악보를 분실한다.
그래서 1830년 작곡한 e단조 협주곡이 1833년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먼저 출판되고 뒤이어 1836년 f단조 협주곡이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출판된다.
사실상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쇼팽의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인 셈이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쇼팽의 첫사랑이었던 콘스탄티아에 대한 젊은날의 연민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2악장 라르게토는 첫사랑 콘스탄티아에 대한 청춘의 애환과 순정이 그대로 건반으로 옮겨져 건반 하나하나에 쇼팽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쏟아 질 듯이 아름답다.
별이 많은 밤에 이 대목을 들어보면, 피아노의 한 음 한 음이 모두 별을 그려내는 듯하여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쇼팽이 혁명의 불길을 피하기 위해 고국 폴란드를 떠났던 것은 1830년 11월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바르샤바에서의 공개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폴란드의 흙을 밟지 않았던 쇼팽. 그가 남긴 2곡의 피아노 협주곡은
모두 파리로의 망명 직전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은 그 작곡배경에 있어서 공통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두 곡 모두 쇼팽의 안타까운 첫사랑이었던 여가수 콘스탄쩨 글라드코브스카(Kons-tanze Gladkowska
1810-1889)에 대한 사랑으로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이 곡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비록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나기는 했다지만 쇼팽은 자신의 음악원 후배이기도 했던 이 오페라 여가수를 끔찍히도 사랑했던 것이고 그녀에 대한 바로 그러한 뜨거운 마음으로부터 이같은 감미롭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피아노 협주곡들이
탄생케 되었다.
1번 2악장의 느린 로만체는 달콤하기 그지 없으며, 도취적인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2악장을 쓸 때 쇼팽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낭만적이고 조용하고 감상적인 마음으로 썼다.
나의 즐거웠던 추억들을 생각하며..."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쇼팽이 사랑했던 여인과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며, 고국을
떠나는 자신만의 이별 의식이었다.

제1악장 Maestoso
소나타 형식 처음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제시부가 나오고 그 후 제1테마가 노래조로 나타난다.
다시 오보에가 제 2테마를 연주한 후 제 1바이올린이 이어받고 피아노로 넘어간다.
제2악장 Larghetto
어둡고 정열적인 중간부를 지나 테마가 재현된다.
제3악장 Allegro vivace
론도형식 제 1테마가 피아노로 연주된다.
전악장은 마주르카풍의 리듬을 가진 테마로 구성된다.
향토성이 짙고 화려하게 즉흥적인 발전을 보이는 환희에 찬 악장이다.
2008년 여름, 중국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자서전이 출판되었다.
약 10년 전, 처음으로 랑랑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언뜻 그 당시 중국 정부가 어떤 나라에 기증한 새끼 판다 중에 그와 비슷한 이름이 있었는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 후, 랑랑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천재 피아니스트’, ‘기적의 피아니스트’ 하면서 사람들이
너무 요란스럽게 선전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랑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을 만한 일들이 뒤를 이어 일어났다.
작년 8월,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 소녀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은 랑랑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6월에는 빈에서 거행된 사커 유럽 선수권 ‘유로 2008’의 갤러 콘서트에 출연하여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 협연하였고 2007년 12월에는 스톡홀름에서의 노벨상 수상식 기념 콘서트에 출연하였다.
이렇듯 전세계가 주목하는 큰 이벤트에 랑랑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들,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토프 엣센바흐, 제임스 레봐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이몬 래틀과의 협연도 이루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랑랑은 작곡가들의 의지를 넘어서 자기 마음대로 연주한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랑랑은 섬세함과 다이나믹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뛰어난 기교와 확고한 구성력을 가지고 스케일이 큰 음악을 그려낸다.
더욱이 피아노의 음의 아름다움과 웅변으로 나타내는 깊은 로맨티즘은 누구나를 사로잡고 만다’고 절찬하는 비평가도 있다.
이쯤되면 나 같은 일반 음악 애호가의 마음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날, 랑랑의 자서전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10년 전에 랑랑을 언뜻 판다의 이름으롤 생각한 사람이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오랫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자책이 가세하였겠지만 자서전이 발매되자 즉시 주문하여 읽고
또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몇 번 손이 갔는지 모른다.
‘랑랑’은 한자로 ‘郞郞’이다. 사내 랑(郞)은 교양있는 신사라는 뜻이고 밝은 랑(朗)은 눈부신 햇빛이라는 뜻으로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이다.
랑랑은 1982년 6월 14일, 중국 심양(瀋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이트클럽에서 혹은 공군시설에서 경비원으로 일하였다. 일찌기 할아버지로부터 호궁(胡弓)을 배운 아버지는 프로 음악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그의 꿈을 앗아갔다. 한편 심양의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여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지주였던 탓으로 그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1가족 1자(子) 정책이 실시되고 있던 때다.
이렇게해서 꿈과 희망이 끊긴 부모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어린 랑랑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처음부터 넘버 원이 그들의 목표였다. 랑랑이 2세 때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사들인다. 랑랑은 피아노
치는 것이 좋았다.
랑랑의 피아노에 맞추어 아버지는 호궁으로 반주하며 노래하였다.
사실 그때 아버지는 랑랑을 중국의 넘버 원, 아니 세계 넘버 원의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랑랑이 4세때, 심양 음악학원의 우수한 피아노 선생을 만나게 되고 5세때, 10세 미만의 어린이들 500명 이상이 참가하는 심양 피아노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다.
이 우승을 계기로하여 랑랑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결심한다. 오늘날 중국에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어린이가 5,000 만명에 달한다. 그 중에서 3,600 만명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 바다같은 경쟁자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이 간다. 랑랑이 베이징에 있는 중앙 음악원에 입학한 것이 9세때, 전국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생도 3,000명 중에서 12명이 선발되는 이 대회에서 1등으로
합격한다.
그동안 어머니는 심양에서 일을 계속하고 랑랑과 아버지는 베이징의 빈민가에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연습을
계속하였다.
어떤 때는 넘버 원이 되어야한다는 아버지의 강압을 참다못해 5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겠다고 소리지르며 창가로
달려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랑랑은 때때로 아버지에 반항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랑랑이 처음으로 중국 밖으로 나간 것은 1994년 여름 12세 때 일이다. 독일 에틀린겐에서 개최되는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특별상까지 받는다.
‘랑랑, 자네같은 연주는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네. 신이 자네의 손가락에 머물고 있는듯 하였네.’ 중국의 유명한
음악교수가 한 말이다. 그러나 중국내의 일반적인 반응은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특히 베이징 음악학원의 랑랑에 대한 분위기는 적의에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랑랑의 국제적 지명도를 높여 줄 만한 일이 일본 센다이에서 진행되었다.
즉 제2회 젊은 음악가를 위한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쿨이었다.
랑랑은 여기서 처음으로 모스크바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함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40개 국에서
모여든 천재 피아니스트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1위를 획득하엿다.
그 후 랑랑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의 교장이며 저명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개리 그래프맨을 알게되고 그의 초청으로 1997년 미국으로 떠난다.
랑랑은 여기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에도 랑랑과 아버지는 세계 각처에서 열리는 콩쿨에서 우승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프맨은 이렇게 타일렀다.
‘콩쿨에 자주 나가면 음악에 대한 생각이 좁아진다.
중요한 것은 상이 아니라 활동무대를 찾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차차 그래프맨 교장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랑랑은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감상하였다.
영어 선생으로부터 세익스피어의 햄릿도 배우고 브로드웨이에서 라이온 킹도 보고 새로운 화성법 유럽의 문학, 예술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이클 조단, 타이거 우드 처럼 유명해지자고 생각하며 랑랑은 기다렸다. 번스타인이 브루노 월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 하모니를 지휘함으로써 또 안드레 왓쯔가 글렌 굴드 대신 연주함으로써 유명해진 것 같은 그런
기회를 기다렸다.
1999년, 미국에 온지 2년 되는 해, 여름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시카고 라뷔니아에서 개최되는 세기의 갤러 콘서트에서 급한 병으로 출연하지 못하게 된 안드레 왓쯔의 대역으로 선발된 것이다.
라뷔니아는 미국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야외 연주장이며 이날 출연하기로 되어 있는 연주자 중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스턴, 고또오 미도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랑랑은 크리스토프 엣센바흐가 지휘하는 시카고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였다.
큰 성공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일순 침묵이 흐르는 듯하다가 뜨거운 박수가 일었다.
‘번개가 지나가는 듯하였다’ 어떤 비평가가 부르짖었다.
약 3만 명의 청중이 일제히 일어나 브라보를 외치고 있었다.
랑랑은 순간 마음 속으로 이것이 새로운 그 무엇인가의 시작, 나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날의 연주로 랑랑은 그 재능이 높이 평가되어 일약 세계의 각광을 받게 되어 온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한편 2004년에 유니세프의 친선대사가 된 랑랑은 ‘랑랑 국제 음악재단’을 설립하고 카네기홀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어린이와 젊은 세대에의 계몽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랑랑이지만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 보고있는 단동(丹東)에서 태어 났고 랑랑과 그 아버지는
중국에서도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심양이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 모두가 한때 체험한 그런 가혹한 빈곤과 험난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겠지만 나는 지금 앞으로 랑랑의 열렬한 팬이 될지 모른다는 그런 예감 때문에 마음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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