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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Russian Gypsy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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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n Gypsy Soul


01. Ilo /"Poppouri"
02. Nadia, Alena, Victor Busilyov /"Bog Nikola"
03. Esmeralda, Galina Erdenko  Jelem /"Shuryaki"
04.Mitya Busilyov & Siberian Gypsies /"Matyshka Rossya"
05. V. Popaduk & Romance Theatre/ "Martovski Horovod"

06. Ilo /"Yegorushka"
07. Victor Busilyov & Siberian Gypsies /"Bogu Pomolitsya"
08. Lilya Shishkova & Rosy Na Snegu/ "Pavlina Krylya"
09. Loyko /"Holodny Veter"
10. Esmeralda , Luba Erdenko & Jelem/ "Gulya"

11. Valentina Ponomareva & Trio Romen /"Snova Slyshu"
12. Arbat /"Ay Romale"
13. Lilya Erdenko /"Solnyshko"
14. Esmeralda Erdenko & Jelem /"Marjanja"
15. Kolpakov Trio /"Vengerka"

16. Zhana Karpenko, Moesy Oglu  Romance Theatre/ "Otoydi Ne Glyadi"
17. Lilya Shishkova & Rosy Na Snegu /"Molyarkitsa"
18. Gypsy Romance /"Kak Tsvetok Dushisty"
19. Loyko /"Loyko"

 

 

 

 

 

 

 

 

 

 

불타오르는 정열과 낭만적인 러시안 집시 음악.
전통 집시 음악에 러시아 민요, 재즈, 플라멩코 등 다양한 요소가 가미되어
다이나믹하고 매력적인 리듬의 연주를 들려준다.

러시안 집시의 음악은
전형적인 집시 멜로디와는 달리 슬라브적인 강한 기질에 영향을 받아
선율에서 느껴지는 끈기와 한이 각별하다.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러시아의 집시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 안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 중에 특별한 부족은 소위 ‘집시’들이다.

 이들은 외모와 차림에서부터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음성적인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 다른 민족들은

공동체 속에서 완전한 개인주의와 세속적 입신을 지향하며 살아 가지만 이들은 전통적인 고루한 생활방식을 고수한

채 비위생적이고 아집적인 생애를 살아 간다.

 또한 이들은 이탈은 곧 죽음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의 결속서클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집시 집단들은 그들 특유의 신비한 생활방식을 보존하면서 결코 이방 민족들과 혼인을 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족적이고 정의.충성에 대한 가치관이 있고 또한 나름의 도덕성을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러시아의 집시들은 옛날 이동마차에서부터 시작하여 트럭,트레일러를 타고 유랑 다니며 음악과 곡예, 제작업등의 낭만적 생존방식을 구사하던 전통 집시들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발칸의 여자 집시들 중에는 밝은 피부와 푸른 눈을 가진 우아한 외모와 내면으로는 집시철학에 철저한 순종 집시들이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집시들은 검은 머리와 거칠고 짙은 피부에 검은 눈이 일색이며 거기에 상스러운 삶의 행적이

 느껴지는 면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남성적인 힘을 가지고 무리 무리를 지어 다니며 거칠고 교활하며 잡초와 같이 억센 면을 지니고 있다. 건강한

 몸뚱아리 하나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편협한 사고와 욕질을 잘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의 장성한 집시 남자들은 그룹을 지어 다니지 않고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다녀 한눈에 식별이 어려우며,

더욱이 활동적이지 않아 거의 잠복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여자들은 이와 반면에 떼를 지어 다니며 활발하게 생계를 위한 활동을 하여 모계사회로 인식되는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 집시 여자들의 복장은 특이하나 조잡한 형형색 무늬의 긴 치마에 두건식으로 이교적 무늬의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다녀 그들의 거무잡잡한 피부를 살펴 보지않더라도 한눈에 그들의 소속과 정체를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은 운명적 신분을 거부하지않고 평범한 사회로의 동화를 경계하며 한정된 생활영역의 틀 안에서 살아 간다.

그들의 생계수단은 도둑질과 구걸, 그리고 점술에 한정이 되며 더 이상의 진보를 위한 시도를 하지 않은 채 살아 가고 있다.

나라 없이 유랑하는 민족에 대한 사실성과 각 개인들의 질곡 깊은 삶은 보통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시켜야 하지만 그들의 괴기한 생활방식과 과격하고 술수와 도둑질에 능한 그들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접근을 기피하게 하고 있다.

인도에서부터 생성 기원이 있다는 집시들은 지난 20세기에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나찌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똑같이 세

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기구한 운명을 겪었지만 현재의 처지는 극과 극에 서있다.

 

유대인들은 과학인재를 일컫는 ‘디아스포라’의 현대적 의미를 유도해 내며 사회 각 분야의 명망과 독보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집시 디아스포라들은 ‘도둑과 걸인’의 명성만을 얻었을 뿐이다.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민족이라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아무래도 저주 받고 버림받은 자를 일컫는 ‘

용천뱅이’라는 말을 붙여 주어도 욕먹을 일은 아닌 것 같고 요즈음 말로 ‘딱’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것같이 여긴다.

이 집시 여자들은 주로 기차역 앞에서 무리를 지어 서성이면서 지나는 행인들을 붙잡고 그들의 괴이한 점술을 펼치며 돈을 뜯어 내기 위한 갖은 술수를 편다. 대개 그들의 전형적인 방법은 손에다 동전을 하나 꺼내 놓으라고 하며 횡설수설 한 후에 행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최면을 걸려고 시도하며, 행인이 얼떨떨해 하면 주머니를 슬슬 뒤져서 돈을

 꺼내기도 한다.

 

이 여자 집시들이 힘이 얼마나 센지 한번 그들의 손에 돈이 들어 가면 싸움을 해서 뺏지 않는 한 다시 빼앗기는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들은 둘씩 조를 짜서 가게나 아파트도 방문을 하는데 이 최면을 거는 주술행위와 도둑질로 그들의 수입을 챙긴다.

아파트 문을 열어 주면 한 여자는 말을 걸면서 혼을 빼고 한 사람은 이리 저리 구경하는 척 하면서 슬쩍슬쩍 주머니와 가방에 담아 넣는다.

러시아 사람들도 집시라 하면 고개를 설래설래하며 두려워 하고 기피를 한다. 외국인에게도 도둑, 경찰 그 다음으로

요주의 대상이 되는 집단들이다.

러시아의 본방인 걸인들이 아마추어인데 비하여 이들 집시들은 구걸에 있어서 프로적인 면을 갖고 있다.

길에 나와 종일 구걸을 하는 집시 걸인들은 허름한 집이라도 일정한 거처가 있으며 해가 지면 정시퇴근을 하는

규칙적인 일과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때가 되면 구걸의 일과를 마치고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의 명당자리를 비워두고 석양을 배경으로 집으로 향하는 새들의 무리처럼 총총히 거처를 향하여 발길을 돌린다

이들 집시 거지들은 동정심 유발의 극대화를 위해 영하 삼사십도 까지도 가는 한 겨울에 꼬마 집시들의 머리를 빡빡

깍이우고 봄에도 추울듯한 얇은 옷가지를 하나 걸쳐서 거기에 꽁꽁 언 맨발로 얼음 위를 오가며 적선을 하게끔 만든다. 오가는 사람들은 두툼한 겨울모자와 외투로 단단한 무장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구걸 전략인지 집시의 기행인지

모르지만 기괴한 일을 서슴지를 않고 한겨울에 주목거리를 만들어 낸다.



또 다른 곳에는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길게 누워 잠자는 큰놈을 한쪽에 두고, 한 손으로는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아이의 젖을 먹이며 길가는 행인들의 눈을 응시하며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적선을 청한다.

 또 일정 거리를 띄어서 한 가족인 또 다른 예닐곱살 된 큰놈이 또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들의 수입은 러시아의 평범한 급료를 받는 사람보다 훨씬 그 수입이 많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집시 가족들은 어려서부터 직업을 위한 제도적 교육기간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고 바로 동냥 실전에 투입이

 된다.

구성원 하나 하나가 경제적으로 기여를 하며 나름의 조직생활을 해 나간다. 집시 아동들은 그들의 처지를 운명적으로 받아 들이며 그 거리의 동냥교육 속에서 눈치를 익혀 가며 그들 나름의 집시민족의 호연지기를 키워 간다.

이들은 이렇게 얻은 수입으로 좋은 개인집과 차를 가지고 있기도 하며 한 지역에 모여서 살아 간다.

이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가증스러운 천형의 용천뱅이라는 라벨을 붙여 주면 딱 어울리지만 만일 그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고 가정을 하면 이와 같은 항의성 답글을 올릴 것이라 예상을 하여본다.
이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가증스러운 천형의 용천뱅이라는 라벨을 붙여 주면 딱 어울리지만 만일 그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고 가정을 하면 이와 같은 거친 투의 항의성 답글을 올릴 것이라 예상을 하여본다.


“우리는 소위 문명인에게 기생하며 교활하게 빌어 먹지만 우리에게는 살인강도와 마약중독자나 술고래는 없다.

우리는 미개하다지만 너희도 뱀,개,지렁이,지네 닥치는대로 잡아 먹는 족속이 아니냐?

우리는 나름의 지조와 순결이있다!

 

 우리는 유랑하지만 너희는 그 작은 땅에 남북에 호남에 영남 그것도 모자라 강남과 강북으로 찢어놓지 않았느냐?

 너희는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 아니냐?

우리는 몸만 있으면 어디를 가나 살아 갈 수 있는 용맹이 있지만 너희는 면역 없는 유약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나라 없이 떠도는 천시 받는 족속이지만 우리에게는 집시의 기상이 있고 집시의 행복을 가지고 산다.

너희는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을 하느냐?

우리는 결코 너희들의 위치와 우리의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불가촉의 천민, 집시의 수난사

 

 

고대부터 모든 사회는 특정 분파를 일탈 집단으로 규정하여 통제하고 배척해 왔다. 예를 들어 살인자, 창녀, 정신 이상자, 노예 등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대개의 경우 이 일탈 집단들은 우발적 사건이나 사회의 신분 질서에 의해 규정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집시는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공식적 배척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 문명인들은 낯선 떠돌이 집단인 집시에 대해 뿌리깊은 편견을 품었고, 그런 편견은 숱한  법제적인 박해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지금 집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집시가 쓴 집시의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의 집시 역사는 서구인들이 제정한 집시 박해 법률의 기록을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집시의 여정이 곧 박해와 수난의 과정이었음을 이 사실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집시는 종종 그들의 고유한 기예 때문에 질곡의 삶에 빠져들었다. 특히 금속 제품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는 그들을 옥죄는 결과를 낳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집시들은 비잔틴 제국을 거치면서 금속 제품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칸 반도에 도달한 후 한동안 그 기술은 생계 유지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집시의 유용성을 인식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집시를 곧 노예화하고자, 14세기 초반 집시들을 고용주의 재산으로 규정하는 법령을 제정한다. 그래서 애초에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난  집시 전체의 절반 정도가 향후 5세기 동안 노예 상태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에 붙박혀야 했다. 루마니아의 경우 1855년에 이르러서야 집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예 신세를 면한 나머지 집시들이 발칸 반도에서 서부와 북부 유럽으로 이동했지만 그들의 삶도 자유롭거나 행복할 수는 없었다.


집시가 유럽 본토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 때문이었다. 13세기 후반까지 약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인들은 이슬람 지배하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그 전쟁은 결국 유럽 사회 전체에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불러왔다. 15세기경 집시들이 유럽 서부 지역에 도달하자, 유럽인들은 집시를 이슬람 세력으로 한동안 오해한다. 집시는 이집트인(Egyptian) 이외에도 터키인(Turks), 타타르인(Tartars) 등으로 불렸던 사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유럽인들에게는 이슬람 공포를 유발할 만한 외모를 지닌 집시들은 그래서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집시가 이슬람 세력의 침략 때문에 고향을 잃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시가 박해를 받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방인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낯선 풍습과 속성을 지닌 집시들이 대거 밀어닥치는 일은 기존 체제에는 위험이 아닐 수 없었고,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발칸반도를 떠나 유럽 본토에 도착한 집시들은 수세기 동안 차별과 박해를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집시가 불가촉 천민, 즉 천민 중의 천민이었다. 실은 많은 경우 집시는 인간이 아니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있는 존재였고 때로는 돼지 한 마리 값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18세기 프러시아에서는 집시들의 유랑 생활 자체가 불법으로 여겨져 18세가 넘은 집시는 재판 없이 교수대에 매달 수도 있었다.


스페인의 경우를 보면 1499년에서 1783년까지 집시의 의복, 언어, 관습을 금지하는 공식적 법령이 10여 차례 이상 제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539년 최초의 공식적인  집시 억압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함선인 갤리선의 노를 젓는 소모품 노예로 집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집시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각했는데, 1695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추방 명령이 내려졌고 그 이후에  발견된 집시에게는 첫 번째는 공개 태형, 두 번째는 낙인, 세 번째에는 공개 처형의 처벌을 내렸다.
영국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서의 반집시 법령은 헨리 8세 때부터 제정되었다. 1530년에는, `이집트인 법령(Egyptions  Act)`이 제정되어 집시의 영국 이주를 금지했다. 메리 3세와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서도 집시는 극형에 처해졌다. 1743년의 한 법령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집시의 모습을 하거나, 이집트인의 모습이나 관습에 따라 방랑하는 자 또 예언하는 자는 모두 부랑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서, 집시가 한곳에 정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집시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해와  편견은 증오심으로 발전하여 집시들을 끊임없이 도피하게 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도 집시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극명한 예는 나치의 집시 대학살이다. 약 40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위험 세력으로 몰려 학살되었던 것이다. 집시 희생자의 수는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에 비하면 적지만, 유럽에 거주하던 집시의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 점을 확인하면 얼마나 철저한 집시 사냥이 진행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집시의 대재앙은 정확히 규명되지도 않았으며 현대 대중들에게도 낯선 정보이다.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양심들이 큰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집시는 여전히 큰 위험을 감내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동구권 지역에서는 집시들의 비극이 더욱 분명하다.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면서 집시는 또 다른 곤경에 처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할 강제적 공권력이 약화되면서 집시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이 되살아난 것이다.


1995년 부활절, 루마니아의 한 마을에서는 교회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성직자와 지방 관료들의 지휘에 따라 사람들은 집시의 집을 향했고 26채의 집시 가옥에 방화를 자행했다. 체코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집시들의 집은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몰락 후 수만 명의 집시들이 동구 지역을 탈출하여 독일로 피신했으며, 보호 시설에 수용되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듯이 극우 신나치가 설치는 독일은 집시들에게 안정된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집시는 힘없는 소수 집단이기에 그런 사회적 박해와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집시의 오늘

 

영화 <집시의 시간>(에밀 크스투리차 감독, 1988년)의 영화적 표현 기법을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이 영화가 마술처림 신비한 현상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이 영화에서 주인공 페르카니는 눈길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력을 지니고 있다. 동전 따위를 벽에 달라붙게 만드는 일은 기본이고 영화의 말미에서처럼 포크를 날려 악한을 응징하기도 하는데, 이 신비한 장면들은 마치 거리에 자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필름에 담듯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철로 옆에서 출산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몸은 2미터쯤 공중에 둥실 떠올라 있는데, 이 모습도 역시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다.

 


<집시의 시간>이 지향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릴 만한 이 표현 기법은, 그 내용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서구인들한테 이방인이며 요상한 집단인 집시를 자연스런 집단으로, 다른 민족들과 공존하고 함께 상호 작용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존재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일하게 집시의 시각에서 혹은 서구인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집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현대 집시의 삶의 모양을 읽어 낼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한 지역 이그라주이다. 이곳에는 집시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주인공 페르카니는 주술사였던 할머니와 바람둥이 삼촌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년이다. 이 영화의 악당은 중년의 남성 아메드이다. 그는 아이들과 부녀자를 사들여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매춘, 앵벌이, 도둑질 등을 시키고 부를 쌓은 인물이다. 페르카니도 아메드 집단의 일원이 되어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는 돈을 벌어서 사랑하는 소녀 아즈라와 결혼하고, 동생의 다리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메드 등이 머물고 있는 지역에 경찰이 들이닥쳐 아메드의 조직은 와해되고, 병약해진 아메드는 페르카니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페르카니는 아메드와 똑같은 행위를 답습한다. 순수한 소년이었던 페르카니는 이제 일탈자 집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이들을 도심으로 내몰아 구걸하게 하고 좀도둑질과 매춘 등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렇게 해서 숨겨 두었던 돈이 홍수에 휩쓸려 사라지고, 아메드가 그를 배신하자 페르카니는 돈도 순수함도 없이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로 변모한다.
4년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동생과 자신의 아들을 찾은 페르카니는 자신의 불행을 불러들인 악한 아메드에게 복수하려 한다. 아메드의 결혼식 파티장으로 들어가 정중히 인사를 한 뒤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염력을 발휘하여 아메드의 목을 향해 포크를 날린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는 또 다른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결혼식을 망쳐버린 페르카니를 아메드의 새로운 신부가 쫓아와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집시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다. 정착한 집시들도 많이 있지만 정착 여부에 관계없이 집시는 사회의 가장 주변적인 부문으로 내몰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집시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에 대한 지표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집시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통계 작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통계 작업을 어렵게나마 진행할 집시의 정치 기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영국과 같은 개별 국가에서 진행된 통계가 최소한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현재 영국에는 1만 2,600가구의 집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전시간(full-time) 취업 상태에 있는 집시는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집시 특유의 이동 시장을 열어서 수입을 얻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집시의 교육 기회가 다른 어떤 소수 집단보다 낮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집시에 대한 일반인들의 근거 없는 편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집시가 범죄를 쉽게 저지른다고 믿고 집시를 고용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시에 의한 범죄의 비율은 전체 평균 범죄율보다 0.46% 정도 높을 뿐이고, 1992년 영국 경찰은 집시 공동체가 범죄를 양산할 위험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집시는 천성적으로 일을 꺼리는 부랑아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인의 편견도 집시의 열악한 사회적 조건을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 사회의 평균치와 비교할 때, 집시 공동체의 어린이나 여성의 가계 기여도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700년 전 유럽에 첫발을 디딘 집시들처럼 현재의 집시들도 여전히 악의적 편견의 대상이며, 그런 편견이 집시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저해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시들은 몇 가지 국제 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동시에 집시들의 권익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국제 집시 연합(International Romani Union)으로 이 단체는 1971년부터 유엔 경제 사회 평의회의 일원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유니세프와 유네스코에 집시의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인도와의 연계를 위해서도 1970년대 중반 인도 집시 연구소(Indian institute of Rom-  ani Studies)라는 연구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집시들의 조직은 무엇보다 인종주의의 극복과 집시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의 학살과 관련된 전쟁 배상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되었듯이 집시가 각지에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정치 권력을 결여하고 있기에 이러한 국제 조직이나 연구 단체들이 힘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 집시의 정확한 인구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직도 이주하는 집단이 많으며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조사가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조사에 따라서 상당히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여러 문헌들은 집시의 인구가 약300만에서 800만 명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그 중에서 많은 수의 집시가 발칸 반도나 옛 소련 등에 살고 있고 서부 유럽이나 중동 지역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에서도 집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집시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도  생활하고 있다. 집시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집단에서 평가한 집시의 수는 앞의 조사와 크게 차이가 난다. 국제 집시 연합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900만에서 1,200만 명의 집시들이 살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1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600만에서 800만이 유럽, 특히 발칸 반도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