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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ISM 음악

Enrico Macias & July -Le Fusil Rouille(녹슨 총)


 

 

 




Enrico Macias & July -Le Fusil Rouille(녹슨 총)



 

 

 

 

 

 

 

 

 

 

 

Le Fusil Rouille

 

 

J'ai vu le soleil bruler la mer
Le volcan eteint fendre la terre
Des tombeaux geants perdus dans le deert
Et la goutte d'eau creuser la pierre
J'ai connu des nuits ou les etoiles
Transformaient le ciel en cathedrale
Les ruines d'un mur eargnees par le temps
Ou j'ai prie souvent et pourtant

저는 태양이 바다를 불태우는 것을 보았어요.
화산이 땅을 갈라지게 하는 것두요.
사막에서 사라진 거대한 묘지와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내는 것도 보았어요.
저는 별들이 하늘을 성당으로 바꾸는 밤들을 겪었어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피해를 면한 무너진 돌담에서
저는 자주 간청을 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 Refrain -

Rien n'est plus beau qu'un fusil rouille
Qu'un soldat un jour a oublie
Quelque part a l'ombre d'un buisson
Pour courir vers son village et sa maison
Dans ce monde qui bat le tambour
Qui prefere la guerre a l'amour
Rien n'est plus beau qu'un fusil rouille
Et qui ne servira plus jamais, plus jamais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어느날인가 한 병사가 그의 집이 있는 마을로 달려가기 위해,
어두운 수풀 속 어디엔가 놔두고 왔던 녹슨 총보다도 말이에요.
북을 치는 이 세상에서
누가 사랑보다 전쟁을 더 좋아할까요?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이젠 결코, 이젠 결코 소용이 없을거에요.

J'ai vu le savant, j'ai vu l'apotre
Passer leur vie a sauver les autres
J'ai pleure de joie en ecoutant le cri
D'une femme qui donnait la vie
Belles sont les fleurs dans le jardin
Qui s'ouvrent a la rosee du matin
Et la jeune fille dans la rue qui court
A son premier rendez-vous d'amour



저는 학자를 보았어요. 저는 사도를 보았어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요.
저는 목숨을 바친 한 여인의 외침을 들으면서
기뻐서 눈물을 흘렸어요.
정원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어요.
그 꽃들은 아침이슬을 받아 핀답니다.
또한 거리에는 아가씨가 자기의 첫 사랑의 약속을 위해 달려가네요.

- refrain -

Rien n'est plus beau qu'un fusil rouille
(3 vers solo orchestre)
Dans ce monde qui bat le tambour
Qui prefere la guerre a l'amour
Rien n'est plus beau qu'un fusil rouille
Et qui ne servira plus jamais, jamais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북을 치는 이 세상에서
누가 사랑보다 전쟁을 더 좋아할까요?
녹슨 총보다 멋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이젠 결코, 소용이 없을거에요

 

 

 

 

 

 

 



 

 

 

 

 

앙리꼬 마샤스는 1938년 12월 11일 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있는 콩스탕틴(Constantine, Algeri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태생이며 모두 유태교 신자였다.
콩스탕틴에서 아랍과 안달루시아 음악을 연주하던 '셰크 레몽 레리스 오케스트라 (Cheikh Raymond Leyris

Orchestra)'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 Sylvain Ghrenassia(1914–2004)의 영향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 기타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15세 때 나중에 그의 장인이 된 셰크 레몽의 오케스트라에 정식 단원이 되어 활동을 하였다.

이후 미래가 불확실했던 음악을 잠시 떠나 초등학교에서 문법과 철자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기타에 대한 강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무렵 알제리는 19세기 초부터 이어져온 프랑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한창이었다.

격렬한 내전 속에서 사랑하는 친지를 잃은 그는  1961년 아내 수지(Suzy)와 함께 고향을 떠나 프랑스행 배를 탔다.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 망명자 신세가 되어야 했던 그는 배 위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후 자신의 첫 앨범에 수록된

노래 '내 나라여 안녕(Adieu Mon Pays)'을 쓴다.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이주한 그는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1961년 파리로 와서 '황금이불'이라는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그는 1962년 레이블 '파테(Pathe)'와 계약을 맺고

첫 앨범 'Adieu Mon Pays'을 발표한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질베르 베꼬(Gilbert Becaud)'의 라이브에서 첫 무대에 섰고, 이듬해에 첫 투어를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유행하던 '예예(ye-ye : 세계 제2차 대전 후의 베이비붐 세대, 즉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대보다도 풍요로운 시기를 누린 젊은 세대가 주도한 1960년대 초반의 로큰롤 문화)'의 열풍 속에서 ''가스통 그레나시아'라는 이름을 '앙리꼬 마시아스'로 바꾼 그는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프랑스는 물론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인종과 종교와 국가, 이념을 초월하여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한 그의 노래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고

앨범은 꾸준히 팔려나갔으며, 그는 명실공히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 사람들', '아니, 난 잊지 않았어', '예루살렘의 크리스마스' 등 주목할 만한 곡들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미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투어가 이어졌고, 1976년에는 아름다운 곡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불행(Malheur ACelui Qui Bless

 un Enfant)'이 수록된 앨범 'Mélisa'로 골드디스크를 수상한다.

 

1978년에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렬의 초청으로 피라미드 아래에서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콘서트를 마쳤다.
1980년 11월 UN사무총장인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은
그에게 '평화의 가수(Chanteur de la Paix)'

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1997년에는 '코피 아난(Kofi Annan)' 사무총장으로부터 UN평화대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의 독특한 이력으로는 1964년에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하였는데,

'Declic et des Claques', 2001sus 'La Verite Si Je Mens! 2', 2006sus 'Un Ticket Pour L'Espace'에도

 출연하였다.
그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La France De Mon Enfance,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노래로,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프랑스의 영토가 아니었다.

 

알제리 해변의 한가한 태양, 그곳이 내가 태어난 프랑스. 독립의 꿈을 꾸기 바로 전,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마치

자유와도 같이 연약하기만 했다.

내가 태어난 그곳 프랑스)'와 '이 모든 이유로 나는 너를 사랑해(Pour Toutes ces Raisons, Je T'aime)',

문 좀 열어줘(Ouvre moi la porte)' 등은 이 시기에 새로운 레이블 '트레마(Trema)'를 통해 발표된 곡이다.


이듬해 발표된 앨범 '한 양치기의 죽음(Un Berger Vient de Tomber)'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타이틀 곡은

암살된 사다트 대통령에게 바치는 작품이었다.

 

빠른 템포의 전자음향이 가미된 1984년 발표작 '진정한 용기(Generosite)'는 우리나라에서도 라이센스로 소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하모니카 연주와 여성보컬과 듀오로 노래하는 '녹슨 총'은 당시 드라마 주제곡으로 사용되어

라디오 방송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아스니에(Asnieres)'어린이 합창단과 노래한 '동심(Coeur D'Enfant)'
서정적인 발라드 '아이들이 이렇게 자란

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Je N'ai pas vu mes enfants Grandir)'도 인기를 얻은 곡들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중후한 목소리와 더불어 감동적인 노래

앙리코 마샤스의 본명은 그레나시아/1938년 12월 11일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알제리의 콩스탕틴 출생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태생이며 모두 유태교도들이었다.

콩스탕틴에서 아랍/안달루시아 음악을 연주하던 셰크 레몽 레리스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 기타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열 다섯 살 때에는 셰크 레몽의

 오케스트라에 정식 단원이 되어 활동을 했다.


이후 잠시 미래가 불확실했던 음악을 떠나 초등학교에서 문법과 철자법등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는 역시 책보다는

기타에 더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즈음 알제리는 내전중이었으며 1961년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떠난 그는 62년 파리의 황금 이불이라는 캬바레에서 노래하던 중 파테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첫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첫 투어를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 걸펴 유행하던 예예의 열풍속에서 앙리코 마샤스로 이름을 바꾸고 64년부터 올랭피아에서의 공연을 비롯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점차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80년 11월 UN 사무총장인 쿠르트 발트하임은 그에게 평화의 가수 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꾸준한 앨범 발표와 투어 등의 활발한 활동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이어지고 있으며 퇴색되지 않은 음악성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 " ~ "네이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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