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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漢詩

설중방우(雪中訪友).이인문 /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雪中訪友’ 선비는 흥에 겹지만… 뒤따르던 노비도 그러했을까

 

이인문 ‘설중방우’… 눈이 오면 떠오르는 모습

 

 


▲ 이인문 ‘설중방우(눈 속에 벗을 방문하다)’. 종이에 수묵과 옅은 채색,

38.1×59.1㎝. 국립중앙박물관



 

 


▲ 정선 ‘정문입설(정이의 문에서 눈 속에 서다)’. 종이에 옅은 채색, 18.5×14.1㎝.

 국립중앙박물관

 

 

눈 내리면 문득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눈 때문에 오히려 외출이 쉽지 않다. 눈길에도 마다 않고 찾아가는 발길이라면 그 마음의 천진스러운 흥취와 벗에 대한 정감이 남다름을 뜻한다.

눈길을 갔다거나 눈 속에 기다렸다는 그 모습이 옛 시와 옛 그림의 한 테마였다.

 

‘설중방우’를 또 하시렵니까

 

눈 속에 벗을 찾아가는 일을 ‘설중방우(雪中訪友)’라 칭했다. 그 모습이 어떠한가. 선비가 나귀나 말을 타고 동자와 더불어 눈길을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만한 낭만적 이미지가 쉽지 않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문인 성대중이 엮어 필사체로 전하는 ‘청성잡지’에 설중방우의 고생스러운 실상이 우스꽝스러운 일화로 각색돼 있다.

 

노비가 대감을 따라가는데 강의 살얼음을 건너다가 대감이 물에 빠졌다. 노비가 대감의 상투를 붙들어 끌어올리는데, 반쯤에서 멈추고 약속을 받는다.

“나리, 설중방우를 또 하시렵니까?” 대감이 “아니!”라 답했다.

노비는 또 묻는다. “저의 아내를 계속 곁에 두시겠소?” 대감이 “아니! 아니!”라고 했다. 그제야 노비는 대감을 완전히 끌어올렸다.

 

성대중은 설명을 더했다. 설중방우란 ‘취사’(趣事·흥취 있는 일)거늘, 선비 곁을 동행하는 노비는 고생이 너무 많다. 손이 곱고 발이 시릴 것이다. 사실, 선비도 춥기는 마련이다. 그래서 추위를 견디느라 노비의 처를 곁에 두고 가며 희롱까지 했다는 것이다. 노비는 차마 투덜대지 못하다가 절호의 찬스를 만난 셈이다. 이때구나 싶어 약속을 받겠다고 얼음물에 빠진 주인을 반만 꺼내 놓고 다그친다.

“나리, 설중방우를 또 하시렵니까?”

간절한 요청인데 방식이 이러하다니, 노비의 천진한 호기가 제멋에 취해 눈길을 강행했던 주인대감 못지않다.

 

‘설중방우’의 출처, 왕휘지의 흥(興)

 

‘설중방우’라는 사자성어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두 예술가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한 사람은 왕휘지(王徽之·336∼386)로 서예가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이며 그 역시 저명한 서예가였다. 또 다른 사람은 왕휘지의 벗 대규(戴逵·326∼396)로 금을 잘 연주하고 그림도 그렸으며 박학다식했는데 한사코 출사하지 않았다. 송대에 간행된 ‘세설신어’에 그들의 설중방우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왕휘지가 산음(지금의 저장성 사오싱·紹興)에 머물 때였다.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보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왕휘지가 술 한 잔에 시 한 수 노래하노라니, 문득 대규가 생각났다. 대규는 섬계(지금의 저장성 사오저우·紹州)에 살고 있었다. 왕휘지는 작은 배로 밤새 가서 대규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왕휘지는 대규 집 문 앞에서 배를 돌려 왔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그의 답이 이러했다.

 

‘내가 원래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노라. 어찌 반드시 대규를 보아야 하겠는가

(吾本乘興而來, 興盡而返. 何必見戴·

오본승흥이래, 흥진이반. 하필견대).’

 

눈 내리는 날이면 옛 문사들이 섬계의 흥취를 반드시 떠올렸고 그들의 설중방우를 기억하며 시문을 거듭 지었다. ‘설야방대도(雪夜訪戴圖·눈 내린 밤 대규를 찾아가다)’라는 그림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 거듭 그려졌다. 중국에 전하는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선에서도 16세기 초 정수강이, 17세기 초 신흠이 모두 ‘설야방대도’를 감상했노라고 제화시를 남겼다.

 

흥에 겨워 밤새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다는 이 이야기는 무엇을 뜻할까. 그들의 시절은 위진남북조시대라, 한나라 이후의 정치적 혼란기였다. 예술과 개인적 자유에의 각성이 일던 시절이다. 내 흥대로 하노라니 그것이 가치라는 풍조가 엿보인다. 조선의 학자들은 유학자의 체통으로 해석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 선생 이이는 ‘설중방우’의 뜻을 묻는 과거시험에서 한때의 즐거움일 뿐이라고 일축해 답했고, 그의 답안은 최고로 뽑혔다. 그림으로 감상한 신흠은 말했다. ‘정신으로 사귐이라 형체를 잊은 것이라.’ 그 후 신위의 말도 비슷했다. ‘좋은 벗은 마음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얼굴을 봐야겠는가.’ 이러한 조선 선비들의 반응 속에서는 흥겨운 공감보다는 의미에 대한 수양적 성찰태도가 드러난다.

 

생각해 보라. 보고 싶어 밤새 갔다 보지 않고 되돌아오다니. 범상치 않은 화두다. 한편 흥도 좋고 내면도 좋지만 어이없음도 사실이다. 차라리 매천 선생 황현이 툭 트듯 읊조린 시구가 정곡을 찌르는 양 시원하다.

‘섬곡에서 배 돌린 일은 너무 썰렁한 이야기라네!’

왕휘지에게 왜 그냥 돌아가느냐 다그친 사람은 밤새 노를 저어 갔던 그의 시종이 아니었을까.

 

이인문이 그린, ‘설중방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송유수첩’ 중에 ‘설중방우’가 실려 있다. 고송유수(古松流水)는 화가 이인문(1745∼1821)의 호다. 이인문의 ‘설중방우’를 보면, 눈 쌓인 날 두 선비가 방안에 마주 앉았다. 한 사람은 주인이고 한 사람은 방문객이다. 방문한 벗은 흥이 다하지 않아 돌아가지 않은 것일까. 두 벗이 만났으니 그림을 보는 이도 흡족할 뿐이다.

 

조선초기 정도전의 시 ‘설중방우’가 이 그림 같았다. 정도전은 눈 속에 친구 한 씨를 찾아갔다. ‘문 앞에 당도해도 눈이 아직 개지 않았네!’ 왕휘지의 흥은 집 앞에서 끝났지만 정도전의 흥은 계속 내리는 눈과 함께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니 흥으로 치자면 정도전이 왕휘지보다 낫다고 자부해 볼 만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남은 흥을 타고 가리니,

풍류에 굳이 섬계의 옛일을 들먹이겠는가.

返路也乘餘興去(반로야승여흥거),

風流何必剡溪行(풍류하필섬계행).

(정도전 ‘설중방우’ 중에서)

 

 

이인문의 그림을 보면, 담장 밖에 동자가 주춤대는데 주인댁 동자가 팔을 들어 안내한다. 추위에 떨던 동자는 이제 안으로 들어 곱은 손발을 녹일 참이다.

 

화가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정조대의 화원화가로 산수를 잘 그렸다. 이 그림 속 설경 표현은 어딘지 기분 좋아 쓸쓸함이 전혀 없다. 하늘을 침침하게 선염하며 눈 쌓인 부분을 모두 바탕색으로 남겨 두는 것은 설경을 그리던 오랜 전통법이다. 하얗게 남기는 것을 ‘유백법(留白法)’이라 한다. 이 그림은 이런 전통을 잘 따르고 있지만, 특별히 산뜻한 설경이다. 그 이유는 무성하게 가지를 친 오동나무며 청록이 싱싱한 소나무 솔잎 위로 베풀어진 유백법 때문인 듯하다. 화면의 거반을 차지하며 뻗어 나간 가지들 위로 소복소복 눈꽃이라 산뜻한 생동감이 화면을 지배한다. 사람들의 흥취와 온정의 이야기가 이렇듯 생기 넘치는 설경에 담겼기에, 이 그림이 기분 좋게 내 눈에 들었던 것이다.

 

폭설 속에 기다린 예(禮), ‘정문입설’

 

날이 궂다고 배움을 거를 일인가. 눈 오는 날에도 스승을 찾아가 배우기를 마다 않고 폭설에도 예를 지킨 옛 학자의 이야기. 조선시대 학자들이 설경 속에 떠올리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1676∼1759)의 그림이 있다.

 

때는 송나라. 유조와 양시 두 학자가 이천 선생 정이(程?)을 처음 찾아뵙고 나서는데 정이가 마침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유조와 양시는 차마 물러나노라 인사를 못하고 선 채로 기다렸다. 정이가 눈을 뜨고 말했다. “자네들 아직 거기 있나. 이제 가서 쉬게나.” 문 밖에는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정문입설(程門立雪·정이의 문에서 눈 속에 서다)’의 사자성어로 통한다. 정선의 그림 상단 오른편에 이 네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그림 속 대학자 정이의 집은 소박한 초막이고 인물은 오직 세 사람이니 참으로 간단한 그림이다. 명상에서 깨어난 정이가 물러나라 허락하느라 뜰을 향해 곤두 앉았다. 뜰에 선 두 학자 유조와 양시는 정강이까지 눈 속에 파묻혔는데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할 따름이다. 집도 담도 온전한데 두 학자만 눈 속에 파묻힌 것이 볼수록 우습지만, 입설(立雪)의 주제를 그린 것이라 이해할 일이다.

‘정문입설’의 이야기는 ‘송사’와 ‘주자어록’에 모두 전한다. ‘주자어록’의 원문을 보면 두 학자가 문을 나왔더니 눈이 한 자였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그림처럼 눈 속에 한참을 서서 스승의 명상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다만 한 자 깊이 눈 속을 헤치고 돌아가야 했으니 상황은 비슷했을 것 같다.

 

정성을 본받고, 초심을 지키라

 

조선후기 정조 때, 성균관 유생들의 품행이 바르지 않고 그들의 풍습이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들 모두 단체기합을 받기에 이르렀다. 유생들은 대궐의 뜰에 공수(拱手·손을 맞잡아 모음)의 자세로 반나절을 서 있어야 했다. 그다음, 그들은 ‘정문입설’이란 시 제목을 받았다. 공손하게 예를 지킨 송나라 두 학자를 기억하며 시(詩)를 지어 제출하란 뜻이다. 그 시절의 반성문이다. 때마침 이날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정조는 ‘문 밖에 눈이 세 자’라 하며 그날 대궐에 입직한 모든 신하들에게 이 일을 주제로 부(賦)를 짓게 했다. 부란 시보다 격식을 갖춘 산문시라 짓기가 까다롭다. ‘홍재전서’ ‘일득록’의 기록으로 1792년 겨울의 일이다.

 

‘정문입설’은 한반도에 성리학이 수용되던 고려말기부터 학자들이 인용했던 고사다. 스승을 처음 뵌 날 배움을 시작하는 태도의 표본이라 해 ‘입설의 초심’이라 부르고 이 초심을 지키라 했다. 정선을 후원한 안동 김씨 가문의 김창흡(1653∼1722)도 이 고사를 여러 번 인용하며 ‘눈 속에 서는 마음(立雪心)’이라 칭송했다.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린 배경에는 ‘정문입설’의 고사를 아낀 김창흡의 각별한 애호가 있지 않았을까. 눈 속에 서는 ‘입설’뿐 아니라 눈 속에 눕는 ‘와설(臥雪)’도, 설경 속에서 선비들이 잊지 않던 고사였다. ‘와설’이란, 눈이 와서 심각해진 백성들의 노고와 기근을 염려한 관료 원안이 밖에 나가지 않고 가만히 누움으로써 백성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했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시와 그림의 오랜 주제였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면 설렘에 무언가 마음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내 맘에는 여고시절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를 가르쳐 주신 불어선생님이 떠오른다. 동화 같은 환상 속으로 우리들의 미래를 하나하나 자립시켜 줬던 선생님의 열정에 매료돼 추위를 잊고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아련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눈이 내리면 설??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의 고비였던 한겨울에 할 일 없이 시종을 거느리고 벗을 찾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웠을 리 없다. 혹은 우스꽝스럽기 십상이다. 밤을 새워 배를 저어간 왕휘지의 영상이 잊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환상이 안겨 주는 낭만적 위로가 있어서였으리라.

이인문의 그림 같은 설경 속 조우라면 더할 나위 있겠는가. ‘입설’이나 ‘와설’은 좀 다르다. 눈이 쌓여도 배움의 도리를 지켰다는 두 학자, 눈이 쌓였으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말자고 꼼짝 않고 누웠다는 원안, 그들은 아마도 눈 내리는 겨울 방에 선비들을 끌어 앉히고 마음을 여미게 해준 고마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미술사학자> / 문화 

 

 

 

 

 

明 ? 周文靖 ? 軸 ? 國立故宮博物院

 

 

雪夜訪戴

 

 

「筆記小說」雪夜訪戴_世說新語_南朝宋 劉義慶

 

《雪夜訪戴》

 

王子猷居山陰,夜大雪,眠覺,開室,命酌酒。四望皎然,因起??,詠左思〈招隱詩〉。

忽憶戴安道,時戴在剡,?便夜乘小船就之。經宿方至,造門不前而返。

人問其故,王曰:「吾本乘興而行,興盡而返,何必見戴?」

 

南朝 宋 劉義慶《世說新語》任誕篇

 

王子猷:字徽之,東晉琅邪臨沂(今山東)人。大書法家王羲之第五子。

任誕:任達放誕

 

 

 

"사람과 거문고가 모두 죽었구나!”

 

<강경범의 음주고사-왕휘지 편>‘거짓 명사(僞名士)’였는가?

 

중국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기는 어지러운 정국으로 인해 ‘청담(淸談)’?‘자연(自然)’?‘담박(淡泊)’?‘운치(韻致)’?‘풍류(風流)’ 등 귀족사회의 명사(名士)풍모가 당시의 조류를 이뤘다.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에게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와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가 가장 유명하다.

왕휘지는 자(字)가 자유(子猷)로, 방종하고 오만하여 깨끗함을 자처하였지만 ‘거짓 명사(僞名士)’란 비난을 받는 반면, 왕헌지는 당시에 글씨로는 부친 왕희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왕(二王)’이란 명성을 얻었고, 고매하여 조그만 예법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남을 업신여기는 언행을 삼갔다.

 

왕휘지의 언행이 과연 명사인체 한 ‘거짓 명사(僞名士)’의 행위였는가?

이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려고 한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의 성품을 평가하는 하는 일은 위험하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근 1600년 전의 일을 ≪진서(晉書)≫와 ≪세설신어(世說新語≫의 편린들로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필자는 ≪세설신어(世說新語)≫ 전체를 통해 가장 운치있는 ‘눈내린 밤에 대규를 찾아가다(설야방대(雪夜訪戴))’ 혹은 ‘흥을 이끌려 친구를 방문하다(승흥방우(乘興訪友))’라고 불리는 고사를 무척이나 좋아하기에, ‘위명사’라고 하는 평가가 왜 나왔는지, 이러한 평가가 그에게 타당한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먼저 천고에 빛나는 그의 운치있는 고사를 보자.

 

왕휘지는 진(晉) 태화(太和)연간에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몇 년을 지내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로 돌아왔다. 그는 회계의 산음(山陰)에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에 큰 눈이 내렸고, 달빛은 밝게 빛나는데, 사방을 돌아보니 호연지기가 생겨났다.

일어나 앉아서 홀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섬(剡: 지금의 절강성 승주(?州))땅에 있는 대규(戴逵: 자가 安道)가 생각나서 곧 야밤에 조그만 배를 타고 그를 찾아갔다. 밤을 새워 비로소 도착하여 문앞에 이르러서는 들어가지 않고 돌아섰다. 그 까닭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본래 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 나섰는데, 흥이 다하여 돌아가니 구태여 대규를 만날 필요가 있는가?”

(≪세설신어(世說新語)?임탄(任誕)第二十三≫)

 

명대 오빈(吳彬)은 ≪주정(酒政)≫에서 술마시는 요건을 사람(飮人)?장소(飮地)?때(飮候)?운치(飮趣)?엄금(酒禁)?잠시 쉼(飮?) 등 6則을 나눴고, 술마실 때를 또한 봄날 교외(春郊)?꽃이 피었을 때(花時)?맑은 가을(淸秋)?초여름 녹음이 돋을 때(新綠)?비가 갤 때(雨霽)?눈이 쌓였을 때(積雪)?새롭게 둥근 달이 떴을 때(新月)?서늘한 저녁(晩?)으로 나눴다.

 

이를 위의 고사에 적용하면 눈이 쌓였을 때(積雪)?새롭게 둥근 달이 떴을 때(新月)에 해당하는데, 작자는 이러한 때를 당하여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조려 보지만 이마저도 그의 감정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 대규가 생각났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간절해지고 집착해지는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도를 닦는 분들이 집착을 끊으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 이후가 멋지다. 멋진 반전이다. 그렇게 간절히 보고 싶었던 친구의 문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있겠는가!

차라리 대규를 만났다면 천고에 전하는 향기로운 고사로 남았겠는가! 친구가 생각난다고 한걸음에 달려가는 일이 흔하지는 않겠지만 세상에 이러한 일이 또한 없겠는가?

 

“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 나섰는데, 흥이 다하여 돌아가니 구태여 친구를 만날 필요가 있는가?”

보기에 따라 약간 오해를 살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절친한 친구(知己)’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만나고 안만나는 것이 무어 문제이겠는가? 오히려 그의 풍류로운 모습과 친구간의 우애를 한껏 높여준다. 나는 종종 밤새워 나를 찾아와 나의 창문 밖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그러한 친구가 하나라도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런데 ‘위군자’라는 평가가 나온 것은 그의 이러한 행위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된 행위’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인품과 이러한 운치있는 행위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일까?

 

우선 당시의 고승 지도림(支道林)의 평가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세설신어≫ 속에 보이는 그의 평가를 살펴보자.

 

고승 지도림(支道林)이 회계로 들어가서 왕휘지 형제를 만나고 돌아오니, 사람들이 “여러 왕씨를 보니 어떻습디까?”라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목이 하얀 까마귀 한 무리를 보았는데, 다만 옹알거리는 소리만을 들었다네.”(≪세설신어?경저(輕?)第二十六≫)

 

왕휘지가 사만(謝萬)을 찾아갔을 때 고승(高僧) 임지림(支道林)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니 매우 훌륭하였다. 왕휘지가 “임대사는 수염과 머리칼이 모두 멀쩡하니, 정신은 마땅히 이보다 더 낫겠지요?”라고 하니, 사만이 “입술과 이빨은 서로 의지하기에 한쪽이 없어질 수 없다지만 수염과 머리칼이 정신이 밝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소?”라고 하였다. 지도림이 매우 불쾌하여, “이 몸을 오늘 어진 두 사람에게 아예 맡겼소.”고 하였다.(≪세설신어(世說新語)?배조(排調)第二十五≫)

 

지도림과 왕휘지의 관계를 보면, 한 사람은 도를 닦는 스님이고 한 사람은 감성을 중시하는 예술인이다. 인용한 첫 번째 고사는 왕씨집안의 자제들이 아직 인격과 식견이 완성되지 못했음을 비유한 것인데, 당시에 왕씨의 자제들은 제법 명망이 있었을 터이지만 고승의 눈에서는 아직 ‘구상유취(口尙乳臭)’한 수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은 듯 하다.

 

특히 두 번째 고사는 더욱 가관이다. 이런 ‘구상유취’한 듯한 애송이가 고승인 자신에 대해 함부로 ‘깨달음’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고, 속된 말로 “나를 가지고, 니들 마음대로 하소.”라며,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휘지의 성품은 말이 많고 속되고 오만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여기서 필자가 잠시 왕휘지를 변명할까 한다. 사람을 대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말이 없으면 성격이 퉁명하여 자리를 어색하게 만든다고 하고, 말을 많이 하면 체신머리없고 경망스럽다고 한다. 적당히 상대의 마음을 살펴서 처신하면 좋으련만, 모든 일에 ‘적당히’라는 말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데, 하물며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서랴!

 

하여튼 그의 이러한 성품은 동생 왕헌지와 상반되기에 더욱 뚜렷이 구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품까지 의심받는 상황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다시 이 둘의 품성을 짐작할 수 있는 ≪세설신어≫의 기록을 보자.

 

왕휘지와 왕헌지가 함께 방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불이 났다. 왕휘지는 황급히 피하였기에 신을 신을 경황이 없었다. 그런데 왕헌지는 태연한 안색으로 좌우의 사람을 불러 부축을 받고 나왔는데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이 정황으로써 두 왕씨의 품격을 판정한다.(≪세설신어?아량(雅量)第六≫)

 

왕씨 집안의 아들 세 사람이 사안(謝安)을 찾아왔는데, 왕휘지와 여섯째 왕조지(王操之)는 속세의 일을 말했지만 왕헌지는 대략 문안인사만 나눴을 뿐이다. 이들이 나가자 그 자리에 있던 손님이 사안에게 “세 명의 현자 중에서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으니, 사안이 “막내가 가장 뛰어나네.”라고 대답했다. 손님이 “어째서 그렇게 여기십니까?”라고 하자, 사안이 “훌륭한 사람은 말이 적고, 경박한 사람은 말이 많은 법이니,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네.”라고 말했다.(≪세설신어?품조(品藻)第九≫)

 

왕휘지와 왕헌지가 함께 ≪高士傳≫과 <고사전>의 찬(贊)을 품평하였다. 왕헌지는 ‘동한(東漢)의 은사 정단(井丹)의 고결함’을 칭찬하였고, 왕휘지는 ‘사마상여가 세상을 조롱하며 오만한 것’을 칭찬하였다.(≪세설신어?품조(品藻)第九≫)

 

환현(桓玄)이 태부(太傅)가 되어 커다란 모임을 가졌기에 조정의 신하가 모두 모였다. 잔치자리가 끝나갈 무렵 환현이 왕휘지의 아들 왕정지(王楨之)에게 “나는 그대의 막내 삼촌(즉 왕헌지)에 비하면 어떠한가?”라고 묻자, 주위의 손님들은 숨을 죽였다. 왕정지가 천천히 “돌아가신 삼촌은 그 당시의 모범이시고, 공께서는 천년에 한번 나올만한 영웅이십니다.”고 대답하자, 온 좌석이 즐거워하였다.(≪세설신어?품조(品藻)第九≫)

 

위 고사를 통해보면, 왕헌지의 인품이 왕휘지보다 더 나아 보인다. 왕헌지는 당시 부친인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와 명성을 나란히 할 정도였지만 당(唐)현종(玄宗)이 왕헌지를 폄하하고 왕희지를 극찬하였기에, 왕헌지의 글씨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또한 품성에 있어서도 그는 부친에 비해서는 구속에 얽매이지 않은 품성을 지녔지만 왕휘지의 광방하고 오만하며 세속적인 냄새가 나는 것과는 달랐다.

 

그런데 왕휘지는 위의 고사에서 보듯 ‘사마상여가 세상을 조롱하며 오만하게 행동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아마도 왕휘지는 동진(東晋)시기의 명사로서, 죽림칠현(竹林七賢)?도연명(陶淵明) 등의 방종하면서 운치있는 언행을 매우 동경한 듯 하다.

 

하지만 그가 대사마 환온(桓溫)과 좌장군 환충(桓沖)의 참군으로써 관직생활을 지내면서, 위진명사의 광방한 행동을 일삼았는데, 이는 당시 권세를 누린 명문가의 자제로써 다만 허세를 부린 것으로 오해를 살만 하다. 아마도 그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거나 고상한 품격이 부족하여 광방한 행동으로 인해 빚어지는 결점을 상쇄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광방한 행위를 보자.

 

왕휘지가 경사를 나섰지만 여전히 청계(淸溪)에 머물러 있었다. 예전에 좌장군(左將軍) 환이(桓伊)가 피리를 잘 분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로 일면식도 없었다. 환이가 물가의 언덕을 지나가고, 왕휘지는 배 안에 있었는데, 손님 가운데 환이를 아는 자가 있어서 저 사람이 환이라고 하였다. 왕휘지는 사람을 보내, “당신은 피리를 잘 분다고 들었는데 나를 위해 한번 불어주시겠소?”라며 청했다.

 

환이는 당시 지위가 아주 높았지만 평소 왕휘지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즉시 수레에서 내려와서 편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세 번을 불었다. 연주가 끝나자 수레에 올라 떠났는데, 주인과 손님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세설신어(世說新語)?임탄(任誕)第二十三≫)

 

왕휘지는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참군(參軍)이 되었다. 환충이 “그대는 무슨 부서인가?”라고 물으니, “무슨 부서인지 모르지만, 항상 말을 끌고 오니 마치 말을 관장하는 부서(馬曹)인 듯 합니다.”라고 말했다. 환충이 또 “부서에는 말이 몇 필이 있소?”라고 하자, “말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不問馬), 무슨 연유로 그 수를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은 죽은 것에 비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묻자, “태어난 것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소?(不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했다.(≪세설신어(世說新語)?간오(簡傲)第二十四≫)

 

*이 고사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마조(馬曹)는 한(漢)대에는 설치했지만 동진시대는 이 직책이 없었기에, 왕휘지가 일부러 ‘馬曹’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도 한다. ‘불문마(不問馬)’는 공자의 마굿간에 불이 났을 때 공자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이 다쳤는지를 물은 ≪논어(論語)?향당(鄕黨)≫의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또한 ‘不知生, 焉知死’는 ≪논어?선진(先進)≫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왕휘지가 거기장군 환충의 참군이 되었다. 환충이 “그대는 이 부서에 오래 있었으니, 요새는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겠지?”라고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다만 높은 곳을 쳐다보고 주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서산에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이 있네.”(≪세설신어(世說新語)?간오(簡傲)第二十四≫

 

 

 

 

이로써 보면 왕휘지의 상하를 구분하지 않은 오만한 태도와 감성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얕지 않은 그의 학식까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명사’라는 오명을 염두에 두고 위에 인용한 고사를 나름대로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즉, 직위를 무시한 그의 오만하고 광방한 행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명대 조신(曹臣)은 ≪설화록(舌華錄)≫ 중 <광어(狂語)> 소인(小引)에서 ‘미치광이의 말(狂語)’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미치광이(狂夫)의 말은 성인이 이를 가려서 썼다.’고 했다. 성인도 오히려 이것을 취했는데 하물며 그 밑의 사람들이야! 대저 미친 자(狂者)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 있어서는 공허함을 가득 찬 것으로 여기고, 타인에 있어서는 높은 지위를 낮은 것으로 여기기에, 자신의 한몸 외에는 자신의 두 눈을 만족시킬 것이 없다.”고 했다.

 

 

옛 문헌 속에 보이는 ‘미치광이(狂夫)’는 세상을 등진 사람으로서, 넓고 높은 안목을 겸비하고, 세속의 어떠한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왕휘지는 이러한 면에 있어서 ‘광부(狂夫)처럼 죽음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철저하지 못하여, ‘광부(狂夫)’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죽림칠현’의 광방한 행동거지를 쫓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의 안목이나 식견은 주위를 감동시킬 만큼 아주 높지 못했던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고승 지도림의 평가에서도 얼핏 짐작할 수 있지만, 위의 고사에서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다만 높은 곳을 쳐다보고 주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서산에 아침이 오니, 상쾌한 기운이 있네.’”라고 한 점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이 고사의 전체적인 의미는 자신은 세속의 일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연의 고상한 기운에 심취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이 통쾌하게 나온 것이 아니라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나온 것이니, 평소 달관한 자의 언행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위명사’라는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필자는 그가 아주 뛰어난 감성을 가지고, 운치를 추구하여 자신을 다독이며, 대나무를 좋아한 꽤 괜찮은 취미를 가진 그의 행동만이라도 닮고 싶은 사람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운치란 산위의 색, 물 속의 맛, 꽃의 빛깔, 여인의 자태같아, 비록 잘 말하는 자라도 한마디로 말할 수 없고, 오직 마음으로 깨달은 자(會心者)만이 이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독자께서도 스스로 판단해보시길...

 

다음은 그의 감성과 운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고사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황휘지와 왕헌지가 모두 병이 심했지만 왕헌지가 먼저 죽었다. 왕휘지가 좌우의 시종에게 묻고서, “어째서 모두 소식을 모르는가? 이것은 이미 (동생이)죽었다는 것이야!”라고 했는데, 말속에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었다. 곧 수레를 몰아 동생을 찾았지만 오히려 곡(哭)조차 하지 않았다.

왕헌지는 평소 거문고를 좋아했기에 곧 시체를 잠시 안치한 곳에 들어가서, 왕헌지의 거문고를 가지고 연주를 했지만 거문고줄이 소리를 내지 않아서 던지며, “헌지야! 헌지야! 사람과 거문고가 모두 죽었구나!”라고 하며, 한참을 통곡하였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죽었다.(≪세설신어?상서(傷逝)第十七≫)

 

왕휘지가 다른 사람의 텅빈 집에 잠시 기거하면서 대나무를 심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잠시 거주하는데 왜 번거롭게 대나무를 심습니까?”라고 하자, 왕휘지가 한참을 읊조리고 나서, 대나무를 가리키며, “이 대나무가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세설신어(世說新語)?임탄(臨誕)第二十三≫)

 

왕휘지가 한번은 오중(吳中)땅을 지나가다가 한 사대부집에 대나무가 아주 좋은 것을 보았다. 주인은 왕휘지가 찾아올 것을 알고서 청소하고 술자리를 마련하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기다렸다. 왕휘지의 가마는 곧바로 대나무 아래로 가서 한참 시를 지어 읊조렸고, 주인은 이미 실망하였지만 여전히 서로 만나기만을 바랬다. 마침내 왕휘지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시종에게 문을 닫고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휘지는 마침내 이로써 주인을 칭찬하고 이내 머물며 실컷 즐기고서 돌아갔다.(≪세설신어(世說新語)?간오(簡傲)第二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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