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론과 시사

우리나라 대통령은 왜, 구세주로 시작해서 죄인으로 끝나는가


                    





우리나라 대통령의 슬픈 공식을 아는가


. 대통령이 되었다가 퇴통령(退統領)이 되고 다시 죄통령(罪統領)이 되는 비극의 되풀이. 되어본 이들은 고개 떨구거나 눈감은 채 침묵하고, 되고싶은 이는 너무나 하고싶은 말이 많다.

5월 대선을 앞두고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정국이다.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 이후, 급박하게 진행되는 정치일정 속에서 판이 벌써부터 거칠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대권을 꿈꾸는 이들은 저마다 화합과 포용과 혁신과 번영을 말하지만, 결국 그 말을 퇴임하는 그날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 지켜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봐야 한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너도 끝이 날 것이니 그것을 미리 기억해서 실수와 후회를 줄이라는 얘기다.

박근혜 전대통령을 뽑았던 지난 대선이 있던 그해(2012년). 선거 석달전인 9월에 사진기자 최재영은 안국동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展’을 열었다. 오는 대통령과 가는 대통령의 장면과 풍경과 기억을

 지상전시한다.





2008년 2월 25일, 또 한사람이 권력에 들어서는 날. 이미 그 권력을 맛보고 그것의 치명적인 독까지를 맛본 사람들이 같은 자리를 스친다. 새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을 바라보는 노무현의 눈길이 인상적이다.




2008년 2월 25일, 또 한사람이 권력에 들어서는 날. 이미 그 권력을 맛보고 그것의 치명적인 독까지를 맛본 사람들이

 같은 자리를 스친다.

새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을 바라보는 노무현의 눈길이 인상적이다.


대권무상① 노무현과 이명박, 노의 미소는 무슨 뜻이었나


◆2009년 5월2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 5월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일한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슬퍼하며 따르는 국민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은 전국적으로 500만(봉하마을 장례위원회 추산)이 넘는 인파가 각지의 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많은 이들을 불러 모은 힘은 무엇일까.


청문회 인기스타 시절이나 대통령 당선 때의 노풍(盧風)과 같은 것일까.

 한 국가지도자의 비극적 종말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비감일까.

아니면 그가 보여주었던 한국 정치와 리더십의 가능성에 대한 그리움과 추인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말 없이 오열하며 따랐지만, 그에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것은 지상에서 쉬 떠나보낼 수 없을 만큼 아쉬운 가치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에게 권력은 무엇이었던가. 물론 한때는 한번 쥐어보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대통령짓 못해먹겠다'고 곧 투덜거릴

 만큼 염증도 빨랐다.


그가 비상하던 시절의 야망과 그것이 실현되고 난 다음의 일들은 어떻게 야망의 프로그램과는 달리 흘러나갔는가.

부엉이 바위에서 부는 바람에 가만히 물어볼 뿐이다.

◆2008년 2월25일. 또 한 사람이 권력에 들어서는 날, 이미 그 권력을 맛보고 그것의 치명적인 독까지를 맛본 사람들이 같은 자리를 스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이제 시작하는 사람은 꿈을 꾼다.


그때 '일하는 작은 정부' '경제 살리기' '도덕적으로 깨끗한 정부'는 어떻게 되었는가.

시작하는 날에 끝날을 기억하면, 끝날에 시작하는 날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을 터인데.

권불오년(權不五年, 권력은 5년을 넘지 못하느니)이라,

영원한 왕좌에 앉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만과 부패와 집착이 끼어들 수밖에 없느니.


대선에 나서는 이여,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라.

 그것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것이다.

허허(虛虛)대권이여. 대한민국 권력들, 그 어리석음의 윤회여.






대통령 취임 첫해인 1993년 여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한장의 '청와대 칼국수' 사진으로 소박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대통령 취임 첫해인 1993년 여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한장의 '청와대 칼국수'

사진으로 소박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대권무상② 청칼 끝맛 칼칼허지?…홍어 뒷맛 톡 쏘재?

남은 YS에게…떠난 DJ에게…兩金은 이렇게 묻고 있지 않을까?


김영삼,


1979년 야당 총재였던 그는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가 말한 새벽은 14년 뒤에야 왔다.


김영삼은 1993년 첫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1954년 26세로 제3대 국회의원 민의원에 당선되어 최연소 국회의원을 기록하며 9선 의원을 지냈던 그는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1990년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감수하고 그는 3당 합당에 참여했고 결국 그렇게도 꿈꾸던 권력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권력의 끝은 시련이었다. 임기말 터진 외환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퇴임 직후 불거져 나온 아들 김현철의 비리, 측근이자 인척인 홍인길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스타일을 크게

구기고 말았다.


그의 퇴임사의 한 마디가 귓전에 남는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1979년 긴급조치 해제 때 해금된 故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흑산도 홍어를 유난히 좋아했다.


1979년 긴급조치 해제 때 해금된 故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흑산도 홍어를

유난히 좋아했다.


김대중.


우리에게 그 이름은 무엇인가. 오랜 동안 한국 현대정치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 늘 있었던 인물.

독재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저항적인 운동가. 한국 민주화의 한 상징. 호남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야권을 결집시킨

정신적 거목, 뛰어난 정치적 전략과 집요하고 투철한 목표를 지닌 야당의 당수. 납치, 가택연금, 투옥, 망명으로 점철한 탄압받는 민주인사. 아니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도자.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대통령.


하지만 DJ에게도 치욕적이었을, 측근 비리가 적지 않았다.

차남 김홍업은 업자의 청탁요구를 받고 3억원을 받았다가 돌려준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 받고 3남 김홍걸은

 체육복권 사업자 선정을 싸고(최규선게이트) 돈을 받아 징역 1년6개월형을 받았다.

그는 최규선 게이트로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다.




1979년 4월 3일. 박정희의 죽음을 반년 앞둔 때.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박근혜는 '유신공주'라는 말을 진저리치도록 싫어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별명을 붙였다. 유신은 고 박대통령의 독재를 압축한 한 마디이며, 공주는 그 피를 이어받은 딸의 DNA를 어쩔 수 없이 함의하기 때문이다.


1979년 4월 3일. 박정희의 죽음을 반년 앞둔 때.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박근혜는

'유신공주'라는 말을 진저리치도록 싫어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별명을 붙였다.

 유신은 고 박대통령의 독재를 압축한 한 마디이며, 공주는 그 피를 이어받은 딸의 DNA를

어쩔 수 없이 함의하기 때문이다.



권력무상③ 딸아 날 기억하렴, 시작과 끝을



1979년 4월 3일. 박정희의 죽음을 반년 앞둔 때.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박근혜는 '유신공주'라는 말을 진저리치도록 싫어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별명을 붙였다.

유신은 고 박대통령의 독재를 압축한 한 마디이며, 그 피를 이어받은 딸의 DNA를 어쩔 수 없이 함의하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으로 연장한 독재는 측근의 내분으로 급박한 종말을 맞았다. 상처를 움켜쥔 그는 말했다. "난, 괜찮다." 군인다운 담담함이지만, 죽음에 이른 이가 오히려 남아있는 무엇인가를 걱정하는 뉘앙스가 담겼다.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진 마지막길에 몰려든 저 국민들은 무엇을 슬퍼하며 오열했을까.


1979년 10월 26일. 유신으로 연장한 독재는 측근의 내분으로 급박한 종말을 맞았다.

상처를 움켜쥔 그는 말했다.

 "난, 괜찮다." 군인다운 담담함이지만, 죽음에 이른 이가

 오히려 남아있는 무엇인가를 걱정하는 뉘앙스가 담겼다.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진 마지막길에 몰려든 저 국민들은 무엇을 슬퍼하며 오열했을까.







박정희.


1979년 10월 26일. 유신으로 연장한 독재는 측근의 내분으로 급박한 종말을 맞았다.

 상처를 움켜쥔 그는 말했다.

 "난, 괜찮다." 군인다운 담담함이지만, 죽음에 이른 이가 오히려 남아있는 무엇인가를 걱정하는 뉘앙스가 담겼다.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진 마지막길에 몰려든 저 국민들은 무엇을 슬퍼하며 오열했을까.

박정희, 5ㆍ16 군화정치의 시작. 민주주의를 뒤로 물려놓는 대신 이 땅의 서러운 가난을 몰아내겠다는 그의 야심은

산업화의 기틀을 닦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가 개인적인 치부나 권력 향유를 위해 독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애국적 충정이 집착으로 이어졌을 정황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박정희는 한국 경제를 이만큼 오게한 비전과 신념의 지도자였다는 평가, 청빈과 소탈이라는 지도자의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췄다는 평가가 그것을 보강한다.


물론 이런 평가는 박정희 재임시절에 있었던 민주인사의 탄압과 고문, 부패 양상을 외면하고 있다.

만약, 그가 비명에 가지 않고 끝까지 권력을 누린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면 지금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법정에 서는 일은 없었을까?


박정희를 잇는 박근혜.


사진 속의 아버지의 굳은 표정과 허리를 굽힌 딸의 웃은 표정이 그런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도중하차한 권력이 23년만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활했는데, 우린 끔찍한 무엇을 목도한 듯 소스라쳤다.

최순실게이트와 국정농단의 대파국.




1995년 12월 2일 검찰은 12.12와 5.18 내란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들어가, 이튿날 전두환을 긴급 구속 수감한다. 16년만에 이뤄진 단죄였다. 이날 전두환은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이 수사를 '정치적 보복' 이라고 주장하고,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1995년 12월 2일 검찰은 12.12와 5.18 내란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들어가,

이튿날 전두환을 긴급 구속 수감한다.

16년만에 이뤄진 단죄였다. 이날 전두환은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이 수사를 '정치적 보복' 이라고 주장하고,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다시 전두환.


1995년 12월 2일 검찰은 12.12와 5.18 내란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들어가, 이튿날 전두환을 긴급 구속 수감한다.

16년만에 이뤄진 단죄였다. 이날 전두환은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이 수사를 '정치적 보복'

이라고 주장하고,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전두환, 그의 등장에 국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한지 11일 뒤에(1979년 11월6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마이크 앞에 나타나, 대통령 시해사건의 내용을 발표했다.


그는 혼란한 시국을 바로잡기 위해 등장한 정의의 사도처럼 포장했다.

그러나 한달 뒤인 12월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다.

이에 대한 국민 저항이 커지자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튿날 광주의 시민들을 무차별 공격한 유혈진압의 피얼룩을 찍는다.


넉달 뒤인 9월에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공중에 뜬 권력구(權力球)를 박정희와 같은 방식으로 잡아낸 기민한 순발력의 새치기 권력이었다. 민의(民意)를 가차없이 짓밟으며 공포정치로 이 나라를 자신의 방식으로 리모델링하려 했다.

반체제 인사 탄압, 삼청교육대, 각종 사회혁신 조치들. 그 시작은 피였고 공포였고 정권의 폭압은 군기(軍氣)였다.





1995년 11월16일 검찰은 노태우를 구속했다. 갑작스럽게 보통사람이 되고 물대통령으로 변신하고 3김 낚시로 위기상황을 건너가려 했지만, 원죄를 피할 순 없었다. 그가 걸려든 것은 쿠데타 죄목이 아니라, 비자금 혐의였다.


1995년 11월16일 검찰은 노태우를 구속했다. 갑작스럽게 보통사람이 되고 물

대통령으로 변신하고 3김 낚시로 위기상황을 건너가려 했지만, 원죄를 피할 순 없었다.

그가 걸려든 것은 쿠데타 죄목이 아니라, 비자금 혐의였다.


노태우,


그는 1972년 10월유신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7년 대선은 그래서 국민들에게도 낯선 잔치였을지 모른다.


노태우 후보는 6.29로 만들어낸 '관용'과 '소통'이미지를 확장하여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선거구호를 들고나와 전국 득표율 36%를 이끌어냈다.


군인대통령 이미지를 씻고 북방외교와 같은 외치에 공을 들였다.

  1994년 서석재의원이 4000억 비자금설을 제기했고 이후 박계동의원이 다시 이 문제를 제기하자 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결국 노태우는 혐의를 시인하며 구속되고 말았다.


이후에 12ㆍ12때 정승화 체포사건과 5ㆍ17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서 징역15년에 추징금 2688억원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나쁜 권력을 움직이는 것은 나쁜 돈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대통령. 그 또한 대통령 재임 때 국가나 국민을 위해

나름으로 충정을 기울인 점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처음과 끝이 모두 떳떳하지 않았기에 그런 노력들마저 허망하게 묻히고 만 셈이다.




▲사진기자 최재영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 확정된 사실을 긴급 보도하는 CNN 방송 인터넷 페이지





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게이트 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최순실박근혜 정부의 국정에 개입했다는 것과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설립에 관여하여그 재단을 사유화한 사건,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특혜를 받은 사건 등을

포함하는사건이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는 공식 명칭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다.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룸>은 최순실이 버리고 간 태블릿 컴퓨터자료를 근거로 최순실이 44개의 대통령

연설문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받았다고 단독 보도했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된 것은 지난 2014년 3월 28일 박 대통령이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하면서 발표한 드레스덴

선언의 내용을 담은 한글 파일 형식의 연설문 파일이었다.


 당시에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준비된 연설문이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JTBC 취재팀이 확인한 결과, 박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된 건 한국 시각으로 3월 28일 오후 6시 40분경이었으나 최 씨가 파일 형태로 전달된 원고를 열어본 건 3월 27일 오후 7시 20분으로 하루가 빨라, 최순실은 박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하루 전에 드레스덴 연설문의 사전 원고를 읽어본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마지막으로 수정한 날짜가 2014년 3월 27일 오후 6시 33분으로 드러나 수정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최 씨가

열어본 것으로 추정됐다.

더구나 최 씨가 받아본 총 13페이지 분량의 연설문 중 30여 단락에서 붉은색 글씨가 발견됐는데, 이들 문단을 들어내도 문맥이 이어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붉은 단락과 실제 연설문을 비교하면 대략 20여 군데가 다르며, 어미나 표현이 바뀌었거나 실제로는 언급되지 않은 단락도 붉은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오방낭 시안 파일이 발견됐는데 실제 취임식에 쓰인 오방낭과 같이

오방색배치가 잘못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최순실은 10월 27일 세계일보와의 단독인터뷰에서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한 정도의 내용만 인정하며

 태블릿이 자기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으나, 해당 태블릿에서 최순실의 셀카가 발견된 점 때문에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는 시각이 많았다.


이 사실이 드러난 이후 검색엔진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에 탄핵하야가 오르는 등 퇴진 요구가 일어났다.

이 보도가 나오기 전에는 정치권 차원의 탄핵과 하야 요구는 금기시되었었다.

또한 수 많은 대학생들과 국민들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이원종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였고 10월 30일에 청와대는 이원종 비서실장과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린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부속비서관,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향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로 오랜 세월 '영애 근혜양'로 살아온 그는 아버지의 죽음 후 18년 동안 은둔했다.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며 정치계에 입문한 박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비록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당내 경쟁에서 패해 본선에 오르진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유력

 대선후보였다.

2012년 12월 19일에는 마침내 제19대 대통령으로 뽑혔다

영광에도 끝이 있었다.


지난해 7월 TV조선의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보도로 열린 '박근혜 게이트'는 <한겨레>와 JTBC 취재가 이어지면서

정국을 급속하게 뒤흔들었다. 

두 차례에 걸쳐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며 측근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을 부인했지만

그의 말과는 다른 사실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결국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박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고, 헌법재판소는 지난 3월 10일 헌정사상최초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그리고 박 전 대통령은 파면당한 지 21일 만에 구속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또 한 번 뇌물죄 혐의로 구속되는 대통령이란 불명예도 얻었다




  




구속이 곧 유죄를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혐의가 13개에 달하고,

최순실씨(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등)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뇌물죄),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공무상

비밀누설죄) 등 여러 공범이 있는 그가 구속 상태로 수많은 증거와 진술을 수집한 검찰에 맞서기란 쉽지 않다.


박 전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형벌의 무게도 만만찮다.

주요 혐의 뇌물죄의 양형기준은 징역 5년 이하 또는 자격정지 10년이다.


그런데 검찰이 주장하는 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액은 433억 2800만 원

(실제 오고간 돈은 298억 원), 1억 원을 훌쩍 넘긴 가중처벌대상(최소 징역 10년 이상)이다.

법원이 이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면 박 전 대통령의 삼성동 집은 아주 오랫동안 불이 켜지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을 통치했던 대통령들



이승만(재임기간 : 1948~1960) : 제 1,2,3대 대통령



윤보선(재임기간 : 1960~1962, 1961년에 사실상 직무정지) : 제 4대 대통령



박정희 (재임기간 : 1961~1979) : 제 5,6,7,8,9대 대통령



최규하 (재임기간 : 1979~1980) : 제 10대 대통령



전두환 (재임기간 : 1980~1988) : 제 11,12대 대통령



노태우 (재임기간 : 1988~1993) : 제 13대 대통령



김영삼 (재임기간 : 1993~1998) : 제 14대 대통령



김대중 (재임기간 : 1998~2003) : 제 15대 대통령



노무현 (재임기간 : 2003~2008) : 제 16대 대통령



이명박 (재임기간 : 2008~2013) : 제 17대 대통령



박근혜 (재임기간 : 2013~ ) : 제 18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