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LASSIC

Claude Debussy,

 

 


Arabesque No.1 in E majorPro Arte Guitar Trio

 

Claude Achille Debussy

드뷔시 /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생 제르맹 출생

C. Achille Debussy 1862∼1918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생 제르맹 출생. 도자기상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파리음악원 재학시절 그는 솔페주부문(Solf ge:階名唱法)·피아노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졸업하면서

로마대상을 받고, 수상자로서 2년간의 로마 체류 의무를 수행하면서 관현악곡 《봄》과 합창곡 《선택받은 소녀》를

작곡하였는데, 《선택받은 소녀》는 1893년 파리에서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겨울에 현악 4중주곡을, 이듬해 겨울에는 출세작인 관현악곡 《목신(牧神)의 오후》의 전주곡 등 걸작품을

계속 발표하였으며, 그 무렵까지의 몇 해 동안은 전에 열중했던 바그너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또한 모스크바 체재 중에 접했던 러시아음악과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등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말라르메·루이스 등 상징파 시인들과 교제하였다.

 

앞에서 언급된 현악 4 중주곡 및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에서 《빌리터스의 노래》와 피아노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 관현악을 위한 《야상곡》을 거쳐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완성에서 초연에 이르는 10년간

(1893∼1903)은 드뷔시에게 있어서 그의 개성적인 양식이 확립된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그는 바로크시대부터 낭만주의시대까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기능화성법에 의한 고전적 조성을 극복하고,

자기 나름의 개성적 음색과 율동구조를 확립, <인상주의 음악>의 길을 열었으며, 1905년 이후 그의 <인상주의 음악>은

더욱 원숙해져 갔다.

 

이 무렵 관현악곡 《바다》, 피아노곡집 《영상 1》 《영상 2》 《판화》가 작곡되었다. 그는 순수한 작곡가로서

자유롭게 작곡에만 전념하였으며, 인상주의 음악의 시조로서 근대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외 그의 작품에는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의 세계》, 관현악을 위한 《영상 3》, 피아노곡집 《전주곡집 1》, 《전주곡집 2》,

가곡집 《프랑스와 비용의 시에 의한 3개의 발라드》 발레곡 《유희》, 피아노곡으로 《12개의 연습곡》

《3개의 소나타》 등이 있다.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프랑스가 낳은 20세기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그는 인상파 음악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다.

도자기 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해군에 보내려 했으나 모테 부인에게 발견되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드뷔시는 놀라운 음악적 재질을 나타냈다.

 

그는 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11년간 그 곳에서 배웠다.

그는 재학 시절에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 메크 부인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과 집시의 즉흥 연주를 듣고 색다른 음악에 흥미를 느꼈가고 한다.

 

1884년, 칸타타 [방탕한 아들]을 출품하여 로마 대상에서 1등을 차지하였으며 그것으로 인해 모라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생활에 권태를 느꼈는데,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할 교향 모음곡 [봄]과 칸타타 [은혜받은 소녀] 등 2개의

 작품을 냈지만 심사 위원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파리의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다. 당시 시인과 화가들은 말라르메의 집에 모여 새 예술을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드뷔시는 그 때까지만 해도 바그너를 대단히 숭배하고 있었고, 그 후 다시 러시아의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고두노프]의

대담한 수법에 경탄하였다.

 

한편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자바와 캄보디아 등 동양 음악의 이국적인 정서에도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지금까지의 음악처럼 멜로디와 하모니, 리듬에 의한 정연한 형식의 음악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인상파 회화의 수법에 알맞은 음악의 표현을 창안하였다. 그림에서 빛을 중요시하듯이 음악에서 감각을

중대시하려 하였다.

새로운 감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음의 조성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대담한 화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1894년에 완성한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통하여

새로운 음악의 양식을 수립했는데, 그것은 인상주의 음악이었으며 또한 바그너 이후 가장 새로운 음악의 시작인 것이다.

 인상주의란 외계로부터 받은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낸 예술이다.

 

그것은 선이 명료하지 않고 불분명하지만 유현하고 신비스런 기분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적이라 하겠으며 감각의 생활에서 얻은 묘사의 기술이다. 그것은 극적이 아니고 서정적이다.

표현의 예술이 아니라 인상의 예술인 것이다.

 

그가 1902년 4월에 초연한 오페라 [펠레아스어와 멜리장드]는 또하나의 대담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상주의 음악이 성숙기에 달했을 때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관현악 작품으로서 3개의 녹턴, 3개의 교향적 스케치, 피아노를 위한 [영상][바다]와 [어린이의 세계][현악 4중주곡],

실내악곡 등 많이 있다.

그 밖에도 가곡과 피아노곡 등을 창작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그의 예술은 새로움을 가지고 전통에 도전함으로써 음악적 유산의 질서를 변혁시켰던 것이다.

 

 

 

생애


 

그는 대단치 않은 도자기상을 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자 아버지지는 장사를 그만두고 회계원으로

 취직했다. 집안이 어려워 아홉 살의 그는 동생들과 함께 칸느에 사는 숙모에게 보내졌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그는 약간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과자를 사먹을 때면 양은 적더라도 꼭 비싼 고급과자를 사서 혼자먹곤

했다는 것이다.

양친은 아들을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일찍이 그의 악재를 발견한 모테라는 부인의 권유로드뷔시는 파리 음악

원에 들어갔다.

드뷔시는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를 통해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노선에 따라 자기 음악

을 전개하여 완성시켰다. 세인들이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도 거기에서 연유한다.

 

1888년 1889년, 두 번에 걸쳐 독일 바이로이트로 가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고 그는 한때나마 열렬한 바그네리안이

되기도 했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자바, 캄보디아 등 동양의 음악을 접하고 그 신선한 매력에 홀딱 반한 것이었다.

 

그는 낭만파의 다른 많은 작곡가들처럼 단지 이국적인 분위기에 일시적으로 끌린 것이 아니라 대담하도 거칠 것 없는

음악적 표현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드뷔시는 타고난 청개구리와도 같은 저항정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암울한 시대의 유럽 중심에서 혼자만의 꿈속을

 살다간 작곡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키운 후배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전쟁주에도 그는 세 곡의 소나타를 쓰고 1918년 3월 25일 밤, 독일군의 폭격이 맹위를 떨치던 파리에서 56년의 생을

마쳤다.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이상과 목표는 피아노 음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의 한 사람인 클로드 드뷔시에 의해 음악

 분야에 도입되었다.

화가들은 그에게 명암화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 빛과 그림자의 대비, 인상의 어슴프레한 표현, 색채의 상호작용을 보여

주었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 아마 보다 강력하게 - 단어, 프레이즈의 변화, 半音의 드라마, 소리를 위한 소리의 아름다움을 통해

암시의 예술을 보여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프랑스 클로드(Claude de France)의 기질(genie)을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이 아이디어들을 개성있게 해석하여 표현했다. 즉 스타일은 드뷔시 개인에 의해

전개, 형성, 발던되었던 것이다.

 

형식과 전개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드뷔시에 있어 피아노 음악은 어느 정도유기적으로 전개된다.

즉 하나의 아이디어가 도입되고 확대되며, 곡이 진행됨에 따라 또 다른 아이디어가 논리적인 듯한 방식으로 피어나 순서에

의해 동일한 수법으로 처리된다.

 

그는 자기 음악에 세심한 연주 지시를 주었는데, 그의 음악은 피아니스트가 임의로 해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가 요구한 대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아노 반주자로서 한 여름동안 러시아를 두루 여행한 것은 그의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들었으며, 화려한 슬라브 민속 음악에 탐닉했다.

 

그는 또한 음악 작곡에 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소개했는데, 이 방식은 순전히 음악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다른

예술로부터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드뷔시가 이런 독특한 수법으로 만들어 낸 음악은 그후 20세기 음악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피아노곡>


< 베르가마스크 모음곡(Suite Bergamusque)>


< 전주곡(Prelude)> <파스피에(Passepied)>

< 메누엣(Menuet)> <월광(Clair de Lune)>

< 피아노를 위하여(Pour le Piano)>

< 두개의 아라베스크(Deux Arabesque)>

< 꿈(Reverie)> <발라드(Ballade)> <낭만적 왈츠(Valse Romantique)>

< 마주르카(Mazurka)> <야상곡(Nocturne)> <舞曲(Danse)>

 

 

 

 

 

 

 

 

드뷔시의 작품세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는 1873-84년 빠리 음악원에서 라비냑, 뒤랑, 마르몽텔로부터 피아노를, 그리고 기로로부터

작곡을배움.

1884년에 그는 그의 칸타타 "탕자"로 로마대상을 수상, 3년간의 로마체류 후에 빠리로 돌아와 평생을 거주.

 런던, 토리노, 러시아, 네델란드, 로마 등지로 여행. 암으로 사망.

 

드뷔시는 작곡가로 뿐만 아니라 지휘자, 피아니스트, 편곡자, 그리고 다른 작곡가 작품들의 교정자로도 활동.

이 외에도 1902년부터는 수많은 작은 글들과 비평문을 씀. 드뷔시의 작품은 19세기 음악과 현대음악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한다.

 

그의 창작활동은 작품스타일에 따라 보통 4 시기로 나눈다: 초기작품시기(1889년까지), 인상주의 작품시기

(1903년까지), 중간창작시기(1904-1912년), 후기작품시기(1912년부터).

 

그의 초기작품들은 한편으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예술(샤브리에르, 들리브, 포레, 구노, 마쎄느, 랄로)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쇼팽과 슈만 음악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그의 화성사용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적어도

 1889년까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초기 작품으로는 「잊어버린 노래」(1888), 2개의 「아라베스크」(1888), 『보들레르 가곡들』(1887-89),

『베르가마스크 모음곡』(1890) 등이 있다.

 

프랑스 예술미학(문학의 상징주의, 회화의 인상주의, 서정오페라, 발레)의 영향과 러시아 음악 또는 이색적인 예술

(세계박람회, 1889)의 접촉을 통해 드뷔시는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멀어짐과 동시에 인상주의적 음악양식의

창조자가 된다.

 

이 양식의 특징은 비격정적이고, 문학적 사고의 상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이는 음악에서 밝고 투명한 음색, 새로우면서도 조성적인 화성(음향이나 음색의 강조로서 쓰이는 비화성음, 병행화성),

 그리고 리듬, 셈여림관계, 템포 등에 나타나는 세밀한 가공 등으로 잘 표현된다.

 

교회선법, 5음음계, 온음음계도 새로운 효과를 위해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양식에 의한 대표적 작품으로는 코믹

 오페라인 「펠리아스와 멜리상드」(1892-1902), 「목신의 오후 프렐류드」(1892-94), 「현악사중주 g단조

(1893)」「피아노를 위해(1896)」, 「빌리티스의 노래」(1897), 「에스탐피」(1903) 등이 있다.

 

이에 비해 1903년경부터는 분명한 대비가 다시 나타난다.

즉, 음향과 곡의 윤곽이 보다 분명해지고 선적이며 도안적인 요소가 강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양식은 세부분으로 구성된오케스트라를 위한 「바다」(1903-05)나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마쥬」

(1906-12),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어린이의 자리」(1906-08)와 가곡들(예, 『3개의 프랑스 샹송』)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피아노를 위한 「이마쥬 II」와 많은 양의 피아노 프렐류드도 이 부류에 속한다. 이 시기의 예외적인 작품으로는

옛 아카펠라 다성부합창방식을 따르는『3개의 오르레앙 샹송』(1908)과 「생 세바스티앙의 순교(1911)」

를 들 수 있다.

 

드뷔시의 후기 작품들은 보다 더 구조적으로 착상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3개의 실내악소나타를 들 수 있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15),

「플루트과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15),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16/17). 발레인

 

「놀이」(1911)와 『3개의 말라르메 가곡』(1913)에서는 이 시기 양식의 대표인 인위적인 정교성이 최고도에

 달한다.

흉내내며 비꼬는 듯한 유모어도 몇개의 프렐류드와 「어린이발레」에서 빈번히 나타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은 낭만적인 것들과 현대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세련된 스타일과 절제된 감정을 추구하며

이전 시대와의 변별성 및 새로운 시대만의 독자성을 찾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성공적인 예술가로 평가받는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전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했다.

 “나는 음악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숨막히게 하는 메마른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음악은 외부로 나아가는 예술이며 소재에 있어서도 구속받지 않는다.

바람, 하늘, 바다를 노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예술인 것이다.

음악은 내부로 차단되고 전통만을 중요시하는 예술이어서는 안 된다.”

 

 

 

 

 


Claude-Achille Debussy, 1862-1918

 

 

낭만주의의 종말, 인상주의의 완성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문을 연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드뷔시는 인상파 화가들과 상징주의 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억양과 운율, 리듬과 문장의 유연하고 불균형적인 짜임새 등과 같은 성질을 음악의 멜로디,

 화성, 리듬, 음색, 형식 등의 모든 면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특히 인상주의 음악의 중요한 요소인 색채와 그 효과가 환기시키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통적인

장단조의 조성과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비기능적인 화성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화음의 연결을 화성적인 움직임으로 하지 않고 선율 형태나 색채 효과에 따라 화음을 진행시켰다.

 

20세기 최초의 10년 동안 드뷔시는 오페라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를 발표한 이후 관현악곡, 발레 음악,

 피아노 작품 등등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가정사에 있어서 대단히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1904년 엠마 바르닥과 사랑에 빠져 부인인 릴리

 드뷔시가 권총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엠마와 드뷔시 사이에 딸 슈슈가 태어났고,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어린이 차지]를 작곡하여

 헌정하기도 했다.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이지적이었던 엠마의 응원과 관심에 힘입어, 드뷔시는 예술가로서의 외로운 길을 벗어나

더욱 정력적이고 창조적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후 릴리와는 이혼으로 관계를 매듭지었지만,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의 처신과 그 처후 문제로 인해 드뷔시는

그 많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의 장례식에 조차 몇 안 되는 친구만이 참석했다고 한다.

 

 

 

 

 

피아노의 음향효과, 색채에 대한 실험으로 인상주의 음악을 창조

 

어찌 되었거나 드뷔시는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삶으로부터 무한한 활력을 얻어 [바다],[영상] 등과 같은 걸작을

쉼없이 발표했다. 이 가운데 마침내 드뷔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발표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주곡 1, 2]이다.

 

 [어린이 차지][베르가마스크 모음곡]과 같은 작품들이 더 유명하고 잘 알려져있을지 모르겠지만, [전주곡 1, 2]

이야말로 그의 피아노 작품을 포함한 20세기 모든 피아노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피아니스틱한 효과와 상징주의적

 색채감, 구조와 형식에 대한 새로운 실험과 완성이 담긴 명곡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화성과 멜로디, 주법에 있어서 낭만주의에 대한 고별과 아방가르드에 대한 태동을 담고 있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24라는 숫자를 짐작해 볼 때, 연습곡이 12라는 숫자에 고정되어 있듯이, 이 역시 바흐의 영향을

받아 쇼팽이 작곡한 [24개의 전주곡]과 동일하게 24개로 구성되어 있다.

드뷔시는 1910년에 발표한 1권과 1913년에 발표한 2, 이렇게 두 권으로 나누어 총 스물 네 개의 전주곡을 구성했다.

 

다만 구성에 있어서 쇼팽은 전체를 하나로 묶어놓은 연작시와도 같은 개념이지만, 드뷔시는 아름다운 작품을 배열해놓은 두 권의 작품집이라는 차이가 있다.

 

드뷔시는 음악의 색채와 이미지를 인상파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인상파화가들이 그림을 통해 색채를 발견했다면, 드뷔시는 음악을 통해 색채를 발견했다.

 

 

 

 

근대 음악의 베토벤 - 드뷔시의 새로운 음악과 예술

 

두 권으로 구성된 [전주곡]에서 드뷔시는 음악의 색채감과 영상적 측면을 인상파적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피아노 예술의 영역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간결함과 시적 상상력을 유지하면서도 전체 형식의

 완전함을 이루어냈다.

 

더군다나 각 곡들은 자연 그 자체와 야외에서 느낀 인상, 특정한 상황과 인물 그 자체를 나타내도록 표제가 붙어있다.

표제는 음악이 표현하는 소리의 대상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드뷔시는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색채와 이미지를 발견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통찰력에 비견할 만한 피아노 음향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표제들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고 페르마타처럼 각 곡의 마지막에 괄호에 묶여 여백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한 까닭은 표제 음악으로 자신의 작품이 굳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즉 전형적으로 표제에 의해 음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음향이 표제의 전주 역할을 담당하며 순간마다

 새로운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음악이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을 명시하며 제목을 만들어내고 있는 음악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평론가 버질 톰슨은 드뷔시를 근대 음악의 베토벤이라고 정의내렸듯이, 드뷔시는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세우고 그 틀을 마련한 거인이었다.

 

 

글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평가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The Best of Debussy