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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Lalo, Symphonie espanole in D minor, Op.21

 

 

 

 

Isaac Stern - Lalo, Symphonie espanole in D minor, Op.21

 

 

 

 

 

 

 

 

Lalo, Symphonie espanole in D minor

랄로 ‘스페인 교향곡’

Édouard Lalo

1823-1892

 

Isaac Stern, violin

Eugene Ormandy, conductor

Philadelphia Orchestra

Town Hall, Philadelphia

1967.02.13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은 종종 교향곡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실제 이 작품은 교향곡의 형식을 갖춘 작품은

 아니다.

 바이올린 독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란 점에서는 협주곡이라 볼 수도 있으나 이 곡은 전형적인 협주곡 형식에서도 벗어나 있다.

 

모두 5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마치 여러 춤곡들을 모아 놓은 모음곡 같기도 하므로 <스페인 교향곡>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향곡도 협주곡도 아니다.

하지만 <스페인 교향곡>이란 작품명 그대로 스페인 풍의 음악인 것만은 확실하다. 전 악장에 걸쳐 ‘하바네라와

 ‘세기디아’ 등 스페인 음악의 향기가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특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색채

 

스페인 풍의 <스페인 교향곡>을 작곡한 에두아르 랄로 역시 스페인 혈통의

음악가다.

랄로의 집안은 대대로 훌륭한 군인들을 배출한 군인 집안으로 17세기에 플랑드르 지방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랄로의 부친 역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런 그가 맏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집안 전통을 깨고 음악가가 되겠다는 랄로의 꿈은 부친의 반대로 좌절되는 듯했다.

소년 시절의 랄로는 바이올린과 첼로 레슨을 조금 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 음악교육의 전부였다.

그러나 직업 음악가를 향한 열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랄로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파리로 건너가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프랑수아 아브넥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랄로는 틈틈이

작곡도 하여 1847년에 당대 최고의 콩쿠르인 ‘로마 대상’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음악가로서 인정받았다.

그 후 아르맹고 4중주단에서 비올라와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연주자로서도 활발한 연주 활동을 했다.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은 하바네라, 세기디아 등 스페인 음악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랄로는 현악 연주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올린협주곡 F단조와 첼로협주곡 D단조, 그리고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작품인 <스페인 교향곡>을 작곡해 현악기에 대한 그의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랄로의 바이올린 협주곡 F단조는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페인 교향곡>은

 초연 당시부터 지금까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랄로는 이 작품을 스페인 출신의 비범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파블로 사라사테를 위해 작곡했다. 1875년 2월 7일,

 <스페인 교향곡>의 파리 초연 당시 바이올린 독주를 맡은 것도 사라사테였다. 초연 이후 이 작품은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주요 레퍼토리로 정착되었다.

 

<스페인 교향곡>에는 독주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가 강조될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음색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이

 나타난다. 트라이앵글과 작은북, 하프 등, 일반적인 협주곡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특수 악기들이 편성되어 이 곡에

 화려한 색채를 더한다. 또한 현악 주자들이 휘파람소리와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하모닉스 주법까지 구사하는 등

특수한 연주 기법이 사용되고 관습에서 벗어난 악기 용법이 나타나 듣는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간혹 이 작품은 지나치게 화려한 외양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 역시 이 곡을 가리켜 “지극히 유쾌하고 신선한 곡이지만 진지한 것 같지 않다”고 평했다.

그러나 짧은 중간 악장들을 장식하는 랄로의 매혹적인 선율을 잘 들어보면 화려한 외양 뒤에 숨은 애수 띤 정서와

 진지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비제 <카르멘> 중 하바네라를 부르는 장면. 카르멘 역에 카테리나 안토나치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 이국적인 스페인 향기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

빠른 템포의 1악장은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1악장이 대개 그러하듯, 소나타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전 악장 중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가장 충실하고 잘 갖추어진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그러나 랄로가 주제로 사용한 선율 자체는 ‘하바네라’를 연상시키고 있어 스페인적인 느낌을 준다.

하바네라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2박자의 춤곡으로 19세기 후반에 유럽에 들어와 스페인에서

크게 유행했다.

하바네라의 리듬 형은 첫 박이 매우 강하며 점음표로 되어 있고 곧이어 짧은 16분음표와 8분음표 2개로 이어진다.

탱고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이 리듬은 <스페인 교향곡> 1악장의 두 번째 주제에서 암시된다.

오케스트라가 하바네라의 리듬을 연주하는 가운데, 독주 바이올린이 관능적인 스페인 풍의 선율을 선보이며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2악장: 스케르찬도. 알레그로 몰토

2악장은 ‘스케르찬도’(Scherzando), 즉 해학적이면서도 변덕스런 느낌의 음악이다. 랄로는 2악장에서 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분방하게 그의 매혹적인 악상을 펼쳐놓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1악장보다도 2악장에서 그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난다.

오케스트라가 수시로 독주 바이올린의 선율을 방해하는 듯하여 재미있다.

이 악장 도입부에서 현악기의 피치카토(pizzicato, 현악기의 줄을 손가락으로 퉁겨 연주하는 기법)와 하프가 마치

 기타 소리와 같은 음향을 들려주는 것도 독특하다. 무게감 없이 가볍게 날아오르는 바이올린 선율은 그 성격으로 보면

스페인 남부에서 유행한 3박자의 음악인 ‘세기디아’와 유사하다.

3악장: 인터메조. 알레그로 논 트로포

3악장 간주곡은 초연 당시 생략된 채 연주되었다는 이유로 한동안 연주회에서 생략되곤 했다. 게다가 러시아 바이올린

악파의 대부 레오폴트 아우어가 “이 악장은 다른 악장들에 비해 연주 효과가 적다”고 말하는 바람에 이러한 관습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하바네라 풍의 3악장은 급격한 음역 변화와 관능적인 표현이 나타난 매혹적인 음악으로, 이 악장을 생략한 채

연주하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다행히 명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이 1933년에 3악장을 복원해 연주한 이후 오늘날에는 3악장을 생략하지 않고

전 5악장을 모두 연주하게 되었다.

4악장: 안단테

4악장은 거창한 선언문처럼 시작된다.

 클라리넷과 바순, 금관, 첼로, 더블베이스 등 모두 낮음 음역의 악기들이 처음부터 묵직하게 등장해 인상적이다.

이윽고 바이올린이 어둡고 진지한 테마를 연주하는데, 그 느낌이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와 매우 유사하다.

5악장: 론도. 알레그로

5악장은 바이올린의 재빠른 움직임과 날렵한 기교가 강조된 화려한 음악으로 처음에는 고음 목관악기들과 하프의

 하모닉스가 반복되다가 바순이 고집스럽게 반복 음형을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바순의 반복 음형은 점차 전체 오케스트라로 번져 갔다가 다시 잦아들면 독주자가 경쾌하고 발랄한 주제를 연주하며

 재치 있는 음악을 선보인다. 전곡을 통해 바이올린의 첫 주제는 여러 번 되풀이되고 그 사이사이에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가 펼쳐진다.

 

 

 

 

 

 

 

 

Edouard Lalo 에두아르 랄로(1823 - 1892)

 

 

고전, 낭만주의 시기에 걸쳐 유럽 음악을 주도한 나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였다.

이탈리아와 함께 줄곧 서양의 중, 근세 음악의 산실이 되어왔던 프랑스는 게르만인의 논리적이고 질서 정연한 절대음악의 힘에 비해 다소 저조한 느낌이었다.

 

 프랑스인들이 낭만주의 시기에 이르러 춤과 화려한 무대 효과에 의한 그랑 오페라나 오페라 코미크에 심취한 나머지

기악 음악의 퇴조 현상이 나타났고, 오페라조차 새로운 음악사조를 반영하지 못한 퇴영적 상태를 계속했다.

오페라는 보수적이나마 구노, 비제 정도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기악음악은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과 관현악 편성에 의해 겨우 체면을 유지할 뿐이었다.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이 새롭게 부흥하게 된 것은, 18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프랑스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을

막 끝마치고서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한창 불타오르고 있었고, 이러한 기운을 반영한 프랑스 음악계에서는 국민음악

협회 등 여러 민족음악 협회와 새로운 악파들을 결성, 특히 관현악과 실내악이 활성화되었다.

에두아르 랄로(1823∼92)는 당시 프랑스 음악의 활성화에 기여한 여러 인물 중의 하나다.

그에 바로 앞서서 세자르 프랑크(1822∼90)와 카미유 생상스(1835∼1931)가 첫 자극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들중

프랑크는 리스트와 바그너의 독일 음악 전통에 너무 기대었고, 생상스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절충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반면 우리가 살펴보게 될 랄로와 그 밖에 댕디, 포레, 비도르, 쇼송, 뒤카스, 뒤파르크 등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들로서 프랑스 근대 음악을 진정 꽃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독일 교향악의 절대음악적 전통과 베를리오즈류의 프랑스 특유의 표제음악적 전통을 한데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도 각기 개성적인 양식을 펼쳐 나갔다.

랄로의 음악 세계는 학교(파리 음악원)나 개인 교습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개성이 뚜렸했다.

그의 음악 세계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심취했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등의 고전적 대가들로부터 직접

 익혀서 형성한 것이었고, 특히 멘델스존과 슈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면서도 뚜렷한 음악적 개성을 띤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펼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스페인등의 민속 어법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 작품들은 이러한 다양한 색채와 더불어 한결같이 특유의 개성적인 힘과 정열로 넘쳐 있어서 세자르 프랑크

계통의 음악이나 조금 뒤에 나타나게 될 드뷔시, 라벨의 인상주의 음악과 뚜렷이 구별된다.

랄로의 음악은 표현적이고 우아한 선율과 강렬하고 자극적인 리듬이 부각된 대위법적 기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반음계적 화성을 자주 사용하였지만 선율은 온음계적인 윤곽을 고수하여 바그너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갖는 최대의 특성은 관현악 편성법에 있었다.

 

그의 관현악법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소 시끄럽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풍부하고 독창적이며 빼어난 기교를 갖추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진다.

사실 '시끄럽다'는 인상도 그가 즐겨 사용했던 수법인 옥타브 진행에 의한 반복 화음이나 예기치 않은 박에서의 포르티시모(아주 세게)사용 등에 연유한 것으로, 그의 관현악곡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개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랄로의 가문은 16세기 이래로 플랑드르와 프랑스 지역에 살았지만, '랄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페인 혈통을

 타고 났다.

랄로는 릴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웠는데 너무 음악에 열중하자 부모로부터 음악 공부를 하지 못하게

강요받았고,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1839) 음악원에서 처음에 얼마간은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곧이어 개인 교습으로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사람들로부터 비교적 늦게 인정을 받았고, 그 이전까지는 주로 바이올린 연주의 레슨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랄로의 작곡 활동시기는 크게 1845년경부터 1865년까지의 습작 및 침묵 시기, 1865년 이후 오페라 창작 시기, 1870년대의 기악곡 창작시기, 오페라 및 가곡 작곡가로서 명성을 굳힌 1880년대의 전성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랄로가 처음 작곡을 시작한 것은 1845년경으로 알려져 있고, 1848년과 이듬해에 당시 유행하던 풍을 모방한 몇 개의

가곡과 실내악을 악보로 출판했으며, 1853년에는 두개의 피아노 트리오를 작곡했다.

 

당시 랄로는 실내악에 주로 심취해 있었지만 실내악 작곡가로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것은 랄로가 작곡가로서 채 성숙하지 않은 탓이라기 보다는, 당시 오페라에 경도하고 실내악과 같이 학구적인 장르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당시 프랑스의 일반적 경향 때문이었다.

낙심한 랄로는 1865년까지 몇 개의 실내악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곡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내악에 대한 랄로의 관심과 노력은 연주의 방면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1850년대 프랑스 실내음악의 부흥은 랄로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가 1855년에 창설한 아르밍코드 현악 4중주단은 고전, 낭만 작곡가들의 실내악 보급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1870년 이후 프랑스 음악의 부흥에 일조했다.

오랜 침묵 끝에 작곡가로서 새로운 자극을 받은 것은 1866년 오페라 <피에스크>를 통해서였다. 이 오페라는

 테아트르 리리크 극장이 주최하는 오페라 경연대회에 출품하기 위해 쓴 그랑 오페라<쉴러 원작>로, 파리 오페라단 등으로부터 관심을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3등 수상에 머물렀다.

이 오페라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공연되지 못했고, 이에 분개한 랄로는 자비로 성악 악보를 출판했다.

이 작품은 랄로 스스로 아주 높이 평가한 곡으로, 정교하고 다양한 음악, 장대하고 화려한 일련의 장면들과 선율적인

아리아들이 포함되어 있는 번호오페라였다.

 

이 오페라는 랄로가 g단조 교향곡 등 이후 작품에 많이 인용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 발레곡 <디베르티스망>으로 편곡,

 연주하여(1872)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디베르티스망>은 관현악 편성에 대한 랄로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1870년대 일련의 기악곡들을 발표하면서 얻을 수 있었다. 당시 결성된 국민음악협회와 파들루,

샤를 라무레, 콜론, 사라사테 등 지휘자, 연주자들의 도움으로 랄로는 관현악 작곡가로서의 야망을 펼칠 기회들을

 얻을 수 있었다.

랄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F장조(1874, 사라사테 독주)와 <스페인 교향곡>(이듬해 같은 독주자에 의함)의 성공적인

 연주로 협주곡 분야에서 최고의 작곡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특히 5악장으로 된 바이올린 협주곡은 스페인 민속 리듬에 기초한 이국적 정서와 신선한 선율, 독특한 관현악 어법

등으로 좋은 반응을 일으켰고, 오늘날까지도 특히 외국 사람들에 의해 사랑을 받고 있다. 1877년에 피셔에 의해

초연된 첼로 협주곡은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힘찬 추진력이 돋보이고, 느린 2악장과 스케르초에 의해 스케르초 악장을 한데 묶는 등 실험을 꾀한 작품이다.

이듬해에는 <노르웨이 랩소디>와 바이올린을 위한 <러시아 협주곡>이 초연되었고, 1882년에는 발레곡 <나무나>

가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무가>는 교향곡 스타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인기 있던 수많은 발레곡들에 비해서 훨씬 우수한 관현악 편성을 갖추고 있었다.

 

<나무나>는 청중들에게서 너무 교향곡적이라는 이유로 냉담한 반응을 얻었고, 심지어는 구노로부터 관현악법의 손질을 받았다고 하는 악성 비난까지 받은 상태로 몇 차례의 공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곡은 이후 5악장으로 된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된 후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되었고, 특히 드뷔시나 댕디 등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

1856년 작곡한 교향곡 g단조는 초기에 랄로가 찢어버린 2편의 교향곡을 제외하고는 표제가 붙지 않은 그의 유일한

교향곡으로, 반복되는 모토 주제로 악장과 악장을 서로 연결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밖에 피아노 협주곡은 다소

평범한 작품이었으나, 1859년에 작곡한 현악 4중주(1830년 개작)와 2번째 피아노 트리오는 주목할 만 하다.

랄로는 이처럼 관현악곡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피에스크>이후 줄곧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했다.

1875년 그는 에두아르 블라우의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 <이스의 임금님>의 작곡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가라앉은 섬에 대한 브레통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 오페라는 무대 밖에서 오르간 소리를 내게 하여 천상의 분위기를 살리는 등 그랑 오페라의 전통적 기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지만, 인물의 성격화에 있어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 장면과 같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합창 장면들은 그랑 오페라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뿐 개별적 인물들에서 보인 정교한 성격 처리는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는 극적인 호소력과 힘, 개성적인 스타일로 오늘날도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이 오페라는 1881년에 거의 완성되었고 일부분을 발췌하여 연주회에서 연주하기도 했지만 1888년 7월 오페라 코미크에서 공연되기 전까지 계속 공연 장소를 찾지 못했다.

이 오페라의 공연을 거부한 오페라 극장은 거절한 데에 대한 사례로 랄로에게 발레곡을 하나 의뢰했는데,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나무나>였다.

랄로는 계속해서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하면서도 관심은 <이스의 임금님>의 공연에 더 쏠렸던 것 같다.

 1888년 결국 이 오페라가 오페라 코미크에서 공연되게 되자,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랄로는 이제 오페라 작곡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것은 관현악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후 3막짜리 판토마임인 <네롱>(1891년 초연)과 미완성된 단막 오페라 <자크리의 난>(1891∼92)을 작곡하였지만, <이스의 임금님>에 비하면 평범한 작품이었다.

만년에 랄로는 20여편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대부분 그가 1865년 결혼한 브레통 출신의 여가수이자 제자 줄리에 드

 말리니를 위해 쓴 것으로 그녀의 성부인 알토를 위한 곡이 많았다. 가곡 작곡의 재능은 습작 시기에 작곡한 몇 개의

가곡들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잠을 깨었을 때의 어린이의 기도>, <떠나는 여인>, <슬픔>등 5개의 노래(1879)와 <바다의 경치>(1884),

 <풀 베어 말리기>, <노예>, <추억>등 3개의 노래 (1887)와 같은 그의 가곡들은 대부분의 그의 기악곡들이나 오페라에 비해 감상적인 성향이 강하고 대체로 서정적이어서 좋은 대조를 보인다.

오늘날 랄로의 명성은 주로 <이스의 임금님>에 의한 것이지만, 랄로는 오페라뿐 아니라 가곡과 기악곡 특히 관현악곡 작곡가로서 새롭게 부각되어야 한다.

 그의 기악곡들은 세자르 프랑크와 생상스의 작품과 함께 당시 프랑스 기악음악의 신경향을 대변하며, 그만큼 작품 내적으로 뿐 아니라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랄로가 작곡가로서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자국의 고유한 음악에 대한 강렬한 바람과 이에 대한 실천이 있었던 시기로, 랄로는 프랑스 낭만음악의 전성기를 장식한 몇 안되는 개성있는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랄로의 음악은 동시대 프랑스 작곡가들보다는 러시아 작곡가(보로딘)나 스칸디나비아 작곡가(스메타나)에 더 강한 친화력을 보였다.

스페인 혈통을 타고난 랄로는 엠마뉴엘 샤브리엘(1841∼94)과 더불어 스페인 음악을 재료로 삼은 최초의 근대 서양

 작곡가였다.

 

랄로는 이밖에도 러시아의 근대 작곡가들, 특히 보로딘의 음악에 심취하였고, 스메타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면서도 바로 뒤를 이은 뒤카스나 드뷔시, 루셀 등 후배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력을 뚜렷하게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랄로는 한편으로는 이국적 정서와 기법을 프랑스 음악에 받아들이는데 기여했고, 또 한편으로는 프랑크나 생상스,

댕디 등과 함께 베를리오즈와 드뷔시 사이의 깊은 공백을 메꾸어주는데 기여했다.

-김학민(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