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아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기구하고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 온 그녀를 2시간 정도의 영화 한편으로 다 그려낸다는 건 사실상
무리고,오히려 미니 시리즈로 만든다 해도 최소한 5-6부작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전설적인 그녀에겐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에디뜨 삐아프(에딧 삐아프) (Edith Piaf, 1915-1963), 본명: 에딧 지오반나 까숑(Edith Giovanna Gassion).
1915년12월19일, 프랑스 빠리(Paris) 에서 태어나고, 1963년10월11일,50세도 안된 나이에 프랑스 남부,
그라스(Plascassier)지방에서 영면한 후, 쇼팽(Chopin)도 누워있는 빠리의 뻬르 라셰즈(Pere Lachaise)공동묘지에
안장이 된 샹송(Chanson)의 영원불멸의 여왕(여제).
수많은 가수들의 자전적인 영화 제작이 유행이 된 이 21세기 초이지만,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점을 감안한다면,끌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감독이 1983년에 ‘Edith Et Marcel’를만든 이후, 그녀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 영화의 출시는 오히려 후시지탄(後時之嘆)의 느낌도 없진 않다.
곡예사인 30대 중반의 아버지, 루이(Louis Alphonse Gassion, 1881-1944)와이태리 혼혈의 거리가수, 20살의
어머니, 아니타(Annetta Giovanna Maillard,1895-1945)는 그녀를 빠리의 베르빌(Belleville) 길가에서
출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돈이 없었고, 이후, 순조롭지 못한 이들의 결혼 생활과 아빠, 루이의 1916년의 입대로 인해, 버려진 아기, 에디뜨는 외할머니네 집을 잠시 거쳐, 노르망디 지방의 친 할머니네 집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을 파는) 티틴(Titine)이 일시적인 대모 역할을 하는 가운데,3살 때부터 4년간 수막염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일시적인 맹인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테레사 성녀(Saint, Therese De Lisieux)께서
이 때,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었음을 굳게 믿는다고 하였다.
14살이 되던 1929년부터 빠리의 길거리에서 아버지의 마술 공연을 거들다가,‘La Marseillaise’(프랑스 국가)를 부르며 노래를 시작한 에디뜨는 16살 때에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하여 이복자매인, 시몽(마몽/Simone Berteaut)과 함께
살면서, 거리에서 노래도 하고 돈이 없으면 매춘도 하는 부랑자 생활을 하는데,루이 듀뽕(Louis Dupont) 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곧 임신을 하여, 18살 때에 이미 딸, 마르셀(Marcelle, 1933-1935)을 출산한다.
그리고는 20살의 어머니, 아니타가 그랬던 것과 똑 같이 자신도 자식을돌보지 않다가, 2년 후 그 외동 딸, 마르셀을
병으로 잃는 불행을 겪는다.
빠리의 샹제리제(Champs Elysees)에서 ‘Le Gerny’ 라는 나이트클럽을운영하던, 루이 르쁠레 (Louis Leplee사장이 거리에서 에디뜨를 발견한 1935년(그녀 나이 20살 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매우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영화의 원제목인 ‘라 몸 삐앞’(La Mome Piaf/Kid Sparrow/작고 어린참새)이라고 그녀에게 무대 이름을
지어준 후, 음악 공부도 다시 시키고,(나중에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내게 한 후,
거물, 모리스 슈발리에 (Maurice Cheval ier)가 나오는 쇼에 출연을 시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또 음반 녹음도 데뷔하게 만든 루이 르쁠레는그러나 이듬 해, 1936년 4월에 의문의 살인을 당하면서, 에디뜨 역시도용의자의 일원으로 만들며, 곤경과 실의에 빠뜨리게 된다.
이후, 에디뜨에겐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의 큰 스승이 되는 시인, 레이몽아쏘(Raymond Asso)의 헌신적인 도움과
지독한 훈련으로 본격적인 가수의길에 접어든 그녀는 같은 해에 무려 15곡이 넘는 노래들을 녹음하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인기를 얻게 되는데, 이 시절에 가까이 지내던 장 꼭도(Jean Cocteau)같은 문화계 거물인사들과의
친분은 그녀의 경력을 더욱 더다양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1940년에는 장 꼭도의 연극(La Bel Indifferent)
에도 출연을 하였고, 이후 영화에서도 그녀를 만나 볼 수 있게 된다.
(생애 총 출연작:10편)
“한 달 동안 나눈 대화보다 침대에서의 하룻밤이 그 남자를 가장 잘 알 수가 있다.”는 유명한 말도 남겼지만, ‘샹송의
여왕’과 함께 ‘염문과 스캔들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얻기 시작한 것도 이 당시부터인데, 자신의 쇼에 오프닝 가수로
나오던 6살 연하의 신인,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과의 동거생활,또 빠리와 뉴욕을 왔다 갔다 하다가
나중에 자신이 죽였다고 자학을 하게 되는 미들급 세계권투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영화 자막에는 막셀/ Marcel
Cerdan/1949년10월에 비행기 사고로 죽음)과의 비극적인 사랑 등이 그녀에 관한 1940년대의 주요 헤드라인이었고,
또 그녀에게 제2의 이브 몽땅같은 존재였던 9살 연하의 샬 아즈나불(Charles Aznavour, 1924)과 함께 있다가
(두 번 이나)당한 1951년의 교통사고는이후, 에디뜨를 알콜과 몰핀 중독에서 영영 못 빠져나오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1952년, 싱어 송 라이터인 자끄 필(Jacques Pills)과 첫 번째 정식 결혼식을올린 후에도 에디뜨는 많은 스캔들로
1956년에 이혼을 하게 되는데,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 에디 꽁스탄틴(Eddie Constantine),
장 루이 조베르(Jean Louis Jobert), 앙리 꽁떼(Henry Contet) 등이다 그녀의 연인 목록에 올랐었던 유명 인사들이었고,투병 중이던 1962년에도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라며, 자기보다 21살이나 어린테오 사라뽀(Theo Sarapo.
1936-1970)와 두 번째로 정식 결혼을 하였으나, 그에게 막대한 부채만 남기고, 이듬 해, 1963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30년대와 1950-1960년대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영화의 줄거리 전개가어떤 면에서는 두서없기도 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내내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이는 데는 성공을 한듯한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한 시간 때문에, 그녀 곁에 머물렀던 수많은남성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의 사랑만이
집중조명을받은 점도, 또 그녀가 돌보지 않아 두 살 때 수막염으로 죽은 그녀의 유일한혈육, 마르셀(Marcelle/1933-
1935/그녀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가 된다는사연/영화 끝에 잠깐 언급) 이야기 등이 모두 거두절미 된 점도 아쉽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영화음악적인 측면이다.
’작은 참새‘ 나 ‘작은 숙녀‘ 정도로 해석이 될 원제(라 몸/La Mome)와는별개로 미국이나 한국에선 흥행을 염두에 두고 붙인 (개봉)제목이겠지만,바로 영화의 제목인 불세출의 대 명곡, ‘라 비 앙 로즈’(장미 빛 인생/La VieEn Rose)의
팬으로서는 섭섭함을 느낄 정도로 음악적인 초점은 이 명곡에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곡을 포함하여 그녀가 1940년대에 세계적으로 크게히트시킨 여러 명곡들이 마치 모두 다 연인, 마르셀 세르당 때문에 만들어졌고,
또 그에게 바치는 곡들 정도로만 왜곡 해석된 점도 불만이 아닐 수 없다.
한편, TV시리즈의 음악을 주로 만들어온 크리스 거닝(Christopher Gunning,1944. 영국)의 OS는 에디뜨 삐아프의
워낙 많은 오리지널 버전 삽입곡 들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음은 이해가 되는데, 그녀의 1936년의 첫 번째 극장
공연에서 그녀의 목소리대신 (뜻밖에) 연주로만 흘러나오던 얌전한 분위기의메인 Theme은 엔딩 크레디츠를 포함하여 모두 세 네 번 가량 들을 수가 있다.
이 명곡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샹송을 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이 영화의 제목인 ‘장밋 빛 인생’(라 비 앙 로즈)은
이브 몽땅과의 사랑이한창일 때인, 1944년 10월, 에디뜨가 직접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하였다고 한다.
[대외적인 작곡가는 루이 기(Pierre Louiguy/Louis Guy, 1916-1991, 스페인)로 되어있음.
“그이가 나를 품에 안고서 작은 소리로 속삭일 때 나에게는 인생이 온통 장밋 빛 으로 만 보인다.“는 가사는 물론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일만한 때에 만들어져서 그렇겠지만,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을 할 수 있는 장밋빛
낭만으로 가득 차 있어, 누가 뭐래도 사랑 예찬론자인 에디뜨를 대표하는 곡(Signature Song)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는 에디뜨의 어린시절회상 장면에서 아코디언 연주로 두어 번 정도, 그리고 연인 마르셀을 앞에
앉히고,뉴욕의 공연에서 부르는 노래 정도로만 등장을 해 아쉬움을 주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곡들 중에 가장 사실에 가깝게 해석을 한 곡은 역시줄거리에 집중 조명이 된 마르셀 세르당과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끝난 해인1949년에 만들어진 에디뜨의 또 하나의 명곡, ‘사랑의 찬가’ (Hymne A L'amour)가
아닌가 싶다.
(죽은 연인, 마르셀 세르당 에게 바치는 곡으로 역시 해석을 함.)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져 내린다하여도모든 땅이 다 허물어진다하여도만약 당신이 날 사랑해주시기만 한다면
그런 모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요.“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 못지않은 훌륭한 멜로디와 가사의 이곡도에디뜨의 오리지널 버전 외에 몇 년 후,
미국에서 ‘If You Love Me’(Really Love Me)라는 제목의 팝송(1954년의 Kay Starr 와Brenda Lee 등)으로도
크게 히트하여, 또 다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곡이 된다.
1935년에 그녀가 처음 녹음을 한 ‘Mon Apero' 이후, ’Mon Legionnaire‘ (1936),‘La Vie En Rose‘ (1944),
’Hymne A L'amour‘ (1949), ’Padam Padam‘ (1951),‘Sous Le Ciel De Paris’ (1954), ‘Milord’ (1959) 같은 그녀의 대표곡들 외에 이 영화가 가장 사랑하였고, 또 관객들에게 가장 감명 깊게 어필을 한곡은 그녀의말년 친구로서
그녀와 듀엣곡도 발표한바 있는 작곡가, 샬 드몽(Charles Dumont /아래 동영상의 피아노연주자)이 투병중인 그녀를 위하여 1960년에 특별히 만들어 주었고, 또 그녀의 파란만장한 48년간의 인생을 대변하듯, 그녀의 임종 직전의 장면과
함께 나오며 이 영화의 휘날레를 장식하던 또 다른 명곡, ‘아니, 난 후회하지 않아’ (Non, Je Ne Regrette Rien)이다.
정작, 영화 제목인 ‘장밋빛 인생’(라 비 앙 로즈)보다도 오히려 더 주인공다운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이곡이 끝나고,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아무런 소리도 없이 흰 자막의 엔딩 크레디츠가 올라갈 때, 마지막 이 한곡으로 더욱 묵직한 감동과
전율을 느낀 관객들은 쉽사리 극장의 좌석에서 일어서지를 못하는데, ‘파니 핑크’(Keiner Liebt Mich, 1994), ‘타인의 취향’(Le Gout Des Autres, 2000), ‘몽상가들’(The Dreamers, 2003), ‘참을 수 없는 사랑’(Intolerable Cruelty, 2003)등에서 그동안 보고 들었을 때보다도 몇 배나 진한 감동을 이번에 제대로 전달을 한 듯하였다.
‘러브 미 이프 유 대어’(Jeux D' Enfants, 2003)에서 보여준 말괄량이 연기와‘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 2006)에서 러셀 크로(Russel Crowe)와의대등한 연기로 이미 프랑스 영화계의 미래로 지목받은바 있는 TV 탤런트
출신의 빠리지앙, 마리옹 꼬띠야르(Marion Cotillard 1975, 빠리)는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감독생활을 시작한 올리비에 다한(Olivier Dahan, 1967, 프랑스)과 함께 힘을 합쳐 각본 제작에도참여를 하면서 오랜 준비를
해 온 이 작품으로 이젠 월드 스타가 된 느낌이다.
‘어느 멋진 순간’을 촬영하던 2005년 여름부터 이미 준비에 들어갔다고 하는데,169Cm의 큰 키로 147Cm의 왜소하고 마른 체구의 에디뜨를 재현하기위해오랫동안 피땀 흘려 한 다이어트는 두말할 필요가 없고, 헤어 라인은 물론이고
눈썹 까지도 면도로 밀어버린 채, 한 시퀀스를 촬영할 때마다 매번 5시간 정도의(일부러 더 못생겨 보이게 하는) 분장을 할 정도로 철저한 준비를 했다지만, 그러나 오히려 연기를 하지 않았으면 가수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밝힌바 있는
에디뜨의 골수 팬, 마리옹의 노래 연기(립 씽크)야 말로 정말 실감이 난다.
그녀는 2001년에 ‘Les Jolies Choses’ 에서도 ' La Fille De Joie'라는 곡을공동으로 만들고, 또 직접 불렀었지만, 이번 OST에서도 'La Conne' 를 직접 불러 녹음하였다.
그녀는 현재 그린피스의 대변인을 할 정도로 열렬하고 극성인환경 운동가이지만,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가
10번 정도 나오는, 그래서 영화 음악적으로는 ‘장밋 빛 인생’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아닌
‘러브 미 이프 유 대어’(Jeux D' Enfants, 2003)에서 이미 숙명적으로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결정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언론이 ‘천상(Heaven)의 목소리’라고 표현한데 반해, 194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도 활약을 한 그녀를 미국 언론은 ‘Heartbreaking Voice' 라고 극찬을하였는데, 그녀의 공연을 본 수많은
미국인들은 상상해왔던 빠리지앙과는 무척이나다른 모습에 우선 놀랐고, 다음에는 그 왜소한 체구에서 나오는 풍부하고 다양한 성량에 한 번 더 놀랐다고 한다.
“내게 있어 노래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의 도피이다.”
라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회고하였던 그녀는 노래가 없는 자신의 삶은 상상조차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1959년부터는
여러 번 쓰러지면서도(이 영화의 첫 장면),무대에 서는 정열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에디뜨하면 잊을 수가 없는 전설적인
빠리 올림피아(Olympia) 공연도 1955년 이래, 병세가 악화되었던 1962년 (이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인용됨
까지 모두 5번이나 열렸었다.
이 영화의 제목인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를 포함하여, 평생80 여곡을 직접 만들었고, 죽기 직전까지도
‘L' Homme De Berlin’ (1963)을마지막으로, 빠리 와 뉴욕에서 1935년 이후, 무려 300 여곡이상을 녹음한
샹송의 전무후무한 영원한 전설,여성들(또한 젊은이들+어린이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거듭 “사랑, 사랑, 사랑.”을 강조하던 사랑 예찬론자, 에디뜨가 세상을 떠난1963년10월11일, 그녀를 계속 후원하였던 장 꼭도 역시도 그녀의 죽음을무척이나 슬퍼하면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펌)
Edith Piaf (에디뜨 삐아프, 1915∼1963)
20세기 최고의 여가수로 꼽히기도 하는 프랑스 샹송의 여왕, 1999년 미국 뉴스위크가 '20세기 100년의 스타들'이라는 특집에서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했던 에디뜨 삐아프(본명 에디뜨 조반나 가시옹, Edith Giovanna
Gassion).
150 이 좀 넘는 작은 키 때문에 Piaf(프랑스 속어로 참새라는 뜻)로 불리게 되었던 검은 드레스의 샹숑 여신의 생애는
그러나,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 빈민가인 베르빌의 거리에서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아버지와 이탈리아 출신의
3류 가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료 자선병원으로 달려가다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베르빌 길복판에서 순찰경찰관이 받아 세상에 태어났으니 시작부터 험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에디뜨라는 이름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태어나기 1주일 전, 에디뜨 카벨이란 프랑스의 한 간호사가 독일 병사에 의해사살된 사건이 있었다.
며칠을 두고 이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삐이프의 아버지는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하필이면 비극적으로 죽은 간호사의 이름을 따서 붙일 만큼 무성의한 사람이었다.
두달 밖에 안된 딸을 버리가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 딸을 키울 수 없는 아버지는 도망간 어머니의 친정에 딸을 보내고 말았다.
3살 때 눈병을 앓다가 시력마저 잃고 말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외할머니의 기도로 다시 시력을 회복했다는 영화의 스토리 같은 사연을 간직한 채,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로 행인들에게 구걸하다가 자니스 캬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프레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무대에 서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극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처럼 삶 속에서도 수 많은 고통과 시련 그리고 행복과 기쁨을 겪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
또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말이다.
그렇게 어려서의 고생과 무절제한 생활로 일찍부터 병고에 시달려왔던 그녀는 50세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할머니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에 벌써 루이 뒤퐁(Louis Dupont)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면서 1933년 Marcelle이라는 이름의 딸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그와의 사이도 벌어지고 첫아이도 두 살이 채 안되어 거리에서 죽고 만다.
그녀에게 'La Mome Piaf(작은 참새)'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데뷔를 시켜줬던 르프레 역시 데뷔 얼마 후 1936년
어떤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삐아프가 그 혐의를 받게 되었다.
겨우 무죄는 입증할 수 있었으나 침체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레이몽 아소(Raymond Asso)와의 만남은 그녀를 밤무대 가수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수로 거듭나게 해준다.
그는 그녀의 첫번째 히트곡인 'Mon Legionnaire(나의 병사님)'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이 후에도 많은 노래들을
만들었고, 둘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또 한번 이별을 맞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전쟁 중에도 여전히 극장과 카페는 문을 열고 있었으며, 그녀도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더구나 그 기간 동안 그녀는 가수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에도 진출하여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는데, 1940년
장 콕토(Jean Cocteau)의 연극 'La Bel Indifferent(냉담한 미남)'와 죠르쥬 라콤브의 1941년 영화
'Montmartre sur Seine'에도 출연하였다.
1944년 그 유명한 캬바레 [물랭 루즈]에서 이브 몽땅(Yves Montand)을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하여 열심히 선전했으며, 46년에는 샹송의 벗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 후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49년에 그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1950년 9월 20일 삐아프는 그때까지 뤼시엔느 보와이어(Lucienne Boyer)의 남편이었던 가수 쟈끄 필스
(Jacques Pills)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였고, 그 4년 후에 이혼하였다. 1962년 21세 연하인 떼오 사라포와 결혼,
그와 함께 올렝삐아 극장에서 노래하였다.
그러던 1963년 10월 11일,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원인으로 요양 중이던 리비에라에서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간 뒤
세상을 떠났으며, 그 충격으로 쟝 꼭또도 뒤를 따랐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녀의 죽음 앞에 오열을 터뜨렸고 팬들이 실신하여 쓰러지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에디뜨 삐아프를 얘기할 때 그녀의 비극적 인생만큼이나 꼭 이야기해야 할 것이 음악과 예술에 대한 헌신이다.
죽기 얼마 전 무대에서 일어난 일만 보아도 이런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쓰러진 적이 있었다. 놀란 스태프가 그녀를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하자, 그녀는 피아노 다리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끝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집념과 열정, 이것이 돈과 인기에 연연하는 가수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가수의 정신이 아닐까.
이 때문에 그녀가 죽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을 담은 그녀의 노래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여전히 우리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이름도 모른다 하여도 그녀의 음악 한곡쯤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굴곡 많은 인생을 담아내려면 두시간이 모자란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불우하고 불행한 삶을 시작해서일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만 그래도 목마르게 갈망했던 건 사랑이였다.
이 영화에서는 이미 약물과 병에 찌들려 죽음을 앞에 둔 그녀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구성.
그래서 어릴때부터 순차적인 에피소드가 아닌, 시간을 오가는 구성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굴곡많은 인생이 더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나의 골자는 사랑이라는 것. 그녀의 말년인터뷰에서도 나오듯이, 여성들에 얘기 해 주고 싶은 것은요?
사랑....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어린이에게는요? ....사랑....
그리스 청년 "테오 사라포"등.
정열적인 사랑으로 삶을 살았고, 그 열정은 음악으로 우리에게 전해 진다.
그가 마지막까지 여러 남자가 있었지만 자신의 사랑은 오직 하나,"마르셀 세르당"뿐이라고 할만큼 그를 사랑했고
그의 죽음은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이였다고 한다.
유부남이던 "마르셀 세르당"과 사랑에 빠지고,그녀를 만나러 오던 마르셀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둘의 사랑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후로, 그녀는 약물에 빠져들게 되면서그가 죽고 몇 날을 방에서 나오지 않던 그녀가 삭발을 하고 나와마르셀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직접 작사한 "사랑의 찬가"를 부른다.
무대에서 그녀는 사랑의 찬가를 부르면서 말했다.
"오늘 밤은 마르셀 세르당을 위해서 노래하겠습니다. 오직 그사람 하나만을 위해서..."
그녀의 또다른 고전 "장미빛인생"도 '이브몽땅'과의 사랑이 빚어낸 곡이다.
실제로 그녀의 곡들에서는 상상만이 아닌 사랑이 충만했던 자신의 삶을 투영하였기에오래도록 불려지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쓰러져 그녀를 끌고 나오려는데그녀가 피아노 레그를 잡고 놓지않으며 "노래는 마쳐야
한다.
노래를 끝까지 마쳤다는 이야기...."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는 곡을 영화 마지막에 부르는데그 가사와 그녀의 인생이 오버랩되면서 전율이
느껴진다..
그녀의 죽음후, 시적인 영감을 교감하며 절친했던 세기의 시인 "장 꼭도"는 통곡하며 "그녀는 위대했다. 피아프와 같은 여성은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애도사를 준비했으나, 그도 며칠후 심장마비로 피아프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녀의 영혼의 친구였던 장꼭도는 지금 피아프의 옆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그녀의 삶.
그녀는 그 후회없었던 삶을 마치고 그녀의 사랑, 마르셀과 만났을까?
그녀만큼이나 예술혼을 지녔던 남편 이브몽땅...그도 소극장 공연을 기획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본명은 에디뜨 조반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이며 1915년 12월 15일 파리의 노동자 지역인 베르빌의
가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커스 곡예사였고 어머니는 도시 변두리의 가수였는데 자선병원으로 가는 도중 그녀를 낳았다고 한다.
이윽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도망가버려 그녀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세상물정을 알게된 무렵부터 아버지와 함께
거리에 나가 구경꾼한테서 돈을 모으는 역을 하고, 15세부터는 혼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자니스’ 라는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프레(Louis Leplee)가 그녀를 자기 가게에서 노래하게 했는데, 이때
그녀는 삐아프(파리지방의 은어로 ‘작은 참새’)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러나 반 년 후 르프레가 어떤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혐의를 받은 피아프는 실의에 빠진다.
얼마 후 작곡가 레이몽 아소, 말그리트 모노 등의 격려로 재기하였고, <나의 병사님> 등을 부르고 성공을 거뒀다.
1940년 장 콕토가 그녀를 위해 쓴 <냉담한 미남>에 의해 배우로서도 눈을 떴다. 1944년 ‘물랭 루즈’에서 이브 몽탕을 알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46년 ‘샹송의 벗’을 내보냈다.
그후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그는 49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사랑의 찬가’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샹송이 되었다.
1950년 9월 20일 피아프는 그때까지 뤼시엔 부아에의 남편이었던 가수 자크 필스와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였고
그 4년후에 이혼하였다. 1962년 21세 연하인 테오 사라포와 결혼, 그와 함께 올렝피아 극장에서 노래하였다.
그리고 63년 10월 11일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원인으로 요양중이던 리비에라에서 파리의 자택으로 돌아간뒤 세상을
떠났으며, 그 충격으로 장 콕도도 뒤를 따랐다.
노래와 사랑에 산 위대한 여성이었다.
Edith Piaf
프랑스의 빌리 할러데이로 추앙되는 에디뜨 삐아프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꿋꿋한 삶을 살면서 그 역경을 노래에 담았다.
'삐아프('참새'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작은 키에 가녀린 몸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감정어린 목소리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그를 닮은 많은 후대 가수들을 만들어냈다.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본명: Edith Giovanna Gassion)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의 베르빌에서 태어났다.
서커스 단원이던 아버지와 카페에서 노래했던 어머니는 그녀를 낳자마자 그녀를 거리에 내버렸다.
숱한 고생으로 6살에 잠시 시력을 잃기도 했었던 그녀는 거리에서 노래부르며 동냥으로 목숨을 유지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노래하던 그녀는 10살때부터 직업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가던 그녀는 16살에 한 군인과 관계를 갖고 첫 딸 Marcelle을 출산했지만 아이는 2년 후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1935년, 프랑스의 작은 술집 'Gerny'의 주인이었던 루이 루프레(Louis Leplee)가 길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당시 20살이던 그녀를 가게에 데려와 노래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온갖 풍파에 시달린 삶이 배어나는 그녀의 노래 실력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La Mome Piaf'('The Kid Sparrow-작은 참새'라는 뜻)로 불리는 열정적인 가수로 알려지기 시작, 그 범위를 넓혀갔다. 작곡가 레이몽 아소(Ramond Asso)와 모리스 슈바리에(Maurice Cheval!!!!!!!ier)의 도움으로
그녀의 삶이 다듬어진 노래로 표현되면서 거칠고 굴곡 많은 그녀의 인생이 예술로 승화되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뇌에 찬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서서히 샹송계의 스타가 돼 갔다.
1936년 그녀는 성이었던 'Gassion'을 없애고 'Piaf'라는 이름을 사용, Edith Piaf로 주변국가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그를 발굴해 키워준 Louis Leplee가 살해되면서 Piaf는 잠시 시련에 빠졌다.
2차 세계 대전(1939~1945) 즈음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활동 영역을 미국 대륙으로 넓혔다.
1946년 워싱턴에서 미국 첫 투어공연을 성황리에 치루면서 그녀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노래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는 미국에서 만난 권투선수 마셀 셀당(Marcel Cerdan).
1948년 이들은 결혼했고 그녀는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됐으며 진실한 사랑을 체험했다.
하지만 Cerdan은 이듬해 그녀를 뒤로한 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떴다.
1950년 그녀는 너무나 사랑했던 그에게 바치는 곡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를 만들었고,이 애절한
러브송은 그녀가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가수라는 평을 들을 만큼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했다.
이 곡은 이후 몇 장의 앨범에 영어로 실리기도 했으며,우리 나라의 음악 교과서에 실릴만큼 유명한 곡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 때문에 크게 상심한 그녀는 술과 마약을 도피처로 삼기 시작했다.
이후 Piaf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지만 그녀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2년 가수이자 작곡가 인 자끄 필스(Jacques Pills)와 결혼, 자손을 기원하며 'Je T'ai Dans La Peau'를 부르기도 했고, 1953년 '하룻밤의 연인(Les Amants D'un Jour)'과 '오토바이를 탄 남자(L'Homme A La Moto)'를 녹음했다.
이듬해에는 미국을 11개월 동안 돌면서 장기 투어를 가졌고,워싱턴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도 공연을 했다.
게다가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 'Les Amants De Demain'(1956), 'Paris Chante Toujours', 'La Petit Lili' 등에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1959년 친분이 있던 작곡가 조르쥬 무스타키(Georges Moustaki)에게서 받은 '주인님(Milord)'이 영국에 이어
이탈리아, 독일, 네델란드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더 많은 투어공연이 연이었다.
또 1960년에는 작곡가이자 친구였던 찰스 드몽(Charles Dumont)의 곡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 그리고 그녀의 자작곡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으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샹송계의 대모'로서의 그녀 이름을 후세인에게 널리 각인시켰다(이 곡은 영화 파니핑크에 삽입된 곡이기도 하다.).
1962년 그녀는 20살 이상 연하인 테오 사라포(Theo Sarapo)와 결혼했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일하는 활력을 줬으며,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을 'A Quoi Ca Sert L'Amour'로
표현하기도 했다.
항상 관중들을 전율하게끔 하며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던 그녀는 196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노래할 때 항상 검은 드레스를 입던 작은 체구의 그녀는 이브 몽땅, 죠르쥬 무스타키, 주디 갈란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의 유명한 보컬리스트를 만들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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