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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읽는 명상록

실락원의 작가 John Milton

실락원의 작가, John Milton

 

 

 

실락원의 작가 John Milton

1608. 12. 9 런던~1674. 11. 8 잉글랜드 버킹엄셔 챌펀트세인트자일스.

영국의 시인.


밀턴, W. Faithome이 제작한 동판화(1670)


장엄문체와 사탄의 묘사로 유명한 대서사시 〈실락원 Paradise Lost〉(1667)의 저자로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이다.

산문 역시 청교도혁명에 대한 귀중한 해석으로 근대 정치와 종교의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옥스퍼드셔의 요먼(자영농)이었던 할아버지는 강건한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아들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자 절연했다.

 

밀턴의 아버지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공증인과 사채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밀턴 자신이 늘 찬사를 보냈듯이 아버지는 자녀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명성을 쌓은

 작곡가였으므로 그로부터 음악적 재능과 열의를 물려받았다.

 

어머니(1637 죽음)에 대해서 밀턴은 자비로운 분이었다고 말했다.

형제로는 누나 앤과 나중에 법률가가 된 남동생 크리스토퍼가 있다.

교육과 초기작품

밀턴은 런던의 세인트폴 학원에 입학하여 정규과정으로 라틴어·히브리어·그리스어를 배웠으며, 가정교사로부터

근대 언어를 교육받았다.

그는 열성적인 학생이었는데, 나중에 실명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도 12세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책을 보던

 습관 때문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2편의 라틴어 습작과 최초의 운문은 15세에 〈시편〉 114와 136을 운율을 주어 풀어 쓴 작품이다.

학창시절 이후까지 밀턴의 가장 친한 친구는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 의사의 아들인 카를로 디오다티로 그 역시

 세인트폴 학원을 졸업했으나 옥스퍼드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밖에 오래 우정이 지속된 친구로는 그 학교 교장의 아들 알렉산더 질을 들 수 있다.

1625년 4월 9일 밀턴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하여 1629년 3월 문학사학위,

 1632년 7월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많은 라틴어 운문과 7편의 라틴어 프롤루션(연설가의 학문과 수사적·논쟁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대중연설)을 통해

 대학시절의 경험을 추측해볼 수 있다.

 1626년 3월 밀턴은 담임교수와 충돌하여 정학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런던 '유배'를 오비디우스의 경우와 비교했으며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라고 표현한 독서를 즐기며

 한가로이 그 시간을 보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새 담임교수를 만났고 정상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에서 7년을 보내는 동안 밀턴은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교과과정인 스콜라 철학의 논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졸업 이후뿐만 아니라 학창시절에도

그것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마지막 프롤루션(1631~32?)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이며 플라톤주의자인 동시에 베이컨주의자인 젊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열렬한 신조와 꿈을 설파했다.

학창시절에 밀턴은 라틴어로 운문을 쓰는 기술과 작품에서 내면적 자아를 드러내는 것을 배웠다.

 

 당시는 조지 뷰캐넌이나 나중에 밀턴이 파리에서 만난 후고 그로티우스 같은 신(新)라틴 시인들이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고, 학생들 역시 대학세계의 표준어였던 라틴어를 사용하여 학문적·국가적 사건을 찬양했다.

 밀턴이 쓴 라틴 시와 나중에 쓴 6편의 이탈리아 시(1630?)에는 젊은 시인의 심미적인 본성이 나타나 있다.

 

그의 첫 영어 소네트 〈오 나이팅게일 O Nightingale〉은 이 작품들과 연관성이 있다.

1628년초 밀턴은 그의 첫 영시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아기의 죽음에 대해 on the Death of a fair Infant〉를

썼는데, 이 작품은 어린 조카딸 앤 필립스에 대한 비가로 엘리자베스 시대풍으로 씌어졌다.

 

2행연구로 쓴 영어 프롤루션 〈방학에 At a Vacation Exercise〉(1628. 7)에서 그는 모국어와 자연스러운 문체,

자연과 인간에 관한 고상한 주제에 헌신하리라고 선언했다.

 

1629~30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디오다티에게 보낸 라틴 시 〈비가 6 Elegy VI〉에서 밀턴은 술과 사랑으로

 시작된 가벼운 운문을 호의적으로 말하다가 곧 영웅적인 시인의 금욕적 순수성을 찬양한다.

 

이 비가는 그즈음 완성한 자신의 시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가 영어로 쓴 최초의 걸작시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 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이다. 이 시는 21번째 생일 직후에 씌어진 것으로 종교적 주제와 기교적 원숙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의 성숙과 장래의 방향에 대한 일종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1631년 긴 휴가 동안 밀턴은 쌍둥이 시 〈쾌활한 사람 L'Allegro〉·〈사색하는 사람 Il Penseroso〉을 쓴 것 같다.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보다는 주제가 덜 야심적이지만 두 작품 모두 독특한 우아함 속에 밀턴 특유의 복잡성을

담고 있다.

 

그 시들은 벤 존슨의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작품들의 도회적 질서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존슨을 능가하기도 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노래하라 5월 아침에 Song:On May Morning〉(1629~30?)·

〈윈체스터 후작부인의 비문 Epitaph on the Marchioness of Winchester〉(1631) 등의 소품에서도

이미 나타나 있다.

 

밀턴은 1630년에 〈셰익스피어론 on Shakespear〉이라는 시를 썼는데 이것은 1632년 셰익스피어 2차 2절판 전집에 인쇄되었다.

가족이나 교사들은 밀턴의 학구적이고 문학적인 재능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성직을 권했다.

후기 산문에서 밀턴은 감독제의 지배를 받는 교회에서 '노예 생활하기'를 거부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성직을 포기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학생활이 끝나감에 따라 진로문제가 부각되었으며, 몇몇 학자들이 〈코머스 Comus〉(1634)와 연관을 두기도 하는 시 〈아버지께 Ad Patrem〉는 1631~32년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씌어졌다.

 

이 작품에서 밀턴은 아들로서의 감사와 시에 대한 헌신을 밝히는 동시에 아들의 문학연구를 권장했고 문학애호가를

자처하는 아버지가 이제 비속한 돈벌이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호턴 시절

1632년 7월 문학석사학위를 받자마자 밀턴은 집으로 돌아가 1635년까지는 해머스미스에, 그 다음에는 윈저 근처

 호턴에 머물면서 대학교육이 제공하지 못한 교양교육에 몰두했다.

 이 시기야말로 그의 자유사상의 기초와 방향이 설정되던 때였다.

 

그는 많은 양의 역사·문학·철학을 공부하여 지도자인 동시에 교사인 시민 시인에게 필요한 '점잖고 관대한 모든

 예술과 사전에 대한 통찰'을 얻으려고 했다.

 때때로 그는 공부를 중단하고 런던까지 나가 수학이나 음악에 관한 새 책을 구하기도 했다.

 

 젊은 밀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24번째 생일에 쓴 소네트 〈시간은 얼마나 빠른가 How soon hath Time〉가 있다. 그때까지 그는 작은 대학 세계에서만 알려진 인물이었다.

 

소네트를 쓸 무렵 동료들은 그에 앞서 나아가고 있는데 그는 6개월 동안 칩거하면서 근면하게 지내긴 했지만 겉으로는 아무 성과도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신의 의지에 따라 평생을 보내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불안도

떨쳐버리게 했다.

 

 이러한 자기봉헌을 달성하리라는 최초의 서약은 〈시간에 on Time〉·〈숭고한 음악 At a Solemn Musick〉

(1632~33?)이라는 간단한 종교시로 표현되었다.

 

 두 작품은 항상 밀턴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지복직관(至福直觀)을 그리고 있다.

 서로 다른 순서이긴 하지만 덧없는 인생의 험난함, 죄로 나타나는 어지러운 부조화 등은 천국과 선이 지니고 있는

 영원과 조화에 대비되어 있다.


비슷한 대조는 〈코머스〉로 알려진 가면극의 첫 대사에도 나타나며 극 전체를 통해 이 대조가 발전하고 있다.

1632년경 봄에 밀턴은 음악가 헨리 로스의 권유로 존슨식의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 Arcades〉를 썼다.

 

이 작품을 보고 로스는 또다른 가면극을 요청한 듯하다.

〈코머스〉는 1634년 9월 29일 스롭셔의 루들로 성에서 브리지워터 백작 존 이거턴이 웨일스의 상원의원장이 된 것을 축하하여 상연되었다.

 

〈코머스〉는 밀턴이 선과 악의 갈등이라는 주제를 최초로 극화시킨 작품이었다.

〈코머스〉가 어떤 의미에서 순수의 노래라면 〈리시다스 Lycidas〉(1637. 11 탈고)는 경험의 노래로서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게 신의 길을 옹호하고자 하는 밀턴의 첫 작업이었다.

 

옛 대학 친구인 에드워드 킹이 1637년 8월 아일랜드 해에서 난파로 익사하자 밀턴은 비가집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J. M. 이라고 서명된 〈리시다스〉는 1638년 그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되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목가적 관습은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극적 장치나 가면으로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밀턴은 항상 이러한 전통을 작품 속에서 재창조했다.

 

그가 깊은 개인적 슬픔을 느낄 만한 이유는 없었으나 장래가 촉망되는 덕망있는 청년이 신의 교회에서 봉사하려는

 찰나에 익사했다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의 정당성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었다.

 

〈리시다스〉의 복합성과 깊이,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인 인용, 어조와 속도의 풍부한 다양성,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스려 높은 평정에 이르게 되는 예술적 통제력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으며, 이 시는 가장 위대한 단시(短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여행

어머니가 죽고 1년 후 1638년 5월 밀턴은 하인 1명을 데리고 이탈리아 방문에 나섰다.

 그는 주로 피렌체·로마·나폴리에 머물렀다.

밀턴의 초기시 중 영어 이외의 언어로 씌어진 작품들이 지식층과 예술 후원자 사이에서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

 

 당시 고국에서 별로 문학적 교제가 없었고 시인으로서 명성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이 경험은 나중에 〈2차 영국

국민 변호론 The Second Defence of the People of England〉(1654)에 길게 묘사되어 있듯이

그에게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나폴리에서 그를 맞아주었던 빌라 후작 잠바티스타 만소는 한때 토르카토 타소와

잠바티스타 마리노의 후원자였는데 밀턴은 그의 대접에 대한 사례로 〈만서스 Mansus〉(1638~39)를 썼다.

 

이는 그의 최고 라틴시 중 하나로 영국 문화에 대한 우아한 변호서이며 시인으로서의 위치와 희망에 대한 우아한 변호서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로마 시인 살칠리에게 보내는 서한집을 썼고 유명한 레오노라 바로니의 노래를 찬양하는 몇 편의

풍자시도 썼다.

 

 가톨릭교도들과 행복하게 어울리고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주재한 대향연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이 강건한 프로테스탄트는 종교문제에 대해 관망만 하지는 않았다.

 

 후에 〈아레오파지티카 Areopagitica〉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천문학자 갈릴레오를 방문했는데 그때 갈릴레오는

그의 우주관이 로마 교회의 교리와 상충된다는 이유로 반감금상태에 있었다

 밀턴은 얼마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렀으나 영국에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시칠리아와 그리스 방문을

 포기했다.

 

 1638년 8월 밀턴의 친구 디오다티가 죽었다. 밀턴은 이탈리아에서 친구의 죽음을 알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제네바에 신학교수로 있던 친구의 삼촌 조반니 디오다티를 만났다.

중기

밀턴은 1639년 7월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에 집을 마련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첫 학생들은 여동생 앤의 아들인

 에드워드와 존 필립스였다.

 

디오다티를 기리는 목가풍의 비가 〈다이몬의 비문 Epitaphium Damonis〉은 1640년 후반에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은 밀턴의 가장 뛰어난 라틴 시로 평가된다.

밀턴은 아서 왕 서사시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만서스〉·〈다이몬의 비문〉에서 그것을 간단히 밝힌 바 있다.

르네상스의 다른 야심적인 시인들처럼 그도 위대한 영웅시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청교도의 주장에 대해서도 몹시 열광적이었다.

 

〈리시다스〉에서 돈벌이 목사를 비난하는 부분은 밀턴이 사실상 청교도적 입장을 선언하는 것으로 풀이되며,

1641~60년에 밀턴은 거의 전적으로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위한 논설을 쓰는 데 열중했다. 그는 4번째 논평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 The Reason of Church-government Urg's against Prelaty〉(1642)에서

시인으로서 불멸성에 대한 갈망을 접어두고 소중한 연구를 떠나 '소음과 격렬한 논쟁의 거친 바다로 떠난 것'은

 자신에게는 상당한 희생이지만 신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일이 진행됨에 따라 자유를 다양하게 옹호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그의 서사적이고 애국적 열정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초기 5편의 논평(1641~42)은 각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스멕팀누스(smectymnuus)라 칭한 한 무리의 장로파 목사들과 함께 성공회의 감독제를 공격했다.

 

이러한 공격은 주로 성공회의 정식 계급, 〈공동 기도서 The Book of Common Prayer〉, 구교와 유사한 종교의식 등에 쏟아졌다.

그들은 사도시대 교회의 민주적 단순성과 순수성으로 복귀하기를 호소했다.

 

밀턴의 첫 소논문은 〈영국 교회계율의 개혁에 대하여 Of Reformation Touching Church Discipline in England〉(1641)였다.

 

 이것은 성공회 예배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새롭고 광범위한 종교개혁에 대한 전망으로 끝나고 있다.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에서 밀턴은 그가 생각하는 시의 종교적 개념과 자신이 공적 의무라고 생각한 것 때문에

 서사시를 연기했다고 밝히고 있다.


1643년 밀턴은 〈이혼론 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발표함으로써 상당한 악평을 얻었으나

 같은 주제로 1644, 1645년에 3편의 소논문을 더 썼다. 그의 논지는 난관에 부딪친 자신의 결혼생활이었다.

 

1642년 청교도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밀턴은 메리 파우얼과 결혼했는데 장인은 밀턴의 아버지에게 돈을 빌린

옥스퍼드셔의 왕당파 지주였다.

 

33세의 학자시인과 그의 절반 나이에 무사태평한 가문 출신인 무학의 소녀와의 결혼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결혼 직후 친정을 방문한 이 어린 아내는 분명히 친정 식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이혼론〉의 고통스런 주장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흠없는 과거와 고상한 희망뿐만 아니라 열렬한 기도로써 결혼에

 이르렀던 사람에게 이것은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러한 비극적 실수로부터 벗어날 어떠한 탈출구도 없었다. 논문에서 밀턴은 당시 유일한 이혼사유였던

 간통도 부부간의 부조화보다는 덜 유효하다는 것과 애정없는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존엄에 대한 범죄라고

주장했다.

 

 종교적·철학적 전통이나 소녀들에게 주어진 빈약한 교육을 비롯한 여러 관례 때문에 여성들은 계속 남성보다 열등하게 되었다. 밀턴은 그 관점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결혼이란 서로 애정과 우정으로 맺어진 능동적인 관계라고 보는

청교도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왕당파 시인들 작품 속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높이 여성을 평가하는

이상적 태도였다.

 

 

그러나 그는 왕당파와 장로파 양쪽으로부터 방탕한 자유사상가로 공격당했다. 1645년 친구들의 주선으로 밀턴은

아내와 재결합했고 1646년 파우얼가가 전쟁으로 패망하자 근 1년 동안 시끄러운 10여 명의 가족을 집에 머물게 했다.

 

세 딸 앤, 메리, 데보라가 1646, 1648, 1652년에 태어났고, 외아들은 어린나이에 죽었다. 밀턴 부인은 데보라를

출산한 직후 죽었다.


현대 독자에게 가장 유명한 밀턴의 논평은 1644년에 출판된 〈교육론 Of Education〉으로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오랜 전통을 따르는 최후의 작품이다.

 

그는 이 논평을 통해 교양과 책임감을 가진 계몽된 시민과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교육의 기본은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적절히 따르면서 옛 고전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과학에 대한 강조 역시 잊지 않았다.

 

 출판의 자유를 다룬 〈아레오파지티카〉에서 그는 학자이며 시인이고 독서가로서 진리란 무엇보다도 자유탐구를 통해 스스로 드러난다는 믿음을 다시금 주장했다.

 

 이 글은 그당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같다.

찰스 1세가 처형되고 2주 후 1949년 2월 13일 밀턴의 첫 정치논설 〈왕과 위정자의 자격조건 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이 출간되었다.

 

그 책에서 밀턴은 권력이란 항상 국민에게 있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군주에게 양도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용되고

있을 때에는 권력을 되찾고 폭군을 양위시키거나 심지어 처형할 수도 있다고 설파했다.

 

 1개월 후 그는 크롬웰 정부의 외국어 담당 비서관이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때까지는 현실정치와 동떨어져 있던 밀턴이 이후 정부활동에 열렬히 개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정책결정 단계까지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외국어 서신에 필요한 라틴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혁명에 동조하는 입장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정치평론가로서 국왕 시해의 비난에 맞서 옹호론을 계속 전개해야만 했다. 이런 맥락에 있는 밀턴의 첫 작품은 〈우상파괴자 Eikonoklastes〉(1649. 10)이다. 이는 국왕 담임목사인

 존 고든이 국왕의 문서를 편집하여 만든 책 〈왕의 성상 Eikon Basilike〉에 대한 수많은 응답 중의 하나이다.

 

〈왕의 성상〉은 찰스 1세를 성인이며 순교자로 치장함으로써 처음으로 대중에게 국왕 처형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던 것으로 영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선전물 중의 하나였으며 밀턴조차도 그 책의 위력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1651년 내내 밀턴은 마샤몬트 니드햄이 편찬하는 공화정 신문 〈정치 보도 Mercurius Politicus〉의 검열관 겸 책임 편집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그의 라틴어 논설 〈영국 국민 변호론 Defence of the People of England〉이 출간되었다.

망명중에 있던 찰스 2세는 유명한 고전학자 클로디우스 살마시우스를 채용하여 〈찰스 1세 변호서

 Defensio Regia pro Carolo I〉(1649)로 국왕 시해를 비난했다.

 

밀턴은 적절한 논리를 사용하기보다는 개인적인 모욕을 주는 것으로 살마시우스를 비난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개혁운동가들처럼 그 역시 반대파는 어떤 수단을 쓰든지 격파되어야 할 적으로 여겼다. 유명한 숙적을 격파한

것으로 밀턴의 이름은 높아졌으나 그의 시력은 점차 상실되어갔다.

 

9년에 걸쳐 시력이 약화되다가 1651~52년 겨울에 밀턴은 완전히 실명했다.

그때 밀턴은 겨우 43세였고 계획했던 걸작시는 아직 쓰지 못한 채였다. 1659년까지 계속 공식서한의 번역자로

 근무했으나 실명으로 인해 업무량은 다소 줄어들었다.


또한 널리 유럽인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라틴어로 쓴 〈2차 영국 국민 변호론〉은 내용뿐만 아니라 작가의 능력

 발휘에서도 뛰어난 의미있는 저술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비록 크롬웰에게 1인독재를 경고할 만큼 대담했지만 공화정 지도자들의 업적을 칭송하기도 했다.

1659년 교회와 정부에 대한 2편의 글이 또 출판되었다.

 

〈교회 주장에서의 시민 권력론 A Treatise of Civil Power in Ecclesiastical Causes〉에서 밀턴은 종교자유를

 옹호했다.

 

여기에서 가톨릭교는 제외되는데 그 자체가 국가 존립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돈벌이 목사를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관하여 Considerations Touching The likelist means to remove Hirelings out of the church〉는 사도다운 소박한 삶을 사는 성직자의 이상을 다시 주장한 글이다.

 

그의 마지막 정치 논평 〈자유공화정을 수립하는 방법 The Readie and Easie Way to Establish a Free Commonwealth〉은 1660년 3월에 출판, 4월에 증보되었다.

그것은 찰스 2세를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진 상태에서 무모할 뿐만 아니라 매우 용감한 행위였는데 결국

국왕은 5월 29일 의기양양하게 입국했다.

 

밀턴의 글은 '훌륭한 옛 주장'의 마지막 대변자가 외치는 회의와 절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20년의 세월과자신의 시력을 바쳤던 공화정의 영광은 '이제 그들에게 이집트로 다시 데려갈 지도자를

선택해주는'노예국가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왕정복고는 밀턴에게 가장 심각한 환멸을 안겨주었다.

시보다 4배나 더 분량이 많은 산문은 이제 학자들만 읽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시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위대한 산문시대에 밀턴의 산문은 절제력을 잃기도 했으나 매우 개성적인 위엄을 보여주고 있으며, 적어도

〈아레오파지티카〉는 고전의 전통을 따르는 명문이다.

 

 더욱이 정치와 종교에서 좌파적 경향을 보이는 성장과정과 그의 꿈과 환멸이 기록된 산문 〈실락원〉·

〈복락원 Paradise Regained〉·〈투사 삼손 Samson Agonistes〉 등은 필수적인 입문서이며 청년기의 찬란한

이상과 노년의 강인함 사이에 연결 부분을 제공해준다.

 

특히 〈그리스도교 교리론 A Treatise on Christian Doctrine〉은 그의 사상과 저술 활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1658~60년에 이 책을 마친 듯하며 1825년 찰스 섬너가 처음으로 번역했다.

 

그 책의 중요성은 〈실락원〉의 신학적 윤곽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정확히 살펴보면 밀턴의 근본 신앙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성서의 권위를 따른 것으로

 정통에서 벗어나 있다.

 

신은 무가 아니라 신 자신의 실체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다든지, 성부·성자·성신은 서로 동등한 삼위일체가 아니라

다른 지위를 가진 것이라는 주장, 부활하여 다시 살 때까지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죽는다는 주장 등이 밀턴의 비정통적 신앙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밀턴의 개념은 너무 복잡해서 정통 신앙을 가진 〈실락원〉의 독자들을 다소 긴장시키기도 했다.

이 시에서 더 극단적인 것은 밀턴이 예정설을 거부한 점이다.

 

그 시대의 대부분 성공회교도와 마찬가지로 칼뱅교도로 성장한 그는 적어도 1644년까지는 스스로 칼뱅교도라고

 여겼으나 그의 최종적인 신앙은 아르미니우스의 교리, 즉 예정된 소수가 아니라 모든 신도들이 진정한 신의 선민이

 된다는 것이었다. 밀턴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합리적 자유와 책임감있는 선택의 힘을 주장했다.


소네트와 기타 시

밀턴의 초기 시는 1646년초에 출판되었다.

20년 동안 공적인 일에 몰두했으므로 거의 시를 쓰지 못했으나 17편의 행사용 소네트를 썼고 수많은 〈시편〉을

 운문으로 다시 썼으며 〈실락원〉의 구성을 준비했다.

 

 어떤 소네트는 대단히 개인적인데 실명에 관한 2편(1651?~55)과, 1656년에 결혼하고 1658년 출산 직후

사망한 2번째 부인 캐더린 우드코크에 대한 1편의 소네트가 이에 해당한다. 주요 소네트들은 밀턴의 생애에 관한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시적 완성을 보이고 있는데, 시 〈리시다스〉와 소네트 작품에는 이후 서사시에

충실히 사용되는 장엄문체의 초기 모습이 엿보인다.

 

그의 소네트는 소네트 자체의 구조나 리듬에 대해서보다는 밀턴의 무운시에 접근해가는 방대한 단일작품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말기

왕정복고 정부는 공화정 지도자 소(小)헨리 베인을 처형했고 크롬웰, 헨리 이어턴, 존 브래드쇼의 시체를 다시 파내

 타이번 사형장에서 교수시켰다. 밀턴 역시 국왕시해의 유명한 옹호자로서 실질적인 위험에 처했다.

 

1660년 여름 체포령이 내렸으며 밀턴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계속 은둔생활을 했다.

 8월에 대부분 공화정 지지자들을 용서한다는 대사면령이 통과되었다.

밀턴은 그 기간 내에는 안전했으나 그후 감금되었다가 12월 15일 석방되었다.

 

여러 이야기에 따르면, 1657년 동료 비서관이었다가 왕정복고 후 국회의원이 된 시인 앤드루 마블의 중재로 그는

생명을 구했다고 하고, 혹은 밀턴이 먼저 생명을 구해준 왕당파 극작가 윌리엄 데버넌트 경의 중재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맹인 작가는 이제 더이상 해롭지 않으며 그에 대한 비방으로도 충분하다고 결정되었던 것 같다.


밀턴은 영국 서사시를 쓸 생각을 포기했다.

그대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다음으로 중대한 문제인 인간의 타락을 선택했다. 실제로 〈실락원〉이 언제 쓰여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1655~58년이라고 추측될 뿐이다.

 

분명히 제7권의 서문에서 시인이 사악한 시기에 빠져 있다는 표현은 왕정복고 이후에 쓰여졌고, 시 전체는 바로 지금

 순서대로 상당 부분이 쓰여졌던 것 같다.

 시는 1665년 완성되었다. 1667년의 초판은 10권이었고 1668, 1669년에 재발행되었는데 밀턴은 이 책에 무운시를 사용한 것에 대한 서문과 '대의'(The Argument)를 첨가했다.

 

 재판(1674)에서 몇 가지 사소한 수정과 더불어 7권과 10권을 각각 2권으로 분리시켰고 전에는 한꺼번에 묶었던

대의를 각 권마다 첫머리에 따로 두었다.

〈실락원〉에 나타난 사건과 주요동기는 밀턴이 상당히 독창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미 예전부터 여러 곳에서

작품화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의 이야기는 독특한 진리, 신성함,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어서 독자들의 마음속에 아득한

믿음과 연상을 전달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장점은 지금 현대 독자들에게는 더이상 쓸모가 없다.

 

단지 그 이야기는 원형신화의 오래된 보편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예술가로서 밀턴은 자신만만하면서 동시에 겸손하게 자신을 고대 시인, 특히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의 눈먼

예언자적 시인과 일치시키고 있으나 또한 그의 그리스도교의 주제가 이교 시인의 주제를 능가한다고 천명했다.

 

그가 오래 전에 말했듯이, 그것은 "기억의 여신과 그녀의 아름다운 딸들에 대한 기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발언과

지식으로 강화되어 제단의 신성한 불을 가진 그의 천사들을 보내 그가 기뻐하는 자의 입술을 정화시키는 저 영원한

 성신에 대한 경건한 기도로 얻어진" 작품이었다.

 

밀턴은 서문에서 영웅시에 쓰여진 무운율의 새로움과 정당성을 강조했다.

 리듬과 음향을 다룬 것은 밀턴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이다.

 그의 긴 문장과 문단은 셰익스피어 대화의 극적 무운시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이것 때문에 지속적인 비난을 받았다.

 

T. S. 엘리엇이 말했듯이 밀턴의 무운율은 결코 단조롭지 않았다.

 소리구조는 의미구조와 잘 결합되어 각각 서로 극히 필요한 관계에 있었다.


〈실락원〉 9권에서 밀턴은 전쟁의 무용(武勇)보다 더 고상하면서도 작품화되지 않은 주제인 '인내와 영웅적 순교'에 대해서 말했고, 〈복락원〉과 〈투사 삼손〉(1671)에서는 '그보다 더 뛰어난 용기'를 찬양하고 있다.

 

〈복락원〉은 당연히 장시의 속편으로 여겨진다.

즉 최초의 아담이 상실했던 낙원을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가 되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턴은 십자가의 고난을다루지는 않았다.

 

그대신 광야에서 그리스도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최후의 시련에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역할에서 인간이 견고한 성실과 신의 의지에 대한 겸손한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드러냈다.

 

많은 독자와 비평가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고 하지만 〈복락원〉은 밀턴의 종교적·도덕적 열정과 진정한 영웅성에 대한 그의 숭배를 담고 있다.

어떤 독자들은 〈복락원〉과 1권으로 출판된 〈투사 삼손〉을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밀턴의 작품으로 본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리스 희곡을 따른 최고의 영국 드라마이다.

 

마지막 파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는 심리적인 것으로 표현되는데 '노예와 함께 가자의 방앗간에서 눈이 뽑힌 채

있는' 삼손이 비탄과 치욕으로부터 벗어나 겸손과 새로운 영적 용기를 가지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 신의 선택된 전사임을 확신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투사 삼손〉은 주인공과 밀턴의 유대감 때문에 상당한 감동을 준다.

밀턴 역시 자유를 잃은 노예처럼 실명한 채 런던에 있었다.

 

그러나 밀턴의 절제력 또한 뛰어났으며, 이 희곡에는 삼손 이야기에 속하지 않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이 작품은 인간과 운동에 대한 초기의 혁명적 신념이 아니라 신에 대한 정화된 믿음과 인간영혼의 부활능력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16년 동안 밀턴은 3편의 작품을 완성했고 외부적으로는 평화스럽게 지냈으나 곤궁한 가정 경제와 실명,

응혈로 고생했으며 딸들과 어느 정도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63년 젊고 상냥한 엘리자베스 민셜과 3번째 결혼을 했으며 그녀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밀턴은 1674년 11월 8일 66번째 생일 직전에 아주 심해진 응혈 때문에 사망했고 크리플게이트의 세인트자일스에

묻혔다.

 

 

 

 

 

실락원의 작가, John Mil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