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rame
Todos dicen que es mentira que te quiero
porque nunca me habían visto enamorado.
Yo te juro que yo mismo no comprendo
el porqué me fascina tu mirada.
Cuando estoy cerca de ti, tú estás contenta.
No quisiera que de nadie te acordaras.
Tengo celos hasta del pensamiento
que pueda recordarte a otra persona más.
Júrame
que aunque pase mucho tiempo
no has de olvidar el momento
en que yo te conocí.
Mírame,
pues no hay nada más profundo
ni más grande en este mundo
que el cariño que te di.
Bésame
con un beso enamorado,
como nadie me ha besado
desde el día en que nací.
Quiéreme,
quiéreme hasta la locura
y así sabrás la amargura
que estoy sufriendo por ti.
Todos dicen que es mentira que te quiero...
No quisiera que de nadie te acordaras.
Tengo celos hasta del pensamiento
que pueda recordarte a otra persona más.
Hey
Hey!
No vayas presumiendo por ahi
Diciendo que no puedo estarsin ti Tu que sabes de mi
Hey!
Ya se que a ti te gusta presumir
Decir a los amigos que sin ti
Ya no puedo vivir
Hey!
No creas que te haces un favor
Cuando hablas a la gente de mi
amor Y te burlas de mi
Hey!
Que hay veces que es mejor querer
asi Que ser querido y no poder
sentir Lo que siento por ti
Ya ves
Tu nunca me has querido ya lo ves
Que nunca he sido tuyo ya lo se
Fue solo por orgullo ese querer
당신 없이는 살수 없다고
그렇게 사랑을 하소연하지는 마세
그대는 나를 잘 알고 있어요
나의 진실한 사랑을
모두에게 즐려주며 야유할 때면
사랑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버려요
그대도 알고 있듯이
조금도 날 사랑하지 않는군요
그대도 알고 있듯이
지금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는 있어요
비록 그대와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나의 진실한 사랑을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겠나요?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항상 순결을 지키려던 그대를 말예요
나는 그림자
그대는 빛나는 햇빛
그대는 기억하겠지요
항상 평화를 원하던 나는
그대를 향한 바다의 왕이었어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부드럽고 감상적인 저음의 목소리와 낭만적인 곡들로언어와 문화를 초월하여 현재까지
2억 2천만 장의 앨범판매고를 올렸고,1000장의 골드, 500장의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레코딩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부드럽고 로맨틱한 라틴 싱어 Julio Iglesias 특히 '70년대와 '80년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다.
이글레시아스는 근30여년이 넘는 가수 생활 중 70여장의 앨범을 냈으며 전세계에서약 2억5000만장의 앨범이 팔려 라틴계 가수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부드럽고 감상적인 저음의 목소리와 낭만적인 곡들로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여 현재까지 1000장의 골드, 500장의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 9월 23일 스페인 태생으로 본명은 Julio Jose Iglesias de la Cueva...
유럽은 물론 자국인 스페인에서 국민 가수로 추앙받는 Julio Iglesias는 외과의사의 아들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학창 시절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변호사가 될 생각으로법학을 전공하다 축구에 소질을 보여 스페인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골키퍼로 화려한 경력을 쌓던 중불의의 교통 사고로 그의 축구 인생이 끝나는 동시에 걷기 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1년 반 동안치료를 받으며 긴 병상 생활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간호사가 선물한 기타를 손에 잡은
그는이후 엄청난 음악적 영감을 떠 올리며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1968년 바인도른 가요제에 참가, Spanish Song Festival에서 'La Vida Sigue Igual'으로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음악 시장에 데뷔,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입문한 Julio Iglesias는이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등 참가하는 가요제마다 승승장구 하며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후 1976년 CBS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미국 시장으로 무대를 옮긴 그는 모국어인 스페인어로만녹음하지 않고
이태리어와 불어, 그리고 영어 적절히 섞은 노랫말로 유럽, 중남미, 미국에서 맹위를 떨쳤고 그 인기는 국내까지
이어졌다.
Julio Iglesias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는 프리 올림픽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하기도 했던 훌 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여성 팬들로부터 가장 많은 갈채를 받고 있는 스페인어권 출신 가수이다.
60여 장에 달하는 독집 앨범과 6개 국어로 발매된 히트 앨범, 1억 2,000만 장의 누적 판매고를 올리며 매 30초마다
전 세계 라디오 방송국에서 훌리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는 20대 초반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환자였는데 불굴의 의지력을 갖고 정상인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간 승리’의 신화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친, 스페인 유명 작가의 딸 사이에서 출생한 훌리오는 양친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어려서부터 밖으로 떠돌아다니는 문제아였다.
“집안에 들어오면 싸늘한 냉기가 돌았죠. 화목이나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던 상황이었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방과 후 거리를 쏘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 12살 때 우연히 교내 합창단 단원 모집 시험에 응모한다.
그때까지 그는 좋아하는 가수나 노래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음악 쪽으로는 전혀 무지한 상태였다.
곡조조차 맞추지 못하는 훌리오의 노래를 듣고 있던 심사 위원 한 사람이 “애야, 차라리 너는 축구 선수나 해라!”라는
비아냥거림을 던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멸조로 던진 심사위원의 이 말은 그의 초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는 곧바로 유소년 축구팀에 가입한 뒤 스페인 축구 지망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레알 마드리드팀의 골키퍼로 활약한다. 축구선수로 명성을 얻어가고 있던 그에게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19살 되던 9월, 친구와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마을 축제에 참가한 뒤 귀가하다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 직후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뒤 별다른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1개월 뒤, 그는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을 느낀다.
2월 눈 오는 어느 날, 거리에 쓰러진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된다.
20살 되던 1월 6일, ‘사고로 인한 하체 부분 내출혈, 그로 인한 척추 압박’이라는 의사 소견을 듣는다.
의사들의 검진 이후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된다.
결국 그후 황소처럼 튼튼한 다리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훌리오의 두 다리는 완전 마비된다.
“병실에 있으면서 ‘왜 하필 나인가’라는 분노감에 휩싸였죠. 20살의 내 인생이 이제 불구로 시작된다는 절망감과 함께요.”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근 1년 동안 병원에 출근하지 않고 아들 훌리오를 간병한다.
병세에 차도가 없자 아버지는 근무를 마치면 병상의 아들을 찾아와 그 다음날까지 함께 하는 고단한 나날을 보낸다.
그리고 끊임없이 격려의 말을 보낸다.
이때 아버지가 자주해주던 말이 있었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설사 하반신 마비 환자로 전락하더라도 적극적인 인생을 살아라는 무언의 충고였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척추가 절단된 것이 아니고 상흔만 입은 압착의 경우 꾸준한 운동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훌리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어스름한 저녁 무렵부터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지팡이를 짚고 병원 정원을
오가는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굳어가는 하반신 상태를 차단하기 위해 하루 6시간 정도의 수영을 병행한다.
고단한 재활 과정에서 그의 인생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아버지가 적절함을 달래주기 위해 갖다 놓은 기타와 악보.그는 그때까지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고 노래 실력은 이미 합창단원 응모 때 밝혀졌듯이 거의 완벽한 음치에 가까웠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악보를 보고 독습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병상 생활은 3년째로 접어들었다.
TV에서 방송되는 가요 프로그램을 듣고 가수의 음정에 맞추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음악 축제 다큐멘터리를 본 훌리오는 아버지에게 “저 2년 안에 저 축제에 참석해서 반드시 노래를 부르겠어요!”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웃었다.
그런데 웬걸 사고 후 5년 만인 24세 생일, 그는 기적적으로 정상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영국 캠브리지로 유학한 그는 방과 후 클럽에서 학비도 벌겸 재미 삼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장래 희망은 변호사를
꿈꾸고 있었다.
1968년 자신의 노래 실력을 공식적으로 검증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스페인 베니돔 송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덜컥
최우수상에 입상된다.
참가곡으로 불렀던 노래가 병상에서 아버지가 들려준 격려의 말을 모티브로 해서 스스로 작사, 작곡한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La Vida Sigue Igual.’
페스티벌 이후 개최된 모든 음악상에 이 곡은 단골 수상곡으로 추천되는 동시에 싱글 발매 이후 단 2주 만에 스페인
최고 인기곡이 된다.
마침내 ‘그래도 인생’은 스페인 국가처럼 애창됐고 조금 과장하자면 길 가던 강아지도 따라 부를 정도였다.
정식 데뷔로 기록되고 있는 1968년 이후 30여 년 이상 톱 가수로 전 세계 순회공연을 지속하고 있는 훌리오.
자칫 불구 청년으로 마감했을지도 모를 인생은 부친의 끊임없는 격려와 기타 선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인터뷰 때마다 늘 되뇌는 포부가 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무대 위에서 죽고 싶습니다.
서 있는 채로 말입니다.”
1944년 9월 23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저명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Iglesias)는,
영국의 명문 대학인 캠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법학도였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공과는 다른 축구 선수로 활약했으며, 스페인의 유명한 프로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여 골키퍼로 종횡무진 활동하면서 제법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는 병상 생활로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고, 지루한 병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자작곡을 만들어 노래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이러한 계기가 인연이 되었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1968년 6월 18일에 열렸던 바인도른(Beindorn) 가요제에
참가하여, 의외로 자신이 부른 곡이 그랑프리가 되어 직업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에 발표한 데뷰 앨범 「Hey」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적절히 믹스하여 제작한 앨범으로, 스페인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중남미에서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했던 그의 성공은, 약 1년도 못되어 전 세계로 확대되어 나갔다.
(펌/요약)
우리가 매스컴 등을 통하여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들 중 천재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사람 역시
대단한 천재이다.
1943년생인 스페인 출신의 가수이자 작곡가, 영화배우인 그는 80장의 음반을 14개의 언어로 3억장을 제작 판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음악가 5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상류층의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 캠브릿지 대학
법학과에 유학을 했다.
목표한 바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변호사로 활동했는지는 모르겠고 축구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스페인의 유명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 팀에 입단하여 골키퍼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의 심각한 부상으로 2년 가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므로 축구에 대한 꿈을 접고, 투병생활동안 간호사가 선물한 기타가 인연이 되어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슬프면서도 낭만적인 곡들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감상적인 매력적, 개성적인 저음의 목소리로 가수의 길을 걸어 스페인에서 국민 가수로 추앙을 받는 등 세계적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적 성공과 더불어 큰 부를 이루었고, 부인과 이혼하면서도 부에 걸맞게 세상의 놀라움이 되도록 엄청난 위자료를 지불하였으며 아들의 애인과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등 염문도 세계적인 규모로 뿌려대기도 하였다.
미국과 영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자신의 노래는 물론 이미 잘 알려진 다른 사람의 노래도 스페인어 또는 영어로 많이 불렀다.
그는 한가지만 성공하기도 어려운데 세계 일류대학인 영국의 캠브릿지대 법학과에 입학하여 변호사 자격 취득, 프로 축구선수, 가수 겸 작곡가, 영화배우가 되고 1989년에는 유엔의 'UNICEF 친선대사’로 위임되기도 하였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자켓 표지 사진은,,
모두, 앉어서 찍은 사진 입니다.
하반신을 못 쓰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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