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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Johnny Cash-Bona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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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 Cash-Bonanza

Bonanza

 

 

 

 


The claim we hold is as good as gold, bonanza
Hand in hand we built this land, the Ponderosa Ranch
Our birthright is this Cartwright bonanza
We here belong, and standing strong, wrong ain't got a chance .


Day by day, work or play, ready side by side
Hello friend, come on in, the gate is open wide
Bound to be a fightin' free bonanza,
Singing pines of boundary lines for the Ponderosa Ranch.


Every tree and flower is part of our bonanza
The stars at night, the morning light, water in the branch
We ride along four men strong together
Every plain and ridge is our heritage: Ponderosa Ranch


Day by day, work or play, ready side by side.
Hello friend, come on in, the gate is open wide.
Bound to be a fightin' free bonanza,
Singing pines of boundary lines for the Ponderosa Ranch

 

 


 

 

 

 

 

 

명의 카우보이가 주인공인 '보난자'는 미국 NBC에서 1959년 9월 12일부터
1973년 1월 16일까지 14개의 시즌을 통해 방영된 정통 서부 TV 드라마 이다.
한국에서는 TBC에서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방송되었다.

제목인 '보난자'는 번영, 대박, 또는 광맥이라는 뜻이며, 골드러시 시대의
미국 서부를 연상시키는 명칭이기도 하다.

 

 

 

 

 

 

 

 
 

 

 

 

 

Johnny Cash (자니 캐쉬)  

 

 

자니 캐쉬(Johnny Cash)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컨트리 음악계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뮤지션 중 한명이다. 깊고 낭랑한 중음역대의 보컬과 간결한 기타와 함께 그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진보적이고

 독특한 사운드를 추구했다.

 

컨트리뮤직의 고향인 내쉬빌사운드(Nashville), 홍키통크(Honky Tonk), 로큰롤(Rock'n'Roll),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자신만의 서브장르를 만들고 구축했다.

 

 감성적으로 무디고 정직한 포크(Folk)와 반항적인 로큰롤(Rock'N'Roll) 그리고 염세적인 컨트리(Country)뮤직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캐쉬는 로큰롤의 탄생과 반항적 태도 그리고 다분히 록적인 간소함과 솔직한 음악적 발성법을

적절히 융화시켜냈다. 거기에는 깊은 역사적 공감대가 존재했다.

 

그는 음악적 사명을 다하는 그 날까지 100곡이 넘는 히트싱글을 내며 흑과 백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특히 록의 황제

(King of Rock)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의 거목들(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과 함께, 1950년~60년대를 빛낸 로커빌리(Rockabilly)음악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아칸사스 출신인 자니 캐쉬는 세 살 때에 다이에스(Dyess)로 이주했다.

열둘 어린나이에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들은 컨트리 송에 음악적 영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교시절 아칸사스 라디오 방송국(KLCN)에서 노래했다.

 

대학을 졸업한 1950년에는 자동차회사에 취직해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그는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있는 동안 캐쉬는 기타를 구입해 스스로 연주를 익혔다. 그는 'Folsom prion blues'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캐쉬는 1954년 공군에서 예편해 텍스사 여성 비비안 리베르토(Vivian Leberto)와 결혼했다.

멤피스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라디오 아나운서과정을 밟았다.

밤에는 기타리스트 루더 퍼킨스와 베이시스트 마샬 그랜트로 구성된 트리오의 일원으로 컨트리음악을 연주했다.

지방라디오방송국(KWEM)에서 무료로 공연을 간간히 겸하면서 안정된 연주의 기틀을 마련하던 트리오는 선 레코드사에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게 된다.

 

마침내 1955년 샘 필립스가 설립한 선 레코드사(Sun Records)에 오디션을 치르게 된 캐쉬는 처음에 자신을

 가스펠싱어로 소개했다.

필립스는 자니에게 좀 더 상업적인 것을 요구했고, 그는 'Hey Porter'로 곧 필립스를 매료시켰다.

이를 계기로 캐쉬는 자신의 데뷔싱글 'Cry Cry Cry'/Hey Poter'를 발매하게 된다.

 

필립스는 싱글레코드에 캐쉬를 “자니”라고 기입했다. 레코드 프로듀서는 또한 퍼킨스와 그랜트를 테네시 투

(Tennessee Two)라고 불렀다.

1955년에는 'Cry Cry Cry'가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14위에 올랐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헤이라이드(Louisiana Hayride) 지역에서 거의 1년간 머물렀다.

 

두 번째 싱글 'Folsom prison blues'가 1956년 초 컨트리차트 4위의 쾌거를 올렸고, 연이어 'I walk the line'이

 6주간 1위를 차지함과 더불어 팝 차트에도 탑2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57년에도 컨트리싱글차트 13위에 랭크된 'Give my love to rose'를 포함해 몇 곡의 히트곡을 내며 히트행진을

이어갔다. 캐쉬는 또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타 뮤지션들과 달리 완전히 검정복장으로 그해 그랜드 올 오프리

(Grand Ole Opry debut)에 데뷔했다.

 

이로 인해 그는 '맨 인 블랙'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57년 11월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처녀작 < Johnny

Cash with his hot and blue guitar >를 발매해 음반매장을 강타했다.

1958년에는 10주간 차트 정상을 지킨 'Ballad of a teenage queen'을 비롯해 또 다른 넘버원 싱글

 'Guess thing happen that way을 포함해 무려 8곡을 컨트리와 팝 차트  상위권에 올리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1958년에 그는 가스펠앨범을 녹음하고자 했으나 선(sun)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 레코드는 또한 캐쉬의 음반로열티 인상에도 반대했다.

두 가지 결정적 연유로 캐쉬는 결국 1958년 콜롬비아레코드사(Columbia Records)로 레이블을 옮겨 그해 말 싱글

'All over again'을 내놓았다. 이 곡은 컨트리차트 4위와 팝 차트 38위에 올랐다.

 

1959년 초에는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두 번째 싱글 'Don't take your guns to town' 또한 컨트리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팝 차트에도 32위까지 올라 그의 최대히트곡 중 하나가 된 이 곡과 함께 그해 내내 발매된 싱글들이 앞 다퉈 차트 정상에 등극했다. 캐쉬는 가스펠앨범을 낼 기회도 맞았다. 자니 캐쉬의 찬송가는 1970년대까지 주제앨범연작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히트행진을 지속하던 그의 쾌속질주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959년에, 그는 1년에

거의 300회가 넘는 공연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암페타민(각성제)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까지 그의 약물복용은 날로 증가했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히트 싱글과 앨범 수의 감소세로 나타났다.

1963년에 그는 가족을 떠나 뉴욕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캐쉬는 술친구 칼 스미스(Carl Smith)의 아내 준 카터(June Carter)에게서 받은 'Ring of fire'로

 컨트리차트 정상을 마크한다.

 

이 곡은 7주간 차트정상에 머무르며 팝 차트에도 20위에 올랐다. 1964년에는 'Understand your man'가 넘버원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어두운 그림자에 둘러싸여있던 캐쉬는 1965년 자신의 기타케이스로 엠페타민을 다량 밀수하다

엘 파소(El Paso)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그랜드 올 오프리(Grand Ole Opry)에서의 공연이 거절당했고, 그동안 각광받아온 커리어에도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66년에는 아내 비비안이 이혼을 제소했다. 이혼 후 캐쉬는 내쉬빌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칼 스미스와 이혼한

준 카터와 친밀해졌다.

 

카터의 조력으로 그는 약물중독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캐쉬를 기독교신자로 바꿨다.

1968년 초 'Jackson'과 'Rosanna's going wild'가 탑 텐 히트 기록하면서 재비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자니는

공연 중 무대 위에서 운명의 여인 준 카터에게 드라마틱한 청혼을 했고, 1968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1968년에, 자니 캐쉬는 가장 큰 인기를 끈 앨범 < Johnny Cash at Folsom Prison >을 녹음 발표했다.

교도소 공연실황을 녹음한 이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Folsom prison blues'가 팝 차트에 걸쳐 큰 인기를 얻으며

컨트리차트 정상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연말에 레코드는 골드를 기록했다. 이듬해, 그는 후속앨범 < Johnny Cash at San Quentin >을 발표했다. 'A boy named sue'는 컨트리차트 1위와 팝 차트 2위에 오르며 히트싱글이 되었다.

캐쉬는 1969년 밥 딜런(Bob Dylan)의 컨트리앨범 < Nashville Skyline >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딜런은 ABC 가수 텔레비전프로그램 '자니 캐쉬 쇼'에 출연해 그에 화답했다. 자니 캐쉬쇼는 1969년과 71년, 2년에

걸쳐 방영되었다.

캐쉬는 197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자신의 텔레비전쇼와 더불어, 그는 백악관에서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을 위해 공연한 것을 비롯해,

 <건파이트>(Gunfight)에서는 명배우 커크 더글라스(Kirk Douglas)와 함께 공연했으며,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다큐멘터리영화의 테마로도 주목받은 그는 'Sunday morning coming down'과 'Flesh and blood'이 넘버 원 히트를 기록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이어갔다. 1971년을 통해, 자니 캐쉬는 차트 3위를 기록한 'Man in black'을 포함해

히트행진을 지속했다.

 

캐쉬와 카터 모두 1970년대 초 토착미국인과 죄수들의 시민권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사회적 활동을 넓혀갔다.

가끔은 빌리 그래험(Billy Grah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캐쉬의 차트 등장횟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이너히트를 이어갔다.

 

그리고 1976년 'one piece at a time'(컨트리차트1위)를 비롯해 웨일론제닝스(Waylon Jennings)와 듀엣으로

노래한 'There ain't no good chain gang'(컨트리차트 2위)와 '(Ghost)riders in the sky'와 같은 빅 히트싱글을 간간이 냈다.

 

 1975년 캐쉬는 자서전 < Man in black >을 출간했다. 1980년에 가장 젊은 나이에 컨트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눈에 띄는 히트싱글을 내지 못하면서 고전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와도 마찰을 빚었다.

 

자니 캐쉬(Johnny Cash)는 1982년 선(Sun)출신의 로커빌리 명인 칼 퍼킨스(Carl Perkins), 제리 리 루이스(

Jerry Lee Lewis)와 함께 팀을 이뤄 레코드 < The Survivors >를 발표했고 괜찮은 성과를 올렸다.

캐쉬,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Willie Nelson) 그리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동참한 밴드

The highwaymen은 1985년 그들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 또한 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음 해, 캐쉬와 콜럼비아사의 계약이 만료됐다. 그리고 그는 머큐리 내쉬빌(Mercury Nashville)과 계약했다.

새로운 레이블은 그러나 그의 성공을 입증해주지 못했고, 스타일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했다. 게다가 컨트리

라디오방송 프로는 더욱 현대적인 아티스트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캐쉬는 곧 자신이 차트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콘서트를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계속해 나갔다.

하이웨이멘(Highwaymen)은 1992년 두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그리고 머큐리에서 낸 캐쉬의 어떤 레코드보다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즈음 머큐리와의 계약기간이 끝난 그는 1993년에 아메리칸 레코드사(American Records)에 새 둥지를 틀었다.

 

새 레이블에서 낸 첫 앨범 < American Recordings >는 설립자 릭 루빈(Rick Rubin)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 앨범의 전 수록곡은 어쿠스틱한 노래들이었다.

이 앨범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으나, 그의 커리어를 되살리는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그를 록 중심의 젊은 음악팬들과 호흡할 수 있게 했다.

 

1995년에 하이웨이멘은 그들의 세 번째 앨범 < The Road Goes on Forever >를 발표했다.

이듬해 캐쉬는 탐 페티& 하트브레이커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그의 두 번째 앨범 < Unchained >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년 봄 캐쉬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본 회고조의 앨범을 사랑, 신, 살인 세장으로 묶어 선보였다.

그 다음해에는 새로운 스튜디오앨범 < American Ⅲ: Solitary Man >이 뒤이어 발매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에 들어 자니 캐쉬는 건강문제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루빈과의 레코드작업을 지속해나갔다.

그들은 네 번째 합작품 < American Ⅳ: The man comes around >을 2002년 후반에 발매했다.

이듬해에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Hurt'를 커버한 뮤직비디오가 기대이상의 갈채를 받으며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MTV뮤직비디오시상식에서 '올해의 비디오'에 후보로 지명돼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화제를 뿌리며

한창 분위기에 젖어있을 때, 운명적 음악인생의 동반자(아내) 준 카터 캐쉬가 심장수술 경과 악화로 2003년 5월 15일 그의 곁을 떠나갔다.

 

4개월 후 자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테네시 내쉬빌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1세였다

 

 

 

 

 



Johnny Cash는 알칸사스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라디오를 통해 듣던 컨츄리음악에 영감을 얻어서 12살이 되던해에 그는 자신의 곡들을 쓰기 시작했지요.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청년이었던 그는 공군에 입대를 했고, 공군에 복무하던 시절 처음으로 기타를 사서 배우기

 

시작했었습니다.

쟈니캐쉬와 그의 음악들은 2차세계대전이후 컨츄리음악에 있어 가장큰 영향력을 과시했던 음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네쉬빌 사운드도 홍키통크나 Rock'n Roll도 아니었습니다.
그만의 독특하고 깊은 바리톤음성으로 자신만의 서브쟝르를 만들어 낸것이었지요.

 

이는 Johnny Cash를 록키마운틴과 미시시피강처럼 미국의 한부분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1957년에 Grand Ole Opry에 데뷔를 했으며 검은옷을 즐겨입었었지요.

  그의 The Man In Black(검은옷의 사나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었답니다.

40여년이 넘게 쟈니캐쉬는 곡들을 쓰고 직접 불러왔습니다. 적어도 일년에 두곡이상의 히트 싱글을 기록하며 컨츄리

음악챠트에서 30년이상을 군림하며 달려왔습니다.

1959년이후 약5300만장 이상의 앨범들이 팔려나갔으니 그 인기정도는 말로 할수없을겁니다.

그를 대표하는 노래들은 수없이 많습니다만...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모았던노래..


 

 


 

 

캐시는 어린 시절부터 시골 남부 음악, 즉 찬송가·민요·노동요·애가 등에 친숙했다.

기타연주를 배우고 작곡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반 독일 군 복무 중이었다.

군 복무 후 테네시 주 멤피스에 정착한그는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캐시는 '테네시 투'(후에 테네시 스리가 됨)와 공연을 시작했고, 카운티 축제와 그밖의 지역 행사에서 공연하다가

선레코드사의 샘 필립스에게 오디션을 받았다.

선레코드사는 1955년 캐시와 계약했다.

 

〈크라이, 크라이, 크라이 Cry, Cry, Cry〉, 〈헤이, 포터 Hey, Poter〉, 〈폴섬 프리즌 블루스 Folsom Prison

Blues〉와 〈아이 워크 더 라인I Walk the Line〉으로 그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1957년까지 캐시는 컨트리 및 웨스턴 음악 분야에서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꾸미지 않은 사운드, 노동자 및 사회·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검정색 옷을 늘 입고 반항적인 기질을 가진 캐시는 〈맨 인 블랙 Man in Black〉으로 유명해졌다.

캐시는 1960년대 마약 중독에 시달리면서 인기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마약 중독은 평생에 걸쳐 재발했다.

1961년부터 함께 활동한 카터 패밀리의 준 카터의 권유에 따라 마침내 그는 치료를 받았다.

이 커플은 1968년 결혼했다.

1960년대 말에 와서 캐시의 활동은 다시 궤도에 올랐고, 그는 더 폭 넓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캐시가 회생하게 된 신호탄은 앨범 〈조니 캐시 앳 폴섬 프리즌 Johnny Cash at Folsome Prison〉(1968)이었다.

이 앨범은 캘리포니아 폴섬 감옥의 수감자 약 2,000명 앞에서 라이브로 녹음한 것이었다. 레코드사 경영진들은

이 공연을 위험한 시도로 여겼으나, 결과적으로는 캐시가 컨트리 뮤직에 가장 적합한 가수임을 재확인하는 완벽한 기회가 되었다.

 

그는 이 앨범과 다음 앨범인 〈조니 캐시 앳 샌 퀜틴 Johnny Cash at San Quentin〉(1969)이 성공하자 감옥 수감자들의 생활환경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는 형벌 개혁과 사회 정의를 외치는 가수가 되었다.

 

뉴욕시티 및 런던의 라이브 공연, 그리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레이 찰스, 로드 매퀜, 보브 딜런 같은

초대손님들이 출연했던 그의 텔레비전 쇼 〈조니 캐시 쇼 Johnny Cash Show〉(1969~71)는 중요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력하고 단순한 그의 노래들을 일반 대중에게 알렸다.

 

캐시는 음악계에서는 전설로 자리매김 했으나, 1980년대 말까지 레코드 판매와 수익은 줄어들었다.

1994년 그는 릭 루빈의 아메리칸레코딩스사에서 노래한 뒤 예상치 못했던 재기를 하게 되었다.

아메리칸레코딩스사는 메탈과 랩으로 가장 유명한 회사였다.

캐시가 발매한 음반은 비평가와 대중에게서 성공을 거뒀고 새로운 세대의 팬을 얻었다.

 

이후 음반으로는 〈언체인드 Unchained〉(2002), 〈아메리칸 Ⅲ 아메리칸: 솔리터리 맨 American Ⅲ American: Solitary Man〉(2000), 〈아메리칸 Ⅳ: 어 헌드레드 하이웨이즈 American Ⅳ: A Hundred Highways〉(2006) 등이 있다. 많은 상을 받았던 그는 1999년의 평생 공로상과 9개의 컨트리 뮤직 협회상을 포함하여 13개의 그래미상을 받았다.

 

캐시는 1980년 컨트리 뮤직 명예의 전당에 선정되었고, 1992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선정되었다. 1996년 그는 케네디 센터 영예상을 수여했다.

자서전인 〈맨 인 블랙〉과 〈캐시 Cash〉(패트릭 카와 공동집필)는 각각 1975년과 1997년에 출간되었다.

캐시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앙코르 Walk the Line〉는 2005년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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