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k Floyd - Another Brick In The Wall
Another Brick In The Wall
We don't need no education.
우린 교육 따위 필요없어요.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 그런 교육은 원치 않습니다
No dark sarcasm in the classroom.
교실에서의 혹독한 야유는 이제 그만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선생님, 애들을 그냥 내버려둬요
Hey,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이봐요 선생님들, 우릴 이대로 그냥 놔두세요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우린 그저 벽 속의 마찬가지 벽돌들일 뿐이었죠
All in all you're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선생님도 마찬가지, 벽 속의 똑같은 벽돌들일 뿐입니다
The Wall
Speak To Me / Breath / on The Run
Time
The Great Gig In The Sky
Money
73년 3월에 발표된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세월이 흘러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단순히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만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관련 이야기, 자료,
그리고 사실들이 있어 [The Dark Side Of The Moon]앨범 리뷰를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엮어봤다.
소개
앨범은 1973년 3월 24일 영국에서 발매되었지만, 사실상 그 준비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1971년 말,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는 새로운 서사시 'Eclipse'의 작곡과 리허설에 몰두했으며, 1972년 초 런던에 있는 레인보우 극장
(Rainbow Theatre)에서 초연을 가졌다.
그때의 공연은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다소 축소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신디사이저의 사용이 줄고 피아노와 기타의 연주가 주를 이룬 공연이었다.
Eclipse의 초연 홍보를 위한 프로그램에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가사를 담고 있었으며, "조화된 광인들을 위한 한편의 조곡"이라고 서술했다.
핑크 플로이드가 미국에서 순회 공연을 가질 때에도 그들 공연의 절반을 'Eclipse'로 연주하였듯이, 1972년 6월 그들이 [Dark Side]를 레코딩하기 시작하였을 때에도 'Eclipse'에 중점을 두고 자주 라이브로 연주를 하였다. 'Eclipse'는 넓게
본다면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같았지만, 'On The Run'과는 다르게 'Eclipse'는 원래의 실황 연주 형태에서 완전히 바뀌어 스튜디오에서는 새로운 버전으로 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Speak To Me'도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통계
1. 1980년 한해동안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미국 앨범 차트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캐롤 킹(Carole King)의 앨범 [Tapestry](캐롤 킹의 앨범은 총 302주를 기록했다)를 추월하였고, 1983년에는 490주간 차트에서 머물렀던
자니 마티스(Johnny Mathis)의 앨범 [Johnny's Greatest Hits]의 기록도 넘어섰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또한 발매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2,500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2.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724주를 기록하고서 미국 앨범 차트에서 사라졌다가, 다음달 (1988년 5월)다시 차트에 등장하여 11주를 더 머물렀다.
그후로도 몇 주를 더 머물러 총 740주로 자니 마티스의 앨범보다 250주간을 더 머무는 기록을 세웠다. 728주는
14년이라는 시간과도 같으며, 70년대를 통해 발표된 그 어느 앨범도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기록에
접근하지 못했다.
더욱 재미있는 비교로서 [The Dark Side Of The Moon]보다 2년 전에 발표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네 번째 앨범 [Led Zeppelin Ⅳ(Untitled)]는 1985년까지 250주까지밖에 기록하지 못했고,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도 총 200주를 넘지 못했다.
3.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미국 차트에 연속해서 591주(1976년12월 18일부터 1988년 4월 23일)를
기록했지만 골드 디스크 상밖에는 받지 못했다.
그것은 1976년 1월 1일 전에 발표된 것에 대해서는 플래티넘 디스크가 수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빌보드
(Billboard)차트와 관련된 통계 연감의 편집자이며 'Record Research'의 조엘 위트번(Joel Whitburn)은 "기록은
깨지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것과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라고 핑크 플로이드 앨범의 기록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였다.
4.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영국 앨범 차트에는 2위까지 올랐었는데, 당시 차트의 정상은 데이빗 보위
(David Bowie)의 [Aladdin Sane],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편집음반 [Pure Gold], 그리고 David Essex가 주연한 영화의 사운드 트랙인 [That'll Be The Day]가 정상을 지켰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은 301주간 차트에 머물면서 영국 차트 사상 6번째로 오래 머문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당시의 앨범 Review들
"앨범 타이틀이 의미하는 것처럼 우주적이지는 못하다. 처음의 반 이상은 무정형과 혼돈뿐이다." 어떤 평론가는 그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룹은 하나의 록 밴드라기보다는 음향 효과그룹으로 전락했으며, 음향 효과만 과다하고
응집력 있는 음악은 미비하다."
NME(New Musical Express)의 토니 타일러(Tony Tyler)는 "앨범은 심장소리로 시작해서 심장소리로 끝나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그룹의 전자 공학적인 삶의 여행을 담고 있다.
"또한 그는 "분명히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앨범 슬리브에 가사를 담을 정도로 가사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그 앨범을 만든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던 하나의 상업적 사건이다."
Nick Mason : "이 레코드는 지난 두 세기 동안 나온 가장 훌륭한 2, 30장의 앨범보다 더 깜짝 놀랄 만큼 훌륭하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바로 올바른 생각과 음악이었다.
또한 쟈켓 커버 그 자체도 훌륭했다. 그러한 것들은 바로 가장 이상한 종류의 결합이었다."
엔지니어 알란 파슨스(Alan Parsons)
알란 파슨스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작업 이후 그 자신의 레코딩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엔지니어로서 참여한 첫 번째 록 앨범이었다.
난 어떠한 과정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어리석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일했다.
왜냐하면 나는 핑크 플로이드 외에도 나와 함께 일하고자 원하는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와는 오후부터 일하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작업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난 작업을 하면서 나의 기여가 뭔가 좀 특별하기를 원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이 앨범이 그처럼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리라
예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앨범 슬리브
그 디자인은 Hipgnosis의 Aubrey Powell과 Storm Thorgerson이 한 것으로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프리즘의 아이디어는 그룹과의 연속적인 대화에서 이끌어 내어진 것으로 특히 Roger와 Rick으로부터였다. Roger는
야망의 광기인 -삼각형이 야망의 상징- 순회공연의 압박감에 대해서 얘기했다.
앨범 디자인의 일부로서 이너 스프레드(Inner Spread) 부분에 심장 박동을 집어넣는 것은 로저의 아이디어였다.
피라미드는 하나의 커다란 물리적인 삼각형을 상징한다. 진짜 피라미드는 반월하에서 촬영된 것이다.
당시 촬영은 하나의 무시무시한 체험이 되었는데, 달빛아래의 피라미드는 하나의 장관을 넘어서는 오싹함이었다."
크리스 토마스([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믹스한 사람)
되었다.
그룹과도 안면이 있었고 그들은 레코드 작업의 마무리로서 날 프로듀서로 참여시키기로 이미 결정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참여한 시점에서 그들은 이미 완전히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끝낸 상태여서, 글자 그대로 믹싱의
문제만이 남아있었다.
다만 그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바꾸고자 원하는 독주 부분이나 어떤 노래들에서 뭔가 특별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 작업에 참여하는 나에게서 오래된 여러 부분의 수정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다소의 수정이 있은 후의 레코드는 6개월 전에 내가 테이프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확실히 많이
나아져 있었다."
트랙
1. (a) Speak To Me
앨범 시작 부분의 음향 효과 몽타즈는 닉 메이슨(Nick Mason)의 아이디어였다. 드러머로서 메이슨의 작곡은 대부분
일반적인 가사나 음악보다는 아이디어에 기인한다.
데이브 길모어(Dave Gilmour)는 그것을 "곡의 후반에 진행된 것으로부터 기인한 작은 콜라주 단편"이라고 묘사했다.
(b) Breathe In The Air 데이브 길모어가 노래를 했다.
노래는 또한 'on The Run'과 'Time'에 각각 소개되어 있고, 앨범 전반에 걸쳐 폭발되는 삶의 중압감을 표현한다.
2. on The Run
이 연주곡은 데이브 길모어와 로저 워터스(Roger Waters)에 의해 쓰여졌으며, 'Breath'와 'Time'을 연결하고 있다.
엔지니어인 알란 파슨스는 이 곡이 미국의 FM에 알맞으며, 세 곡이 함께 방송될 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무정한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공연 매니저인 Roger The Hat로부터 나왔다.
그룹은 트랙에서 들리는 어떤 음향 효과를 창조하기 위하여 VCS3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 데이브 길모어는 이 기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EMS라는 회사가 지구상에서 최초로 만든 전압이 조절되는 신디사이저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전에 이 신디사이저를
들었는데, 그것은 비틀즈가 [White Album]에 사용했던 것으로 몇 톤의 전선과 물건이 딸린 커다란 무그(Moog)였다.
그후 VCS3이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소개했고 'on The Run'의 배열이 끝났을 때 사용했다."
3. Time
그룹의 네 멤버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노래는 데이브 길모어와 릭 라이트(Rick Wright)가 했다.
닉 메이슨의 타악기적인 사운드는 Rototoms(Drums)에 의해 프로듀서 되었다.
이 노래의 초기 라이브 버전은 원래 절반 가량의 템포로 연주되었었다.
가사를 쓴 로저 워터스는 회상 속에서만 인지되어 질 수 있는 삶의 흐름 속도에 관한 노래라고 하였다.
이 곡은 또한 미국에서 발매된 두 번째 싱글 'Us And Them'의 B면에 담기기도 하였다.
데이브 길모어에 따르면 알란 파슨스는 앨범 사운드 효과를 위해 한 가게에서 시계 소리를 녹음했다고 했다.
닉 메이슨: "우리는 그 노래의 시작 부분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했었고, 누군가가 말하기를 '우리는 이것을 두 주일 전
시계로 가득 찬 한 가게에서 녹음을 끝냈어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테이프를 듣고서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지요.
Rototoms와 함께 한 음악의 도입부는 그전에 모두 작업을 끝냈었죠.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것의 효과적인 것을 고르지 않는다는 것에 놀라곤 하죠.
그것은 하나의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인데 말이에요.
그러한 대조가 사물에 색과 공간을 부여하죠."
4. The Great Gig In The Sky
원래는 두 가지 부분이었는데, 그 하나는 성경의 낭독을 수반하는 키보드 악구였고, 다른 하나는 키보드 연주에 뒤따르는
어떤 말들이었다.
곡은 키보드 주자인 릭 라이트(Rick Wright)에 의해 쓰여졌는데, 그에 따르면 이 곡은 죽음의 공포에 관한 노래라고 한다.
그룹은 자주 순회 공연을 하였고 그래서 삶의 상당 부분을 여행에 쏟아 부었는데, 바로 그러한 가운데서 완성된 곡이다.
노래는 현 보컬리스트인 클레어 토리(Clare Torry)에 의해 불려졌는데 그녀는 알란 파슨스가 추천하였다고 한다.
닉 메이슨: "이 곡은 릭이 만든 작품이지요. 아주 훌륭한 코드의 연속이 돋보이지요."
5. Money
로저 워터스에 의해 쓰여졌고, 노래는 데이브 길모어가 불렀다.
'Money'는 핑크 플로이드가 가장 자주 연주한 곡이며(후에 라이브 앨범과 편집 앨범에도 등장한다), 또한 미국에서
톱 10을 기록한 가장 히트한 핑크 플로이드의 싱글이었다(영국에서는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다).
이 곡은 후에 데이브 길모어와 닉 메이슨(1981년 핑크 플로이드 라인업)에 의해 다시 레코딩되어 베스트 편집음반인
[A Collection Of Great Dance Song]에 실렸는데, 그것은 오리지널 버전이 미국에서의 발매 레코드 회사가 틀린
관계로 원래의 레코딩을 편집 앨범에 담을 수 없었다.
그룹과 친했으며 데이브의 친구였던 딕 패리(Dick Parry)가 오리지널 버전의 색소폰을 담당한 바 있었는데, 재녹음에서도 오리지널 색소폰 부분을 다시 연주하였다.
데이브 길모어: "데모 테입은 로저의 어쿠스틱 기타와 노래로 이루어졌었다." 금전 등록기의 소리는 Tape Loop으로
만들어졌다.
싱글 'Money'가 차트에 10위로 올랐을 때 모든 것들이 변하였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우리들은 미국을 순회 공연할 때
1만 명에서 1만 5천 명 사이의 관중들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마지막에서만 박수를 칠뿐 아주 조용했었다.
우리는 모든 연주를 할 수 있었고 -아마 여러분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핀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근사했었다. 아무도 공연 중 소리지르지 않았고 그것이 참으로 좋았었는데, 그 싱글 이후의 순회공연은
어떤 면으로 봐서는 완전히 악몽이었다.
그렇게 열광적인 사람들과 함께 공연하는 것은 멋진 일이었지만,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은 고함치는 것과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 우리가 무대 위에서 서로 쳐다보며 '그들이 언제 멈추지'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Money'를 외쳤는데, 정말 그것은 믿을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음악을 바꾸게 하였다. 왜냐하면 아주 조용한 가운데서만 행해질 수 있는 연주들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어차피 피장파장이었다. 뭔가를 많이 얻으면 상대적으로 뭔가를 조금 잃기 마련 아닌가."
6. Us And Them
영화 사운드 트랙 [Zabriskie Point]를 위해 쓰여졌던 연주곡 'The Violent Sequence'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진 곡으로, 당시 감독인 Michaelangelo Antonioni에 의해 거부되었었다.
로저 워터스와 릭 라이트에 의해 쓰여졌고, 노래는 로저와 데이브가 불렀다.
이것은 로저 워터스가 빈부의 심한 격차를 묘사한 것으로, 특히 집이 없고 굶주린 사람들을 얘기하고 있다.
이 곡은 두 번째 싱글의 A면으로 미국에서 발매되었지만 차트에 진입하는데는 실패했다.
데이브 길모어: "원래 이 곡은 릭에 의해 쓰여졌고, 1969년 [Zabriskie Point]에 우리가 쓰기 전에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 곡은 영화에서 UCLA 데모 장면에 넣으려고 했었는데, 감독의 거부 이유를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짐 레드: "이 노래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성을 말하고 있어요. 이것은 사회에 의해 강요된 전쟁이나 가난, 그리고 인종의
벽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7. Any Colour You Like
Money의 B면으로 발매되었었고, 곡은 데이브 길모어, 닉 메이슨, 그리고 릭 라이트에 의해 쓰여졌다. 길모어는 이 곡은 "하나의 음악적 간주곡이다"라고 했다.
8. Brain Demage
이 노래는 앨범의 제목을 포함하고 있다. 로저 워터스는 1990년대에 짐 래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래드: "이 곡은 시드 배럿(Syd Barrett)에게 일어난 일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곡이 보다 더 진실한 인간의 삶의 내부에 관한 노래라고 본다."
워터스: "옳다고 봅니다.
다소 개인적인 것인데,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고리의 연결을 갈망하지만 가난하게 태어나서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 관한 것이죠 우리 중 다수가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끔찍한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어린이를 어른들이 조종하고 통제해 버리고,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에 복종하죠."
래드: "당신은 달의 어두운 면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나요?"
워터스: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러한 생각들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노래에는 마지막 구절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우리가 포용해야 하는 것들이죠. 그러나 우리는 포용할 수 없었어요.
왜냐면 우리는 당황했기 때문이죠."
래드: "그건 마치 광활한 우주적인 농담 같군요. 거기에 답이 하나있죠. 신, 바로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이 멋진데, 당신은 거기에 접근하지 않았어요."
워터스: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노래이죠."
래드: "당신은 20년 전에 쓴 가사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군요. 지금 당신의 가치관은 당신이 그 노래를 만들었을 때보다
달라져 있지 않나요?"
워터스: "그래요, 그렇지만 난 아직 대다수는 불행하게도 '화합'을 결코 포용하지 못할 것 같다고 느껴요."
9. Eclipse
이 곡은 반복의 송가와 함께 앨범의 대단원이며, 로저 워터스에 의해 쓰여졌다.
데이브 길모어의 종언
"로큰롤 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가지게 되고, 그 모든 꿈을 성취했을 때 '다음에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 거야?' 하는 생각의 단계에서 아주 혼란함에 빠지지요.
아주 성공적인 레코드를 마치고, 진정으로 꿈을 성취하고 -여기서 꿈이란 엄청난 히트와 판매량, 그리고 굳이 당신이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스타덤에 오르는 것- 그런 다음 혹은 그 다음 해에 멤버 모두에게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어요.
어느 날 난 갑자기 깨달았죠. '난 정말 이런 것을 하고 싶어. 난 이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 그리고 차츰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갔죠. 뭔가 더 가야하고 해야할 것이 있었다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이정표였어요."
자료제공 / EMI 팝 마케팅부
사이키델릭 록에서 출발하여 블루스에 기반한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발전시켜 전세계의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록 팬들을
사로 잡은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는 1965년에 영국 런던의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
(Regent Street Polytechnic, 현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만난 세명의 동창생인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리처드 라이트'를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 '시그마 식스(Sigma 6)'에서 출발하였다.
평화주의자였던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는 영국 노동당(Labour Party)의 당원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저 워터스의 아버지는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구급차를 몰면서 평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의 피해가 커지며 전쟁이 확산되자 평화 운동을 포기하고 영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로저 워터스가 생후 5개월째 되던 해인 1944년 2월 18일의 이탈리아 안치오(Anzio) 전투에서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이로인해 로저 워터스는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못한채 성장해야 했으며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아픔이 자신의
내면 속 깊은 곳에 커다란 상처로 자리 하게 된다.
케임브리지(Cambridge) 시의 몰리 메모리얼 초등학교(Morley Memorial Junior School)에 입학한 로저 워터스는
이 학교에서 자신의 3년 후배인 '시드 베렛(Syd Barrett)'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후일 로저 워터스와 함께
핑크 플로이드를 결성하게 되는 인물이다.
한편 로저 워터스가 다니던 몰리 메모리얼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인근의 퍼스 초등학교(The Perse School)에는
'데이비드 길모어'가 시드 베렛과 같은 시기에 입학하여 신입생으로써 첫 걸음을 떼고 있었다.
로저 워터스는 아버지로 부터 받은 영향으로 십대 시절 영국의 청소년 평화 단체인 YCND(Youth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에 가입하여 평화 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고교 시절에는 럭비와 크리켓 팀의 일원으로 활발히 교내 활동에 참여하며 학창 시절을 보낸 후 1962년에 런던의 종합 기술 전문 학교인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의 건축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열두살 때 부터 스스로 기타를 치며 악기 연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리처드 라이트는 이후 피아노와 트럼펫으로 까지
관심의 폭을 넓혔으며 십대 시절 음악 학교에 들어가 음악 이론을 공부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1962년에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 입학한 리처드 라이트는 학교에서 로저 워터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자주
어울려 다니며 연주 활동을 하다 1963년 9월에 시그마 식스의 결성에 참여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던 빌 메이슨(Bill Mason)의 아들로 태어난 닉 메이슨은 사립학교인
프랜침 하이츠 스쿨(Frensham Heights School)을 거쳐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으며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 로저 워터스와 리처드 라이트를 만나 그들과 함께 시그마 식스를 결성하게 된다.
시그마 식스는 세사람 외에 '키스 노블(Keith Noble, 보컬)'과 '클라이브 멧켈프(Clive Metcalfe, 베이스)'등이 참여했던 밴드로 리젠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 지하에 위치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찻집을 무대로 공연 활동을 하며 밴드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시그마 식스는 '메가데쓰(The Meggadeaths)', ' 아브답스(The Abdabs)', '스크리밍 아브답스
(The Screaming Abdabs)', '스펙트럼 파이브(Spectrum Five)'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활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밴드의 변동이 있었으나 로저 워터스를 비롯한 리처드 라이트와 닉 메이슨은 밴드의 주축으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 나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65년에 이르러 스펙트럼 파이브는 '티 세트(The Tea Set)'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4인조 구성의 밴드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티 세트에는 로저 워터스, 리처드 라이트, 닉 메이슨 외에 로저 워터스와 어릴적 부터 친구로 지내던 시드 베렛이 이때 부터 가입하여 주도적인 역할로 밴드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다.
또한 시드 베렛이 주도하는 밴드 체제로 바뀌면서 밴드 이름도 다시 바꾸게 되는데 1965년 가을 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이름은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Pink Floyd Sound)'였다.
이 이름은 시드 베렛이 소장하고 있던 음반의 주인공들인 블루스 연주자 핑크 앤더슨(Pink Anderson)과 플로이드
카운설(Floyd Council)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라는 긴 이름이 핑크 플로이드로 짧아진 것은 1966년 초였다. 당시 마키 클럽(Marquee Club)에
출연하던 핑크 플로이드는 사이키델릭 조명을 이용한 조명 쇼를 자신들의 무대에 첨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환각적인
조명 효과는 청중들에게 색다른 체험을 안겨주며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클럽에서 인기가 높아감에 따라 음반사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핑크 플로이드는 마침내 이엠아이 음반사(EMI Records)와 음반 계약에 성공하고 1967년 9월에 음반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발표하며 데뷔하게 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사이키델릭 음악을 대표하는 곡들인 'Arnold Layne'과 'See Emily Play'를 데뷔 음반 보다 먼저
싱글로 발표했었던 핑크 플로이드는 데뷔 음반 발표 후 그해 12월에 데이비드 길모어를 새로 가입시켜 5인조 구성으로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당시 데이비드 길모어는 자신이 1962년 부터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던 블루스 록 밴드 '조커스 와일드(Joker's Wild)'와 함께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치며 거리 공연을 벌이다 막 영국으로 돌아와 있었던 상태였었다.
그런 그에게 닉 메이슨이 찾아와 핑크 플로이드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5인조가 된 핑크 플로이드는 데뷔 음반 보다 진일보한 사이키델릭 음악을 두번째 음반인 'A Saucerful of Secrets'를 통해 선보이게 되는데 이 음반은 1968년 6월에 발표되었다.
하지만 두번째 음반이 발표되기 전인 3월에 시드 베렛은 마약 복용에 의한 후유증으로 밴드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려워
이미 밴드에서 탈퇴한 상태였다. 이로써 핑크 플로이드는 다시 4인조 구성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1969년 9월에 영국에서 개봉된 바벳 슈로더(Barbet Schroeder) 감독의 영화 '모어(More)'의 사운드 트랙 음반인
'More'를 1969년 7월에 세번째 음반으로 발표한 핑크 플로이드는 이 음반에서 처음으로 효과음으로 새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핑크 플로이드는 그해 11월에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녹음으로 구성된 두장짜리 음반인 'Ummagumma'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 음반은 'More' 음반에서 시작된 효과음 사용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채용되기 시작한 음반이기도 하다.
1970년 음반 'Atom Heart Mother'에서 'Alan's Psychedelic Breakfast'를 통해 사이키델릭의 정수를 보여준 핑크
플로이드는 다음해인 1971년에 대곡 'Echoes'가 수록된 음반 'Meddle'을 발표하였으며 1972년 6월에 두번째 사운드
트랙 음반인 'Obscured by Clouds'를 발표하게 된다.
'Obscured by Clouds' 음반의 수록 곡들은 1972년 7월에 개봉되었던 바벳 슈로더 감독의 프랑스 영화 '구름에 가린
계곡(La Vallee)'에 사용되었다.
사운드 트랙 음반 작업으로 한숨을 돌렸던 핑크 플로이드는 1973년 3월 23일에 록 사상 최대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음반인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발표하여 밴드 결성 이래 최대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사이키델릭 성향의 음악적인 분위기가 많이 걷혀진 이 음반은 'Meddle' 음반에서 부터 발휘되기 시작한 데이비드 길모어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 음반으로 블루스적인 요소가 이전 음반들에 비해 더욱 짙어진 음반이기도 하다.
완전한 프로그레시브 록으로의 전향을 의미하는 음반인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빌보드 앨범 차트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741주(1973년 부터 1988년 까지) 동안을 차트에 머물렀던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The Dark Side Of The Moon' 음반은 수많은 시계 종소리로 시작하는 'Time'과 금전 등록기 소리로 시작하는
'Money'가 양대 명곡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들 두곡 외에도 초청 가수인 클레어 토리의 처절한 스캣이 심금을
울리는 'The Great Gig In The Sky'와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외치고 있는 'Brain Damage', 그리고 음반에서 가장 긴
대곡인 'Us And Them'등도 빼 놓을수 없는 명곡들이다.
인간 내면의 탐욕과 갈등이 시간의 흐름으로 연결되면서 정신 질환으로 까지 이어진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음반은 인간 탐구를 그 근본으로 하고 있는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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