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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시사

국제시장 흥행 성공과 종북의 절망

 

 

'국제시장’ 흥행 성공과 종북의 절망!  
 


1. 드디어 제자리에 들어 선 한국의 예술인  



요즘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은 근 20여 년 동안 좌편향

 감독과 배우들이 치던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모처럼 올바른 국가관과

가치관이 정립된 영화가 등장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더

고무적인 것은 전체 관람객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20대가 이 영화를

보고 기성세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계는 긴 세월 동안 좌편향 감독과 배우들에 석권되어

 선동에 이용되어 왔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제작된 남부군 남영동 1985을 필두로 계속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키워 온 좌편향 영화들은 화려한 휴가로

절정에 이르렀고 대선에 맞춰 제작된 영화 ‘변호인’은 젊은 층의 마음속에 보수 정권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하게 만드는데 성공, 새민련 문재인

후보가 48%를 득표하게끔 일조를 하기도 했다.  


2. 좌편향 정치인, 예술인들의 역사 왜곡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은 집권에 성공한 후 종북 세력의 득세를 위해

역사 왜곡, 특히 이승만 박정희 두 정부의 치적을 감추고 왜곡 폄훼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 왔다.  

무기라고는 미군이 남기고 간 구식소총 몇 자루와 연습기 다섯 대 뿐인

 대한민국 국군을 이끌고 소련제 탱크와 야포로 무장한 북한 괴뢰군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이승만 정권의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자원이라고는 무연탄

탄광 몇 곳과 중석 광산 몇 곳이 전부인 최빈국 대한민국을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이끌어 경제 대국으로 부상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종북 세력에게 정권을 계승시킬 명분이 없었던

두 인간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자라나는 세대를 상대로 역사를

 왜곡시켜 세뇌시키는 방법밖에 없었고 그 작업은 종북 좌파 문화계 인들과 민노총 산하의 전교조, 그리고 언론 노조가 맡았다.  



3. 절망 안겨주는 좌편향 종북 예술인들의 득세 

이들 좌편향 영화인들은 절정기를 맞아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누리며

왜곡과 선동에 거칠 것 없었다.  

김대중이 취임하자마자 창설한 전교조는 학생들의 의식화 교육을 전담했고 좌파 연예인들은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 노골적으로 기성세대에 대한 불

신을 주입시켰다.  

그 통에 기존의 문예영화와 반공영화를 제작해 오던 영화사들은 다 망하고 정권과 코드가 맞는 영화인들은 승승장구, 기존의 역사를 뒤집는 영화,

전통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희화화시키는 영화를 잇달아

 성공시켰다.  

5.18을 미화시킨 영화 ‘화려한 휴가’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만든 ‘남영동 1985’는 보수정권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켰고 효자동

 이발사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희화화시켜 동물농장 수준의

독재정권으로 매도했다.  

물론 기성세대는 그런 영화에 공감하지 않았으나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층을 선동하기에는 충분했고 종북 세력의 득세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4. 좌익 언론인, 정치가, 정당들의 활동의 허구성 인식과 역사 재조명  


그러나 사회 갈등만 조장하는 좌편향 영화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흥행에 실패하기 시작했다.  

천안함 폭침 사건을 우리 해군의 자작극 혹은 좌초 후 미군 잠수함과 충돌한 사건으로 조작해 만든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와 세월호 참사 사건에

끼어들어 분탕질을 쳤던 벨을 주제로 만든 영화는 흥행에 폭삭 망한 대신 ‘명량’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리고 ‘국제시장’ 등 전통의 가치관을 조명한 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기

시작했다.  

종북 좌파의 선동이 말짱 허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젊은 층이

가치관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면서 생긴 변화고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종북 좌파에게는 절망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20대가 국제시장 주 관람 층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화 정부

 20년에 걸친 왜곡과 선동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5. 종북 좌파 세력들의 노출확인과 유해성 확인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래 종북 좌파는 자멸의 길을 걸어왔다.

 대선 직전에 드러난 전직 노무현의 NLL 포기발언 의혹과 관련한 문재인

의원의 연이은 거짓말은 별수 없는 종북 좌파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고 국정원 댓글 사건과 세월호 참사 사건, 청와대 문건 유출 사태를 이용한

 선동의 잇단 실패는 대한민국에 진정한 진보란 없다는 확신과 진보의 탈을

 

 쓴 인간들이 실은 죄다 문희상 같이 창조적인 방법으로 뇌물수수나 하는

 모리배인 동시에 북한의 주장에 장단 맞춰 고려연방제나 노리는 종북 세력이라는 사실만 확인시켜 준 셈이 됐다.  

또한 보수인 척하고 나불대는 언론사, 종편 모두가 개혁 내지 퇴출의

 대상일 뿐, 국가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라는 사실까지 확인시켜주었다.  

그 때문에 이정희를 비롯한 통진당 잔당들이 아무리 거리에 나와 박근혜

 정권을 독재정권이라 매도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게 됐다.  


6. 독재와 인권 유린의 정권을 찬양 옹호하는 통진당 해산과 그 추종인들의 척결  

그런 종북 세력에게 국제시장 흥행성공은 가망 없는 앞날을 예고하는

먹구름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종북 세력은 고모부까지 무참히 살해해 유엔 총회에서

연거푸 인권침해 국가로 낙인찍힌 데다 어설픈 사이버 공격으로 오히려

개망신만 당한 김정은의 잇단 실패에 절망했고 그런 인간을 찬양하고

 

다니던 신은미의 종북 콘서트를 단신으로 중단시켜 버린 주인공이 다름

 아닌 10대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런 판에 영화 국제시장 관람객 절반이 20대라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그 동안 덮어졌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나름대로

재조명하고 있다는 현실은 종북 세력을 확인 사살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결과가 됐다.  

이로써 종북 세력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확신도 섰다. 통진당은

 이미 해산으로 거리의 미아가 됐고 불량국가 북한을 지지하는 친노 또한

자당 내에서도 척결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다 이제는 젊은 층까지

외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7. 국가보안법의 엄격한 적용으로 국가발전 저해세력들의 확실한 척결  


이제 종북 세력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함세웅 등 원탁회의 일부가 종북과 결별을 요구했다는 들리고 친노 거두의 하나인 정세균이 대표 출마를 포기했다는 소식도 들리는 등 자중지난이

일고 있지만 진심이 아니라 잠시 소나기를 피하자는 수작이라는 것쯤은

 국민도 다 알고 있다.

 

때문에 국민은 확실한 전향과 속죄가 있기 전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용서를 받고 국민과 함께 선진 대한민국으로의 길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끝내 고집을 부리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것인가?

 선택은 자유다.  

세태가 그런데다 영화 국제시장까지 흥행에 성공하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신이 나고 힘도 솟는다.  

북한의 김정은을 미치광이 소인배로 희화화시킨 영화 ‘인터뷰’는 언제쯤

 개봉할 건가?

그거야 말로 대한민국국민에게 주어진 알 권리, 볼 권리인데  

이 민족과 나라를 지켜준 한 외국인  

* 6.25때 만주로 진격 하려는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여 미웠는데 트루만

대통령이 은인이네요.*  

" 이 민족과 나라를 지켜준 한 외국인! 그 는 누구인가 ?." 안녕하세요.

2012년은 6.25 南侵 62주년이다.

 6.25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駐韓美軍이 철수하고- 韓美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美國은 연150만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우리를 구해

주었던가?

美 군부는 주한미군을 1년전에 철수시켰었다.

그런데 왜 軍隊를 다시 보내5만4000명을 죽게 하는 血戰을 벌인끝에

 

 '알지도 못하는 조그만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 을

공산침략으로부터 구출했던가?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  

우리 역사상 한민족 전체의 운명이단 한 사람의 외국인에 의해 결정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맥아더 장군이라고? 아니다, 맥아더를 한국 戰線으로 보낸 美軍의 참전을 결단했던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다.  

6월24일 미조리 인디펜던스 1950년 6월24일 트루먼 대통령(당시66세)은 週末을 고향에서 보내고 ..

있을 때... 딘 애치슨국무장관이 걸어온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UN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일설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3차大戰의 서막이 오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는것 같았다고 한다.  

정오 직전-무초 대사가 보낸 電報가 그에게 건네졌다. 그는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께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匕首(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도 남침을

 저지할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駐韓美國人을

 철수시킬 것.

제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이날 회의는 미군을 사용한 한국 방어를 결의하고 밤11시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빠져 나갔고, 대통령은 함구령을 내렸다.  

“육군도 보내라” 다음날(서울 6월26일, 워싱턴 6월25일) 트루먼 대통령은. 두 번째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 개입 결정이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海, 空軍力을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다음날은 .-6월27일-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나갔다

오전 11시30분 의회 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 西館 각료실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전쟁을 지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의회가 --별도로-- 전쟁 결의안을 낼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上下院 합동회의도 이날315 대 4의 압도적 표차로 징병기간을1년

연장하는결의를했다.  

UN 안보리는.1950년 6월30일 새벽 3시 美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의 電文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 아니라- 육군이 투입되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지체 없는 명확한 결정을 바란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우선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이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일본에 원자탄 투하하는 결정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모택동은 무슨 짓을 할까 러시아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이렇게 하여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파병된다.

 3년간 戰場에서 - 5만명이 죽고 - 10만명 이상이 다쳤다.  

우리 역사상 한국인의 운명이 외국인 단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당시 美 軍部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의 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조치였다 그는 陸士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다.


1차 대전이 터지자 - 나쁜 視力을 속이고 자원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 포병장교로 용감히 싸웠다.
그런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는 19세 이상 成人 인구가 15%

500만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트루먼을 기억하게 하는- 공원 이름이나 거리

이름이 없다 트루먼 동상은 -판문점 근방 - 잘 안 보이는 곳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서울 번화가나 -대형공원에 동상을 건립하고 - 트루먼 거리 하나쯤

명명하여 그분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에 늦고 작으나마- 오래오래

기렸으면 합니다.

본 내용에 대하여 - 많은 분들께 알리는것도 - 길이요 보은의 일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