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기가 지구상에 남기고 갈 흔적에 대하여 엄청난 미련을 가지고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 연연(戀戀)해 한다.
인간들은 그들이 남기고 갈 흔적에 커다란 미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큰 원망(願望)인 영생(永生)과 무관하지 않아서
인간이 가진 모든 종교적 염원이 하나로
그것에 연(連)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나이 들어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되면
묘비명(墓碑銘) 하나는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흔적의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사람에 따라 모두 그 생각이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자식(子息)을 낳아 기르는 것을 제 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욕(性慾)을 자세히 파고 들어가 보면
하늘이 인간에게 준 생식욕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이 준 가장 달디단 당의정 속에 싸인
자녀의 번식(繁殖)을 위한 욕망임을 인식할 수 있다.
자식은 자기의 사후에도 살아 있는 자기의 일부분인 까닭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더 자식을 귀히 여기는 것이리라.
인간이 무겁고 단단한 화강석에 이름을 새기기를 즐겨하는 것은
또한 인간이 제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욕망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명예가 또한 사후에 남아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또한 인간이 갈망하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을 위하여 사람들은 제 이름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사후에 덧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제 자녀들과 함께 가문(家門)이라는 주체를 통하여
살아 있기를 바라는 비원(悲願)이 담긴 인지상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오복( 五福)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壽), 부(富),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으로
오래 살고, 부귀하며, 건강하게 사는 것, 남에게 덕을 베풀며,
하늘이 준 천수대로 오래 사는 것을 말한다.
중국고전 서경(書經) 홍범편(洪範編)에 나오는 말이다.
통속편(通俗編)에 나오는 오복은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해로(夫婦偕老)하는 것
4) 손님 대접할 만큼 부유한 것 5)명당(明堂)에 묻히는 것 등 다섯 가지이다.
우리 동양인 조상들은 현세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영생에 대하여는 별무관심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가 영생을 전제로 하는 까닭은
우리 인생은 길게 백년 밖에는 더 오래 살 수 없는 까닭이다.
육체와 영혼으로 된 우리 인간은 육체가
죽음과 더불어 한 줌의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며,
영혼은 육체라는 옷을 탈피(脫皮)하여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억겁(億劫)의 영원한 천국의 삶을 위하여 찰나(刹那)에 불과한 짧은 생을
버려도 좋을 일이지만 찰나 속에 구백의 생멸(生滅)이 있다고 하니,
우리 인생도 그냥 찰나로 만 넘겨버리기에는 그리 짧기만 한 것은 아니질 않는가?
몇 억 광년(光年)으로도 헤아릴 수 없어 무한대(無限大)라고 이르고 말았던가?
이 광대한 우주의 작은 편린(片鱗)에 불과한 이 지구 위에서 삶을 이어가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의 먼지 같은 다이아몬드 조각을 놓고 생명을 걸고 싸우고,
한조각의 금은(金銀) 조각을 놓고,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까닭은 소유(所有)라는 한갓 헛된 환상에 속은 탓이다
소유란 완전히 가지는 것이 아니고, 잠시,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을
가까이 하고 있다가 때가되면 놓아버리는 것이지,
결코 영원히 점유(占有)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물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소유와는 별개의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옥을 돈을 주고 샀다고 하자.
그 가옥을 일정기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100년 후 우리가 사망하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그 가옥은 다른 사람에게 사용권을 양도하거나 낡아 부서진다.
우리가 사는 집도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소유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소유라는 환상에 젖어 살아가지만 소유라는
개념에 속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족적을 남기기 위하여 화강암을 갈아 비석을 세웠던 많은 사람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인간의 두뇌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아무나 기억할 정도로 푼푼한 기억력을 갖지도 못하였다.
우리는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한국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안중근 의사란 이름을 기억한다. 세종대왕을 기억하고 김구를 기억한다.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분명하고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들은 흔적을 남기게 하기 위하여 애쓴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들이 돕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임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기독교의 예수를, 불교의 석가모니를, 그리고 공자와 맹자를 기억한다.
그들은 인류를 위하여, 또는 제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제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바위에 제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키 큰 동상을 만들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그 이름을 기억하도록 애써 각인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이 결코 바위에 이름을 새기기보다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훈훈한 인정과
동정과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진리를 스스로 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한 인간의 평가는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마음 놓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남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적어도 남에게 그만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봉사를 하고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남에게 아무것도 준 것 없이 벼슬 나부랭이나 하고
보국안민(保國 安民)의 공적을 비석 위에 새겨 후세에 남기려 했던
우리 조상들의 염원은 다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공덕비는 땅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일본의 침략 근성의 예봉을 꺾어버리고
차디찬 이국의 감방 속에서 의연히 죽음을 기다렸던 안중근 의사는
그 불멸의 애국심과 정의의 깃발을 펼친
인류의 의사(義士)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안 의사의 족적은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불멸의 봉화(烽火)로 영원히 우리 민족의 가슴 속을 불태우며 살아남을 것이다.
그의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인류를 위한 거사는
안 의사가 어렸을 때 그의 집으로 찾아든
식객 김구선생의 만남에서 비롯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 속에서, 사람들을 위한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사람다운 행동을 하여야만 영원히 불멸하는 사람으로서 남게 되는 것인가 보다.
지금 남북의 어지러운 사태야 말로
그런 의인들을 가장 절실히 요구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돈만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뢰와 사기로 병든 공무원과,
‘쩐’의 위력 앞에 스스로 스승의 권위를 포기한 선생님들,
나라 밖으로 차명계좌 비자금을 끌어내어 일신의 부귀영화를 획책하는 장사치들과,
중소기업과 농촌에는 노동력이 부족하여 산업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
대기업에 연연하여 무직인 젊은이들로 가득한 남한을 바로 잡고,
아사(餓死)의 고통을 무기(武器)로 부정의한 사회를 핵폭탄으로 다스리려는
북한 삼대 세습 왕국을 침몰시킬 의인들은 진정 아무도 없는 것일까?
진정 소돔과 고모라처럼
열 사람의 의인도 찾을 수 없어 유황 비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인가?
- 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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