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Mauriat
많은 사람들이 폴 모리아의 음악을 들려주면 익숙해하면서도 정작 그의 이름이 Paul Mauriat
나 그에 일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방송 시그널 뮤직이나, 화면조정 시간, 백화점 매장, 몇몇 CF 등에서 듣던
음악이네!" 할 뿐이다.
그러나. 그저 편하고 쉽게 들릴 수도 있는 그의 음악 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잠시 우체국직원이기도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Paul Mauriat는 1925년에 프랑스 남부에 마르세이유
(Marseilles)에 있는 클래식 음악 가정에 태어났다.
아마츄어 음악가였던 그의 아버 유아기의 폴 모리아 지에 배려로 4살부터 Academy of Music in Marseilles(the
Conservatory of Marseilles)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으며 1935년 그가 10살 되던 해에 가족들이 Paris로 이주하게 되면서 파리음악원(the Conservatoire in Paris)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14살에 그는 수석졸업장과 함께 탄탄한 클래식 기초를 가지고 졸업한다.
졸업 후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그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 것은 오히려 팝음악과 재즈가 되어갔다.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7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악단을 조직해 몇 년 동안 유럽 지역을 공연하며 다녔다.
이후 그는 얼마 전 타계한 Franck Pourcel(프랑크 푸르셀)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 등을 거치며 계속 활동을
해오다가 한 음반 매니져의 제의로 샹송의 거장 Charles Aznavour의 앨범에 편곡과 지휘자로 참여하면서부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그는 그 때부터 프랑스에서 작/편곡자 시절 스튜디오에서 가장 유명한 편곡자로 Maurice Chevalier, Dalida,
Henri Salvador 등의 스타들과 함께 활동하게 된다. 작,편곡자와 뮤직 디렉터로서의 그의 활동은 바클레이(Barclay)라는 레이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가 작곡한 "Rendez-vous au Lavandou", "La longue marche" 등의 곡이 전국적 히트를 하게 되어 작곡가로도 활약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자국인보다는 미국이나 이탈리아 음악가들을 더 대접해 주는 분위기여서 폴 모리아는 1963년경 Del Roma라는 가명으로 다른 유명한 프랑스 음악가들인 Franck Pourcel(프랑크 푸르셀)과 Laymond LeFevre (레이몽 르페브르)와 함께 공동으로 "Chariot(샤리오)"라는 샹송을 발표한다. 이 곡은 Petula Clark이라는 가수에 의해 유럽 전역에 히트를 기록했고, 다음해 Norman Gimbel과 Arthur Altman에 의해 영어로 개사되어 "I will follow him"이라는 곡으로 재탄생되어 Little Peggy March에 의해 미국 챠트 1위를 기록하며 폴 모리아의 최초의 히트곡이 된다. 이 곡은 바로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Sister Act'의 삽입되어 다시 대히트를 했던 바로 그 곡이다. 이름으로 40세가 되서야 완전한 솔로 아티스트로 독립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솔로 아티스트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다른 샹송 가수들의 작곡/편곡자로 활약하는데 이 시기엔 Mireille Mathieu의 뮤직 디렉터가 되어 "Mon credo", "Seuls au monde"등 그녀의 히트곡을 작곡해 준다. 자신은 매우 좋아했으나 4위에 그치고 만 룩셈부르크 대표의 Vicky Leandros 라는 여가수의 "L'amour est bleu "라는 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편곡,연주하여 취입한다. 당시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이 짧고 간단한 노래가 바로 1968년 빌보드 챠트 1위를 5주 동안이나 지켰던 세계적인 연주곡이 되어버린 "Love is blue"였다. 그는 이 곡으로 말미암아 빌보드 챠트 1위를 한 유일무이한 프랑스 아티스트가 되었다. '68년 한해 동안 이 곡이 수록되어 세계적으로 발매된 <Blooming Hits> 라는 앨범은 200만장이나 팔렸고 이후 600만장 넘게까지 팔렸다. 특히, 그는 오히려 문화권이 다른 나라들에서 더 많이 앨범이 팔리는 몇 안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현재도 일본, 대만, 홍콩, 브라질 등에서의 그의 인기는 압도적이다. 다른 연주 아티스트에 비해 당시의 최신 곡들과 자신의 신곡들을 재빠르게 선곡,편곡,연주해내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21세기까지 그의 음악이 살아남을 수 있게했다. 1968년의 대성공 이후 그는 매년 최소한 1~2개의 앨범들을 선보이면서도 세계 투어를 활발히 진행했고, 매년 히트곡들을 내며 연주가로는 드물게 40여년 가까이 롱런을 해오고 있다. (사진출처:국제 폴 모리아 팬클럽-일본) 서 공연을 가졌다. 지금까지 800여회 가까운 콘서트를 해오던 그가 1990년 이후로는 해외투어를 중단하고 앨범활동만을 하다가 자신의 오케스트라 결성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6년 다시 투어를 재개했다.1997년 그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예술문화 훈장'을 받았다. 100여개로 추산되는 정규앨범외의 각 나라에서 버젼이 다른 특별앨범을 발표했고, 무수한 컴필레이션 앨범들과 1100여곡이 넘는 레파토리를 자랑하며 "Penelope", "Nocturne", "Minuetto", "La reine de Saba", "El bimbo"등의 곡들을 세계적으로 연주하며 평생을 다닌 그는 1994년 데뷔시절부터 함께해온 필립스 레이블을 떠나 자신의 팬이 가장 많다는 일본의 Pony Canyon에 전속계약을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그는 1998년 일본공연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나 은퇴를 선언했고 현재 그의 오케스트라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약해온 Gilles Gambus가 이어받아 지휘하고 있다.
30대 중반이 된 그는 1960년대 들어와 자신만의 독특하고 현대적인 비트감을 지니면서도 멜로디를 선명하게 해 주는 편곡스타일이 확립되어가며 자신의 앨범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65년 드디어 폴 모리아는 Philips 레이블에 전속 계약을 하며 "Le Grand Orchestre de Paul Mauriat"라는
1967년, 그는 `Eurovison Song Contest'(1967년에 열린 제 12회 대회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에서
이를 계기로 그 "Love is blue"를 온세계에 알린 앨범인 <Blooming Hits> 는 1969년 4월에 미국 무대에서 자신의 오케스트라의 첫 공연을 가지며 명실공히 국제적인 아티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75년 12월에는 첫 내한공연이 있었고 그 후 5차례나 한국에 현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Gilles Gam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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