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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Bob Marley -No Woman, No Cry ,could you be 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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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Yes,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a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그래요, 나는 우리가  트렌치타운의 정부청사 앞마당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Observing the hypocrites mingle with the good people we meet.
그때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섞여 있던 위선자들을 관찰하고 있었죠.
 
Good friends we have had,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얻기도 하고,
Good friends we have lost, Along the way.. 
좋은 친구들을 잃기도 해왔어요. 그 길을 따라…

 


In this bright future, you can't forget your past. 
이 밝은 미래에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없어요. 
So dry your tears, I say. 
그러니 눈물을 그쳐요.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Yes,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a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그래요, 나는 우리가  트렌치타운의 정부청사 앞마당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And Georgie would make the fire light, I say, log wood burnin' through the nights 
조지가 불을 붙였고, 통나무는 밤새도록 타오릅니다. 

 

 

Then we would cook cornmeal porridge of which I'll share with you.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나눠 먹을 옥수수죽을 만들어요. 
And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내 두 발이 나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죠, 그러니 난 힘차게 나아가야죠. 

 

Everything '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Everything '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Everything '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Everything '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Everything '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Everything 's gonna be alright.
모든것이 다 잘 될 거예요…


 

 

 

 

 

 

 

 

could you be loved

 

 

 

 

Could you be loved, and be loved?

Don't let them fool ya,
Or even try to school ya! Oh, no!


We've got a mind of our own,
So go to hell if what you're thinking is not right!
Love would never leave us alone,
Ay-in the darkness there must come out to light.

Could you be loved, and be loved?
Could you be loved, wo now! - and be loved?

(The road of life is rocky and you may stumble too,
So while you point your fingers someone else is judging you)

Love your brotherman!

(Could you be -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Could you be -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Don't let them change ya, oh!
Or even rearrange ya! Oh, no!
We've got a life to live.


They say: only - only -
only the fittest of the fittest shall survive -
Stay alive! Eh!

Could you be loved, and be loved?
Could you be loved, wo now! - and be loved?

(You ain't gonna miss your water until your well runs dry;
No matter how you treat him, the man will never be satisfied.)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Say something! (Say something!)


Say something! Say something!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Say something! Reggae, reggae!
Say something! rasta, rasta!


Say something! Reggae, reggae!
Say something! rasta, rasta!
Say something!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Uh!
Say something! Come on!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Say something! (Could you be - could you be loved?)

 

 

 

 

 

 

                                            

                                                                              

 

밥 말리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슬럼가인 '트렌치타운'에서 

1945년 2월 5일, 영국군 대위와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그리고 축구와 음악에 푹 빠진 소년으로 성장했다. 

"나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아버지에 대해 알지도 못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일주일에 겨우 20실링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교육을 받았다면 아마도 멍청한 바보가 되었겠지요"
 
그의 저항정신의 스승은 도시의 뒷골목이었다.  
 
자메이카의 음악은 곧 레게음악이다. 레게음악은 한가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1838년 자메이카에서 노예해방이 이뤄지고 난 뒤, 

영국으로부터의 식민경험에 짓눌린 민중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기억이 승화된 것이 레게다.

또한 레게는 시대를 넘어서 자메이카 민중, 빈민가의 슬픔과 저항을 노래한다.
  
레게 음악과 함께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흑인들의 해방 사상을 담은 신흥종교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
 
 라스타파리아니즘은 기독교와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이 결합된 종교로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를 구세주의 재림으로 여기는 신비적 요소가 강한 종교이다. 
 
이 종교는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부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 하여 부모에게 받은 머리카락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작이라는 공자(孔子)의 가르침 때문에 머리카락을 매우 소중히 여긴 우리 조상들처럼 어떠한 신체 훼손도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신도들은 자신의 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조상들이 상투를 틀었듯 드레드록(dreadlock)이라는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영혼을 승화시킨다고 믿으며 피우는 ‘간자’라는 일종의 환간제 ‘마리화나’를 피웠다.
 
이 종교는 노예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이 다시 아프리카로 회귀해야 한다는 운동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밥 말리는 라스타파리아니즘에 따라 드레드록을 하고

마리화나를 피웠으며 또한 열다섯 살 무렵에는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소신를 전파할 목적으로 

뜻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웨일러스(Wailers)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웨일러스라는 말은 '외쳐대는 사람들'이라는 뜻.
 
웨일러스는 노래를 통해 혁명을 얘기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강한 신념은 급진적 정치성향으로 상승하기도 한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
 
그러기에 레게는 단순히 신나는 음악이 아니다. 
그 음악 속에는 아주 오랜 옛날 아프리카의 초원을 누비던 자유와 

노예로서의 수난과 저항의 DNA가 숨어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가 1974년에 발표한 대표적인 앨범 <내티 드레드(Natty Dread)>에 수록된 곡들은 

자유라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외침이자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으로

빼앗긴 권리를 찾자는 힘찬 주장의 멜로디였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우리는 선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위선자들을 가려내고 있었죠.
긴 투쟁 동안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또 많은 벗들을 잃었죠.
위대한 미래, 당신은 지난 날들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 눈물을 닦으세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여인이여 울음을 그쳐요,
어여쁜 소녀여, 눈물을 거두어요.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그때 지는 밤새도록 통나무를 태워 불을 지폈지요.
 
우리는 옥수수죽을 끓여 함께 나눠먹었고요.
두 발은 나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에요.
그래서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해요.
 
내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잘 될 거예요.
  
- ‘No Woman, No Cry(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Natty Dread> 앨범의 두번째곡  -
 
 밥 말리는 이 노래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밥 말리의 행보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6년 자메이카 총선을 앞두고 사회주의 정당인 인민국가당(PNP)을 지원하는 콘서트를 준비하던 중
 
친미우익정당인 자메이카노동당(JLP)의 사주로 의심되는 총기 테러로 부인과 매니저가 크게 다치고 자신도 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밥 말리는 약 2년 동안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대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78년에 고국으로 돌아 왔다. 혼돈에 빠진 자신의 나라에 돌아와 함께 비를 맞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국을 위해 평화 콘서트를 기획하는 등 정치 변화를 꾀했다.
또한,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레게음악을 통해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그의 기념비적 앨범인 《Legend》(1984년)는 전세계적으로 1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온 세상에 레게 음악을 알렸다. 
 
밥 말리는 1981년 5월 11일, 안타깝게도 36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앞으로도 계속 불러질 노래를 남기고. 레게는 자메이카인이 발 디디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연주되고 있으며  세계인들에게는 자유를 상징하는 흥겨운 저항음악으로 영혼 깊숙이 입력되어 있다.

 

 

Bob Marley [No Woman No Cry]

 

 

 

 

 

레게(Reggae) 음악의 전설로 우리에게 알려진 밥 말리. 1945년 태어나 198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밥 말리는 팝 역사상 제3세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슈퍼스타가 된 인물입니다.

 

 

  레게의 황제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담배를 멋있게 피는 사람이었고 아디다스 저지와 드레드 헤어를 보편적

 패션 아이템으로 격상시킨 패셔니스타이기도 했지요.

그는 지극히 쾌락 지향적이고 감성적인 인물로,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쾌락을 안겨주고자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모든 노래들은 하나의 기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유형이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어떤 울림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라고 그가 말했듯이, 밥 말리는 흥청망청하는 레게 비트 속에 자메이카 민중의

삶을 담았고 정치적 현실을 고발했으며 보편적인 인류애와 숭고한 이상향을 담아냈다는 데에서

그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지요.

오늘은 밥 말리의 삶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흑인 중심의 사회에서 흑백 혼혈아로 소외되었던 아이

 

 

  밥 말리(본명은 로버트 네스타 말리 Robert Nesta Marley이다)는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의 세인트 앤에서,

 백인 영국 장교와 그에게서 버림받은 흑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말리는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의 ‘트렌치 타운’에서 자랐는데 이곳은 가난하고 치안의 행정력도 미치지 못해 범죄에 취약한 슬럼가였지요.

 

 철저한 흑인 중심 사이에서 백인 아버지의 피가 섞인 탓에 붉은 피부를 지녔던 밥 말리는 놀림과 배척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이 시대는 사회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때였기 때문에 뒷골목 부랑아로 산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요.

 싸움을 일삼아 거리를 누비는 그였지만, 말리는 그 속에서의 체험으로 흑인들의 ‘박탈감’을 깊게 인식했으며

그 시절의 기억은 후에 노래하는 메시지의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 때의 기억을 담은 노래로 <No Woman, No Cry>가 있기도 하지요. 가사를 보면

 

 

 

트렌치 타운 관청의 뜰 앞에서 위선자를 응시하던 때가 생각나네

그들이 친구들 속에 끼어 있을 때 우린 한상 좋은 친구를 잃었지

 

과거는 잊을 수 없어

눈물을 말려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말리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용접을 배우다가 열여섯 살, 노래대회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합니다.

더불어 노래대회에서 밥의 실력을 눈여겨 본 자메이카의 가수 겸 작곡가인 힉스의 눈에 띄어 음악의 가르침을

받게 되지요.

 

 힉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음악에 열중하게 된 말리와 그의 친구들은 어느 날 자메이카의

 음악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유명한 음반제작자인 콕손(Coxsone Dodd)의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고,

그곳에서 우승을 거머쥔 그들은 1963년, 발리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밴드 ‘웨일러스(Wailers, 울부짖는 사람들’를

결성합니다. 거기서 말리는 그룹의 기타리스트였고, 결국엔 보컬리스트가 되지요.

 

  밥 말리의 노래하는 삶

 

 

  자메이카에는 ‘스카리듬’(자메이카인들은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을 접한 뒤 민속음악인 멘토와 R&B,

 거기에 관악기 소리를 포함시켜 흥겨운 느낌을 주는 ‘스카리듬’을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사전)이라는 게 있는데 말리는 이 스카리듬을 2박자, 4박자를 강조하며 좀 더 경쾌한 비트로써 바꾼,

 즉 토속음악과 미국 ‘리듬 앤 블루스’가 결합된 새로운 음악인 ‘레게(Reggae)리듬’을 수단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노래의 메시지는 흑인해방 사상과 자신들의 고향이자 약속의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였지요.

 

이렇게 캐리비안海 쿠바 아래 조그만 섬나라 자메이카에서 온 밥 말리와 웨일러스(Bob Marley & the Wailers)의

 레게음악은 70년대 영국에서 소개된 후 유럽을 뒤흔들게 됩니다.

 

 

  말리는 <No Woman, Co Cry><One Love><Exodus><Jamming><Redemption Song><Burralo Soldiers><Get Up, Stand Up>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유럽에서 ‘레게의 황제’로 부상하게 됩니다.

 

 특히나 1974년 에릭 클랩턴(Eric Clapton)이 그들의 노래 <I Shot the Sheriff>를 부르고 순회공연을 하면서

 미국에서까지 레게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지요.

밥 말리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노래를 통한 소통’, ‘민중의 화합’ 등으로 채우기를 추구했습니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하지만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를 듣게 할 수 있다.”

 

 

  말리는 노래운동의 가치를 확신했습니다.

아프리카를 조국으로 아프리카인들이 단결하고 각각의 국가가 독립하기 위해

기득권자와 싸우는 정신을 세계로 알리며 ‘제3세계’ 음악적 태동을 예고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1976년, 자메이카 총선을 앞두고 인민국가당을 지지하는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던

밥 말리는 공연도중 아내와 매니저, 그리고 자신의 팔이 크게 다치는 총기 테러를 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2년간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지요.

 

  2년 뒤인 1978년, 밥 말리의 고국 자메이카가 내전 상태에 돌입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그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 평화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극한의 내전 상황에서 자메이카 수상과 반민 지도자를 무대로 불러내 손을 맞잡게 한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사례로 회자되는 장면이지요.

 

 

 

 

                                                                                                                                          

 

 

자메이카에서 사회주의 노선과 친미적 노선과의 대립이 한창일 때, 말리는 대중들에게 “너는 어느 편인가?”

에 대해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는 거절했다.

(실은 사회주의 노선인 인민국가당을 지지했다)

 

  그러던 차에 괴한의 총격으로 팔 관통상을 입은 말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영국으로 망명을 간다.

말리가 돌아온 2년이 지난 78년에도 자메이카는 사회주의 ‘인민국가당’과 친미노선의 ‘자메이카 노동당’은

 여전히 유혈사태와 정치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 때 정치 단체에서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연을 개최했고, 말리는 그곳에 참가했다.

 여기서 <One Love>를 부르며 여당(인민국가당)과 야당(자메이카 노동당)의 화해를 주선했다.

 

  1978년 평화콘서트를 위해 다시 자메이카를 밟은 밥 말리는 그의 노래 <One Love>를 부르며,

 예정에 없던 이벤트를 벌입니다. 양쪽으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자메이카의 두 수뇌부 ‘마이클 맨리’와 ‘에드워드 시가’를 무대 위로 부른 후, 둘의 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 위에서 두 손을 맞잡게 합니다.

 

그 아래에서 밥 말리는 “이제 자메이카에 평화가 왔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노래를 마무리합니다.

 만리와 시아가는 곧 불편해 하는 기색을 드러내더니 다시 손을 놓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말리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자기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아는 거지.” 그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밥 말리가 연출한 이벤트가 자메이카를 바꾸진 못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자메이카의 민중들은

 화합에 대한 희망의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죠.

 

  밥 말리의 말, “음악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바꿀 수 있다는 기대를 준다.” 어때요? 그런 기대만이라도

 충분하지 않은가요.

 

 Money cat't buy life

 

  유럽은 휩쓸었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거의 무명이다시피 했던 말리는 1980년 9월,

매디슨스퀘어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 ‘코모도스(Commodors)’ 콘서트의 오프닝 밴드 자격으로

뉴욕 땅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콘서트를 앞두고 조깅을 하던 중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 암 말기 진단이 내려지게 되지요.

 

영국에서 축구를 즐겼을 당시에도 발가락 질환으로 다리를 자르느냐 마느냐 지경까지 갔다 온 이력이 있기도 했던

 말리. 검사 결과 뇌에 악성종양이 몸 전체에 퍼져 있었고, 미국에서 막 이름이 알려질 무렵 말리는 서른여섯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미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말리는 1980년 9월 23일 피츠버그의 스탠리시어터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투어 콘서트를 전면 취소하고

 투병기에 들어갑니다.

 한겨울 독일의 바바리아 클리닉에서 키모테라피와 식이요법을 받으며 암과 투병하지만

상황이 위급해져 1981년 5월, 마이애미를 경유해 자메이카로 가던 중 마이애미 병원으로 호송되었고,

다음날인 5월 11일 눈을 감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 지기 말리에게 한 말은 “Money can't but life”라고 하네요. “돈으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단다.”

 

 

 [출처] 밥 말리(Bob Marey)| 작성자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