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눈쌓인 겨울산·땔감 진 나무꾼’ 그들 넋두리가 곧 민심의 소리
김홍도 ‘부신초동도’ - 나무꾼이 행복한 세상
▲ 김홍도 <부신초동도>, 종이에 옅은 채색, 29.5×37.9㎝, 개인소장.
▲ 유운홍 <부신독서도>, 비단에 옅은 채색, 16.1×22.1㎝, 서울대박물관 소장.
하얀 눈 소복한 산길로 소년들이 지게를 지고 간다.
추운 줄도 모르고 무거운 줄도 모르는 듯 소년들의 모습이 밝아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을 산뜻한 설경의 풍속으로 감상하고 접자니, 천진한 그들 표정 위로 크게 솟은 땔감더미가 가슴에 얹힌다.
나의 아들 같은 너희들, 무슨 사연으로 땔감을 높이 지고 이 그림에 들었니.
나무꾼의 일, 그 의미
몸을 힘들게 하는 일 중의 하나로 ‘부신(負薪)’을 꼽는다.
‘땔나무를 메다’는 뜻이다. 산에 들어 지게 가득 나무를 싣고 필요한 곳까지 나르거나 혹은 저잣거리에 내다 파는 일까지,
나무꾼 혹은 꼴꾼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하던 일이다. 일의 귀천으로 따지자면 천한 일에 속한다.
고관대작을 두루 지내고 몸이 늙은 관료들이 사직서를 올릴 때, 자신을 ‘부신’이라 칭했다.
부신으로 더 이상 이 공직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왜 하필 ‘부신’일까?
‘부신’으로 병든 몸을 표현하는 것은, 중국 한나라 때 정리된 경전 ‘예기(禮記)’에서 비롯한다. 유
래가 오랜지라 그 이유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땔나무를 지고 온 피곤함으로 몸에 병이 들었다는 뜻인지, 몸이 병들어 땔나무를 질 수 없다는 뜻인지추측의 해석만이
구구하다.
분명한 것은 관직에서 떠나려는 뜻을 전할 때 ‘부신’이라 칭하며 구실의 표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주어진 해석을 존중하며
극단으로 유보해 그 뜻을 밝히자면, ‘부신’이란 ‘힘든 일’이며 ‘필요한 일’이다.
한편 ‘맹자(孟子)’에는 ‘부신’과 같은 뜻으로 ‘채신(採薪·땔나무를 함)’의 근심이란 말이 나온다. 조선의 관료들이 물러날 때
‘부신’ 외에 ‘채신’이란 표현도 자주 썼다.
굳이 나무꾼이 땔나무를 하여 짊어지는 일에 자신을 비긴 것은, 아마도 그 비유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리라. 맑은 산에 깊이 들어 나무하는 일이라 쾌쾌한 구석이 전혀 없다.
또한 땔나무가 무엇인가. 밥을 짓고 방 데우는 필수연료 아닌가. 산 속 노동의 청정한 분위기와 그 노동의 가치가 이러하니,
나무꾼의 비유에는 그 자체로 속깊은 매력이 담겨있다.
나무꾼의 말, 그 권한
옛 어른이 말씀하시길,
‘나무꾼에게 묻고 들으시오.’
(先民有言, 詢于芻?.)
중국 고대의 노래모음집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의 한 구절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명분을 내세우는 관료들의 논리나 달콤한 아첨에 미혹되지 말고, 차라리 나무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란 요구이다.
두서없는 나무꾼의 넋두리, 그 삶의 포부, 나무꾼의 상상, 나아가 그들의 사랑이야기까지. 그들이 하는 말, 즉 민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고위관직의 신료들이 왕에게 상소문을 올릴 때, 종종 이런 토를 덧붙인다.
“제가 나무꾼의 말로 아룁니다.”
나무꾼의 발언권이 신료의 그것보다 낫다니. 이는 나무꾼 비유의 의미 있는 매력을 작동시킨 수사법이다.
거짓을 모르는 나무꾼의 성실함으로, 명리에 상관치 않는 나무꾼의 순진함과 소박함으로 이 글을 아뢰고 있다는 말이며, 자신의 요청만은 특별히 꼭 들어달라는 간절한 당부이다.
겨울산 나무꾼의 영상
나무꾼을 그린 그림이 있다. ‘부신초동(負薪樵童·땔나무 진 나무꾼 소년)’이란 제목이며, 김홍도(1745∼?) 말년의 작품으로 전한다. 땔나무 지고 돌아가는 소년들. 등에 쌓아 올린 나뭇가지들이 그들의 몸보다 크고도 높다. 소년들은 알 리 없다.
학자들이 운운하며 나무꾼에게 부여했던 오랜 매력과 권한의 의미를.
겨울산 나무꾼의 모습. 이 이미지는 오랜 의미와 현실적 영상을 응축시킨 옛 그림의 화제(畵題)였다.
중국 청나라의 ‘점석재화보’ 중 한 화면이 그 예다.
“흰 눈 깊은 곳에 땔나무 지고 돌아가네(白雪深處負薪歸)”란 구절이 있고, 땔나무를 진 나무꾼 두 명이 그려져 있다. 하얀
설경 속을 꿈틀대는 검은 고슴도치처럼 땔감지게가 움직이는 화면이다.
김홍도의 ‘부신초동’ 그림에 있는 시구가 이러하다.
눈 내린 산허리 길로 나무꾼이 돌아오는데,
나무 덮인 마을에서 희미한 등불 아래 사람 소리.
樵歸雪嶽山腰路
人語燈深樹裡村
겨울 산에서 나무하고 돌아가는데 저 멀리 등불이 반짝이고 사람 소리 들린다. 늦도록 등을 밝혀 백성들이 편안하게 일하도록 도와주었다던 어느 지방관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이 등불은 어린 나무꾼의 발길을 안내하는 등불이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다정다감 서로서로 보살피는 목소리며, 보리밥에
다독이는 아련한 소리다.
등불이 멀어도 돌아갈 곳이 있기에 소년들은 발길을 재촉한다. 그림 속 등을 돌리고 가는 소년은 앞질러 서두르는 모양이다.
눈 쌓인 산허리 길로 세 소년의 커다란 지게가 내려가고 있다.
춥고 배고파도, 젊은 그들!
도성문 닫히려 할 때 냇가로 나무꾼 돌아오는데,
도성의 파루소리 황혼에 울리네.
까마귀 깃들고 초승달이 산 성곽에 걸려 있고
숲속 마을 너머에서 희미한 등불 아래 사람 소리.
근년의 기근 중에 올해가 더욱 심하지만,
젊은 시절 놀아야지 늙어지면 어이할까.
밤이라 봄기운 생겨남을 조금 느끼겠으니
술 익는 봄바람이 상원으로 다가오네.
溪上樵歸欲閉門, 禁城鍾鼓動黃昏.
烏棲月細依山郭, 人語燈深隔樹村.
比歲阻飢今更甚, 少年行樂老誰存.
夜來稍覺生春意, 酒熟東風近上元.
조선후기 홍세태(1653∼1725)의 시다. 나무꾼이 돌아가는 저녁에 저 멀리서 등불 빛나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 시상이 김홍도 그림과 그 위에 얹혀 있는 시와 흡사해, 연관성이 포착된다.
홍세태의 이 시에 따르면,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배고프다. 흉작이 심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하는 소년들이 이 겨울을 견디고 있다.
시 속의 현재(今), 즉 나무하고 돌아가는 초동들의 저녁, 그들의 배는 얼마나 주렸을까.
그런데 그 와중에 시인은 소년들 마음에 소년다운 즐거움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소년시절 행락’이란 늙어지면 누릴 수 없다고. 시인은 소년의 행락을 바라며 행복을 기원한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읊은 ‘소년행(少年行)’이 조선후기 문사들에게 거듭 읽히면서 그림으로도 많이 그려지던 터였다.
소년들이 호기를 부리며 백마를 달리면서 술집을 찾아들어 젊음을 자랑한다는 ‘소년행’의 내용에 맞춰, 그림에는 비단옷을
차려입은 젊은이가 백마를 몰며 봄길을 달려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한때의 치기를 다시 누리고픈 늙은 시인의 마음이리라. 그런데 그림 속 가난한 나무꾼 소년들이 정작 그리 할 수 있을까. 시인은 기대한다.
천진한 소년들이 탈없이 청춘을 누려 보라고. 홍세태의 이 시에서 소년행의 가치가 새삼 간절하다.
이 시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상원(上元)’이란 역(易)의 시초다.
계절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만사를 계획해 영원의 앞날을
건설하는 때다. 새 봄이 다가오듯 소년들에게 봄날이 다가오기를 바라는 바람이 이 구절에 담겨있다.
우주의 순리 속에서 한겨울 정월이면 이미 동쪽에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고.
시인 홍세태는 중인(中人)이었다. 신분의 한계 속에 살았고, 그의 아이들 열 명은 모두 그의 생전에 죽었다.
생애의 불우함 속에서도 홍세태의 문학적 재질은 남달랐다.
당시 최고의 사대부 시인 김창흡(1653∼1722)에게 크게 인정받았고, 중인신분으로 제술관에 올랐다. 그가 펼친 ‘천기론
(天機論)’은 문학사회학적 의미가 깊다. ‘천기’란 ‘장자(莊子)’에 출전을 둔 말로 ‘하늘의 기밀’을 뜻하는 보편개념이다.
사대부들은 이 말을 그들의 문화예술에 운용했다. 홍세태는 이 개념을 달리 사용했다.
천기를 발휘해 좋은 시를 쓰는 것은 신분에 관계없는 것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중인도 천기를 발하면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소년도 대갓집 아들처럼 소년의 행락을 누릴 수 있다.’ 이는 하늘이 내린 권리이며 인간의 제도를 넘어서는
비밀스러운 기운이다.
소년들이여. 그대들은 청춘이라, 시절이 힘들어도 그대들만 즐길 것이 따로 있다.
그것은 겨울 지나 봄이 오듯 하늘이 베푼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을 보라. 그림 속 소년들의 활기가 새롭게 다가든다.
땔나무 지고 책 읽는 소년
나무꾼 소년의 그림으로 다른 내용의 그림이 있으니 펼쳐보자. ‘땔나무를 지고 책을 읽다’란 뜻의 ‘부신독서(負薪讀書)’다.
이 그림은 19세기 화원화가 유운홍(1797∼1859)의 작품이다.
지게를 진 채 책을 들고 가는 소년의 모습. 소년의 미래가 절로 예감된다.
이 소년은 역사의 실존인물 주매신(?∼기원전 109년)이다. 주매신은 중국 한나라 사람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공부하길 좋아해 마침내 50세의 나이로 벼슬에 들었다.
그가 고향 회계의 태수에 임명되어 돌아가자 고향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특히 주매신을 경멸하고 달아났던 옛 아내가 가장
놀랐다. 주매신은 그녀와 그녀의 새 남편을 먹이고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끝내 부끄러워 목매어 자살했다.
‘한서’ ‘주매신전’에 전하는 내용이다.
이후로 사람들은 주매신을 기려 그렸다. 성공한 뒤의 모습이 아니라 땔나무 지고 책 읽던 소년상으로 그렸다.
금의환향보다 가치로운 것이 부신독서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까닭이다.
조선에서도 주매신의 행적이 유명해 부신독서가 그려졌다. 어떤 이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학문을 이루면, 조선의 문사들이 그를 기록할 때 ‘부신독서’ 혹은 ‘부신독송(負薪讀誦)’했노란 표현으로 칭송했다.
나무꾼 이미지 속 여유와 희망
이 땅의 추운 겨울, 해마다 겨울철 농한기에 삭은 나뭇가지를 구하려 산을 누빈 소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우리 삶이 힘겨울 때 상상해볼 일이다. 땔나무 높이 지고 비탈진 눈길을 내려오던 소년들. 먹을 것 하나 없는 겨울 산을 무명
솜 홑바지저고리 달랑 걸치고 온종일 헤매다 커다란 지게 아래 묻혀 콧물을 훔치던 거친 숨소리. 조선중기 학자 유집
(1585∼1651)이 그들을 생각했다.
“날 춥고 구름 끼어 어둡더니, 눈발이 급히 나려 이리저리 흩날리네.
내 몸에 근심이 깊어가는 때, 땔감 지고 돌아오는 소년의 모습을 나 홀로 가여워 하노라.”
이 시인의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이 그림들을 다시 볼 일이다. 그림으로 그려진 초동들은 현실을 이기고 섰다.
그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대견하다. 그림 속 소년들은 춥고 배고프지만, 그 속에 젊음의 혈기가 느껴진다.
풍류를 지닌 꿈이 활기차고 미래에의 포부가 굳세다.
우리가 이 그림들 앞에서 여유와 희망을 전달받는 이유이다.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터와 배움터의 많은 청년들이 이 그림 속 초동들만 같지 않은 사실이다.
이들 어깨 위의 짐이 땔나무 지게보다 무거워진 탓인지 모르겠다. 옛 그림을 접어두며 이 땅의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따름이다.
<미술사학자>/ 문화
吳友如 / 點石齋畵報
청나라 강소(江蘇) 소주(蘇州) 원화(元和) 사람. 자가 우여고, 이름은 유(猷) 또는 가유(嘉猷)다.
도광(道光) 30년(1850)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 태평군이 강소와 절강(浙江) 일대를 점령할 무렵, 20살이 채
못 된 것은 확실하다.
전하는 말로 원래 소주 도화오(桃花塢)에서 설맞이그림[세화(歲畵)]을 그리는 화공(畵工)이었다고 한다.
광서(光緖) 10년(1884) 상해(上海)로 초청받아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에 그림을 넣어 편집하는 일을 담당했다.
16년(1890) 9월 『비영각화보(飛影閣畵報)』를 창간했다. 19년(1893) 8월 화보를 그만두고 『비영각화(飛影閣畵)』를
창간했다. 그림은 민간의 설맞이그림과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잘 융화시켜, 그 뒤의 연속 그림책과 설맞이그림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설맞이그림과 화보 인쇄 외에도 『잠상사직조도설(蠶桑絲織凋圖說)』(1891)과 『신강승경도(申江勝景圖)
』(1893, 2권)를 펴냈다. / 네이버 지식
點石齋畵報 점석재화보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는 청나라 말기이던 1884년부터 1898년까지 15년간 총 528호가 발행된 중국 최초의 근대 그림신문이다.
그림과 글을 함께 배치한 점석재화보는 평범한 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졌으며 개항지역이던 상하이의 외국인 거주지역인 조계(租界)에서만 발행되던 신문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 중국인들의 삶과 생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다. / 연합
『점석재화보』
『점석재화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메이저가 운영하던 석판인쇄 전문 출판사 점석재석인서국(點石齋石印書局; 1876년 창립)에서 발행한 시사화보다.
메이저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신속한 보도로 정평이 나 있던 『신보』(申報; 1872년4월 창간)의발행인이었으며 점석재석인서국을 비롯한 여러 계열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출판?언론인이었다.
점석재석인서국은 당시 상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출판사에 속했는데, 화보를 발간하기 전에는 주로 사서(四書) 등
고전과 자전(字典) 등을 석판인쇄
의 장점을 발휘해 축소 인쇄해 간행하여 많은 수익을 올린 바 있다.
청불전쟁(1884)으로부터 청일전쟁(1894~1895) 그리고 무술년의 변법운동(1898)에 이르는 격동기의 온갖 크고 작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포괄하고 있는 『점석재화보』는 중국의 근대가 그 기원의 시공에서 빚어낸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보물 창고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화보는 서구의 저널리즘과 ‘필기’(筆記)로 대표되는 온갖 시시콜콜한 일들에 관한 전통적 기록문화, 사실주의적 시각 재현에 관한 근대적 믿음과 중국 전통의 그림체, 이미 중국 문화 곳곳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그것을 내면화한 혹은 그것에 저항하는 중국인의 시선 등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어우러진, 그 자체가 특별한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1884년 5월 8일에 첫 호가 나온 『점석재화보』는 1898년에 정간되기까지 15년 동안 순간(旬刊; 열흘에 한 번 발행)으로 발행되었는데, 매 호 통상 아홉 편의 화보가 실렸다(1889년 발행분까지는 7, 8편의 화보가 실린 호도 더러 있으며, 1890년부터는 규칙적으로 아홉 편씩 실림). 매호는 음력으로 발행 연(年)-월(月)-순(旬)이 적혀 있으며 호수와 정가가 밝혀져 있는 앞표지가 붙어 있고, 뒤표지에는 광고가 실려 있다. 제6호부터는 부록으로 왕도(王韜)의 문언단편소설이 『송은만록』
(淞隱漫錄)이라는 큰 제명 아래 한 편씩 게재되기도 했으며 그의 유럽 기행문이 실리기도 했다.
『점석재화보』는 책을 접었을 때의 크기가 가로 142mm, 세로 240mm이며, 맨 앞뒤에는 한 쪽에 화보기사 한 편이 실렸고 중간에는 두 쪽을 한 면으로 하여 화보기사가 실렸다. 『점석재화보』는 독특한 이원적 번호 매김 방식을 채택했다.
제1호부터 일련번호로 호수를 표시하는 동시에 ‘甲一, 甲二 …… 甲十二’와 같은 방식으로 12호를 단위로 따로 번호 매김을
했다.
이 같은 12호 단위의 번호 매김과 창간 당시 광고, 상해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첫 12호의 합집 등을 근거로 매 12호씩
즉 4개월 분량을 선장(線裝) 제본(책의 오른편 가장자리 쪽에 세로 방향으로 구멍을 뚫고 끈으로 꿰어 엮는 책 장정법)으로
묶어 다시 발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재발행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12호를 단위로 번호 매김 하는 것은 정간 때까지 지속되었다. 상해도서관 근대문헌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甲一~甲十二 합집은 전체 표지와는 별도로 각 호의 표지를 남겨 두고 있다.
그런데 각 호 표지에 발간 연월순과 호수는 빠져 있으며 광고 부분도 누락되어 있고 왕도의 소설도 실리지 않았다. 정간 이후에 발간된 전체 합집본은 12호 단위의 합집본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발간물의 당초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지 못하다.
이 같은 점은 이 정기간행물의 화보기사들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필기 양식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인 것
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점석재화보』에 실린 내용들은 근대적 신문보도에서부터 지괴(志怪)적 성격이 농후한 필기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꽤 넓은데, 당시 ‘신기’(新奇)에 대한 전통적이며 근대적인 관념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근대적
저널리즘이 주조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림과 기사가 함께 있는『점석재화보』.
합집본으로 재발행하는 과정에서 그림 아래에 기사가 추가되었다. 위 그림은 전통과 근대가 뒤섞인 공간을 잘 재현해 주고 있는 19세기 후반 상해의 대표적 거리 모습이다. (『중국 근대의 풍경』156쪽 참고)
그림과 기사가 함께 있는『점석재화보』. 합집본으로 재발행하는 과정에서 그림 아래에 기사가 추가되었다. 위 그림은 전통과 근대가 뒤섞인 공간을 잘 재현해 주고 있는 19세기 후반 상해의 대표적 거리 모습이다.
『점석재화보』는 『신보』 배급망을 통해 상해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배급되었으며, 후에 별도로 중국 각지에 20여
개의 자체 영업점을 갖게 되었다. 시각적 재현이 갖는 파급력을 고려해 볼 때 적지 않은 양이 유통된 이 화보는 근대 중국인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을 구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점석재화보』는 당시 중국
내외에서 출간되던 다른 화보 및 기록 사진들처럼 서양인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중국인 독자층을 대상
으로 중국인의 관점을 보여 준 첫 화보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발행인이 서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
점석재화보』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주체는 중국인 화가와 지식인으로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점석재화보』를 필두로 중국은 석판인쇄에 의해 제작되는 시사화보의 시대로 접어든다.
『점석재화보』는 여러 면에서 이후 약 35년 동안 발행된 여러 화보의 모범이 되었다.
『점석재화보』의 초기 주요 화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오우여(吳友如)가 독립해 발행한 『비영각화보』(飛影閣畵報, 上海,
1890)는 내용에 ‘백수도’(百獸圖), ‘사녀도’(仕女圖) 등 전통 회화에 가까운 그림들도 싣고 있는 점이 다소 다를 뿐 신문보도화의 경우 『점석재화보』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은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뒤이어 나온 화보들 역시 기본적으로 『점석재화보』를 모델로 했다.
이들 화보는 석판인쇄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점석재화보』와 유사했다.
『성속화보』(醒俗畵報, 天津, 1907), 『성세화보』(醒世畵報, 北京, 1909) 등과 같이 계몽적 성격과 풍자적 성격이 보다
강해진 화보의 경우에서도 그 영향을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컷 혹은 네 컷 만평에 가까운 지면을 선보인 『민권화보』(民權畵報, 上海, 1912)와 같은 경우도 신문화의 경우에는 『점석재화보』식 화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후 사진기술의 발달과 인쇄매체에의 적용이 확산됨에 따라 시사보도화는 사진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정기간행물에
실리는 그림은 풍자적 성격이 보다 강화되어 시사만평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같은 비교적 큰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점석재풍’(點石齋風)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료출처 :
『중국 근대의 풍경』 깊이 읽기 / 민정기 (인하대학교 중국어중국학전공 교수,『중국 근대의 풍경』저자)
근대 100년, 외국 매체에 실린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나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는 중국 최초의 그림신문이다.
청나라 말기 1884년부터 1898년까지 15년간 528호가 나왔다. 중국 근대 풍경과 사회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 이
가운데에는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도 적지 않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그림도 그 가운데 하나다. 화가는 조선의 전통 사대부 복장을
한 홍종우는 크게, 근대 일본식 복장을 한 김옥균은 작게 그려 대비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홍석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는
김옥균의 ‘친일 매국노’와 ‘소인배’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중국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점석재화보’ 속의
조선 관련 그림들은 당시 중국인의 반일 감정을 드러냈는데, 독자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홍 교수는 <근현대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선>(이화여대출판부)에 실린 ‘점석재화보의 조선 재현 양상’이란 제목의 글에서
중국의 조선관을 분석했다. 홍 교수는 그 양상을 속방(屬邦) 이미지의 강화, 낙후하고 우매한 조선사회 이미지 재현, 조선의 중국 친연성 이미지 강화, 항일 적개심 표출 등 4가지로 정리했다.
‘점석재화보’는 조선의 정치·사회 사건을 다루면서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는 종주국의 태도와 함께 중국인의 반일 감정을 녹여냈다. 그림은 홍종우가 개화파 김옥균을 살해하는 모습을 묘사한 ‘나라를 위해 간신배를 처단하다’.
<근현대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선>에는 다큐멘터리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소개된 한국 관련 기사에 대한 분석도 실려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1890년 이후 100여년간 한국 관련 첫 기사를 내보냈는데 첫번째가 1890년 조선 탐사 기사였다. 김영훈 이화여대 교수(한국학)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본 코리아’란 글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창간 동기가 세계의 자연지리에 대한 탐사를 목적으로 한 전문 지리서 성격으로 출발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잡지는 미국의 경제적 관심도 반영하고 있다. 1899년 5월17일 개통해 한양 도심을 달리는 미국 전차를 묘사한 기사는 “한국에게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가장 사심 없고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고 썼다. 을사보호조약에 대해서는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때로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반도에 대한 인식은 매우 타자화된 것이었고 한국은 전형적으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취급되었다”고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한국전쟁과 이후 경제성장을 다루면서 시선의 변화를 보여준다. 88올림픽 당시 한국발 보도는 경제성장 이면의 재벌 독점과 열악한 노동 현장 상황을 파헤쳤다. 김 교수는 “(시선 변화는) 미국 사회의 내부적 변화와 긴밀한 연관이 되어 있다”고 했다. “베트남 전쟁과 흑백 간의 내부적 사회 갈등을 거치면서 변화한 언론의 현실 참여와 새로운 인식 태도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취재에도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후 정치적인 문제와 사회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다”고 설명했다.
<근현대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선>에는 이 밖에 청일전쟁 시기 대표적 일간지 ‘선바오(申報)’, 중국 극작가 양한셩(陽翰笙)의 역사극 <무궁화의 노래>,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사자료(민간신앙 부분)’에 나타난 중국과 일본의 인식과 시선도 담겨있다.
/ 경향
Kite-flying Competition in the Zhang Garden. Resource: Wu Youru hua bao吳友如?寶, hai guo cong tan海國叢談, volume 2, pp. 14.
圖2:弩弓射虎。圖片來源:?.吳友如,《點石齋?報》,第13集下,上海文藝出版社,頁2536-2567。
19世紀末, 南方某官宦人家女眷及幼子進餐的情景。(吳友如繪)
중국에서 點石齋畵報를 검색하면 전혀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가 있나보다.
吳友如에 몇건이 올라오나 자료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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