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아이작 스턴은이 시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사람으로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는 전문 연주가로서 50년 이상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콘서트 무대에서 연주해왔고,
무수히 많은 젊은 음악인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으며,국내외 예술진흥을 위해 헌신해 왔다.
스턴은 우리시대의 가장 많은 작품을 레코딩한 아티스트로서63명의 작곡가들의 200여작품을 100장이상 녹음했다.
그는 50년간 소니 클래식의 전속 아티스트로서 활동해왔고,이 오랜관계를 인정받아 1985년 최초의"계관 아티스트"의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1995년 소니 클래식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아이작 스턴: 전 생애에 걸친 음악"이라는 타이틀로
43개의 디스크를 재발매할 예정으로 있어다시 한번 세계음악계의 화제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수한 레퍼토리의 뛰어난 곡해석으로 유명한 스턴은자타가 공인하는 현대음악의 거장이기도 하다.
그는 번스타인, 펜데레츠키, 로츠버그, 슈만, 뒤티유그리고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의 작품을 초연했고,
바르토크와 힌데민트의 작품을 미국 초연했다.그리고 슈만의 작품을 제외하고 이 작품 모두를 레코딩했다
그의 화려한 경력은 영화와 텔레비젼으로도 이어진다.
영화 "모택동에서 모짜르트까지: 중국의 아이작 스턴"은1981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문상을 수상했으며,
카네스 필름 페스티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또한 1967년 "6일 전쟁"때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함께 스코푸스산 정상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공연했는데,이 잊지못할 콘서트는 "예루살렘으로의 여로"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가 연주한 영화음악 "지붕위의 바이올린"은 클래식팬 뿐아니라영화팬들에게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는 1987년 에미상을 받은 CBS의 "카네기 홀: 더 그랜드 오프닝"과91년 5월 PBS에서 방영한 카네기홀 센터니얼 갈라 콘서트에도 출연했다.
음악 다큐멘터리 "아이작 스턴의 생애"는1993년 아트 엔터테이먼트 네트워크로 방영되었고
소니에서 비디오로 재발매되었다.
수많은 콘서트 프로그램과 유명 토크쇼에도 출연했다.
1993/94시즌에는 91년 러시아 투어때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라이브레코딩을 함께 했던예핌 브롬프맨과 극동과
미국투어를 하였으며현재에도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의 레코딩과공연을 위해 현재에도 훌륭한 파트너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첫번째 앨범은 1994년 봄, 소니클래식에서 발매되었다.
그는 또한 동료 엠마누엘 엑스, 제이미 라레도, 요요마와 함께유럽과 북미에서 콘서트와 레코딩 활동을 했다.
이들과 함께 녹음한 브람스 4중주는 91년에 그라모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프란츠 리스트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남아메리카와 동유럽 투어를 했고,영국, 덴마크, 프랑스에서 공연했다.
국제 예술기금협회의 창립 멤버인 스턴은미-이스라엘 문화재단과 예루살렘 음악센터의 설립자로서 총재직을
맡은 바 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음악에의 열정은젊고 유망한 연주가들의 발굴에도 전력을 다하고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차크 펄만, 핀커스 주커만, 슐로모 민츠 등이 그가 키워낸 대표적인 연주자들이다.
최근에는 미도리, 길 샤함 등의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다.
그는 30년이상 카네기홀의 대표를 맡으면서카네기홀을 철거의 위기로부터 구해내기도 했다.
"음악과 인류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앨버트 슈바이쳐 뮤직상의 첫수상자이기도 한 그는1984년 레이건 대통령으로
부터 받은 "케네디센터 명예상"을 비롯,권위있는 세계단체와 정부로부터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1986년 뮤지컬 아메리카는 그를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했으며,92년에는 국민의 최고 영예인 "자유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버클리대학, 콜롬비아대학,커티스음악학교, 하버드대학, 히브르대학, 일리노이스대학,
존스홉킨스대학, 줄리아드음악학교, 뉴욕대학, 옥스퍼드대학, 텔아비브대학,그리고 예일대학으로 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다.
1920년 러시아의 크레미니에츠에서 태어난 아이작 스턴은생후 10개월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며 음악수업을 받은 그는8세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음악경력을 쌓기 시작했고그곳에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악장이었던,
그의 음악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스승 나훔 블렌더를 만난다.
1933년, 13세 때 리사이틀 데뷔를 했고,1936년 피에르 몽튀가 지휘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으로 오케스트라 데뷔 무대를 가졌고이 공연은 미국전역에 방영되었다. 1937년 타운홀에서 뉴욕 데뷔 무대를 갖었으며1943년에는 카네기홀 데뷔 연주를 했다.
아이작 스턴은 200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클래식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노력한,진정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음악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마에스트로였다.
바이올린의 전설’ 아이작 스턴 (Stern, Isaac, 1920.7.21 ~ 2001.9.22)
얼마전 화제를 모았던 영화 '샤인'에서는 어린 헬프갓에게 미국행을 제안하는 스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음악계에 이른바 '유태 마피아의 대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스턴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좋은 예다.
그는 연주여행으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도 그곳에 정착한 유태인들 중에 가능성 있는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핀커스 주커만이나 슐로모민츠 등은 그가 키운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스턴은 1920년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첫돌 전에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미국땅에
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1세때 데뷔 연주회를 가졌고, 1937년에 뉴욕에 데뷔했으며, 43년에 카네기홀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미국땅에서
자라나 거시서 성공하고 또 그곳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연주가라면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 남을 정도로
드물엇던 시기에 그는 탁월한 재능을 자랑하며 당당히 '미국 연주가'가 되었다.
비근한 예를 찾으라면 아마 번스타인 외엔 찾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또 드물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가 미국 음악계에 가진 영향력은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번스타인도 역시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스턴과는 '팔이 안으로 굽는 사이'였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는 블라디미르 펠츠만의 예를 들면 알수 있을 것이다.
역시 유태인으로서 소련에 억류상태나 마찬가지였던 펠츠만을 빼내오기 위해 스턴은 당시 대통령 영부인에게 로비를
펴 구소련의 서기장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한다.
두 나라의 국가간 중대사가 수도 없이 많았을 당시, 사람 하나를 부탁한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하고 힘든 일이었을까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스턴은 대통령을 통하면 일이 더욱 힘들어질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스턴의 연주도 번스타인만큼이나 미국적인 것이었다.
외향적으로 분출하는 남성적이고 힘찬 것으로 낙관이 넘치고 확신에 찬 것이었지만, 기교에 치중하는 면이 강하고
깊은 맛이 좀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지금의 이자크 펄만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실내악에 치중했다.
물론 젊은 시절에도 유진 이스토민, 레너드 로즈와 함께 피아노 3중주로 곧잘 어울렸던 스턴이지만 최근 20년 내에
그의 솔리스토로서의 활동은 찾아보기 힘든 점으로 봉 어느 정도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려 한 시도로서 비쳐지기도
한다.
'세레나데'란 원래 밤에 님의 창가에서 부르는 사랑의 노래를 뜻한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그 성격이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과는 다르다.
다른 작곡가들이 따뜻하고 희망에 넘치며 사랑스러운 세레나데를 썼다면,슈베르트는 비통한 애상조의 세레나데를 썼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원래 가곡.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라는 제목이 붙은 가곡은 2개가 있지만,
하나는 '세레나데 d단조' 이고 하나는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이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만들어진 배경은,슈베르트가 유쾌한 젊은이들을 데리고 베링가(街)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친구인 티쩨가 '비아자크'라는 카페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일행들을 데리고 거기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티쩨는 책을 펴놓고 있었는데, 슈베르트가 그 책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시를 보고
나지막이 읽기 시작하다가 불쑥 외친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떠올랐어, 5선지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한 친구가 손님이 놓고 간 계산서를 발견하고 계산서를 건넸고슈베르트는 그것을 뒤집어 뒷면에 오선을 긋고,
보이가 왔다 갔다 하고, 이야기소리... 하프 음악... 구주회(九柱會) 를 하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요란한 장소에서
저 미묘(美妙)한 <세레나데>를 썼다고(1826),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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