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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漢詩

맹광제미(孟光齊眉)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27]

 

남편들이여, 이젠 저렇게 밥상을 차려라


 

'

맹광제미(孟光齊眉)'… 양기성 그림, 종이에 채색, 38×29.8㎝, 18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한적한 산골에 달랑 집 한 채가 보인다. 등장인물은 단둘이고, 그들은 부부다. 남편은 방 안에 편히 앉았고 아내는 두 손으로 뭔가를 떠받친다. 잘 보니, 밥그릇과 반찬 그릇이 놓인 소박한 밥상이다.

얼굴 위로 치켜든 상이 위태롭기는커녕 몸에 푹 익어선지 아내는 미소를 짓는데, 공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세다. 아내는 날이면 날마다, 꼬박꼬박, 높이 우러러 밥상을 남편에게 올린다.

과연 어떤 남편이기에 저런 밥상을 받아먹을까.

이 그림은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를 알아야 재미있다.

'밥상을 들어 눈썹과 나란히 하다'라는 말뜻은 중국 후한(後漢)의 학자 양홍(梁鴻)과 그 아내 맹광(孟光)에게서 나왔다. 맹광은 서른이 되도록 양홍 하나만 바라본 채 시집가지 않았다.

성품이 깨끗하고 행실이 맑은 양홍을 흠모한 까닭이다. 마침내 결혼하자 부부는 산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길쌈을 하며 청빈하게 살았다. 뒷날 부잣집에서 곁방살이할 때도 맹광의 남편 모심은 한결같았다.

아내는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올렸고 눈을 치켜뜨지 않았다.

무릇 그녀의 극진한 공경은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한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18세기 화원(畵員)으로 조선 세조와 영조의 어진(御眞) 제작에 동참했던 양기성(梁箕星)이다.

그림은 한눈에 봐도 채색이 아주 곱고 구성이 매우 단정하다. 정성을 잔뜩 기울인 작품인 것이, 정조가 감상하기 위해 특별히 공들여 만든 화첩 속에 들어 있어서다. 양홍은 살림살이에 보태기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지극한 맹광 덕분에 수학을 병행한 끝에 저술을 남겼다.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말마따나 '살아서는 한방에서 정이 두터웠고 죽어서는 한무덤에서 티끌이 되었던' 부부다.

하지만 맹광처럼 밥상 높이 드는 몸가짐을 요즘 아내에게 바라다가는 큰일 난다.

눈치코치 갖춘 남편들은 일찌감치 길들었다. 이제는 저런 밥상을 받지 않고 저런 밥상을 차린다.

 

 

/ 조선

 

 

 

 

 

梁鴻擧案 潘振鏞

 

 

 

 

後漢書·梁鴻傳:

 

“爲人賃?,每歸,妻爲具食,不敢於鴻前仰視,擧案齊眉。”

 

부풍군 평릉현에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자(字)는 백란(伯鸞)으로 양홍(梁鴻)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현의 맹가(孟家)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도 못난 맹광(孟光)이라는 딸이 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 혼기가 훨씬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자 부모는 근심이 되어 그 연유를 묻자,

 

"양백란(梁伯鸞)같은 훌륭한 분이라면 기꺼이 시집을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7일이 지나도 양홍은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날 색시가 하도 궁금하여 자신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연유를 캐묻자 양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바랬던 여자는 비단옷을 입고 분을 바르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 함께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

 

이 말을 듣자 양홍의 색시는 말했다.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양홍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그녀에게 덕요(德曜)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둘이서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그러나 왕실을 비방하는 양홍이 지은 시로 인해 장제(章帝)에게 쫓기게 되자 오(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伯通)이란 명문가의 방앗간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의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깔고 밥상을 눈썹 위로 들어 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히 바쳤다고 한다.

 

 

古文:

梁鴻字伯鸞,扶風平陵人。勢家慕其高節,多欲女之,鴻??不娶。同縣孟氏有女,狀肥醜而黑,力擧石臼,擇對不嫁,至年三十。父母問其故,女曰:“欲得賢如梁伯鸞者。”

鴻聞而聘之。女求作布衣、麻?,織作筐緝績之具。及嫁,始以裝飾入門,七日而鴻不答。妻乃?床下,

請曰:“竊聞夫子高義,簡斥數婦。妾亦偃蹇數夫矣,今而見擇,敢不請罪。”

鴻曰:“吾欲?褐之人,可與俱隱深山者爾,今乃衣綺縞,傅粉墨,豈鴻所願哉!”

妻曰:“以觀夫子之志耳。妾亦有隱居之服。”

乃更爲椎?,著布衣,操作而前。鴻大喜曰:“此?梁鴻妻也,能奉我矣。”字之曰德耀,名孟光。

......

遂至吳,依大家?伯通,居?下,

爲人賃?。每歸,妻爲具食,不敢於鴻前仰視,擧案齊眉。

 

 

 

(皇甫謐)의 烈女傳

형처(荊妻)

荊:가시나무 형.  妻:아내 처.
[출전]황보밀(皇甫謐)의《烈女傳》[유사어]거안제미(擧案齊眉)

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일컫는 말.

후한(後漢) 시대 양홍(梁鴻)이라는 사람의 처 맹광(孟光)의 이야기다.

맹광은 뚱보인데다 얼굴이 추하고, 게다가 얼굴빛이 새까맸다. 하지만 미녀에게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손쉽게 돌절구를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세었다. 더욱이 마음이 상냥하고 그 언행에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평판이 좋아 사방에서 혼담이 들어왔으나 맹광은 계속 거절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른 살이 되어 버렸다.

맹관은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퇴박하더니 양홍이라는 돼지치기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맹광의 부친이 양홍을 찾아가서 청혼을 했다. '댁의 따님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양홍이 청혼을 받아들이자 맹광은 양홍의 희망대로 신변의 일용품만 가지고 시집을 왔다. 이튿날부터 즉시 허술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트레머리로 하고 친정에 있을 때와 같은 복장을 했다. 양홍은 그러한 아내를 보고 흡족해 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아내다."

당시는 왕망(王莽)이 정권을 빼앗아 국호를 신(新)이라 칭한 때로, 그의 악정을 견디지 못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천하가 어지러웠다. 양호은 학식이나 인품이 높아 사방의 반란자나 그 부하들로부터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혹의 손길을 피해 돼지치기를 그만두고 맹광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산속에다 양홍은 땅을 갈고, 맹광은 베를 짜며 2년간을 살았다.

이윽고 산속에까지 유혹의 손이 뻗치자 두 사람은 오(吳)나라에 가서 이름을 숨긴 채 어느 집의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살았다. 양홍은 매일 삯방아를 찧으러 나가고, 그 근소한 수입으로 겨우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맹광은 매일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서 남편을 따뜻이 맞았으며, 밥상을 눈썹 높이 들어 공손히 남편에게 식사를 권했다. 常荊釵布裙 每進食 擧案齊眉(상형재포군 매진식 거안제미)

이 맹광의 고사에서 허술한 옷차림을 가리켜 형채포군(荊釵布裙)이라 하고, 부인이 예절을 다해 남편을 섬기는 것을 거안제미(擧案齊眉)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형처(荊妻)라는 말도 생겼다.

 

 

가시나무 형 1. 가시나무 2. 곤장(棍杖) 3. 아내 4. 땅 이름

비녀 채,비녀 차 . 비녀 2. 인동덩굴 a. 비녀 (차)

布 베 포

裙 치마 군 1. 치마 2. 속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