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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Max Bruch-Violin Concerto No.1 in G minor Op.26


 

 

 

 

 

 

 

 

 

 

 

 

 

 

 

 

 

 

 

 

 

 

 

 

 

 

 

 

 

 

 

 

 

 Jascha Heifetz

 

 

 

Jascha Heifetz, violin

Sir Malcolm Sargent, cond.

New Symphony Orchestra of London 1951

 

1. Allegro Moderato


2. Adagio


3. Allegro energico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자유로운 형식의 1악장은 G단조 4/4박자 자유스런 소나타 형식 ....대단히 화려하며 독주자에게 엄청난 기교를 요구한다. 목관악기가 오래도록 기억될 만큼 아름다우며, 오케스트라의 역동적인 음악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마치 독립된 1악장이 아닌, 2악장의 서주 같아 보이는데, 발전부가 대단히 짧다는 사실과 오케스트라와 독주 바이올린이 하나의 동기를 교대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브루흐는 자유분방한 형식의 1악장 때문에 이 작품을 환상곡의 범주에 넣으려 했었다.

2악장: 아다지오

Eb장조 3/8박자 가요 형식...서정적인 세 개의 주제로 전개되는 아다지오 악장은 물안개가 자욱한 호숫가를 은은하게 흘러가는 배의 움직임처럼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전체적으로 갈망하는 듯한 분위기가 뒤덮고 있으며 약음의 섬세한 활쓰기가 요구된다. 감수성 어린 2악장은 명상적이면서 어떤 애틋함의 기운이 느껴진다.

3악장: 알레그로 에네르지코

G장조 2박자 소나타 혈식...행진곡 스타일의 활기찬 리듬이 인상적인 이 악장의 제2주제는 독주 바이올린에 의해 G현으로 연주된다. 제1주제는 3도의 기교적인 더블스톱으로 화려하게 펼쳐지고 곳곳에서 집시의 기운이 느껴질 만큼 흥겨움과 떠들썩함이 코다의 장엄함으로 이끌며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오케스트라와 독주 바이올린의 치열한 경합이 대미를 장식한다.

 

 

 

 

 

작품의 엄청난 성공에 가려진 작곡가 브루흐의 명성

작품에 작곡가가 가려진 현상은 그다지 보기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평생 동안 브루흐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비슷한 작품을 써달라는 요청에 시달려야 했다. 이 협주곡이 초연된 지 반세기 가까이 흐른 20세기 초에 브루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확인해보자.

“저기 저들은 이곳 구석구석에서 내게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외치고 있어. 마치 내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이 1번 하나만 있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 난 그 따위 인간들의 지긋지긋한 타령에 미칠 지경이야. 내 생각엔 2번이나 3번 협주곡도 1번만큼이나 훌륭한데 말이지. 제발 이제들 그만해줬음 좋겠어!”

 

 브루흐에겐 좀 안 된 얘기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만 멈출 수가 없다. 사실 브루흐가 존더샤우젠의 궁정악단 지휘자에서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교수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계기도 협주곡 1번의 성공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죽는 그 순간까지 브루흐는 협주곡 1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이 패전하는 것과 새로운 조류의 음악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이 초연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둘 중에 어떤 것이 브루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두 가지 모두 그를 상심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브루흐는 라인란트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베르트 슈만이 그에게 피아노 협주곡을 헌정한 바 있는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 페르디난트 힐러 밑에서 처음으로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교사, 지휘자, 작곡자로 일하였으며, 독일에서 만하임(1862-1864), 코블렌츠 (1865-1867),

 존더샤우젠 (1867-1870), 베를린(1870-1872) 등 음악 관련 직위를 옮겨다녔으며,

 

1873~1878년 사이에는 본에서 개인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의 명성이 높아졌을 때 그는 3년 동안 리버풀

 필하모닉 협회에서 지휘자를 지냈다.

그는 Berlin Hochschule fur Musik에서 1890년부터 1910년 은퇴할 때까지 작곡을 가르쳤다. 브루흐는

베를린-프리데나우의 자택에서 숨졌다.

 

그는 1912년 미국인 2중주 피아니스트 로즈와 오틸리 수트로 자매를 위해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Ab단조(Op.88a)를 썼으나, 이들은 원래 판본을 연주하지 못하였으며,자신들이 바꾼 두 판본을 두 번 연주한 적이

있다.

그 악보는 1917년에 사라졌다가 1970년 오틸리 수트로가 죽은 직후 발견되었다.

 

작품

 

브루흐는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전통에 따라 보수적으로 작곡하였으며, 그 작품은 프란츠 리스트나 리하르트 바그너의 "새로운 음악"보다는 그에 반대되는 요하네스 브람스 쪽의 낭만적 고전주의에 속한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 (1866년작)은 매우 인기있는 낭만주의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이 곡에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의 여러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가령 악장 간에 서로 연결이 돼 있거나, 곡이 시작하며 관례적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등장하며, 이전 협주곡의

형태를 따른 것 등이다. 여러 비평가들은 독자적인 멜로디 전개가 낭만주의 전통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평하였다.

 

다른 작품으로는 유명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코틀랜드 환상곡이 있다. 또 첼로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콜 니드라이 Op.47 (그 부제는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멜로디의 아다지오"이다)가 있다.

 Kol Nidre는 ...아랍어로 '모든 서약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회당에서 Yom Kippur 대속죄일 전야에 의식을 시작하면서 부르는 기도문 입니다.

 

19세기에 유대교 개혁파는 오해를 우려해 전례에서 콜 니드레를 제거했으나 1945년 개정된 형태를 다시 도입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의식 때 부르는 콜 니드레의 가락은 개신교 작곡가 Max Bruch가 1880년 첼로를 위한 변주곡의 기초로

사용함으로써 유명해 졌습니다.

이 곡은 원래 첼로 독주와 관현악 반주로 만들어진 고대 히브리의 전통적인 선율인 성가 Kol Nidre를 변주시킨 환상곡으로 알려져 오는 곡입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스코트랜드 환상곡과 함께 브루흐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 곡은 첼로와 관현악이

어울려 종교적인 정열이 넘쳐 흐르고 있고 동양적인 애수가 깃들어 있고 로맨틱한 정취와 함께 첼로가 낼수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성공하면서 많은 이들이 브루흐 자신을 유대인 출신으로 추측하게 되었지만, 증거는 없다. 나치 시대에는

그가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의 음악은 연주 곡목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독일어권 국가에서 그의 음악은

완전히 잊혀지기도 하였다.

 

작품으로는 두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두 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비올라와 클라리넷,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등이 있다.

교향곡도 3곡이 있는데, 구조나 형식면에서 독창성은 없지만 확고한 낭만주의 전통을 기반으로 그의 뛰어난 멜로디

작곡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러 실내악 작품을 썼는데, 8개 부분으로 된 피아노와 클라리넷, 비올라를 위한 곡과 현악 8중주 등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세프 요아힘과 빌리 헤스는 현악 악곡을 작곡하도록 충고하였는데, 헤스는 자신에게 헌정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Op.84 등 브루흐의 여러 곡을 초연하였다.

글 출처;위키페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