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곡

엄정행, , 조수미 - 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시, 장일남 작곡)

 

 

 


엄정행

 


박인수

 

 


 

 

 

 

'


기다리는 마음' 가곡의 작사와 작곡의 배경 이야기

 

작곡가 장일남 선생(1930년)은 황해도 해주 출생이었다. 그는 1950년 말 단신 월남하여 처음 1년간을 연평도에서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맑은 날이면 연평도에서 빤히 보이는 고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가족들을 찾아 귀향하리라 고대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 섬에 사는 한 문학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통하는게 있어서 두 사람은 급격히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청년이 옛 우리말로 된 시가가 적혀있는 헌 책을 들고 와서, 장일남선생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것인데, 섬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것이리라 여기지만, 제주사람들은 옛날부터 '뭍'으로 가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갖는 것이었다. 제주도 방언에다, 옛 글이라 정확한 해석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원전(原典)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제주도의 한 청년이 꿈에 그리던 '뭍'을 찾아 육지로 오게 되었다. 그 곳은 지금의 '목포'이었다. 청년은 언젠가는 섬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유달산 뒤, 월출봉에 올라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두고 온 여인을 그리게 되었다. 한편 고향에 있는 청년의 여인도 간곳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일출봉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것이다.’ 작곡가 장일남 선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시의 내용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장일남 선생의 심정과 너무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는 10분 만에 그 자리에서 그 시에다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 때가 1951년이다. 당시, 임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연평도 종합중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향했다. 그는 평소에 문화방송과 줄을 대고 있었는데, 당시 문화방송 스크립터였던 김민부 시인이 장일남 선생에게 좋은 곡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요청했고, 장일남 선생은 그때에 바로 그 "기다리는 마음"을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김민부 시인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시인이었다. 원전(原典)의 시를 그 자리에서 표준말로 번역하게 되고, 그 것은 지금의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던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기다림"으로 대변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곡은 첫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비목"과 더불어 장일남 선생을 세상에 가장 크게 알린 곡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민부 신인은(1941년) 부산출신으로 16세 때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어떤 글을 쓰든지 습작 없이 바로 쓸 만큼 문학에 뛰어나, 장일남 선생은 그를 천재시인(天才詩人)이라고 말했다. 김민부 시인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장일남 선생이 평생에 잊지 못할 사람 중의 하나로 떠올리게 되었다. 장일남 선생의 오페라 "원효대사"도 김민부가 가사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화상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장일남 선생의 회고에서 그는 세상을 비관하다 자살을 했다고 한다. 

장일남 선생이 부산엘 가면 김민부 시인의 친구들이 김민부 시인을 본 것 같다며 반겨주었다고 한다. 김민부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천재의 한사람으로 꼽았던 시인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차지했으며, 첫 시집'항아리'를 출간해 당대 문단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가 첫 시집 후기에 밝히고 있는 자신의 시론(詩論)은 16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월반을 하고도 공동출제 중학입시에서 부산 최고의 점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때 문화방송에서 근무하다가 시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극심한 갈등으로 31세의 이른 나이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생전에 남긴 거의 모든 시가 발굴돼,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민예당간).그가 쓴 오페라 「원효」의 대본도 수록했다. 국민학교 동창생으로 그의 요절을 늘 안타까워하던 조용우 전 국민일보 회장,문학평론가 김천혜 교수(부산대),부산고 동문회 등 많은 사람이 오랜 시일에 걸쳐 수소문해 찾아낸 시편 들이라고 한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나무와 새」는 세상에 단 두 권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는 짧고 이미지가 강렬하다. 생활 속에서 울어나오는 피곤한 정신의 고뇌를 때로는 퇴폐적인 자학의 언어로, 때로는 탐미적인 세계관으로 드러낸다. 바다를 '여자대학교의 기숙사 같은 거'라거나, '찻잔 속에 남은 죽음을 핥고 있다'와 같이 독특한 비유들이 눈길을 끈다.

서울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장일남 선생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돌아가신 이은상 선생은, 김민부 시인은 뛰어난 시재에 감탄해 자신에게 작사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김민부 시인에게 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한다. 이틀 만에 15개의 작시를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그의 작시는 적재적소에 맞는 천재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그의 친구였던 이근배 시인은 “민부는 너무 일찍 신(神)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는 느낌을 표현 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명문이라는 인상을 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