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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Gabriel Faure-Sicilienne op. 78

 

 

 


Theodora Geraets, Violin

Erika Waardenburg, Harp

 

장한나, Cello

 

김상진, Viola

 

 

 

 

 

 

 

 

 

포레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시칠리안'은 본래 몰리에르의 극음악 '평민귀족'의 일부로 1893년에 작곡된 것이다.
그리고 후에 작곡된 극음악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op. 80)에서도 다시 이 곡이 사용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시칠리안'의 독특한 부점리듬이 효과적으로 씌여지고 있으며, 선법적인 선율의 움직임을 통해서

섬세한 변화가 그려진다.

 

이 곡은 포레의 곡중에서 가장 애호 받는 곡의 하나로서 여러 가지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고 있다.

17~18세기경 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생겨난 무곡. 대개 중간 속도의 8분의 12, 8분의 6박자로 되어 있으며

펼친화음[分散和音]으로 반주된다.

 선율은 거의가 점리듬으로 연주되는 서정적인 선율이고 성격은 다르지만 파스토랄과 비슷하다.

 코렐·바흐 등의 소나타에도 느린 악장으로 쓰이고, 또 오페라나 칸타타 등에서도 아름다운 전원풍경 같은 데서

연주되고있다.

알라 시칠리아나(alla ciciliana)라는 말은 ‘시칠리아노 양식’이라는 뜻이다.


Gabriel Urbain Fauré (포레) 1845.5.12~1924.11.4, France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로 노틀담사원을 비롯한 여러 교회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고 말년에는 파리음악원 교수를 거쳐 음악원장으로 재임한 작곡가다.
그의 작품은 우아하고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넘쳐 그의 후배인 드뷔시, 라벨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시칠리엔느"는 극의 무대음악으로 작곡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 들어있는 곡인데 4곡으로 된 교향적 모음곡 가운데 세 번째 곡이다.

시칠리엔느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민요 가락의 목가적 형태를 딴 이름으로 시칠리아나와 같은 이름이다.

이 곡에서 포레는 목가적 내음을 이용하여 전아하고도 차원 높은 여운을 표현하는데 성공하여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나가와 또다른 독창성을 가진 포레의 시칠리아나로 승화시키고 있다.

 

어려서부터 음악재능을 인정받아 9세 때 파리 니데르메이에르 음악학교에 입학한 포레는 여기서 중세 르네상스 종교음악과 J.S.바흐. F.J.하이든의 작품을 공부하고, 생상의 제자가 되어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등의 음악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863년 첫 작품인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무언가》를 발표하였으며, 졸업 후 파리 마들렌교회의

 오르가니스트, 파리음악원 작곡법 교수로 활동하였다.

 1870~71년 프랑스, 프로이센전쟁에 종군한 뒤 1871년 당시 창립된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에 참가하였다.

1905년부터 청력상실과 건강쇠약으로 퇴직할 때까지 파리음악원 원장을 지냈으며, 1909년 아카데미회원이 되었다.

 라벨, G.에네스코 등을 가르쳤으며 퇴직 후에도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근대 프랑스 서정파의 거장이며 나아가서는 근대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천품이

나타났다.

 

우아한 기품을 지닌 그는 고전의 전통적인 형식과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의 기교는 최고의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자유롭고 신선한 음의 취급과 섬세한 시적 감정에 차있다고 하겠다.

세련되고 심오하며 감수성 넘치는 작풍으로 성악, 피아노곡, 실내악곡, 관현악곡 등 거의 모든 장르를 포괄하였는데,

전통적인 음악형식을 바탕으로 대담하고 창의적인 표현양식을 더하였다.

드뷔시, 라벨로 이어지는 근대프랑스음악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대표적 음악가였다.

 

그의 내성적인 기질은 실내악, 피아노, 그리고 특히 오페라를 그의 예술의 기본 바탕으로 하였는데 오페라는 프랑스 말과 떠날 수 없으리만큼 되어 있다.

그는 전통을 존중하였으며 그의 주의 깊은 대담성은 드뷔시처럼 혁명적은 아니라 해도, 초기의 로맨티시즘을 제외하고는 그 수법을 순화하고 스타일을 세련시킨 그의 독창성과 노력은 놀랄 만gk다.

낭만파의 시대로부터 근대의 길을 개척한 중요한 인물이며, 근대 프람스 음악계의 대 작곡가이며 교육가인 포레가 차지한 비중은 크다고 하겠다. 그는 드뷔시보다 20년 먼저 나서 근대 프람스 음악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세련된 미는 순수한 프랑스 향취를 발하고 있으며 대담하고 화성적인 감각에는 지금까지 맛볼 수 없던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

 

그는 저명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교육자로서 마스네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문하생에는 라벨, 에네스코, 슈미트, 블랑제 등 저명한 작곡가들이 있다. 그를 가리켜 대기 만성의 작곡가라고 하며 걸작으로 알려진 실내악 작품들은 70세 이후의 소산이라고 한다.

대표작품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자장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발라드》, 관현악 모음곡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오페라 《프로메테우스》, 《페넬로페》, 《꿈꾼 뒤에》, 《이스파한의 장미》와 100곡이 넘는

 작품이 있으며 성악곡《진혼곡》과 야상곡, 즉흥곡 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실내악과 오페라은 브람스 이후 그만한 공적을 남긴 작곡가가 드물다. 그는 독자적인

 선율과 화성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개성적인 스타일에 알맞은 작품을 써 낸 작곡가라고 하겠다.

 

 

 

 

 

 

 

 

 

가브리엘 포레는 1845년, 프랑스 남부 파미에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포레는 교회에 있는 풍금을 통해 음악과 친해졌다. 포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틈만 나면 교회로 달려가 풍금을 치면서 놀았다. 실력은 형편없었다. 테크닉도 없었고, 바르게 치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을 치면서 행복했다는 것이다.

1854년, 그의 아버지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그를 파리에 있는 네데르메이에르 교회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훌륭한 교회음악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육은 교회음악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1861년, 생상스가 피아노과 교수로 부임했다.

생상스는 당시 유행하던 슈만, 리스트, 바그너의 음악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아버지처럼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포레는 그의 열정과 자상한 마음에

감동했으며, 이후 평생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1865년, 포레는 피아노, 화성학, 대위법, 작곡 부문의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성 소뵈르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했다.

 

하지만 일을 매우 지루하게 생각한 포레는 신부가 설교하는 동안 살짝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온다거나 밤새 파티에 참석했다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오르간을 연주하는 등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4년 만에 해임당했다.

 

그 후 생상스의 소개로 클리냥쿠르 노트르담 교회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잠시 일하다 1870년 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자원 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엘리제 생 쉴피스의 성가대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때 동료 오르가니스트 위도와 함께 경쟁하듯

 연주하는 즉흥 연주를 즐겼다.

 

바로 이 무렵 새로운 프랑스 음악의 모색을 위해 국민음악협회가 설립되었다.

생상스가 회장이었으며, 포레는 창립 멤버였다. 그는 자기 작품을 이 협회의 음악회를 통해 발표했다.

1874년, 생상스가 수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는 마들렌 성당의 보조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상스가 여행으로 자주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포레가 대신 연주하는 일이 많았다.

 

포레는 여기서 40년간 일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생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도 정작 오르간곡은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오르간보다 피아노를 좋아했다.

오르간은 그저 생계 수단일 뿐, 그처럼 섬세하고 예리한 감성과 뉘앙스를 가진 작곡가에게 오르간은 너무 둔감한

악기였다.

 

1878년,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 〈발퀴레〉,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파르지팔〉 등을 보았다.

그는 바그너를 존경하고 그의 음악을 면밀하게 연구했지만, 자기 음악에 그것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포레는 당대 작곡가 중에서 바그너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1883년, 유명한 조각가의 딸 마리 프레미에와 결혼했다. 하지만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했고, 종종 다른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1892년 무렵에는 가수 엠마 바르닥과 로맨틱한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딸 돌리를 위해 피아노 모음곡

〈돌리(Dolly Suite Op.56)〉를 작곡하기도 했다.

1888년에는 후에 자신의 대표작이 된 〈레퀴엠〉을 선보였다.

 

 하지만 마들렌 성당의 신부는 "우리는 이런 식의 새로운 작품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들렌 성당에는 이것 말고도 연주할 작품이 차고 넘치니까요."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892년, 파리 음악원 작곡과 교수 에네스트 귀로가 죽자 생상스가 포레에게 그 자리에 지원해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음악원 교수들은 그의 음악을 불손한 모더니즘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원장인 앙브로와즈 토마는 결사반대했다.

 

"포레! 절대 안 돼. 만약 그가 교수가 된다면 내가 사표를 던질 거야."

결국 포레는 교수가 아닌 지방 음악원의 감독관 일을 맡았다.

1896년, 파리 음악원 원장 토마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테오도르 뒤브아가 원장으로 취임했고, 포레는 원장이 되지 못해 홧김에 사표를 던진 마스네를 대신해

작곡과 교수가 되었다.

 그 밑에서 라벨, 에네스쿠, 나디아 불랑제 등 미래의 유명 작곡가들이 공부했다. 포레는 열린 마음을 가진 스승이었다.

 제자들에게 자기 스타일을 따라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1905년, 로마 대상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어났다.

포레의 제자인 라벨이 로마 대상에 연거푸 떨어지자 로망 롤랑을 비롯한 음악계 유력 인사들이 파리 음악원 교수들의

보수성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 일로 뒤브아가 원장직을 사임하고 그 자리가 포레에게 돌아갔다. 포레는 곧 개혁에 착수했다.

입학시험과 학기 중 시험, 교내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모두 학교와는 관계없는 외부 인사를 쓰도록 했다. 커리큘럼도

대폭 바꾸었다.

 

 르네상스의 다성음악부터 드뷔시의 음악까지 레퍼토리의 폭이 확대되었다.

그전까지 금기시되었던 라모의 아리아는 물론, 심지어 바그너의 오페라까지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학생들에게 개인 레슨을 해 주며 부수입을 챙기고 있던 교수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학교를 떠났다.

 

1911년 무렵, 포레는 청각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잘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리가 왜곡되어서 들렸다.

그 후 건강이 점점 나빠져 결국 1920년에 음악원 원장직을 사임했다. 말년에 건강으로 무척 고생하던 포레는 1924년

 11월 4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포레의 작품 경향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에 머물러 있는 시기로 이때는 살롱에서 유행하는 음악 등 프랑스 사교계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을 썼다.

그러다가 제2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다채롭고 눈부신 화성과 화려한 색채감을 폭발적으로 보여 주는 오케스트레이션, 관능적이고 정열적인 정서로 요약될 수 있다.

청각을 잃은 후에 쓴 작품들은 제3기에 속하는데, 이때부터는 내성적이고 금욕적이며 종교적인 작품을 썼다.

 

포레는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큰 양식보다 독주곡이나 실내악, 가곡 같은 소규모 양식에 주력했다.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을 썼으나 오페라는 한 편도 작곡하지 않았다. 대편성곡은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들어간 교회음악이 주를 이룬다.

 

 그중 대표작은 1888년에 발표한 〈레퀴엠(Requiem Op.48)〉이다. 레퀴엠은 대개 분위기가 어두운데, 포레의

 〈레퀴엠〉은 '죽음의 자장가'라고 불릴 만큼 편안하고 평화로운 것이 특징이다. 〈입당송과 키리에〉, 〈봉헌송〉,

〈상투스〉, 〈자비로운 예수〉, 〈아뉴스 데이〉, 〈리베라 메〉, 〈낙원에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비로운 예수〉는 소프라노 독창으로 부른다.

 

다른 레퀴엠에 비해 〈진노의 날〉이 정서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다소 축소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마지막 곡으로 원래 텍스트에 없는 〈낙원에서〉를 집어넣었다.

 이는 포레의 낙천적인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네 개의 상승하는 분절음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합창단이 '예루살렘'을 반복해서 부른다.

 

포레는 오페라 작곡을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898년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의 비극에 곡을 붙인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 Op.80)〉이다.

 

나중에 이 중 몇 곡을 추려 관현악 모음곡으로 만들었다.

제1곡 〈전주곡〉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비극임을 암시한다.

제2곡 〈실 잣는 여인〉은 3막에서 성안의 방에서 멜리장드가 실을 잣고 있을 때 연주되는 음악이다. 물레가 돌아가는

 단조로운 소리는 현악기가, 두 사람의 대화는 목관악기가 묘사한다.

 

제3곡 〈시칠리아 춤곡〉은 극과는 상관없이 교향 모음곡을 만들 때 집어넣은 것이다. 제4곡 〈멜리장드의 죽음〉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녀의 남편 때문에 멜리장드가 죽는 과정을 그렸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첼로 독주곡 〈엘레지〉, 〈시칠리아노〉, 〈현악 4중주 e단조〉, 가곡 〈꿈꾸고 나서〉,

관현악 소품 〈파반느〉, 합창곡 〈장 라신 찬가〉, 극장음악 〈칼리귤라〉, 〈서민귀족〉, 〈페넬로페〉 등이 있다.

아래를 클릭하면 "포레"의<시실리안느>를 들을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