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tislav Rostropovich
Bach, Cello Suite No.1, Prelude Rostropovich, Cello
Rostropovich, Mstislav Leopoldovich, 1927,3,27 ~ 1997,4,28
소련 태생의 지휘자·피아니스트, 파블로 카살스 이후 국제적으로 가장 명성을 떨치는 첼로 연주자.
그는 첼로 연주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부모에게 훈련받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배웠다(1943~48).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6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첼로 교수가 되었다. 1950년대에 해외 순회 연주를 시작해서
소프라노 가수인 부인 갈리나 비시네프스카야(1926 출생)와 함께 피아니스트로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으며 1968년에
는 지휘자로 데뷔했다.
1970년 반체제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지지하여 정부로부터 연주와 여행 기회에 제한을 받았다.
1974년 부인과 함께 2년간 해외체류를 허가받았고, 다음해에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미국망명을 발표했다
(1978년 소련 정부는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했음).
1977년 워싱턴 D. C. 의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지나친 낭만적 성향 때문에 비난받는 경우도 있지만, 현대작품을 다룰 때나 기존 연주회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
모두 빈틈없는 기량으로 찬사를 받고 있으며 첼로가 낼 수 있는 음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개발했다.
아람 하차투리안,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루카스 포스 같은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작곡했다.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의
종양 전문센터에서 타계했다. 80세.
지난달 27일 80회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렘린 궁에서 마련한 성대한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돼 다시 입원했다. 80회 생일상을 받은지 꼭 한달만에 눈을 감은 것이다. 당시 생일 축하연에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 제자인 첼리스트 다비드 게링가스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500여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영국 더 타임스는 로스트로포비치를 '현존하는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했다. 병원으로 급히 향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지난해말부터 간종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최근에는 간 이식 수술을 받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망 소식을 접한 후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로스트로포비치가 입원했던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체홉, 옐친의 곁으로
로스트로포비치가 안장될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스승인 작곡가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를 비롯해 니키타 흐루시초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 여사,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에밀 길렐스 등 정든 친구들이 묻혀 있다.
이곳에는 3일전 타계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전 대통령도 안장된 곳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스승과 친구들과 만나 보드카 한잔 나누러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1990년 2월 11일 오랜 망명 생활을 접고 26년만에 고국 땅을 밟은 그가 모스크바 공항 도착 직후 곧장 달려간 곳도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이었다.
3일전 타계해 이곳에 묻힌 보리스 옐친 러시아 전 대통령도 로스트로포비치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옐친을 가리켜 '내가 100 퍼센트 믿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러시아의 수호자' 메달을 받았다.
로스트로비치의 애칭은 '슬라바'.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말이지만, 러시아어로 '영광' 이라는 뜻도 된다.
에자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난 그는 4세때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0세때부터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인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웠다.
16세때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첼로피아노는 물론 작곡지휘까지 배웠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20세기 러시아 음악의 거장들을 두루 사사했다.
그는 1955년 당시 볼쇼이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였던 소프라노 갈리나 비슈네프스카야와 만난 지 4일만에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탁월한 피아노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아내의 독창회 때 반주를 도맡기도 했다.
볼쇼이 프리마돈나와 만난지 나흘만에 웨딩 마치
1956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부임한 로스로포비치는 구 소련 시절 인민예술가 칭호와 함께 예술 분야 최고 권위의 레닌상과 스탈린상을 받았다.
1966년에는 영국 출신의 여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가 그에게 배우기 위해 모스크바로 유학을 왔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그의 음악활동은 순탄치 못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로 반체제 소설을 쓰다가 탄압받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공개 편지를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이 '수용소군도'를 집필할 때 자신의 아파트를 몰래 제공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도 끝내 박해를 받아 1974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소련 당국이 모스크바에서의 연주를 금지하고 출국을 거부했을 때 자살까지 생각했다" 며 "그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아내와 두 딸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각각 첼로와 피아노를 전공한 올가와 엘레나 등 두 딸을 두었다.
그는 파리에 체류하던 1978년 부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지만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 의해 복권됐다.
1980년 2월 27일 파리 살 플레옐에서는 한달 전 고리키로 유배당한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날 공연에는 뜻을 함께 하는 동료와 후배 첼리스트 24명이 무대에 섰다. 슬라바는 1991년 군부 쿠데타 시도를
막기 위해 크렘린 광장에 모인 시위대에 가담하기 위해 사전 예고도 입국 비자도 없이 모스크바에 들어오는 용감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솔제니친 /솔제니친
솔제니친 등 반체제 인사 돕다가 망명 생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로스로포비치는 서베를린 쪽 벽 아래 혼자 앉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이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던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199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 행사에서는 미국.러시아.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를린에 주둔했던 나라에서 온 젊은 첼리스트 166명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70회 생일까지 통산 100곡의 첼로 협주곡을 위촉, 초연한다는 목표를 세웠었다.
지금까지 그가 초연한 첼로 협주곡과 독주곡을 합치면 모두 120여곡. 브리튼.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의 해석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첼로 협주곡 2곡은 모두 로스트로포비치가 초연했다.
그는 생전에 "나의 음악으로 공산주의에 희생된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죽음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브리튼도 첼로 소나타, 3개의 첼로 모음곡, '첼로 교향곡' 등을 모두 쇼스타코비치에게 헌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고발한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은 1996년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러시아에서 연주되기
전까지는 60년간 소련 정부가 금지곡으로 낙인을 찍었던 곡이다.
오랜 망명 생활에서도 고향을 못내 그리워했던 그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1999년 러시아 어린이를 돕기 위한 로스트로포비치 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2002년 '로스트로포비치 가정 박물관'을 열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써오던 첼로는 1711년산 뒤포르 스트라디바리우스. 현존하는 첼로 중 가장 뛰어난 악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1977년부터 94년까지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구 소련의 박해를 받아 망명해온 음악가가 자유 서방의 심장부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지휘자로 활동한 것이다.
1993년에는 내셔널 심포니를 이끌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무료 야외음악회를 열어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연주했다.
장한나 데뷔 음반서 지휘봉 잡아
로스트포비치는 무엇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25)씨를 발굴한 스승으로 유명하다.
1994년 파리에서 열린 로스로포비치 국제 콩쿠르에서 장한나에게 우승 트로피를 안겨줬다.
1995년 프랑스 칸 미뎀(MIDEM) 음반박람회 때 장한나가 쇼케이스 연주를 할 때도 직접 참석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차이코프스키'로코코 변주곡'등을 실은 장한나의 데뷔 앨범(EMI)에서는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첼리스트 출신의 명지휘자인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한번 협연해 보는 게 전세계 첼리스트의 꿈이었다.
미샤 마이스키도 1990년부터 스승 '슬라바'에게 지휘를 부탁해왔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지금까지 로스트로포비치의 지휘로 협주곡 음반을 녹음하는 영예를 안은 연주자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막심 벤게로프,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첼리스트 장한나 뿐이다.
그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갾나는 12세때 한나만큼 연주하지 못했다갿고 고백하면서 장한나에 대해선갾성숙한
감정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눈을 감고 들으면 25세짜리가 연주하는 것 같다갿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음원출처:http://pds5.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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