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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Brahms, Piano Concerto No.1 in D minor, Op.15

 

 

 

 

 

 

Emil Gilels - Brahms, Piano Concerto No.1 in D minor, Op.15

 

 

Brahms, Piano Concerto No.1 in D minor, Op.15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Johannes Brahms

 

 

 

 

 
'Johannes Brahms' (1809~1847)
요하네스 브람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d minor 도 무척 많은 고민과 시행 착오 끝에 태어난 작품이다. 신중한 성격의 브람스가 작품을 만들면서 요아힘이나 클라라 슈만 등 쟁쟁한 선배들에게 조언을 청하곤 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처음에 이 협주곡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씌어졌는데, 브람스는 “아무래도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고 요아힘과의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작품에 불만이 생기면 거기에 더욱 복잡한 요소를 플러스시키기 쉽다.

브람스 역시 이 곡을 교향곡으로 개작할 마음을 먹고 일악장을 관현악용으로 편곡해 보았으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 자신 이 작품을 가리켜 ‘불운한 교향곡’이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숙고를 거듭한 작곡가는 마침내 피아노 협주곡의 형식을 취하여 다시금 곡에 매달렸고, 일악장의 카덴차 부분에 이르러 겨우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클라라 슈만과의 편지에서 적고 있다.

1858년 2월 작곡을 시작한 지 무려 5년 만에 완성된 피아노 협주곡 d minor는 여러 가지 시련에 담금질 된 탄탄한 작품으로서의 면모를 곳곳에 지니고 있는 걸작이다.

젊음의 패기로 가득찬 오케스트레이션과 고집이 센 독일인의 피아니즘이 느껴지는 솔로 파트, 그리고 명인기.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의 특징은 그 완벽한 균형에 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무게는 서로의 장점을 한 점도 덜어내는 법 없이 교묘하게 비등점을 이루고 있으며, 교향악적인 거대한 스케일의 오케스트라에 맞서는 피아노는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게 이 커다란 작품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한마디로 흠잡을 데 없는 미끈한 작품인데, 보기 드문 노력파였던 브람스의 성품은 비교적 초기 작품인 이 협주곡에도

뚜렷이 새겨져 있다고 하겠다.

제 1악장은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이나 협주곡인 점을 고려할 때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도약이 심하며 극적인 제 1주제와 코랄풍의 제2주제는 한 번은 격렬하게 나타나며, 다음 번에는 온화하고 서정적인

표정으로 바뀌는 등 다양한 전개를 보이는데,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솔로 역시 충돌과 양보를 반복하면서 발전해가고

 있다.

원래 미사곡을 모델로 하여 씌어졌다는 제 2악장은 차분하고 조용한 기품을 지니고 있지만 역시 브람스 특유의 쓴 맛이 지배적이다.
론도 형식의 제 3악장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의 속도로, 독일 무곡 다운 진행이다.

 

 피아노가 활기차고 경쾌한 주제를 노래하고 곧이어 오케스트라총주가 이를 이어받는데, 중간에 B flat 장조의

부주제가 등장하는 것도 특이하다.

후반부에 나오는 짧은 카덴차는 ‘환상곡풍으로’라고 지시되어 있는데, 화려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어딘가 떫은 느낌의 브람스다운 피아니즘으로 꾸며져 있어서 협주곡 전체를 통털어 가장 깊은 감동을 만끽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품배경과 해설

브람스가 그의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에 집중한 시기는 1856년부터 2년간이었다. 그러나, 이 협주곡의 시원(始原)은 1854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은 브람스의 스승인 슈만이 정신착란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하는 비극적 사건이 있은 직후였다. 이 무렵 그는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3악장 짜리 작품이었다.

그러나, 작품의 발표를 미루고 있다가 그해 여름에 제 1악장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이때의 의도는 교향곡

제 1번으로 고쳐 쓰고자 했던 것이다.

허지만 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5년 2월 7일 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불행한 교향곡은 피아노 협주곡으로 사용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중에서 피아노 협주곡으로 채택된 악장은 제1악장 뿐 이었다.

 

제 2악장과 3악장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졌다.

이렇게 해서 1856년이 거의 저물어갈 무렵에 제 2악장 아다지오(Adagio)와 제 3악장 론도(Rondo)가 완성되었다.

초연은 1859년 1월 22일, 하노바에서 브람스의 피아노 독주와 요아힘의 지휘로 행해졌으나 이때의 연주는 '실패'로

기록되고 있다. 재연은 닷새 후,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열렸다. 브람스는 그의 친구 요아힘

(Joachim)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연주는 빛났지, 그러나 결정적인 실패였소".

작품의 탄생 배경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탄생 동기가 교향곡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피아노 협주곡에

 비하면 교향악적인 비중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일러서 '피아노 있는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이러한 표현은 칼 그레드너와 한스리크가

 사용했다).

 

물론, 여기에서도 피아노는 독주 악기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나 여타의 협주곡처럼 피아노가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모습이 아니고 거의 대등하거나 혹은 피아노가 오케스트라 속에 녹아있는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보다도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질 부분은 이 협주곡이 브람스의 청년기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의 '질풍노도의 시대'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협주곡에서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강렬한 빛깔의 정열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째지게 가난한 집안… 어린 나이에 피아노 반주로 돈을 벌어야 했던 브람스

 

파트리크 쥐스킨트(1949~ )의 <콘트라베이스>라는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이 소설은 독일 작가 쥐스킨트가 무명시절을 청산할 수 있었던 계기였습니다. 어느 극단의 제의를 받아 모노드라마(1인극)를 염두에 두고 썼던 작품인데, 다행스럽게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쥐스킨트라는 네 글자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이듬해에 발표한 <향수>는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소설이었지요. 30개가 넘는 나라에 번역 소개되면서 그를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한데 엄밀하게 따지면 ‘콘트라베이스’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이탈리아식으로는 ‘콘트라바소’, 영어식으로는 ‘더블베이스’로 써야 합니다.

쥐스킨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발음하자면 ‘콘트라바스(Der Kontrabass)’가 맞겠지요. 아마 출판사에서 편의상

 ‘콘트라베이스’로 표기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는 사랑스러운 소설입니다.

일단 분량이 짧아서 단숨에 읽기에 좋고요, 다루고 있는 내용과 주제가 제법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마 쥐스킨트는 독일 작가답게 음악을 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 만(1875-1955)처럼 본격적으로 음악에 몰입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소설 곳곳에 음악적 표현이나 음악에 대한 언급들이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지요.

한데 하루키가 매우 표피적으로 음악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것과 달리, 쥐스킨트는  본질적으로 음악에 접근합니다.

예컨대 <콘트라베이스>가 그렇습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몸집이 가장 커다란 악기인 콘트라베이스는 어떤 존재일까요? 사실 이 악기는 ‘오케스트라’라는

 계급사회에서 매우 낮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권력 서열이 보잘것없다는 뜻이지요.

물론 저현(低絃)의 깊은 맛을 우려내기 위해 꼭 필요한 악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늘 뒷전에 엉거주춤 서 있는 악기이기도 하지요.

 오케스트라 피트의 전면에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바이올린에 비하자면, 또 관악기들이 터뜨리는 우렁찬 팡파르에

견주자면, 콘트라베이스는 왠지 서글프고 안쓰러운 악기입니다.

그래선지 쥐스킨트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최후의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아버지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가 바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째지게 가난했습니다. 이곳저곳 떠돌며 작은 악단의 연주자로 살던 그는 스무 살 무렵에 함부르크에

정착하지요.

 

 하지만 그를 기다려주는 번듯한 오케스트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동네잔치에 불려가 경음악이나 연주하는 별 볼일

 없는 악단의 ‘오부리 악사’로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브람스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30년,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집 딸과 결혼합니다. 한데 그 ‘주인집’도 형편이

곤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울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브람스의 어머니인 크리스티아네 니센이 남편인 요한 야코프보다 17년 연상이었다는

 점입니다.

 

브람스가 14년 연상의 클라라를 평생에 걸쳐 사모한 배경에는 그런 가족사도 깔려 있는 듯합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브람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열두 살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브람스는 가극장에서 가수들의 반주를 해준다거나 인형극의 배경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

주고 급료를 받았습니다.

밤에는 술집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함부르크는 항구도시입니다. 어린 브람스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술집은

 취한 선원들로 북적거렸고 매매춘이 일상사였습니다.

그 어둡고 음습한 북부 독일의 항구도시에서, 브람스는 우울하고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그래선지 훗날 브람스가

작곡한 음악들은 대부분 무겁고 우울합니다.

 

 

 

브람스와 처음 만난 날, 슈만이 일기에 쓴 글 “천재가 다녀갔다”

1853년은 브람스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지요.

뿐만 아니라 서양음악사에서도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해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해 9월 30일, 드디어 브람스가 슈만과 조우합니다.

브람스는 스무 살 청년이었고 슈만은 마흔세 살의 중년이었습니다. 브람스는 무명의 음악가 지망생에 불과했지만,

 슈만은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잡지 <음악신보>의 발행인이었습니다.

 스무 살 청년은 자신이 직접 쓴 ‘피아노 소나타 C장조’를 떨리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그리고 1악장이 끝났을 때, 슈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잠깐 연주를 멈추게.”라고 말하지요. 왜 그랬을까요?

 연주가 시원치 않았던 걸까요?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였지요. 슈만은 서둘러 아내를 거실로 불러들입니다.

아내가 들어오자 슈만이 청년에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주게나.”

 

그날 슈만의 집 거실에서 펼쳐졌던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슈만과 클라라는 청년 브람스의

연주에 감탄했지요. 슈만은 그날 일기에 “천재가 다녀갔다.”고 씁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창간한 잡지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Neue Bahnen)’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게재하지요.

그것은 슈만이 이 잡지에 절필을 선언한 후 10년 만에 쓴 글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브람스에 대한

극찬이었습니다.

한데 그것은 브람스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린 계기였던 동시에, ‘브람스의 적’을 만든 사건이기도 했지요. 슈만의 글이

 너무 신랄했던 까닭입니다.

슈만은 브람스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면서 당시의 음악적 대세로 자리를 잡아 가던 리스트와 바그너 풍의 음악을 거세게

비난합니다. 그 덕분에 훗날의 브람스는 반대파들의 공격에 직면하지요.

세상일이란 항상 그렇습니다.

좋은 게 있으면 힘든 것도 있는 법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Op.15는 청년 브람스의 대표작입니다.

브람스가 남긴 4곡의 협주곡들, 그러니까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더블 콘체르토) 중에서 가장 먼저 작곡된 음악이지요.

브람스가 최초로 작곡한 대규모 관현악곡이기도 합니다.

 브람스를 옹호했던 슈만에게는 일종의 조울증이 있었는데, 그는 브람스를 첫 대면하고 약 5개월 뒤에 라인 강에 몸을

 던집니다. 간신히 구조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지요.

브람스는 슈만이 사망하기까지, 그러니까 약 2년간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슈만의 집안을 가족처럼 돌봅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바로 이 무렵에 작곡되지요. 작곡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1858년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1악장: 마에스토소

1악장은 장엄하게 펼쳐지는 마에스토소(maestoso) 악장입니다.

팀파니가 으르렁거리며 돌진하는 서주에서부터 청년 브람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비장하면서도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첫 번째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불현듯 음악이 잦아들었다가 아름다운

선율의 바이올린으로 이어집니다. 관현악과 피아노가 두 개의 얼굴의 번갈아 보여주는 악장이지요.

때로는 격렬하게, 또 때로는 애틋하게. 마치 브람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악장입니다.

2악장: 아다지오

브람스는 아다지오(adagio)로 연주되는 2악장에 대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초상(肖像)”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슈만을 잃은 클라라에 대한 위로, 아울러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애틋한 마음이 겹쳐지는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잔잔하게 물결치고 목관악기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피아노는 슬픔을 머금은 채 애잔한 선율을

 연주합니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이어지는 마지막 3악장에서 음악은 다시 강렬해지지요.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피아노가 당당하게 상승 선율을 연주하고 관현악이 따라옵니다. 1악장에서 이미 들었던 주제가 재현되는 장면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지요. 피아노가 매우 화려한 패시지들을 연주하면서, 브람스 본인이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요.

 

브람스는 1859년 1월 하노버에서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해 이 곡을 초연했습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1831-1907)이 지휘를 맡았지요.

 결과는 ‘비교적 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닷새 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가졌던 연주회는 격렬한 비난에

 부딪혔습니다.

브람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악단도 청중도 무반응”이었고, “박수를 치려고 했던 사람은 고작 3명”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진영 논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라이프치히에는 유난히 ‘브람스의 적’이 많았습니다. 브람스는 자신에게 모욕을 줬던 도시 라이프치히를 이후에도

계속 불편해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Maurizio Pollini - Brahms, Piano Concerto No.1 in D minor, Op.15

Maurizio Pollini, piano

Christian Thielemann, conductor

Sä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

Semperoper, Dresden

20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