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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Musical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Rouslan and Ludmila」서곡

 

 

 

 

  글린카의 두 번째 가극이며, 시인 푸시킨의 같은 이름의 서사시에 바탕을 두고 작곡했다.

1842년 11월 27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으나, 그 상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야기는 러시아의 옛 민화에 의했으며, 키에프 대공의 딸 루드밀라가 악마 체르노몰에게 유괴된 것을

 3명의 기사가 도와 준다는 줄거리로서, 기사들 중의 한 사람인 루슬란이 마지막에 류드밀라를 구출하여

 해피엔드가 된다. 오늘날 가극은 상연되지 않고, 서곡만 연주회용 프로그램을 장식하고 있다.

 

 

  글린카(1804-1857) : 러시아 근대 음악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글린카(러시아)는

스몰렌스크(Smolensk)의 귀족이자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 무렵부터 음악 교육을 받고 작곡을

 시도하게 되었다.

1824년(20세) 페테르스부르크의 철도성에 근무하나 퇴직하여 이후는 음악에 몰두한다.

1830년 이래 건강을 위해 국외 여행을 떠나, 유럽 각지에서 음악을 배우면서 서구적 작곡 기법을 통해

러시아 국민음악에의 자각을 높였다.

1833년(29세) 아버지의 급서로 귀국, 얼마 후 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겨 오페라

「이반 수사닌 Ivan Sussanin」에 착수해 1836년 초연되어 당국의 간섭을 받았으나,

이로써 러시아 최초의 국민적 작곡가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후 잠시 동안은 민요 연구에 바탕을 둔 가곡을 쓰는 한편, 걸작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 Rouslan and Ludmila」도 계속 써내려 갔다. 그러나 1842년(38세)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초연은 청중의 몰이해 때문에 실패로 끝나고 만다.

 

 

 

 

 

 

 

1844년 파리에 간 글린카(러시아)는 베를리오즈(프랑스)에게 격찬을 받고 러시아 국민음악을 처음으로

서유럽에 소개하고 대성공을 거둔 바 있다.

 

1845년부터는 에스파냐 민요 연구에 착수하여 그 성과는 스페인 서곡 제1번 「호타 아라고네사

jota aragonesa」 (1846), 제2번 「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 Souvenir d'une nuit d'été à Madrid」

(1848) 등 2개의 관현악곡에 살려졌으며, 또 유명한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1848)도

 러시아 민요의 연구를 살린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2월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당국은 극단적인 문화 탄압 정책을 펴고 있어서,

국민적인 글린카(러시아)의 작품도 고국에서는 거의 상연되지 못했다.

그 위에 건강 상태도 나빠져 창작은 뜻대로 진척되지 않고 1855년(51세) 『회상록』을 써 낸 뒤로는

고대 교회 선법의 연구에 열중했는데, 1857년에 베를린에 갔다가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러시아 음악사상 글린카(러시아)의 역할은 종종 문학사상의 푸시킨과 비교된다. 그가 수립한 세계 최초의

 국민 음악의 전통은 '5인조'나 차이코프스키(러시아)에게 계승되어,

러시아 음악을 세계적인 지위로 올림과 동시에 체코와 헝가리 그 밖의 나라들의 국민 음악에의 실마리도 되었다.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최초의 러시아 음악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국민 가극을 완성하여 음악 세계에 커다란 공헌을 한 글린카도,

그 만년은 쓸쓸하게 1857년 2월 15일 베를린에서 객사했다.

그는 1804년 6월 1일, 러시아의 스몰렌스크에서 출생했다.

 지주인 귀족집안에 태어나, 음악적인 환경의 혜택을 입고 자랐으며, 1817년에는 페테르부르크에 나가

존 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3년부터 작곡도 시작했다. 183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가극을 연구,

 러시아인은 러시아인의 가극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귀국 후 고골리 · 푸시킨 등과 함께

국민음악 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1836년에 초연한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나 1842년의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당시의 외극 가극

 특히 이탈리아 가극에 심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해서, 실의 속에 또다시 외유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민족 음악을 수집하고 있는 동안 글린카의 악상도

 차츰 새로워졌고, 귀국해서 바르샤바에 정착하고부터는 「카마린스키야」와 「마드리드 여름 밤의 추억」

 등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글린카의 진가가 겨우 인정받게 된 것은 그가 타계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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