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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Nana Mouskouri - Pardonne-Moi (용서해 주세요)

 

 

 


LP / 9101 159 ©1977 Philips
Alleluia
France - Canada

Alleluia (S & E. Rhymer-Claude Lemesle)

Dans une coupe de champagne (Alain Goraguer-Serge Lama)

A Paris sur le petit pont (Trad.)

Heureusement que l'on ne s'aimait pas (J. Denver-Michel Jourdan)

Qu'est ce que je t'aime (Joan Sakel-Claude Lemesle)

Kyr mikalis (Manos Hadjidakis-J. Kambanelis)

Qu'est ce que ça peut faire (Nikos Gatsos-D. Moutsis-Claude Lemesle)

La petite rose (Serge Gainsbourg)

Jamais ensemble (R. Crowell-Claude Lemesle)

Il arrivera peut-être (Alain Goraguer-Serge Lama)

Habanera de Carmen (Bizet) en duo avec / duet with Serge Lama

Pardonne-moi (Alain Goraguer-Claude Lemesle)

 

 

 

 

 

 

 

 

 

 

 

 

Pardonne-Moi (용서해 주세요)

 

 

 

 

Je viens le coeur tendre et mains nues
Je viens puisque tu ne reviens plus
Je viens comme un enfant pour prier
Comme un penitent les yeux baisses

 

나는 부드러운 마음과 빈 손으로 옵니다
나는 당신이 더이상 오지않기 때문에 옵니다
나는 기도하는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떨군 속죄자처럼 옵니다


Pardonne-moi, je t"aime tant
D"avoir si froid quand je j"attends
Pardonne-moi de t"implorer
Pardonn-moi de t"adorer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당신을 기다릴 때 너무나 추웠어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에게 애원하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Je viens comme un pecheur vers son dieu
Je viens comme un martyr vers le feu
Je viens comme un fou vers sa folie
Comme un nouveau ne qui veut lavie

 

나는 신을 향한 전도자 처럼 옵니다
나는 불구덩이를 향한 순교자 처럼 옵니다.
나는 광기를 향한 광인처럼 옵니다
생명을 바라는 새로운 탄생처럼

 

Pardonne-moi, je t"aime tant
D"avoir si froid quand je j"attends
Pardonne-moi de t"implorer
Pardonn-moi de t"adorer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당신을 기다릴 때 너무나 추웠어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에게 애원하는 나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Nana Mouskouri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는 본명이 "이오안나 무스쿠리 (Ioanna Mouskouri)" 인 그리스 출신으로,

거의 전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 내는 세계적인 가수이다.

그녀는 1934년 10월 13일 제우스의 탄생지로 알려진 그리스 최대의 섬 "크레타" 에서 태어났다.

지금까지 그녀는 약 3억장의 음반 판매기록을 갖고 있는데 음반은 그리스어 뿐만 아니라,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라틴어, 포르투갈어로도 음반 발매하기도 했고 골든 디스크 300회 수상 기록을 세워 음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녀는 특히 프랑스에서는 역대 최대 앨범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는 처음에는 오페라 가수의 꿈을 키우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극장의 영상기사였고 어머니도 극장에서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음악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녀를 명문 아덴 예술학교에 입학을 시키기 위해서 3살때 가족들은 아덴으로 이사를 하였고 1950년 그녀는

아덴 예슐학교에 압학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오페라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성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학교에 입학한 지 8년쯤 지나서 그녀는 그녀의 친구가 노래하던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노래는 대중가수들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엘라 핏제랄드 등) 의 노래였다.

그런데 어느날 담당 교수에게 대중음악을 하던 것을 들키고 말았는데 이에 화가 난 교수는 그녀가 연말 시험을 보지

못하게 방해할뿐만 아니라 아예 그녀를 학교에서 추방시키고자 앞장을 섰다고 한다.

이렇게 오페라 가수의 꿈이 사라져 버린 그녀는 결국 아덴의 한 재즈클럽 "자키" 에서 노래를 할 수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럼으로해서 그녀는 "Billie Holiday" 와 "Duke Ellington" 과 같은 재즈뮤지션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포크와 샹송 등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다양한 팝음악을 섭렵해 나갔고 제 2의 Maria Callas가 되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어 일생일대의 행운을 얻게 되었는데 바로 그리스의 유명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 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지다키스는 "Over and Over" 를 작곡한 유능한 인물로 나나무스꾸리의 좋은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부모님의 뜻대로 음악원을 졸업해 오페라 가수의 길을 가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가수로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게 된것이다.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는 천상의 소리라고 할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뿐만 아니라 단아한 품위와 청순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지난 50여년간 세계무대를 섭렵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검은 뿔테 안경과 긴 생머리 그리고 긴 드레스 (주로 흰색을 좋아한다) 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우리나라에도 2005년과 2007년 내한 공연을 하였고 가수 송창식 윤형주가 번안해 부른 "하얀 손수건" 으로 세계적으로 히트곡이 되었고 한국을 유난히도 사랑한 가수라고 할 수가 있다.

그녀는 1958년 음반을 발표했는데 그 이듬해 "그리스 음악제" 에서 대상과 차상을 모두 휩쓸었고 또한 "지중해 음악제"

 에서도 대상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유럽으로 진출을 하였으며 1962년에는 퀸시존스를 만나 뉴욕에서

 "The Girl from Greece Sings' (Nana Mouskouri in New York)" 음반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 음반은 전 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5년에는 가수 "헤리 벨라폰테"와 함께 1년 동안 공연을 가지기도 했는데 그 당시 "벨라폰테" 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대중음악 스타였다.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는 1963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첫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되자

 1974년부터는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겼으며 2003년에 두 번째 남편 "안드레 샤펠" 을 만나 지금까지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04년부터 시작한 그녀의 "World Farewell Tour" 는 7월 23일 그리스 "아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녀의 50년 음악인생애 "아듀" 를 고하는 은퇴 투어였었다.

아덴에서는 "헤로데스 아티쿠스 (Odeon of Horodes Atticus) 음악당에서 고별 콘서트를 가졌었는데 그 자리에는

 그리스 총리를 비롯해 만여명의 청중들이 움집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 준 전 세게의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며 유니세프 (UNICEFF) 친선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앞으로는 젊은 가수 지망생을 지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역대 소프라노 서열 1위로 세계 오페라계를 평정한 마리아 칼라스야 별도로 거론 하더라도, 영화 '페드라'에 출연했던

왕언니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리스 출신 아티스트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폭 넓게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뮤지션은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1934~)이다.

고령인 그녀는 은퇴했지만(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고별 공연을 가졌음), 3억 5천만 장에 달하는 음반을

판매한 경이적인 기록의 소유자.

그녀에 비견되는 여성 아티스트로는 미국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 1942~)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까. 스트라이샌드는 배우, 프러듀서, 공연기획자로도도 활동한 전방위(全方位) 연예인인 데다 정치적 색채도 강하다.

무스쿠리와의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가창력, 지명도, 음반 판매량 등에서 견줄 만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레퍼토리의 다양성(팝? 민요?가스펠?리드?샹송?칸초네?오페라 아리아 등을 망라)과 호소력, 목소리의 청아함에서 그녀를 넘어서지 못한다.

 

나나 무스쿠리는 오리지널 히트곡도 많지만('하얀 손수건', '아테네의 흰 장미', '사랑의 기쁨', '오버 앤 오버',

 '온리 러브', '자유의 송가' 등), 다른 사람의 노래도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재창조하여 새롭고 깊이 있는 감동을

선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테면 영국 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가 부른 명곡 'Why Worry'를 그녀의 노래로 들어보면 그 느낌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오리지널 노래는 그룹 특유의 읊조리는 듯한 창법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삶을 관조하는 듯한 철학적 정조를

 자아내는데 비하여, 그녀가 부르면 진정성을 가지고 아픔에 동참함이 느껴지며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하여 새로운 의지와 희망을 갖게 하고  있다.

나나 무스쿠리는 그리스어를 비롯한 7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프랑스와 독일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죠. 초기 대형 히트곡은 그녀를 발굴하여 키운 유명한 작곡가인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의 작품인 'Over and Over'.

1960년 독일에서의 데뷔는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독일로 진출하여 '하얀 손수건', '아테네의 흰 장미' 등이 수록된 앨범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전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죠. 이 앨범은 당시 놀랍게도 12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였다.

 

그녀가 부른 독일어 노래를 들어보면-예컨대 '보리수(Der Lindenbaum)', '세레나데(Serenade)', '일곱 송이 검은

장미(Sieben Schwarze Rosen)' 등-그 매혹적인 발음하며, 독일어 또는 독일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인지

 감탄이 절로 난다.

청량감 있는 목소리의 소유자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또 다른 가수는 반전과 평화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포크의 여제

(女帝) 존 바에즈(Joan Baez, 1941~ )다.

그녀의 목소리는 강하고(스핀토), 애잔하면서도 육사(陸史)의 시 '절정'에 나오는 표현처럼 ‘겨울 하늘에 걸린 강철로 만든 무지개’ 같은 강단이 있다.

 

한편 무스쿠리의 목소리는 부드러움(릴리꼬)에 더하여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아련함, 따뜻함이 있다.

정녕 그녀는 봄의 정령(精靈)인 것인가요? 존 바에즈와 나나 무스쿠리는 놀랍게도 한 무대에 서서 듀엣으로 노래

('Blown' in the wind)'를 부른 적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본다.

 

이연실(참, 그녀의 목소리는 바에즈에 가깝죠), 그보다는 박인희가 생각납니다.

박인희와는 목소리의 질감과 창법이 다르지만 마음에 스미는 소리의 울림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외모도 닮은 듯.

 

미국의 원로 가수인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와의 우정도 아름답다.

일곱 살 위인 그의 초청과 주선으로 1964년 카네기홀에 데뷔했고 그와 함께 1년간 미국 전역을 순회공연 하였다.

 록에 익숙한 미국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공연은 그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이로써 그녀는 '뮤즈(Muse)'의 반열(班列)에 오르게 된다.

벨라폰테와는 같은 무대에 섰음은 물론 여러 곡을 듀엣으로 함께 취입하기도 했다.

각각의 노래로도 유명한 'Try To Remember'를 들어 보면 두 사람의 우정이 오버랩되어 훈훈한 감정이 돈다.

미국에서의 그녀의 첫 앨범은 1962년 저명한 음반 프러듀서인 퀸시 존스(Quincy Jones)의 도움을 얻어 발매되었다.

나나 무스쿠리 노래의 본령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무엇보다 기품있는 투명한 목소리와 가슴에 스며드는 짙은

 호소력에 있다 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흔히 '천상의 목소리'로 비유하는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위무(慰撫)하고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느껴진다.

 영혼이 눈을 뜨는 것.

가만,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본디 천사의 직분일 텐데, 그렇다면 그녀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뻬아트리체가 아니던가.

나나 무스쿠리는 긴 생머리와 검은 뿔테 안경, 흰 드레스, 수수한 외모, 스타연하지 않는 진정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엔 소공녀에 나오는 '민친 여사'인 줄 알았다.

 

그때는 그녀가 이토록 오랫동안 내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줄 진정 몰랐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