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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ONG & ROCK

Nat King Cole -Nature Boy

 

 

 

 

Nat King Cole -Nature Boy

 

 

 

 

Nature Boy

 

 

 

There was a boy
A very strange enchanted boy
They say he wandered very far, very far
Over land and sea
A little shy and sad of eye
But very wise was he


소년이 있었어요.
매우 독특하고 매력적인..
그는 아주 먼 곳을 방황했다고 하네요, 아주 멀리
산 넘고 바다 건너...
약간의 수줍음과 슬픈 눈망울하지만
그는 매우 현명했어요.


And then one day
A magic day he passed my way
And while we spoke of many things
Fools and kings
This he said to me
"The greatest thing you'll ever learn
Is just to love and be loved in return"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그와 내가 마주치던 마술같은 날
우리가 많은 것 들과
바보 들 그리고 왕 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이 것이 그가 내게 한 말이에요.
"당신이 배우게 될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하고 그 대신 사랑받는 거예요"

 

 


"The greatest thing you'll ever learn
Is just to love and be loved in return"


"당신이 배우게 될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하고 그 대신 사랑받는 거예요"

 

 

 

 

 

 

 

 

이 곡, Nature Boy를 들을 때마다 분명히 어떤 영화에 쓰인 곡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고색창연한, 고대의 신화를 변주했을 듯한, 이를테면 흑인 오르페 같은 느낌의... 분명히 그 영화의 주인공을 그리고 있는 내용일거야,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 곡이 최초로 레코딩된 것은 1947년,냇 킹 콜에 의한 것이었다.

아무리 뒤져도 이 곡을 쓴 오리지날 영화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민요처럼 작자를 알 수 없이 오랜 세월 불려졌던 곡일 것이라고... 물론 이 곡을 부른 사람은 너무 많았고 심지어 물랑루즈 같은 '요즘' 영화에서도 등장했다지.

그러다가 아베즈라는 작곡가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작자미상은 아니며 이든 아베즈. 그의 이름은 에덴.
그에 관한 얘기를 읽다 보니 이 음악이 왜 이런 느낌을 주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냇 킹 콜의 원작이 난 제일 좋다. 있지도 않은 영화를 상상하게 만든 무언가 환상적이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발이 땅에 닫지 않는 그 느낌을 제대로 들려주는 사람은 그뿐이다.

 

 

 

 

Nat King Cole

 

 

솜사탕같이 부드럽고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들려 준 냇 킹 콜은 1940-50년대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 프랭크

 시내트라의 인기전선에 위협을 가한 유일한 흑인 크루너(crooner)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중들의 끊임없는 추종을 받고있는 그는 틴 팬 앨리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작곡한 발라드의

고전 'Unforgettable'(1951)의 주인공이다.

대중들은 그의 이름을 듣고 '가수'로서의 냇 킹 콜만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가수로 성공하기 전인 1930-40년대에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냇 킹 콜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던 1930년대 말부터 1940년 대 초까지 그는 수많은 레코드를 녹음해 발표했다 기타, 베이스, 피아노로 구성된 독특한 재즈 트리오

 양식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비밥 재즈의 봉인 버드 파웰이 드럼-베이스-피아노로 이뤄진 트리오 양식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이 편성이 굳혀지긴

했지만, 재즈 트리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처음 얻은 사람은 바로 냇 킹 콜이었다.


'Route 66'(1943) 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하기도 한 냇 킹 콜 트리오는 한결 부드럽고 팝 적인 색채의 재즈 연주로

주목받으며 이후 1950년대 명성을 얻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출현을 예견케 했다.
1945년 캐피톨(Capitol) 레코드사와 계약하면서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수많은 히트곡을 팝 차트에 올리는

 가수로서 우리에게 기억된다.

1917년 생으로 어린 시절을 시카고에서 보낸 그는, 12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형제가 모두

재즈 음악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으로 유복했던 그는 1936년 재즈 베이스주자 에디 콜

(Eddie Cole)의 밴드에서 잠시 몸을 담지만 얼마 후 자신의 무대를 찾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이런저런 쇼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찾기에 몰두한 끝에 기타리스트 오스카 무어

(Oscar Moore), 베이시스트 웨슬리 프린스(Wesley Prince)를 만나며 '냇 킹 콜 트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출범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초기엔 순수 연주곡 중심이었으나, 1940년 데카(Decca)레코드와 계약하면서 'Sweet Lorraine'

(1940)을 그의 노래로 녹음했고, 이내 대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는 트리오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병행하게 되었다.

냇 킹 콜 트리오는 1940년대 초반 대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Route 66', 'Straighten up and flying right'(1943)와 같은 히트곡들을 연이어 발표했으며 40-50년대 명성을 구가했던 아마드 자말 트리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아트 테이텀 트리오는 모두 냇 킹 콜 트리오(피아노/베이스/기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The christmas song'(1947) , 'Nature boy'(1947)와 같은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한 냇 킹 콜 트리오활동은

194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다 1950년, 그의 트리오가 오케스트라 세션을 넣어 발표한 'Mona risa'가 차트 넘버원을 기록하며 냇 킹 콜은 더 이상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인기 정상에 가수로 탈바꿈한다

그의 노래는 어느덧 재즈뿐만 아니라 팝 청취자들의 애청 곡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고 대중들은 차츰 그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후 'Unforgettable', 'Ramblin' rose'(1962)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차트에 올려놓으며 발라드 가수로서만

활동하게 된다 TV가 미국 대중들의 안방에 자리하면서 그는 쇼에 출연하며 50-60년대 내내 인기가수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196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음악엔 더 이상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 양상을 띄게 되는데 트리오 양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재즈의 선구자'라는 호평에 반해

발라드 가수로서 백인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며 '재즈를 팔아먹은 장본인'이라는 비난 역시 감수해야 했다.
재즈의 선조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마일즈 데이비스, 조지 벤슨과 같은 거물급 재즈 스타가 겪은 이 대중성과 음악성과의 숙명과도 같은 패러독스는 냇 킹 콜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대인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추앙 받는 뮤지션이다.

초기의 그의 연주 스타일은 재즈 연주의 백미라 할 트리오 양식의 발전에 기여했고, 부드럽게 감싸 주는 듯한 그의

 바리톤 보컬은 샘 쿡, 마빈 게이,루더 밴드로스로 이어지는 소울 팝 가수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보컬 연주의

교과서'로 자리 메김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룩했던 위업을 지금껏 꾸준히 이어나가는 그의 딸이자 재즈 보컬리스트인 나탈리 콜(Natalie

Cole)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절묘하게 더빙된 'Unforgettable'(1994)로 탈바꿈 해 대중들을 다시금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첨단 디지털 기술은 그만의 독창적인 보컬 스타일은

지금에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후배 보컬리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계승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윗사진; Eden Ahbez와 가족들

 

Eden Ahbez


Born Alexander Aberle, 15 April 1908, Brooklyn, New York
Died 4 March 1995, Los Angeles, California 


      
이든 아베즈는 스페이스 에이지 팝계에서 진정한 주변부 괴짜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단박에 드라마틱한 센세에션을 일으키며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잡았다.
실제로 그가 성취한 일에 비하면 지나치다고 여겨질 정도다.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이 유대인 소년은 나이를 먹으면서 예수와 비슷한 외모를 갖게 되었고 햇빛 따스한 남캘리포니아의 괴짜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08년에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그가 40년대 중반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훌륭한

 전기작가가 꼼꼼히 파헤쳐보아야 할 문제다.

 

아베즈 자신은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35세 때까지 여덟 번이나 도보로 미국을 횡단했다고 주장했다.

LA에 정착한 그는 애너 제이콥슨이라는 여성과 결혼했고, 그녀와 함께 그리피스 공원에서 슬리핑백에서 잠을 자고

채식주의를 고수하며 일주일에 3달러를 가지고 생활하면서 헐리우드의 길거리에 서서 여러 가지 동양의 신비사상들을

 설교했다고 한다.

아베즈가 대중에 알려진 것은 Nat King Cole이 그의 곡 "Nature Boy"를 발표한 1948년의 일이다.
그 노래는 "뭔가에 홀린 듯한 기이한 소년"이 "머나먼 곳으로 헤매다니다가"  마침내 "삶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물"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직장도 없었고 정해진 주거지도 없었던 아베즈는 링컨 극장 같은 곳에서 어슬렁거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냇 킹 콜의 매니저인 Mort Ruby를 만난 곳도 바로 링컨 극장이었다.

아베즈는 루비에게 다가가 꼬질꼬질 때묻고 돌돌 말린 "네이처 보이"의 악보를 꼭 콜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우겼다.

악보를 본 냇 킹 콜은 그 노래에 이디시 풍의 (Yiddish --- 이디시 (유대의) 말 ((독일어에 슬라브어히브리어를 섞어
히브리 문자로 씀;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 사이에서 주로 씀)) ) 멜로디가 깔려 있음을 알아보고

(나중에 이 노래가 히트한 후, "Schwieg Mein Hertz(내 마음아 진정해)"라는 이디시 노래의 판권소유자들 역시

 그랬다.

그들은 법정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아베즈와 협상을 통해 타협을 보았다(실제로 그곡에서 멜로디를 따왔다고 한다))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레퍼토리에 포함시킬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마침 냇 킹 콜은 자기 공연에서 부를
유대풍의 노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무대에서 몇 차례 시험 삼아 불러본 콜은 마침내 그 곡을 레코딩하기로 마음먹고 Frank Devol에게 편곡을 맡겼다.

두 사람은 원래의 왈츠 멜로디를 빼버리고 임의로 박자를 바꿀 수 있는 루바토 템포를 적용하여 1947년 8월 22일에

녹음했다. 냇이 작곡한 피아노 파트는 Buddy Cole(혈연 관계 아님)이 연주했다.

콜과 캐피틀 레코드사는 그 레코드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몇 달 동안이나 가만히 묵혀 두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콜의 라이브 무대에서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에게서입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콜은 레코드를

 발표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까지 아무도 그 노래의 저작권을 확보해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루비는

아베즈를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야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루비가 아베즈와 그의 아내를 찾아냈을 때 그들은 "HOLLYWOOD" 표시판의 "L"자 아래에서

야영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베즈가 대여섯 명에게 그 판권을 부분부분 넘겨줘버린 후였고 따라서 아베즈는 그 노래에서

거의 얻은 것이 없었다.
(콜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는 판권을 다시 아베즈에게 넘겨주었다.)

 

처음에 캐피틀은 그 곡을 싱글의 B면에 실어 발표했지만 뉴욕의 WNEW에서 처음 전파를 타자마자 그 방송국에는 신청전화가 빗발치듯 쏟아졌고 "네이처 보이"는 단숨에 싱글차트 1위에 롤랐다. 프랭크 시나트라, 딕 헤임즈, 사라 본 등이

서둘러 커버 버전을 만들었고 얼마 후 '페트릴로의 레코딩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아베즈는 그 독특한 생활 방식 때문에 헐리우드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들 부부는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야외생활을 계속했고 가진 거라곤 자전거 한 대와 슬리핑 백, 주서(과즙기)뿐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어쩌면 꾸며져서
덧붙여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언젠가 아베즈는 그의 괴상한 차림새를 보고
정신병원에 끌고가야겠다고 생각한 경찰관과 실랑이를 벌인 일이 있었단다. 그때 그는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미치지 않았소. 웃긴 건 다른 사람들은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미쳤다는 거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본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생각해 보니 당신 말이 맞군요. 누가 또 당신을 귀찮게 굴거든 나한테 말하세요."

아베즈(그는 대문자는 성인들에게나 붙이는 거라며 자기 이름은 'ahbez'라고 표기하라고 우겼다)에게는 후에 역시

콜이 레코딩한 "Land of Love"라는 곡도 있었지만, 어느새 잊혀져 1960년까지는 길거리 생활을 계속했다.
60년에 Del-Fi Records의 사장 Bob Keane이 그를 스튜디오로 데리고 와 Eden's Island라는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에서 아베즈는 Martin Denny의 정글 엑조티카 스타일의 연주를 배경으로 자기가 쓴 시/노래들을 낭송했다.
Mickey  McGowan은 이 앨범을 "마틴 데니와 잭 케루악의 만남" 같다고 표현했다. (케루악이 비트 작가가 아니라
은둔자가 되었다면 말이다.)

60년대에 걸쳐 아베즈는 이따금 여기 저기 등장했는데, 가장 유명한 사건은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과
함께 나타났던 일이다. 비치 보이스의 전설적인 'Pet Souds'(66)와 'Smile'(67) 앨범이 나오기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후에 아베즈는 'Echoes from Nature Boy'라는 앨범을 한 장 더 녹음했는데 '이든즈 아일랜드'와 비슷하게
배경음악을 깔고 시를 낭송한 것이었다.

 이 앨범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발매되었다.

1995년에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동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