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lida-Quelques Larmes De Pluie(빗물과 눈물)
Quelques Larmes De Pluie
(빗물과 눈물)
J'ai connu un pays
Ou le soleil a disparu du monde
Aujourd'hui c'est la pluie
Que pleure le ciel
Tant sa peine est profonde
Mon coeur s'est endormi
Pour quelques larmes de pluie
J'ai connu un pays
Ou le soleil a disparu du monde
- musique -
Mon cœur s'est endormi
Pour quelques larmes de pluie
J'ai connu une enfant
Dont les amours se voulaient loin du monde
Et depuis tout ce temps
Je vois mon ciel noye de plages blondes
J'ai connu un pays
Ou le soleil a disparu du monde.
빗물과 눈물은 같아 보여요
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날에는
눈물을 빗물인 것처럼 속일 순 없어요
마음에 상처를 입고 당신이 눈물 흘릴 때
그것이 단지 빗물일 뿐이라고
그런 척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 동안 당신의 푸른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수없이 봐 왔어요
빗물과 눈물은 같아 보여요
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날에도
눈물을 빗물인 척 속일 순 없어요
나를 사랑의 눈길로 봐주세요
이제 난 사랑이 뭔지 알고 싶어요
이렇게 햇살이 비치는 날의 빗물과 눈물
당신은 당신의 가슴 속에서
무지개빛 물결을 느끼죠
빗물과 눈물은 같아 보여요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희망이 보일 것 같지가 않아요
빗물과 눈물은 같아요
하지만 햇살 아래에선
당신은 흐르는 눈물을
빗물이라고 할 수 없어요.
수십년에 걸친 스타로써의 대중적인 명성과 레코드 판매고를 들자면마이클 잭슨, 프랑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래슬리,
비틀즈등 남자가수와여자가수로는 마돈나인데,이러한 존재의 마돈나와 비견될만한 유일한 여성은 이탈리아계 프랑스
가수 '달리다' 뿐이다.
1933년 1월 1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생, 이집트 교외에서 성장하였고,'달리다'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 이주한 사람이었고,'달리다'의 아버지 삐에뜨로(Pietro)는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 바이올린연주자로 일한바 있어
'달리다'는 어릴적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다.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이태리계인 그녀는 1954년 'Miss 이집트'로 뽑혔고, 같은 해 말에 파리로 건너갔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앞세워 프랑스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데뷔곡 'Bambino (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디스크가 백만장이 팔리는 대히트로 가수 '달리다'가 탄생하였고, 인기 샹송가수로 발돋움하여 무려 1000 여곡에
이르는 곡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화려한 출세에 비해 어수선하였다.
2살 연하 알랭 드롱을 비롯한 몇몇 남자들과 염문을 뿌린뒤 라디오 프로듀서인 뤼시앵 모리스와 결혼했지만,
불과 석달 뒤 화가 장 소비에스키와 결합하였다.다시 소비에스키와 헤어진 뒤 이탈리아 가수겸 작곡가 루이지 텡코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텡코는 '달리다'가 자신의 곡 '차오 아모레 차오(Ciao amore ciao)'가 '산레모 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지
못하자 자살해버렸다.
그후 달리다의 첫 남편 모리스도 자살했다.
사랑했던 사람마다 자살로 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드라마와 같은 일이지요.
'달리다'는 영어권 국가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 중동, 일본에서는 대중의 우상으로 군림하였다.
자살하기 한해전 그녀는 지친 몸으로 영화 촬영을 위해 고향 카이로를방문했다.
고향 사람들의 환대는 그녀 자신도 놀랄만큼 뜨거웠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활기로 충전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활기는 활짝 피어난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평생의 절반을 우울증에 시달려 1987년 5월 3일 55세
나이에 자살,파란만장했던 生을 스스로 마감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우리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지금 애절하게 흘러나오는 'Quelques Larmes De Pluie' 는 그리스 출신의 3인조 남성밴드인 'Aphrodite's Child' 의
'Rain and Tears' 곡을 'Dalida' 자신만의 신비한 분위기로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 ..
Dalida
1933년 이집트 카이로의 이탈리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Cairo Opera House)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다.
1950년 지역 미인 대회인 미스 온딘(Miss ondine)에 출전해 우승했고, 곧바로 카이로의 패션 센터 도나(Donna)에서 모델로 일했다.
1954년 이집트 최고의 미인대회인 미스 이집트(Miss Egypt)에서 ‘미스 이집트’로 뽑혔다. 그해 오마 샤리프
(Omar Sharif) 주연의 영화 《조제프 에 세 프레르(Joseph Et Ses Frères)》에 캐스팅되며 배우로 데뷔했고,
이후 십 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54년 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샹젤리제거리에 위치한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올랭피아(Olympia) 극장의 소유주 브뤼노 코카트릭스(Bruno Coquatrix), 프랑스 라디오 방송국 유럽
1(Europe 1)의 제작자 뤼시엥 모리스(Lucien Morisse), 음반사 바클레이 레코즈(Barclay Records)의 대표
에디 바클레이(Eddie Barclay)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1956년 데뷔싱글 <마돈나(Madona)>를 발표하며 음반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발표한 싱글 <밤비노>로 (1957년 기준) 프랑스에서 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샤를 아즈나부르
(Charles Aznavour)의 올랭피아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1950년 후반 <곤돌리에(Gondolier)>(1957), <코메 프리마 (튀 므 돈느)(Come Prima (Tu Me Donnes))>
(1958), <차오, 차오 밤비나 (피오베)(Ciao, Ciao Bambina (Piove))>(1959)를 히트시켰다.
또한 1958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이집트, 이탈리아, 미국에서 콘서트를 펼쳤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보컬 그룹 드리프터스(The Drifters)의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포 미(Save The Last Dance For Me)>와 미국의 포크 가수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웨어 해브 올 더 플라워스 곤?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을 각각 프랑스어로 개사해 부른 <가르드 무아 라 데르니에르 당스
(Garde-Moi La Dernière Danse)>(1961)와 <크 송 드브뉘 레 플뢰르?(Que Sont Devenues Les Fleurs?)>
(1962)를 히트시켰다.
1965년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음악을 맡은 영화 《희랍인 조르바
(Alexis Zorbas)》의 테마음악에 노랫말을 붙여 노래한 <라 당스 드 조르바(La Danse De Zorba)>를 히트시켰다.
1967년 1월 당시 연인 관계였던 이탈리아의 신예 싱어송라이터 루이지 텐코(Luigi Tenco)와 함께 제17회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San Remo Festival)에 출전해 루이지 텐코가 작곡한 노래 <차오 아모레 차오(Ciao Amore Ciao)>를 함께 불렀다.
그러나 산레모 가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것에 비관해 루이지 텐코가 1967년 1월 27일 호텔 방에서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았고, 한 달 후 자신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1967년 10월 5일 올랭피아에서 재기 무대를 가졌고, 1970년 그리스 칼림노스섬(Kalymnos Island)의 민요를
새롭게 재해석한 <달라 딜라다다(Darla Dirladada)>를 히트시켰다.
그러나 1970년 9월 전(前) 남편이자 매니저였던 뤼시엥 모리스 역시 자살을 하면서 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에도 주변 인물들의 자살은 계속되어 1975년에는 친구이자 가수인 마이크 브란트(Mike Brant)가, 1983년에는
한때 연인 사이였던 리샤르 샹프레(Richard Chanfray)가 자살했다. 결국 달리다는 활동기간 내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1973년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과 함께 부른 듀엣곡 <파롤 파롤>(1973년 프랑스 싱글차트 1위)을
히트시켰다.
1970년대 후반까지 <지지 라모르소(Gigi L'amoroso)>(1974), <일 브네 다부아 디즈위트 앙
(Il Venait D'avoir 18 Ans)>(1974), 디스코 스타일의 <자탕드레(J'attendrai)>(1975), 이집트 민요를
재해석한 <살마 야 살라마>(1977)와 같은 노래를 히트시켰다.
1978년 11월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Carnegie Hall) 무대에 섰고, 1980년대 중반까지 <제네라숑 78(Génération 78)>(1978), <헬와 야 발라디(Helwa Ya Balady)>(1979), <무리르 쉬르 신(Mourir Sur Scène)>(1983), <솔레유(Soleil)>(1984)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1986년 유세프 샤힌(Youssef Chahine) 감독의 이집트 영화 《르 시지엠므 주르(Le Sixième Jour)》에 출연했고,
1987년 초 터키 앙카라(Ankara)에서 라이브 무대를 펼쳤다.
그러나 깊은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7년 5월 3일 파리 몽마르트르의 자택에서 ‘인생은 너무 견디기 힘들어요.
날 용서해주세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달리다는 샹송 발전에 기여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어, 아랍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독일어 등 10 여 개 국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며 월드뮤직 대중화에도 이바지했다.
대표곡으로 <밤비노>, <파롤 파롤>, <지지 라모르소>, <살마 야 살라마>, <무리르 쉬르 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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