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DERNISM 음악

Charles Aznavour - Petite Fleur , Yesterday When I Was Young

                                                                                                                                                                            

 

 

 

 

Petite Fleur 

 

 

 

J'ai caché mieux que partout ailleurs
Au jardin de mon cœur une petit fleur
Cette fleur plus jolie qu'un bouquet
Elle garde en secret tous mes rêves d'enfant
L'amour de mes parents et tous ces clairs matins
Faits d'heureux souvenirs lointains
Quand la vie par moments me trahit
Tu restes mon bonheur, petite fleur.

Sur mes vingt ans
Je m'arrête un moment
Pour respirer
Ce parfum que j'ai tant aimé
Dans mon cœur, tu fleuriras toujours
Au grand jardin d'amour, petite fleur.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이
내일 모두 시든다 해도
열 여섯살 때의 봄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겠어요.

신비로운 세계에서 당신을 사랑했던 시절
당신의 눈동자에 타오르던
작은 사랑의 꽃은
언제나 나를 위해 피어 있었죠.

어느날 아침
당신의 집 계단에서
시들어 버릴지라도
사랑의 작은 꽃을 지키겠어요.

오랜 세월
당신의 눈동자에 빛나던
푸른 빛의 작은 꽃을
당신은
내 마음 속 사랑의 뜰에서
언제까지나
작은 꽃으로 피우고 있어요

 

 

 

 

 

 

 

 

Yesterday, When I Was Young
The taste of life was sweet as rain upon my tongue
I teased at life as if it were a foolish game
The way the evening
breeze may tease a candle flame


내가 어렸었던 그 시절
인생은 혀 끝에 닿는 빗물처럼 달콤했었지
어리석은 장난 같았던 내 삶은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같았어

The thousand dreams I dreamed
The splendid things I planned I always built, alas,
on weak and shifting sand
I lived by night and shunned the naked light of day
And only now I see
how the years ran away


수많은 꿈을 꾸고
근사한 계획도 세웠는데
언제나 부서질듯한 모래성을 쌓았던 거야
한낮의 밝은 빛을 멀리하고 환락의 밤을 즐기며 살았던 나
이젠 덧없이 세월만 흘렀네

Yesterday, When I Was Young
So many happy songs were waiting to be sung
So many way-ward pleasures lay in store for me
And so much pain
my dazzled eyes refused to see


내가 어렸었던 그 시절
끝도없이 마시며 노래를 즐겼고
수많은 유흥만이 날 위해 있었지
내 맘대로 기쁨을 누리면서
그런 것에 현혹된 내 눈엔 고통만이 남았어

I ran so fast that time and youth at last ran out
I never stopped to think what life was all about
And every conversation I can now recall
Concerned itself with me
, and nothing else at all


젊은 시절을 너무 빨리 보내버렸어
인생을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불러보려 해도
나 자신 밖에 남는 게 없네

Yesterday the moon was blue
And every crazy day brought something new to do
I used my magic age as if it were a and
And never saw the
waste and emptiness beyond


푸른 달빛이 비쳤던
내게 그런 나날들은 새로움을 가져다줬지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아무 쓸모도 없다는 걸 몰랐었어

The game of love I played
With arrogance and pride and
every flame I lit too quickly, quickly died
The friends I made all seemed somehow to drift away
And only I left on stage
to end the way


사랑놀이만 하려했고
오만했고 자만했었지
열정도 아주 빨리 식어버렸어
친구들도 모두가 떠나가 버리고
무대에 홀로 남겨진 난 쓸쓸함만이 남았네

There are so many songs in me that won't be sung
I feel the bitter taste of tears upon my tongue
The time has come for me to pay for
Yesterday, When I Was Young


많은 노래가 있지만 부를 수 없었어
혀 끝에 닿는 눈물이 이제 쓰게만 느껴지네
이제 드디어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온 거야
내가 어렸었던 그 시절 누렸던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2009년 5월 13일.

제62회 Festival de Cannes(칸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칸.

 

카메라와 배우와 감독에 둘러싸여 있는 하얀 신사복의 백발의 노신사.

그의 이름은 Charles Aznavour였습니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프랑스 샹송계의 큰 별로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있는 샹소니에 Charles Aznavour.

(샤를르 아즈나브르)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출세길을 열어주었던 Edith Piaf도 이미 세상에 없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Maurice Cheval‍!!!!ier, Jacques Brel, Yves MontandGeorges Brassens, Charles Trenet,

 Leo Ferre 등도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올해 85세인 Charles Aznavour는 여전히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고,

월드 투어에 나서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작곡한 곡은 1천 여곡, 그동안 발표한 앨범은 100여 장이 넘습니다.

 음악뿐 만이 아니라, 그는 60여 편의 영화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흐느는 듯한 낮은 저음의 매력적인 보이스로 들려 주었던 'She', 'La Mamma', 'La Boh?me',

 'Isabelle','Mourir d'aimer', 'Que C'est Triste Venise', 'Les com?diens' 등이

그의 대표곡으로 1969년 Roy Clark이 열창한 'Yesterday, When I Was Young'은

그의 작품 'Hier Encore'를 영어로 개사해 불렀던 곡이었지요.



1924년 5월 파리에서 그루지야 태생의 아버지와 터키계 아르메니아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그는 아르메니아계다

 

 

 


  

그의 아르메니아 사랑은 유명합니다.

Charles Aznavour는 그동안 프랑스 내 40만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이주민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자신이 아르메니아계인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지난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2만5,000명이 목숨을 잃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구호 모금 콘서트를 여는가 하면, 직접 자선단체를 세우고 아르메니아 구호지원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었죠.

 

그는 아르메니아의 UNESCO(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상임대표로 활약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그의 헌신적인 모국 사랑에 아르메니아 정부는 2004년, 그에게 국민 영웅 칭호를 선사하며

아르메니아 국적까지 부여했고, 올해 2월 15일, 그를 스위스 대사에 임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6년 세계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별공연을 갖었던 그는 지난 5월 22일

자신의 85회 생일을 기념하며 "For you, Armenia" 콘서트를 개최, 다시 무대에 올랐습니다.



올해 85세의 노신사가 지나온 인생 여정을 회상하며 들려주는 그의 대표작인

'Hier Encore'는 한해의 끝자락에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리가 샹송, 또는 프렌치 팝이라는 영역으로 부르는 프랑스의 대중음악으로서의 위상은 영어권 팝 음악과

 비교했을 때, 그 세계적 장악력에서는 조금 밀릴지 몰라도 오랜 역사와 튼튼한 음악 수요층을 전 세계에 두고 있다.

 

 15세기부터 이어진 그 오랜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모던 샹송의 영역만 이야기 하더라도 일찍이 20세기 초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f)와 같은 불세출의 보컬리스트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도 자크 브렐(Jacques Brel), 프랑소아즈 아르디(Fran?oise Hardy), 이브 몽탕(Yves Montand) 등 다수의 싱어-송라이터들이 프랑스 국내를 넘어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게다가, 로큰롤 시대 이후 영-미 팝 사운드가 프랑스에 물밀듯 밀려들어와 더욱 다양한 장르로 분화된 시점에도

 프렌치 팝을 대표하는 스타들은 꾸준히 탄생했다.

 

 

 

 

세르쥬 갱스부르(Lucien Ginsburg), 프렌치 팝의 8-90년대를 빛낸 쟝 자크 골드만(Jean Jacques Goldman)와 같은 자국파들, 그리고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국내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엘자(Elsa), 제인 버킨(Jane Birkin)이나

죠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처럼 태생은 프랑스가 아니나 이제는 프렌치 팝의 일부가 된 아티스트들까지

프렌치 팝과 샹송이 아직까지 대중음악 씬에서 펼치는 위력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비록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여파를 타고 있지만 카를라 브루니

(Carlar Bruni)가 현재 세계적으로 보여주는 인기도도 이의 연장선이라 하겠다.

 

물론 그녀도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지만.)
물론 현재 프랑스의 대중음악의 트렌드가 힙합, 일렉트로니카 등에서 더욱 활발하게 가속도가 붙고 있기에,

 고전적 샹송 보컬들의 입지가 세계적으로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세월의 흐름과는 아랑곳없이 80대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 세계를 누비면서 꾸준히 공연 활동을 하고, 음반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원로', 아니, 진정한 '고참' 남성 보컬리스트가 있다.

 

바로 그가 이 음반의 주인공이자, 국내에는 싱글 [Isabelle]로 음악 팬들에게 친숙한 샤를르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이다.
그는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로써 지금까지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했으며, 또한 영화 배우로서 60편에 이르는

 영화에 출연했고, 세계적으로 총 1억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한 프랑스 대중문화의 거목이다.

 

아직도 그는 전 세계의 유명인들이 모이는 행사에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는 단골손님이며,

 1998년에 타임 온라인(Time online)에서 선정한 '20세기의 연예인' 100위 명단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는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샹송의 매력을 가장 다양한 언어로 전 세계에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미국계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어에도 능통한 그는 영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독일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샹송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파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프랑스의 국민 가수로서의 위상을 넘어 세계적 뮤지션으로서 그를 인정받게 만든 가장 큰

 힘이었던 것이다.

 

 


 

 


 

팔순이 넘도록 쉼 없이 이어져온 샤를르 아즈나부르의 음악 커리어


샤를르 아즈나부르는 1924년 5월 22일생으로 프랑스의 생 제르망 드프레(Saint-Germain-des-Pres)에서 태어났고, 미국계 이민자 부모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후 파리로 이주해 살았다.

 

 서양인치고는 왜소한 체격와 프랑스계와 다른 독특한 이목구비로 인해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가족이 이미 연예계에서 활동해왔기 때문에 일찍이 아역배우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뮤지컬 단체의 일원으로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노래와 연기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파리에서 우연히 음악 감독이자 가수인 피에르 로슈(Pierre Roche)와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 가수로 활동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피에르가 자신의 아파트를 개조해서 운영한 '샹송 클럽'이라는 곳에서 샤를르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시와 노래를 접하고, 자신도 직접 가사와 곡을 쓰면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을 확보했다.

 

그 후 거의 8년간 피에르와 함께 듀엣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1946년에는 레이몽 베르나르

(Raymond Bernard) 감독의 '잘 가요, 내 사랑(Adieu Cherie)'에 처음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서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1946년 미셀린 루겔(Michelin Lugel)과 첫 결혼을 했으나, 8년 만에 이혼한 뒤 그의 인생과 음악에 있어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인물인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게 되었다.

 

에디트는 처음엔 피에르와 샤를르를 자신의 투어 팀에 합류시켰고, 피에르가 그와 결별한 이후에는 그를 솔로로

 활동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혼까지 이르지 못하고 결국 결별했다.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 그는 캬바레 싱어로서의 침체기를 뛰어 넘어 1954년에는 물랑 루즈, 다음 해에는

 프랑스 뮤지션에겐 꿈의 무대인 올랭삐아 무대에 진출하면서 진정한 샹송가수로 인정받았다.

(물론 영화 배우로서도 50년대 후반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6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는 내놓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La Mamma], [Les Feuilles Mortes], [Le Temps, Et Pourtant]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그를 대표하는

 트랙들이다.

 

 그리고 그의 무대는 자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국 카네기 홀(1964년), 런던 애버트 홀(1967년) 등

세계로 범위를 넓혀갔다.

 

결국 그는 영-미 대륙에서도 배우와 가수로서 확실한 기반을 닦았고, 아예 헐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까지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등 미국의 인기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매력적인 보이스는 영화에서도 빛났기에, 당시 헐리우드 제작자들은 그를 매우 선호했었다고 한다.
70년대에 가수로서 그가 거둔 또 하나의 성과는 샹송 보컬로서 영국 차트에서 당당히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일이다. 바로 그 곡이 우리에게는 영화 '노팅 힐(Notting Hill)' OST에서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가 리메이크했던 [She]였다.

 

 

 

 

 

그 후에도 80년대와 90년대에도 그는 꾸준히 음반을 발표했고, 음악 활동과 별개로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난과 인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회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선보여 그의 팬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특히, 1998년 아르메니아 지진 사태로 피해를 입은 난민들을 위한 자선 싱글 [Pour toi Arm?nie]는 프랑스의

대표적 가수들이 모두 참여했고, 프랑스 차트 18주간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유네스코에서 아르메니아

영구 친선 대사로 임명되어 자신이 거둔 기금을 해당 국가의 재건을 위해 전액 희사했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까지 세워질 정도로 그는 '은사'의 대접을 받았고, 작년에는 해당 국가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84살이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재도 신보를 내고 월드 투어를 가질 만큼

건강한 몸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쿠바 여행을 하며 받은 영감을 반영한 앨범「Colore Ma Vie」를 내놓은 2006년에 그는 미국과 캐나다를 도는

 'Farewell Tour(고별 투어)'를 가졌지만, 결국 이것이 그를 은퇴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故) 딘 마틴(Dean Martin)과의 듀엣곡으로 화제를 모았던 앨범「Forever Cool」이 발매된 2007년에는 아시아와 일본에서, 그리고 작년에는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그리고 향후 투어 일정이 (건강이 허락하는 한)

2010년까지 잡혀있을 정도로 그는 영원한 '청춘'을 구가하고 있다. 

 

 

 



'MODERNISM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va Cassidy - Fields of Gold  (0) 2015.05.07
Enya - One By One  (0) 2015.04.22
Enigma - Mea Culpa 외  (0) 2015.04.16
Macy Gray - I Try  (0) 2015.04.16
Nancy Sinatra and Lee Hazlewood- Summer Wine  (0) 201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